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1화

301화 간만의 꿈이었다. 희부연 시야 속에서 매캐하게 퍼지는 연기. 분명 한국이었지만 어딘가 낯선 구조물들과, 한 번도 본 적 없는 설화병기들, 멸망을 앞둔 세계처럼 새카만 하늘······. 꿈속의 한수영은 중얼거렸다. 뭔데 이거. 하지만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까가가강! 눈앞에서 두 명의 사내가 싸우고 있었다. 각자 검은색과 흰색 코트를 입은 사내들. 전에도 본 광경이었지만, 뭔가가 달랐다. 왜냐하면 두 사내는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유중혁? 푸우욱, 하는 소리와 함께 두 명의 유중혁이 눈앞에서 사라졌다. 이 상황은 대체 뭐지? 대체 무슨 광경이야?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김독자의 모습이 보였다. 마치 모든 것을 상실한 사람처럼 무릎을 꿇은 김독자. 한수영이 손을 뻗으며 다가가는 순간, 바로 곁에서 누군가가 그녀를 불렀다. ―거기까지. 돌아보자, 그곳에는 자신과 똑같은 얼굴의 ‘한수영’이 있었다. 소름끼치는 감각이 등줄기를 타고 올라왔다. 물벼락이라도 맞은 듯 차가운 느낌과 함께 한수영은 벌떡 꿈에서 깨어났다. “······!” 옅은 신음과 함께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을 때, 한수영은 소파에 누워 있었다. “······또 개꿈인가, 젠장.” 며칠 전부터 반복해서 꾸는 꿈이었다. 유중혁과 유중혁이 싸우고, 또 다른 자신과 김독자가 그것을 지켜보는 꿈. 처음에는 예지몽 같은 게 아닐까 싶었다. 하지만 달리 해석해 보려고 해도, 좀체 감이 잡히지 않는 꿈이었다. 멀찍이 떨어진 텔레비전에서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새로운 화신 연합의 출범으로 인해 한반도의 정세가 지각 변동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멍한 얼굴로 일어난 한수영은, 뉴스를 들으며 입안에 들어 있던 차가운 얼음을 데굴데굴 굴렸다. ······응? 얼음? “뭐지 이건? 아줌마가 내 입에 넣었어?” “내가 그런 짓을 왜 하겠니.” 물을 받아 놓고 치성을 드리던 이수경이 돌아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한수영은 인상을 찌푸리며 얼음을 오도독 깨물었다. 그럼 유상아인가. “나 몇 시간이나 잤어?” “두 시간.” “유상아는?” “탕비실에 커피 마시러.” “탕비실은 무슨. 여기가 아직 회사인 줄 알아?” 말은 그렇게 했지만, 실제로 그들이 거주 중인 사무실은 버려진 회사 건물이었다. 한수영은 투덜거리며 일어나 탕비실로 향했다. “야, 뭐하냐?” 탕비실의 테이블엔 작은 종이컵이 놓여 있었다. 새하얀 손가락으로 허공을 누비는 유상아. 홀로그램을 통해 떠오른 정보들이 유상아의 망막으로 고스란히 스며들고 있었다. 깜짝 놀란 한수영이 외쳤다. “······미쳤어? 또 성흔 쓰고 있는 거야?” “······.” “너 그러다 진짜 젊은 나이에 골로 가는 수가 있어. 그렇게 강력한 성흔들을 남발하면 어떻게 되는지 몰라서······.” 유상아가 사용하는 성흔은 <올림포스>의 「헤르메스 시스템」이었다. <스타 스트림> 각지의 정보들을 입수해 미래를 계측해내는 <올림포스>의 빅 데이터 네트워크. “어쩔 수 없어요. 최악의 상황은 피해야 하니까.” “미래 정보라면 나도 제법 알고 있다니까?” “그것만으론 부족해요. 변수가 너무 많으니까요.” 성흔 「헤르메스 시스템」은 사용자의 수명을 극단적으로 단축시킨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음에도 한수영이 유상아를 만류할 수 없었던 것은, 일행들이 45번 시나리오에 도달하기까지 유상아의 공이 지대했기 때문이다. 만약 유상아가 계측한 미래 변수가 없었더라면, 일행들은 35번 시나리오나 40번 시나리오에서 큰 위기를 겪었을 터였다. 한수영이 질끈 입술을 깨물었다. 그 녀석이 있었더라면······. 김독자가 사라진지도 벌써 3년이 흘렀다. 다시 돌아올 것이라는 희망이 조금씩 희미해지기 시작한 것도 벌써 오래였다. 식어가는 커피에서 모락모락 김이 솟아났다. 그 김을 바라보며, 유상아가 입을 열었다. “간만에 여기 앉아 있으니 회사 다니던 시절 생각이 나네요. 그때도 틈틈이 탕비실 와서 이렇게 숨어 있었는데.” “······난 회사 안 다녀봐서 몰라.” “당신은 확실히 회사 체질은 아니에요.” 유상아가 빙긋 웃자, 한수영이 입술을 비죽였다. “그러고 보니 너 김독자랑 같은 회사 다녔댔지?” “네.” “둘이 친했어?” 지나가듯 묻는 그 말에, 유상아가 한수영의 두 눈을 바라보았다. 옅은 미소와 함께, 유상아가 답했다. “그때도 전우였죠.” ―재앙 경보! 재앙 경보! 시끄럽게 울려대는 그 알림에, 한수영이 사무실로 달려갔다. 대기 중이던 이수경이 텔레비전을 통해 경보 지역을 확인하고 있었다. “······또야? 이번에는 어디래?” “부산이라는구나.” “부산? 너무 먼데. 그쪽 애들이 알아서 하겠지.” 한수영은 퉁명스레 답하며 뉴스 속보로 떠오르는 화면을 바라보았다. 화면 속에 나타난 촉수 괴물들이 화신들과 접전을 벌이고 있었다. 이수경이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수영아, 다른 애들이랑은 계속 연락하고 있니?” “나 싫다는 애들한테 연락을 왜 해? 그보다 아줌마, 그릇에 뭐 떠오르는 것 같은데?” 그 말에 이수경이 자신의 성유물을 내려다보았다. 한수영이 물었다. “이번엔 무슨 점 본 거야?” 이수경은 대답이 없었다. 이상한 낌새에 한수영이 고개를 들자, 이수경은 마치 넋이 나간 망부석처럼 굳어져 있었다. 그제야 한수영은 뭔가를 깨달았다. 김독자가 사라진 지 3년. 애초에, 이수경이 볼 만한 점이란 하나밖에 없었다. 한참이나 그릇 안을 들여다보던 한수영이 말했다. “나 잠깐 부산 다녀올게. 그리고 유중혁 지금 어딨어?” * 나는 허공에 떠오른 시나리오 창을 확인했다. + <메인 시나리오 # 45 ― 금의환향(錦衣還鄕)> 분류 : 메인 난이도 : ??? 클리어 조건 : 당신은 오랜 여행을 마치고 마침내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고향의 사람들에게 당신의 존재를 알리고, 주요 거점 지역에 당신이 돌아왔다는 표식을 남기세요. 고향 사람들은 당신을 환영해줄 것입니다. 제한시간 : 없음 보상 : 200,000코인, 재앙화(災殃化) 해제 실패시 : 사망 * 해당 시나리오가 진행 중인 동안, 화신들은 귀환자들을 마물(魔物)로 인식합니다. * 해당 시나리오가 진행 중인 동안 화신들은 귀환자들의 언어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 클리어 조건 한 번 엿 같다. 사람 약 올리는 것도 아니고. [당신의 목표 거점은 ‘서울 여의도’입니다.] [현재 표식 가능한 거점 지역이 근처에 없습니다.] 나는 작게 심호흡을 했다. 그래, 차라리 다행인지도 모른다. 어차피 45번 시나리오를 수행해야만 한다면, 차라리 내가 귀환자가 된 게 잘된 일일 수도 있다. 이 시나리오는 앞으로 열리게 될 ‘어떤 장소’에 대한 연습이니까. “씨발! 왜 공격하는 건데!” 화신들의 공격을 받은 귀환자들이 화를 냈다. 지금까지 살아남은 화신들이라고 모두 강자들은 아니었다. 여전히 배후성이 없는 화신들도 있었고, 뒤늦게 시나리오에 합류한 이들도 있었다. 때문에, 화신들의 공격이 전부 귀환자들에게 위협적인 수준은 아니었다. “아 못 참겠다 진짜. 이봐 친구들, 그냥 여기 다 쓸어버리고―” “안 됩니다.” 내 만류에 귀환자들의 표정이 굳어졌다. “왜? 쟤들이 먼저 공격했다고!” “그럴 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이유는 무슨 이유? 시발, 쟤들 표정 보라고. 당장 우릴 잡아 죽이려는 얼굴들이잖아.” 확실히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지. 나는 이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난처했다. [도깨비들이 당신의 존재를 못마땅하게 생각합니다.] 본래 이 45번 시나리오는 귀환자들과 기존 화신들의 전면전으로 불거지는 전개였다. 내 그룹 번호가 163번이라고 했으니, 이미 앞서 소환된 162개의 그룹들은 지구 곳곳에서 한창 사고를 치고 다니는 중일 것이다. 제1차 귀환전쟁(歸還戰爭). 원작에서, 3회차의 한반도는 이 전쟁으로 인해 폐허가 된다. 어디까지나 원작 그대로 흘러가면 그렇다는 얘기다. “뭐야, 재앙들끼리 뭔가 얘기하는 것 같은데?” “지금 빨리 다 죽여버려! 흑염마황(黑炎魔皇)이 그랬잖아. 방심하고 있을 때 죽여야 편하다고!” “아냐, 월하현제(月下賢帝) 말 못 들었어? 혹시나 소통 가능한 재앙이 있을 수 있으니 두고 보고 신중하게······.” ······뭔가 익숙한 별명들인데. 아무튼 화신들이 저런 태평한 소리를 할 수 있을 정도면, 아직 한반도의 화신들은 건재하다는 얘기였다. 내 말을 기다리던 귀환자가 내 멱살을 붙든 것은 그때였다. “방해하면 너부터 죽인다. 비켜.” “싫다면?” 귀환자가 나를 향해 ‘격’을 일으키는 순간, 나도 귀환자의 손목을 붙잡았다. [마왕, ‘구원의 마왕’이 자신의 ‘격’을 드러냅니다.] 우드득 뼈가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손목을 붙잡힌 귀환자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리기 시작했다. “너, 너 뭐야······!” 공포에 질린 귀환자의 다리가 후들거리고 있었다. [임시 채널이 열렸습니다.] [한반도의 성좌들이 당신을 주목합니다!] [성좌, ‘대머리 의병장’이 채널에 입장했습니다!] [성좌, ‘해상전신’이 당신에게서 묘한 기시감을 느낍니다.] 반가운 수식언들이 보였지만, 지금은 인사를 나눌 때가 아니었다. 나는 귀환자들을 향해 말했다. [닥치고 전부 무기 집어넣어. 그리고 전부 내 옆으로 모여라. 늦게 모이는 놈은 모가질 날려 버릴 거니까 빨리 움직여.] 나는 일부러 평소보다 과격하게 말했다. 내 진언에 격의 차이를 실감한 귀환자들이 헐레벌떡 내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그런데 혼란에 빠진 것은 귀환자들만이 아니었다. “미친! 저 괴물 뭐야!” “신고해, 빨리! 연합에 신고해!” 내 격을 느낀 화신들이 혼비백산하며 달아나고 있었다. 차라리 잘 됐다 싶었다. 비천호리가 물었다. “혀, 형씨. 설마 형씨가 우리 그룹의 리더요?”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귀환자들이 탄식을 터뜨렸다. “맙소사, 우리 중에 성좌가 있었다니······.” 근처에 모인 귀환자의 숫자는 나까지 총 열 명. 무림 출신 셋에 양산형 중세풍이 다섯. 그리고 기타 지역이 둘이었다. 나는 그들의 면면을 하나하나 살피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당신들이 어느 지역에서 왔는지, 무슨 목적으로 이곳에 돌아왔는지 나는 궁금하지 않습니다.” 초조한 얼굴의 귀환자들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나 확실한 것은, 이 시나리오가 실패하면 우리는 모두 사망한다는 겁니다.” 뒤늦게 시나리오 창을 연 귀환자들 중 몇몇이 침음을 흘렸다. “사랑하는 가족이나 지인들도 만날 수 없고, 그리운 고향 땅도 밟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죽을 때까지 지구인들에게 그저 ‘재앙’으로 기억될 겁니다.” 내게 시비를 걸었던 귀환자도, 깊은 충격에 빠졌던 귀환자도. 하나둘 제정신을 차리는 듯했다. 몇몇 귀환자들은 깨진 건물의 유리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있었다. “설마 우리가 공격을 받은 게······.” “외형 때문만은 아닙니다. 우리보다 앞서 소환되었던 귀환자들이 있었으니까요.” 어떤 귀환자는 고향이 그리워 돌아오지만, 어떤 귀환자는 고향을 파멸시키기 위해 돌아온다. 그들은 지구의 안위를 위협했고, 어쩌면 지금도 그런 짓을 일삼고 있을 것이다. 나는 신신당부하듯 말했다. “싸워서는 안 됩니다. 그럼 파멸뿐이니까.” “이쪽은 싸울 의사가 없다고 전하면 어떨까요?” “그것을 믿어줄지도 의문이지만, 사실상 의사를 전하는 것 자체가 힘듭니다. 시나리오가 끝날 때까지 우리의 언어는 저들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않으니까요.” 귀환자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혹시 다른 작전이라도 있습니까?” “최대한 전투는 피하고, ‘목표 거점’에 표식을 남기는 걸 최우선 과제로 삼으세요. 그러면 시나리오는 클리어 되고, 재앙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다행히 이 그룹은 말이 통하는 분위기였다. 거기다 비천호리도 있으니, 운이 좋다면 별다른 충돌 없이 시나리오를 완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시나리오가 늘 그렇듯, 일이 그렇게 쉽게만 풀릴 리는 없었다. “연합이다! 부산 연합이 왔어!” 사람들의 외침과 함께, 빠져나가는 화신들의 인파를 가르고 다가오는 인물들이 있었다. 순간 귓가가 먹먹해지며, 먼 뱃고동 소리 같은 것이 들려왔다. 불어오는 해운대의 바람에 희미한 소금기가 묻어 있었다. [‘제4의 벽’이 희미하게 흔들립니다.] 해운대의 모래사장 너머로 나타난 열두 척의 배. 그 배의 선두에서 두 사람이 뛰어 내리고 있었다. “해상제독이 왔어!” “충왕(蟲王)이다!” 새삼, 많은 시간이 흘렀다는 것을 깨닫는다. 어떤 것은 변했고, 어떤 것은 변하지 않았다. 캡을 깊이 눌러 쓴 소녀는 여전히 특유의 후드 집업을 입고 있었지만 더이상 교복 치마를 입고 있지는 않았다. 채집망을 든 소년은 여전히 특유의 매서운 눈매를 가지고 있었지만, 이목구비가 한결 뚜렷해지고 부쩍 키가 자라 있었다. 적어도 이제 내 허벅지에 들러붙을 키는 아니었다. “꼬맹이 네가 할래, 아니면 내가 할까.” “동전 던지기로 정하죠.” 그리웠다. 무척 보고 싶었다고.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새하얀 백사장 위로 떠오른 동전이 반짝였고, 나는 지금 달아나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발을 뗄 수 없었다. [마왕, ‘구원의 마왕’이 자신의 일행들을 바라봅니다.] 어쩌면 희망을 품었던 걸지도 모른다. 다른 이들도 아닌 저들이라면, 나를 알아볼 것이라고. 그렇게 믿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시나리오 페널티로 ‘간접 메시지’가 왜곡됩니다.] 그리고 다음 순간, 허공에 간접 메시지가 떠올랐다. [‘못 생긴 오징어’가 화신 ‘이지혜’를 도발합니다.] 이지혜가 나를 보며 말했다. “저 오징어는 내가 죽인다, 꼬맹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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