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4화
514화
자꾸만 정신이 아득해졌다.
「만약 ‘멸살법’이 현실이라면 어떨까.」
그것이 나의 생각인지, 아니면 [최후의 벽]에 기록된 것인지, 혹은 그것도 아니라―
「내가, ‘멸살법’의 인물들과 함께 싸울 수 있는 세계가 있다면」
‘가장 오래된 꿈’의 상상인지, 나는 잘 알 수가 없었다.
무수한 기억들이 갑작스런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어린 소년의 머릿속에서 중구난방으로 퍼져 나가는 상상들이, 다른 세계에서는 이야기의 재료가 되었다. 살아있는 현실이, 비극이 되었다.
「그러고 보니 유중혁이 회귀한 후의 세계는 어떻게 되는 거지? ······작가님한테 댓글로 물어봐야겠다.」
누구보다 ‘멸살법’을 잘 기억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누구보다도, 그 소설을 열심히 읽었다고 자부했다. 그런데 왜 정작, 그 소설을 읽었던 ‘나’에 대해서는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어쩌면, 나는.
[당신은 ‘등장인물’이 되었습니다.]
내 화신체 위로 스파크가 흘렀다. [제4의 벽]이 기능을 멈추고 있었다. 심장이 미칠 듯이 뛰었고, 황폐해진 머릿속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비명들이 울렸다. 떨리는 고개를 숙인 채, 가까스로 심호흡을 했다.
[제4의 벽]의 말이 맞다.
어쩌면, 나는 알고 있었다.
너무나 많은 힌트가 있었다.
「그 세계에서 나는 너무나 운이 좋았고.」
「그 세계의 모든 것이 내게 편의적이었으며.」
「때로는 허술하기까지 했다.」
그 모든 것이, ‘가장 오래된 꿈’의 가호 때문이었다면.
「모든 세계선의 태초, 원형(原形)의 세계선.」
나는 다시 고개를 들었다. 힘이 빠진 주먹을 천천히 쥐었다. [제4의 벽]은 없었지만, 마음은 차분했다. 차분해졌다 믿어야 했다.
오직 나만이, 이 세계의 결말을 알고 있었다.
기이이이잉.
[부러지지 않는 신념]이 울었다. 나는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소년이 노트에서 고개를 들고 나를 보고 있었다.
츠츠츠츠츠!
“······어?”
아무것도 모르는 눈.
나는 그 시선을 피할 수 없었다. 그저 어떻게든 하루를 살아남아야 했던, 이 세계에 의지할 곳은 어디에도 없었던 아이의 눈이었다.
마치 헛것이라도 본 듯이 눈을 비비며 그 아이가, 나를 보고 있었다.
「<스타 스트림>을 파괴하기 위해서는, ‘가장 오래된 꿈’을 끝내야 한다.」
<스타 스트림>이 시작되었던 순간부터 다짐했고, ‘은밀한 모략가’와도 약속했다. 이 모든 비극의 원인을 없애겠다고. 그리고 마침내 기회가 온 것이다.
[‘마왕화’를 발동합니다.]
찢어진 어깻죽지에서 새카만 날개가 펼쳐졌다. 나를 보는 아이의 눈도 커졌다.
“아, 아······?”
무척이나 오래된 목소리. 맞다. 나는 분명 저런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 아이를 향해, 나는 한 걸음씩 다가갔다.
[‘천사화’를 발동합니다.]
아이의 얼굴이 가까워질수록, 더 많은 것들이 보였다.
아이가 끼적이던 노트. ‘멸살법’의 파워 밸런스를 기입한 도표. 언젠가의 내가 작성했던, 바로 그 도표였다.
유중혁, 이현성, 신유승, 이지혜, 이설화, 김남운, 안나 크로프트······. 빼곡하게 적힌 이름들 옆으로 기록된 그들의 성흔들과 스킬들. 삐뚤빼뚤한 글씨를 덮듯이 가린 아이의 손등 위로 남은 멍.
나는 이 아이가 살아남은 시간과, 살아갈 세월을 알고 있었다.
아이의 미래에 무엇이 있는지, 어떤 불행들이 녀석을 기다리고 있을 것인지.
「그 세월이, 얼마만큼의 의미가 있을까.」
소년은 일진들에게 찍혀 왕따를 당할 것이다.
친척들에게 버림받아 이른 독립을 하게 될 것이며, 가는 곳마다 자신을 따라오는 기자들의 추적을 받게 될 것이다.
입시에 실수를 저질러 삼류 대학에 가게 될 것이다.
훈련소에서 난수 뽑기가 잘못되어 최전방에 배치를 받을 것이고.
편의점 삼각 김밥으로 매일 끼니를 때울 것이다.
그러다 어영부영 아무 회사에 턱걸이 입사하여, 생을 연명하게 될 것이다.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하나의 소설을 완독할 것이고.
그 소설을 읽고 살아남아, 결국 자신이 사랑했던 모든 존재를 불행하게 만들 것이다.
소년은, 자라서 김독자가 될 것이다.
“괴, 괴물······.”
아이가 나를 보며 입을 열고 있었다.
“그래, 괴물이야.”
아이의 망막에 나의 모습이 비쳤다.
「그 괴물이 아이의 미래였다.」
괴물을 막을 수 있는 것은, 바로 지금뿐이었다.
모든 것은 찰나의 일이었다.
내가 검을 세우며 달려간 것도, 한수영이 주먹으로 내 얼굴을 갈긴 것도.
“――――!”
목소리가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한수영이 뭐라고 외치고 있었다. 붉게 물든 녀석의 눈이 울고 있었다. 내 가슴을 주먹으로 마구 두들겼고, 억센 손으로 내 어깨를 붙들었다.
“―독자!”
나는 한수영을 뿌리쳤다. 그리고 다시 앞으로 나아갔다. 고작 몇 미터밖에 되지 않는 거리였음에도 쉬이 다가갈 수가 없었다. 내 모든 설화가 반발을 일으키고 있었다.
전신을 억압하는 강력한 스파크가 내 몸을 붙들었다. 발이 떼어지지 않았고,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나를 보는 아이의 표정이 겁에 질렸다. 덜덜 떨리는 아이의 턱. 흔들리는 눈. 이것이 현실인지 아닌지를 가늠하는 눈이었다.
[‘가장 오래된 꿈’이 당신의 존재를 의심합니다.]
그 모든 세계를 꿈꾸는 존재.
녀석의 꿈속에서는 나 역시 등장인물에 지나지 않았다.
츠츠츠츠츠츳!
[‘가장 오래된 꿈’이 당신의 존재를 부정합니다.]
현실을 부정하듯 아이가 머리를 감싸며 몸을 웅크렸다.
“나, 나는 유중혁이다······ 나는······.”
수만 번도 더 외웠던 그 주문.
「내 주변에는 보호막이 있어.」
「아무도 나를 해치지 못하고.」
「어떤 것도 나를 건드리지 못해.」
일진들에게 두들겨 맞을 때마다,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했던 생각들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현실을 현실이 아니게 만드는 힘.
이제 그 힘이, 정반대로 작용하고 있었다.
“아저ㅆ······!”
아주 작은 절대자가, 이 모든 것을 자신의 망상이라 여기고 있었다.
아이의 몸을 중심으로 불투명한 막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새카만 공처럼 생긴 막. ‘가장 오래된 꿈’이 만들어 낸 가장 튼튼한 보호막.
나는 악귀처럼 울부짖으며 그 보호막을 향해 다가가 칼을 휘둘렀다. 세계와 세계가 충돌하며, 눈부신 섬광이 눈앞에서 터졌다.
[부러지지 않는 신념]의 칼날이 맥없이 부러져 하늘을 날았다.
나는 날아오르는 칼날 조각을 망연히 바라보았다.
「죽일 수 없다」
죽일 방법 같은 게 있을 리 없었다. 만약 이 모든 이야기가 어린 나의 꿈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이 세계의 모든 법칙은 어린 나에게 달려 있었다.
어디선가 맹렬하게 불어온 바람이, 아이의 떨어진 노트를 거칠게 넘겼다. 이윽고 멈춰선 페이지에는, 어린 내가 기록한 ‘멸살법’의 설정이 적혀 있었다.
―끊어진 필름 이론 : ‘멸살법’의 세계선 겹침을 설명하는 이 이론은······.
희미하게 튀어 오르는 스파크 속에서, 나는 멍하니 그 내용을 읽었다. 읽고, 또 읽었다.
허리를 숙여 부러진 칼을 집었다. 그리고 내 안에 남은 모든 설화를 공명시켰다.
나는 아이를 둘러싼 검은색 구체를 바라보며 말했다.
“······나는, 이 세상 누구보다 너를 잘 알아.”
「괴롭히지마괴롭히지마괴롭히지마」
“괴롭히려는 게 아냐.”
「도망치고 싶어」
“알아.”
「하지만 어디로?」
아이의 이야기가 내게 전해져 왔고, 나의 이야기가 아이에게 전해져 갔다.
츠츠츠츠츠츳!
부러진 [부러지지 않는 신념]의 칼날은 이제 두 뼘도 채 남지 않았다. 하지만 내 계획을 실행하기엔, 그 두 뼘이면 충분했다.
「‘가장 오래된 꿈’을 끝낼 방법.」
[‘끊어진 필름 이론’이 발동합니다!]
[당신의 존재가 ‘가장 오래된 꿈’과 공명합니다!]
나는 있는 힘껏 나의 목을 향해 칼을 찔렀다.
푸욱, 하는 소리가 들렸다. 새빨간 피가 눈물처럼 바닥에 떨어졌다.
“김독자.”
유중혁의 피였다. 칼은 목 바로 앞에서 조금도 움직이지 않은 채 허공에 고정되어 있었다. 칼날을 쥔 유중혁의 손아귀에 푸른 힘줄이 돋아 있었다.
“모두 꽉 잡아라!”
유중혁뿐만이 아니었다. 누군가가 등 뒤에서 나를 제압하고 있었다.
“독자 씨. 이건 아닙니다!”
이현성이었다.
내 왼팔과 오른팔을 쥔 이들도 있었다. 정희원과 유상아였다.
“······제발!”
“다른 방법이 있어요, 분명히.”
허리를 껴안은 이지혜와, 내 다리를 한 짝씩 붙든 신유승과 이길영이 보였다.
나를 대신해 ‘가장 오래된 꿈’의 보호막을 두드리는 한수영도 보였다.
“이거 열어! 널 해치려고 온 게 아냐! 그냥, 그냥 잠깐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그럼에도 보호막은 점점 더 두꺼워지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알 수 있다. 저것은, 열리지 않을 것이다.
나는 칼자루를 다시 굳게 쥐었다.
“이 방법뿐입니다.”
장하영이 외쳤다.
“제발, 제발 그만둬! 아직 시간이 있잖아. 아직······.”
시간은 없다. 시간이 지날수록 우리를 둘러싼 스파크가 짙어지고 있었다.
[‘가장 오래된 꿈’이 당신의 존재를 부정하고 있습니다.]
아이는 끝내 우리를 부정할 것이다. 자신의 망상을 지울 것이다.
다른 세계의 현실을, 현실이 아닌 것으로 만들 것이다.
그러니, 이 일을 할 수 있는 것은―
쿠구구구구······.
어디선가 짙은 안개가 깔리며, 불길한 혼돈의 힘이 느껴졌다.
칼날을 쥐고 있던 유중혁의 표정이 이상해지고 있었다.
“네, 네놈······.”
비틀거리는 유중혁의 입에서 새카만 설화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 설화는 꾸역꾸역 녀석의 입을 타고 바닥으로 흘러내려, 마침내는 사람의 형상이 되었다.
새카만 코트 사이로 빛나는 [진천패도]의 칼날.
오직 이 순간만을 위해 살아온 이가 그곳에 있었다.
「은밀한 모략가」.
무수한 회귀 끝에, 마침내 자신의 이름마저 잊어버린 존재.
오직 복수만을 위해 생을 거듭해 온 이가, 그곳에 있었다.
그는 내 쪽을 흘끗 바라보더니, 천천히 보호막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튀어 오르는 스파크를 가볍게 무시하며 걸어가는 ‘은밀한 모략가’.
그 순간, ‘가장 오래된 꿈’의 설화가 내게 흘러들어왔다.
「‘유중혁처럼 되고 싶다.’」
서서히 팔뚝에 소름이 돋았다.
내 유년을 지배했던 기억이 무엇이었는지, 왜 잊고 있었을까.
「이 우주의 그 누구보다 강한 주인공.」
‘은밀한 모략가’가 스파크의 영향을 받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강박처럼 계속된 상상 속에서, 나는 얼마나 많이 그런 생각을 했던가.
「어떤 인간도 모든 상상을 통제할 수는 없다.」
팔뚝과 허벅지에 멍이 생길 때마다, 입술이 터질 때마다, 얼마나 많이 그 이름을 외웠던가.
「그러니 이 꿈을 끝내기에 가장 적합한 이는 정해져 있었다.」
나는 천천히 칼자루를 떨어트렸다.
지금부터는, 나의 몫이 아니었다.
이 세계에서 가장 정당한 복수를 내가 방해할 수는 없었다.
“은밀한 모략가!”
한수영이 소리를 지르며 달려갔다. 정희원도, 이지혜도, 그리고 아이들도. 지금부터 그가 저지를 끔찍한 일을 알아채기라도 한 것처럼.
하지만 투명한 장벽에 가로막히기라도 한 듯, 일행들은 다가갈 수가 없었다. 그리고 오직 ‘은밀한 모략가’만이, 플랫폼을 가로질러 아이가 있는 벤치에 도달했다.
그는 [파천강기]의 힘이 담긴 검을 휘둘러 새카만 원을 베어냈다. 그러자 그곳에, 아기 새처럼 몸을 웅크리고 있던 아이가 더욱 몸을 웅크렸다.
“나는 유중혁이다. 나는 유중혁이다. 나는······.”
희미하게 비치는 빛살 속에서, 아이가 몸을 떨었다.
【너는 유중혁이 아니다.】
억겁의 회귀 속에서, 자신의 이름을 잊었던 회귀자.
그가 자신의 이름을 말하고 있었다.
“내가, 유중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