300화
300화
Episode 57. 금의환향 (1)
[전용 스킬, ‘제4의 벽’이 강하게 활성화됩니다!]
‘은밀한 모략가’가 나를 응시하자마자, [제4의 벽]이 움직였다.
마치 새끼를 보호하는 맹수처럼 으르렁거리는 [제4의 벽].
「조심 해 김독 자」
처음 이곳에 왔을 때 ‘은밀한 모략가’는 [제4의 벽]을 두고 ‘최후의 벽’이라 불렀다. 원작에는 그에 관한 정보가 나온 적이 없었지만, 짐작 가는 것이 아예 없는 것은 또 아니었다. ‘멸살법’에는 장하영의 ‘정체불명의 벽’을 포함해 여러 종류의 벽들이 존재하니까.
“보상을 받으러 왔습니다. 은밀한 모략가.”
내가 입을 열었음에도 ‘은밀한 모략가’는 답이 없었다.
츠츳, 츠츠츳······!
‘은밀한 모략가’의 주변에 스파크가 튀고 있었다. 표정을 대신해 얼굴을 차지한 새카만 어둠이, 마치 화가 난 것처럼 내게 묻고 있었다.
【구원의 마왕, 왜 그런 선택을 한 거지?】
“예?”
갑자기 그런 식으로 물어봤자 무슨 뜻인지 알 턱이 없었다.
‘은밀한 모략가’가 재차 물었다.
【어째서 3회차로 돌아가지 않으려 했는가? 그 세계선은 네 회차도 아니었을 텐데.】
“그 세계가 저를 구해준 적이 있습니다. 그뿐입니다.”
【그대로 두었다면 그는 안식을 찾을 수 있었다.】
“그것은 안식이 아닙니다. ······은밀한 모략가, 당신은 왜 저를 그 세계선으로 보냈던 겁니까?”
츠츠츠츳······.
‘은밀한 모략가’의 주변에서 스파크가 한층 더 심해졌다.
마치, 존재가 불안정해지기라도 한 것 같은 모습.
한숨과 함께 ‘은밀한 모략가’가 말했다.
【모든 것은 이미 정해져 있는 이야기였거늘······ 너는 네가 무엇을 바꾼 것인지 모른다.】
눈이 있어야 할 자리에 뚫린 새하얀 구멍이 나를 보고 있었다.
【약속한 보상을 주마.】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서브 시나리오로 약속된 보상은 총 세 가지였다.
1863회차에서 획득 가능한 아이템, 설화, 그리고 스킬.
【가지고 갈 아이템은 뭐지?】
“이 코트입니다.”
나는 살짝 긴장하며, 한수영이 준 하얀 코트를 내밀었다. 빛이 새어 나오던 ‘은밀한 모략가’의 눈이 가늘어졌다.
역시 ‘이계의 신격’을 속이기는 무리였던 모양이다.
‘은밀한 모략가’가 약속한 아이템은 한 가지.
그러나 이 코트의 안주머니에는 하나 이상의 아이템이 들어 있었다.
【······됐다. 어차피 돌아갈 꽃 한 송이가 줄어들었으니, 개연의 총합은 비슷하겠지.】
[‘무한차원의 아공간 코트’를 보상 아이템으로 수령합니다.]
다행히 ‘은밀한 모략가’는 한수영의 코트를 눈감아주었다.
다음은 ‘설화’ 차례였다.
【가지고 갈 설화는 당연히 ‘그것’이겠지?】
“그렇습니다.”
애초에 1863회차에서 내가 얻은 설화는 유중혁이 건네준 설화뿐이었다.
사실 여기서 이 설화를 획득하면, 내 계획 노선의 일부를 수정해야 할 필요가 있지만······ 상관없다.
중요한 것은, 내가 선택한 이야기의 끝을 보는 거니까.
[보상 설화를 수령하였습니다.]
[해당 설화는 본래의 세계선으로 귀환한 뒤 정상 적용됩니다.]
마지막은 ‘스킬’이었다.
【스킬은 어떻게 하겠는가? 새로운 스킬은 획득하지 못했을 텐데.】
“스킬은 획득하지 못했습니다만······ 이런 형태의 보상 수령도 혹시 가능합니까?”
나는 ‘은밀한 모략가’에게 설명을 시작했다.
잠시 내 이야기를 듣던 ‘은밀한 모략가’가 고개를 끄덕였다.
【가능하다.】
[보상 스킬을 수령하였습니다.]
[해당 스킬은 본래의 세계선으로 귀환한 뒤 정상 적용됩니다.]
이걸로 얻어야 할 것들은 모두 얻었다.
예상 밖의 일이 벌어진 것은 점검을 끝낸 내가 ‘은밀한 모략가’에게 세계선 귀환 요청을 하려던 순간이었다.
츠츠츠츠츠츳······!
강력한 스파크와 함께, 공간의 뒤쪽에서 누군가가 이 공간으로 침투하려 하고 있었다.
나는 공간 너머에서 느껴지는 ‘격’의 종류를 눈치챘다. 아무래도 ‘은밀한 모략가’가 이번 일을 주도한 사실을 <관리국>에서 알아챈 듯했다.
즉, 지금 이곳에 침입하려 하는 자는 관리국의 대도깨비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만 가라, 구원의 마왕.】
‘은밀한 모략가’가 가볍게 손끝을 움직이자, 내 발밑에 소용돌이치는 포탈이 나타났다.
나는 ‘은밀한 모략가’를 향해 다급히 물었다.
“잠깐만요! 제가 돌아갈 세계선은 지금 몇 년이 지난 상태입니까?”
내 말에 ‘은밀한 모략가’가 나를 돌아보았다.
【어떤 이야기는 빠르게 읽히고, 어떤 이야기는 천천히 읽힌다.】
그 목소리에 깃든 스산함에 나는 입을 열려고 했다. 하지만 내 하관은 이미 포탈을 넘어가는 중이었다.
【구원의 마왕. 그대가 사라진 이야기는 빠르게 읽힐 것 같은가, 아니면 천천히 읽힐 것 같은가?】
어디선가 장난스러운 웃음 같은 것이 들려왔다.
포탈이 완전히 발동하며, 이내 시야가 완전히 이지러졌다.
【다시 만날 때는, 네가 그 ‘벽’의 제대로 된 주인이 되어 있길 바라지.】
*
세계선을 넘는 것이 처음이 아니었기 때문일까. 정신을 마구잡이로 휩쓸어대는 포탈의 급류 속에서도 나는 나름대로 의식을 유지할 수 있었다.
[‘제4의 벽’이 강하게 활성화됩니다!]
[‘부왕의 차원문’이 시공간 좌표를 설정합니다.]
흘러가는 <스타 스트림>의 정경.
나는 부표처럼 떠오르는 기억들 속에서 필요한 일들만을 생각했다.
[‘부왕의 차원문’이 닫힙니다.]
메시지와 함께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바닥에 누워 있었다.
어슴푸레한 등불이 천장에 매달린 널따란 공간. 어디선가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여긴 어디지?
아직 지구는 아닌 것 같았다.
왜지? 왜 갑자기 여기로 온 거지?
[<스타 스트림>이 세계선으로부터 당신의 존재를 감지하였습니다!]
[<스타 스트림>이 당신의 수식언을 재인식하였습니다.]
[<스타 스트림>이 당신에게 별자리의 맥락을 할당합니다.]
[<관리국>이 당신의 격을 헤아립니다.]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알 것 같았다.
나는 ‘이계의 언약’을 통해 본래 세계선의 시나리오를 떠나 있었던 몸.
본래의 시나리오로 다시 진입하기 위해서는 대가가 필요했다.
츠츠츠츳······.
전신의 근육이 경련하는 느낌과 함께, 메시지는 계속해서 떠올랐다.
[관리국이 당신의 심사를 완료하였습니다.]
[당신은 본래의 시나리오로 돌아가기에 적합하지 않습니다.]
[관리국이 당신의 수준에 맞는 시나리오를 검토합니다.]
[검토가 완료되었습니다.]
나는 이어서 떠오르는 메시지들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어쩌면 이렇게 될 거라고 예상은 했다.
아니, 실은 예정된 일이었다.
나는 본래 거주하던 세계선을 떠나 다른 세계에 다녀왔다.
그리고 범주는 다르지만, 나처럼 본래의 시나리오를 아득히 벗어나 되돌아온 존재들은 모두 같은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
[새로운 설화를 획득하였습니다!]
[새로운 특성을 획득하였습니다!]
[당신은 ‘귀환자’의 자격을 얻었습니다.]
[당신을 위한 새로운 시나리오가 준비 중입니다.]
나는, 귀환자가 된 것이다.
천천히 몸을 일으키자, 주변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는 몇몇 남녀들이 보였다.
모두 나와 같은 귀환자들이었다.
“하하하, 드디어 지구로 돌아갈 수 있다! 10년만이라고!”
“이 몸은 20년만이다.”
“자넨 어딜 갔다 왔나? 행색을 보아하니 무림 출신인가?”
“난 ‘그라투스’ 출신일세. 들어본 적 있는가?”
누군가가 내게 손을 흔든 것은 그때였다.
“오, 형씨가 마지막인가 보군.”
흑색 무복을 걸친 사내였다. 복면을 쓰고 있었지만 드러나는 눈매와 인상이 어딘가 익숙했다.
내가 간단히 인사하자, 사내가 다시 말을 걸어 왔다.
“형씨는 어디 출신이오?”
“지구 출신입니다.”
“아니, 그걸 물은 게 아니잖소. 여기 지구 출신 아닌 사람이 어딨다고······ 나는 형씨가 차원 이동 됐던 행성을 묻는 거요.”
서글서글한 말투로 웃는 사내. 순간 나는 이 사내가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꾀주머니처럼 도톰히 솟은 볼. 야간 투시에 적합한 가는 눈과, 까마귀가 쪼아 먹은 것처럼 반쪽만 남은 눈썹.」
속으로 헛웃음이 나왔다.
벌써 이 자가 등장할 시기라니······.
“다녀 온 곳도 지구였습니다. 다른 평행 차원의 지구요.”
“흐음, 그렇소? 이것 참 특이한 형씨로군.”
사내가 나를 향해 손을 내밀며 말했다.
“자기소개부터 하지. 내 이름은 왕 웨이롱이오. 내가 다녀온 <제2 무림>에서는 ‘비천호리’라는 별호로 불리고 있지.”
비천호리(飛天狐狸) 왕 웨이롱(王卫荣).
그는 훗날 유중혁의 동료가 되는 인물 중 하나였다.
“제 이름은 김독자입니다. 별명은······ 음······ ‘구원의 마왕’이라고 해둘까요.”
곁에서 이야기를 엿듣던 몇몇 귀환자들이 박장대소를 했다.
“구원의 마왕? 크하하하핫······!”
“거참 거창한 칭호로군. 어디 삼류 판타지 세계라도 다녀온 모양이야!”
내 등을 팡팡 때리는 손길들. 대부분 무림 출신이거나 중세풍 이세계 출신의 귀환자들이었다.
비천호리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멋진 별호구려 형씨.”
“뭘요.”
“그런데 형씨는 벌써 ‘귀환자 의복’을 지급 받은 모양이군.”
“아, 예.”
나는 입고 있던 [무한차원의 아공간 코트]를 내려다보았다. 이 의복이 본래 귀환자 전용 의복이라는 것을 깜빡 잊고 있었다.
언젠가 상대했던 ‘질문의 재앙’ 명일상이 떠올랐다. 아마 그 녀석도 나와 같은 절차를 거쳐서 지구에 소환되었겠지.
마침 허공에서 나타난 도깨비들이 귀환자들에게 코트를 지급하기 시작했다. 코트를 받아든 몇몇 귀환자들이 자신의 코트와 내것을 번갈아보더니 항의했다.
“이봐 도깨비! 내것보다 저 형씨가 입은 게 더 좋은 것 같은데······!”
당연한 일이다. 무려 95번 시나리오에서 온 코트가 보급용 코트보다 못하다면 말이 안 되니까.
나를 발견한 몇몇 도깨비들이 깜짝 놀라 상부에 뭔가를 보고하는 것이 보였다.
지금쯤 비형도 내가 돌아온 것을 알았으려나.
빨리 지구의 일행들이 보고 싶다.
몇 년이나 지난걸까?
다들, 잘 지내고 있어야 할 텐데.
귀환자 코트를 지급받은 비천호리가 헤벌쭉 웃으며 말했다.
“크으, 옷발 좋구만. 형씨는 돌아가면 뭐부터 하실 거요?”
“일단 누굴 좀 찾아보려고요.”
“호, 기다리는 애인이라도 있는 모양이지?”
나는 빙긋 웃었다. 비천호리가 계속해서 말했다.
“난 돌아가면 떵떵거리면서 살 생각이오. 모처럼 힘도 얻었겠다. 이제 갑질하던 녀석한테 주눅들 필요도 없으니까! 이제 고생 끝 행복 시작이라 이거지!”
“······그렇게 즐거운 일만 있지는 않을 겁니다. 지구도 많이 변했을 테니까요.”
“어허, 형씨는 벌써부터 약한 소리를 하는군. 이계에서 그 고생을 했는데, 지구로 돌아가서 못할 게 뭐가 있겠소?”
[귀환자 여러분, 집중해주시기 바랍니다.]
한바탕 소란이 가라앉자, 귀환자들을 담당하던 중급 도깨비가 대표로 입을 열었다.
[곧 지구 귀환이 시작됩니다. 여러분은 ‘귀환자 전용 메인 시나리오’를 할당 받게 될 것이며, 고향에서 그 시나리오를 수행하게 될 것입니다. 간단한 유희라고 생각하고, 즐겨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귀환자 시나리오? 내용을 똑바로 말해라!”
[자세한 내용은 시나리오 창을 확인해주십시오. 아, 참고로 이 시나리오는 그룹 시나리오이기 때문에 리더가 존재합니다. 여러분 중에서 가장 격이 높은 존재가 리더로 자동 선출되니, 기억해두시기 바랍니다.]
“리더라면 당연히 나지!”
“저기 저 무림 출신 친구가 꽤 세보이는데······.”
누가 이 그룹의 ‘왕’일까를 궁금해하는 눈치들이었다.
[지구 귀환이 시작됩니다!]
눈부신 빛살과 함께 열 명에 달하는 귀환자들이 한꺼번에 공간 이동을 시작했다.
잠깐 시야가 일렁인다 싶더니, 다시 눈을 떴을 때 우리는 드넓은 도시의 한가운데에 떨어져 있었다.
듬성듬성 채워진 파손된 보도블록.
재건이 시작된 건축물들이 그리는 스카이 라인.
틀림없는 지구의 정경이었다.
“여긴 어디야? 저 문자는······.”
“한국이다! 한국이야!”
한반도 출신의 귀환자가 날뛰었다.
나는 머릿속으로 ‘귀환자 시나리오’와 관련된 정보들을 떠올리며 외쳤다.
“잠깐만요. 다들 진정하시고 잠시 모입시다.”
귀환자들은 이미 통제 불능의 상태였다.
성질 급한 몇몇 귀환자들이 지나가던 일반인들을 붙잡고 물었다.
“이보게, 여긴 어딘가? 그리고 지금은 서기 몇 년이지?”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귀환자 트리거’가 발동했습니다!]
“나, 날짜를 물었어! 저놈들 귀환자다!”
“으아아악! 귀환자야! 다들 도망가!”
“빨리 연합에 신고해!”
‘귀환자’라는 말에 거리 전체가 들썩였다. 썰물처럼 달아나는 인파들과, 어리둥절한 표정의 귀환자들.
“뭐야. 내가 뭘 잘못했나?”
[새로운 메인 시나리오가 도착했습니다!]
[메인 시나리오 # 45 ― ‘금의환향(錦衣還鄕)’이 시작됩니다!]
건물의 유리벽에 비친 내 모습이 보였다.
튀어 오르는 스파크와 함께, 내 겉모습이 변하고 있었다.
누가봐도 끔찍한, 촉수와 오물로 들끓는 괴수의 모습.
실제 내 모습은 그렇지 않았음에도, 겉으로 보기에 나는 마치 작은 이계의 신격처럼 보였다.
아마 지구의 모든 사람들에게도, 나는 저렇게 보일 것이다.
지구의 사람들에게, 모든 귀환자는 재앙(災殃)이니까.
적의에 찬 눈으로 한발짝씩 다가오는 지구의 화신들.
돌아 보니 멍한 얼굴의 비천호리가 떨리는 입술을 열고 있었다.
“혀, 형씨. 이게 대체······.”
“즐거운 일만 있진 않을 거라고 했지 않습니까.”
[163번째 귀환자 그룹의 소환이 완료되었습니다!]
[당신은 ‘163번째 귀환자 그룹의 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