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9화

299화 “뭐?” “난 안 간다고.” 생각지도 못한 대답이었기 때문에, 나는 바보처럼 되물었다. “왜?” “내가 없으면 저 녀석들은 다 죽을 테니까.” 나는 귀를 의심했다. 한수영이 저렇게 말할 수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불쑥 치솟아 오른 반감에 나도 모르게 공격적인 목소리가 나왔다. “언제는 너만의 세계를 만들고 싶다며?” “······내 세계 같은 건 나중에라도 만들 수 있어. 누군가는 저들을 이끌어야 해.” “그러니까, 왜 갑자기······.” “유중혁은 더이상 등장 인물이 아니야. 그게 무슨 뜻이라고 생각해?” 나는 입을 다물었다. “이건 더이상 소설이 아니야.” 한수영의 말에, 심장이 쿵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전용 스킬, ‘제4의 벽’이 강하게 발동합니다!] “이걸로 모든 걸 용서받으려는 것도 아니야. 전개가 어떻게 흘러가든, 시작한 이야기는 제대로 끝을 봐야지.” 모자의 챙에 가려진 한수영의 얼굴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내 말이 채 이어지기도 전에, 한수영이 상황실을 나갔다. 상황실의 유리 밖으로 일행들에게 말을 하는 한수영의 모습과, 그 이야기를 경청하는 일행들의 모습이 보였다. 나는 오래도록 그 모습을 보고 있었다. * 떠나기 전 내가 해결해야 할 일들은 몇 가지가 더 있었다. 그중 하나는 우리엘에 관한 것이었다. 나는 요피엘의 구속구에 갇힌 우리엘의 인형을 내려다보았다. 비록 지금은 얌전한 상태지만, 구속구의 효력이 끝나는 순간 우리엘은 다시 ‘염화의 대천사’로 깨어날 것이다. 그리고 주변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를 불태우려 들겠지. 츠츠츠츠츳······. 가브리엘의 진언이 귓가에 들려왔다. [우리엘은 어쩔 거야?] “생각하고 있습니다.” 나는 힘없이 처진 꽃잎을 흔드는 가브리엘을 내려다보았다. 아마도, 이곳의 정경에 큰 충격을 받은 듯한 모습이었다. 원작 설정에 따르면 가브리엘은 다른 천사들을 잘 챙기는 성정이니 더욱 그럴 것이다. [······역시 내가 남겠어.] “안 됩니다.” [왜? 이곳의 내가 배신했기 때문에?]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가브리엘이 억울하다는 듯 다그쳤다. [난 왜 <에덴>을 배신한 건데?] “당신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결정이었을 겁니다.” [세부를 정확히 말해. 대체 뭔 일이 있었던 거냐고! 너 뭔가 알고 있잖아!] “저도 정확히는 모릅니다. 정 궁금하시면 돌아가서 메타트론을 닦달해 보세요.” 이 일은 내가 당장 개입해서 좋을 것이 없었다. 자칫 정보를 잘못 흘렸다간 3회차의 전개가 예상 밖의 난관을 맞이할 가능성이 있었으니까. 가브리엘의 잎이 거칠게 떨렸다. [어차피 돌아가면 난 또 배신하게 되는 거 아냐? 그럴 바엔 차라리 여기 남아서―] “미래는 바꿀 수 있습니다. 우린 돌아가야 합니다.” 나는 확신을 담아 말했다. 이 세계는 우리의 회차가 아니다. [그럼 우리엘은······!] “말씀드렸다시피, 저도 생각 중입니다.” 지금으로 최선의 선택은 한수영에게 우리엘을 맡기는 것이었다. 하지만 녀석이 ‘염화의 대천사’를 통제할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제4의 벽이 말합니다. ‘도 와줄 까?’」 우리엘에게 3회차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방법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누차 말하듯, 우리엘이 3회차의 이야기를 듣고 유중혁과 같은 반응을 보이리란 보장은 없었다. 어쩌면 내 세계선의 이야기는 불안전한 우리엘의 정신을 더욱 망가트릴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진짜로 가브리엘을 이곳에 남겼다간, 더 커다란 문제가 발생할 가능성이 크다. 더군다나 [선악의 구속구]도 사용할 수 없는 가브리엘로서는······ 역시 내가 좀 더 남아서 우리엘을 돕는 편이······. [내가 남겠다, 가브리엘.] 흔들리는 붉은 코스모스의 꽃잎. 반사적으로 고개를 숙이자, 깜짝 놀란 가브리엘이 외쳤다. [······요피엘?] [내가 남는 것이 최선이다.] 뜻밖의 선언이었다. 나조차 어안이 벙벙해졌다. 다른 천사도 아니고, ‘대천사 요피엘’이 이곳에 남기를 선언했다고? [심사숙고 끝에 결정한 것이다. 나는 ‘선악의 구속구’를 통해 우리엘을 통제할 수 있어. 그러니 이곳에 내가 남는 것이 옳다.] “······요피엘, 지금 돌아가지 않으면 다시는 본래의 세계선으로 돌아가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세계선을 넘을 방법은 몇 가지가 있다.] “있겠죠. 그리고 모두 막대한 대가를 필요로 할 겁니다.” [못 돌아가도 상관없다.] [요피엘!] 가브리엘의 외침에도 요피엘은 물러서지 않았다. [이 세계선에는 그만큼의 가치가 있다. 그리고 저 음흉한 놈에게 의지하지 않고 내가 직접 이 세계선을 알아보는 편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곳의 <에덴>이 왜 멸망했는지, 미래에 무슨 일들이 발생했는지를 파악해 본래의 세계선에 알릴 의무가 있어.] 과연 요피엘다운 합리적인 발언이었다. 이 세계는 기존의 1863회차와는 많이 달라졌고, 만약 앞으로 일어날 일을 3회차로 전송할 수 있다면 분명 도움이 되긴 할 것이다. [잠깐만, 요피엘! 왜 네 멋대로 그런 결정을―] [번복은 없다, 가브리엘.] 붉은 코스모스에서 휘황한 빛이 뿜어져 나오더니, 이내 그 빛은 새하얀 구속구로 변해 흰 백합 위에 깃들었다. [선악의 구속구]. 잠이 들기라도 한 것처럼 가브리엘의 꽃이 축 늘어졌다. 요피엘이 나를 향해 말했다. [가브리엘을 부탁한다.] “······왜 이렇게까지 하시는 겁니까?” [우리엘에겐 가브리엘이 필요하다. 그리고 가브리엘에게도······ 둘 다 불안정한 녀석들이니까.] 새삼 ‘대천사 요피엘’ 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에덴>은 이런 대천사 하나하나가 모여 만들어진 성운인 것이다. “그럼 당신은요?” [그대를 믿지는 않지만, 부탁할 것이 하나 있다.] 나는 머뭇거리다 고개를 끄덕였다. [본래의 세계선으로 돌아가면 꼭 <에덴>을 방문해주길 바란다. 그리고 이곳에서 있었던 일을 서기관에게 전해주면 좋겠군. 그 정도는 해 줄 수 있겠지?] “알겠습니다.” 확실히 그 정도라면 어려운 부탁은 아니었다. 어차피 <에덴>에는 한번 방문할 생각이었으니까. 얼마 지나지 않아 요피엘의 코스모스도 축 고개를 늘어트렸다. 마치 피곤에 절어 잠든 듯한 모습. 나는 두 꽃이 머금던 페트병의 물을 갈아주었다. 누군가는 남고 누군가는 떠난다. 어느 쪽을 선택하든, 결국 모두는 각자의 결말에 도달할 것이다. * 다음 날 아침, 나는 일행들의 배웅을 받았다. 이런저런 일들이 많이 있었는데도, 일행들은 꾸역꾸역 나를 배웅하겠다고 나왔다. 정확히는 이현성에게 떠밀려 나온 투였다. 고개를 돌리자 특유의 못마땅한 얼굴로 이쪽을 노려보는 한수영이 있었다. 나는 녀석에게 꼬깃꼬깃한 수첩 하나를 건넸다. 한수영이 퉁명스럽게 되물었다. “······뭐야 이 쓰레기는.” “지금 네게 필요한 정보.” 나는 밤새 ‘멸살법’의 원본에서 1863회차에 유용할 정보들 몇 개를 더 추려내 정리했다. 츠츠츳······. 한수영의 몸에서 희미하게 튀어 오르는 스파크. 나는 그것의 정체를 어렴풋이 예상하고 있었다. 저 스파크는 아마도 한수영의 ‘등장인물화’와 관계되어 있을 것이다. “버리지 말고 시간 날 때마다 들여다보라고.” 한수영은 내가 준 수첩을 잠시 내려다보더니 물었다. “······넌 괜찮은 거냐?” “뭐가?” [‘제4의 벽’이 강하게 활성화 됩니다!] 마치 내 얼굴에서 뭔가를 읽어내려는 듯, 유심히 나를 보던 한수영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됐다. 아무것도 아냐.” ······실없기는. 곁에서 이야기를 듣던 이현성이 입을 열었다. “같이 시나리오를 수행할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아쉽습니다.” 그나마 나와 친해진 이현성이 먼저 인사를 하자, 뒤쪽에서 나를 노려보던 김남운이 말했다. “흥, 빨리 꺼지라고. 그곳의 나한테도 안부 잘 전해주고.” 물론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3회차의 김남운에게 안부를 전하려면 나는 저승까지 가야 하니까. 인사를 마친 내가 돌아서려는 순간. “야.” 부드러운 무게감을 가진 뭔가가 내 뒤통수로 날아왔다. 나는 황급히 고개를 돌려 그것을 붙잡었다. 손 안에 들어온 것은 하얀색의 코트. 정확히는 [무한 차원의 아공간 코트]였다. “클리어 보상 못 챙겼을 거 아냐? 그거 가져가.” 그것은 한수영이 입고 있던 코트였다. 나는 어이가 없어서 말했다. “95번 시나리오까지 와서, 겨우 이런 걸 가져가기엔―” 한수영이 무슨 한심한 소릴 하느냐는 듯 나를 바라보았다. 별안간 머릿속에 스친 생각이 있었다. 이 자식, 설마······. 내가 멍한 얼굴로 코트 안주머니에 손을 넣는 순간, 한수영이 물었다. “어제 못했던 질문, 지금 마저 해도 되냐?” “······해.” “너, 왜 그때 3회차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했던 거지?” 생각지 못한 질문이었다. 한수영이 계속해서 물었다. “거기선 보나마나 네가 내 역할을 하고 있을 텐데······ 네가 돌아가지 않으면 그 세계는 멸망했을 거야. 그걸 잘 알고 있는 녀석이, 왜―” “글쎄······ 안 그랬을걸?” “뭐?” “내가 없어도 3회차는 오랫동안 건재했을 거야.” “어떻게 확신하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나를 쏘아보는 한수영에게, 나는 답했다. “거기도 네가 있으니까.” 내 말에, 한수영의 표정이 굳어졌다. 놀란 녀석의 눈가가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3회차에 있는 널 믿었거든.” 한수영은 잠시 나를 노려보다가 홱 고개를 돌렸다. “빨리 꺼져. 꼴 보기 싫으니까.” “간다. 잘 살아라.” 뒤돌아선 나는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마왕, ‘구원의 마왕’이 밤하늘을 올려다봅니다.] [은밀한 모략가! 언약의 내용을 지키기 바랍니다.] 그러자 발밑에 새카만 포탈이 만들어졌다. 뭔가가 나를 끄집어당기는 듯한 느낌과 함께, 세계의 정경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1863회차의 세계가 조금씩 흐릿해지고 있었다. 내가 알고 있었던 원작과는 달라진 세계. 짧은 시간이었음에도, 많은 일들이 있었던 것처럼 느껴졌다. 손을 흔드는 이현성과, 복잡한 얼굴로 나를 배웅하는 일행들. 유중혁이 그랬고, 내가 그랬듯, 저들 또한 내가 알던 원작과는 다른 세계를 걸어나가게 될 것이다. 언젠가 그 세계선들이 서로 만날 수 있을지 없을지는 모른다. 하지만 다시 만날 수 없더라도 이 세계가,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만은 틀림없었다. 마치 ‘멸살법’이 내게 그랬던 것처럼. 세계가 어둠으로 화했다. 어지럼증과 함께, 어디선가 이계의 신격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 작 도 끝 도 없 는 부 질 없 는 이 야 기 만 이 남 으 리 라】 쑥 하고 바닥이 꺼지더니, 나는 포탈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형이상학적으로 일그러진 통로가 몇 번인가 좁아졌다 늘어나기를 반복했다. 나는 눈을 감고 가늠할 수 없는 시간의 흐름 속에 몸을 맡겼다. 3회차에 너무 많은 시간이 흐르지 않았어야 할 텐데. 잠시 후, 뭔가가 나를 게워내는 소리와 함께 나는 바닥에 떨어졌다. [‘이계의 언약’이 완료되었습니다!] [보상을 정산 중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바닥’은 아니었다. 주변에는 일전에도 보았던 <스타 스트림>의 은하가 드넓게 펼쳐져 있었다. 내 몸은 우주의 공허 속에 떠다니는 중이었다. 신음과 함께 눈을 깜빡이자, 바닥을 끄는 검은색 케이프 자락이 보였다. 【왔군.】 ‘은밀한 모략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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