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화

500화 <올림포스>를 통과한 후 우리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달리거나 걷고, 또 달릴 뿐이었다. 별이 빈자리에 휑한 비명만이 들려 왔다. 저 비명들도 설화로 남을까. 그리고 다시 누군가가 그것을 들을까. 얼마나 더 많은 설화들이 반복되어야, 이 세계가 끝나는 것일까. “김독자.” “알고 있어.” 나를 부축한 한수영의 목소리에 가까스로 마음을 다잡았다. 마침내 내가 찾던 선실의 문이 멀찍이 보이기 시작했다. 멀리서 보기에도, 다른 선실의 입구와는 달리 작고 누추한 문. 우리가 지나온 복도가 시끄러워지고 있었다. 다른 세력의 성좌들이 부딪치는 소리였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문을 열었다. [‘소품 보관실’에 입장하셨습니다.] “뭐야? 이 누추한―” 중얼거리던 한수영의 목소리는 방의 정경이 펼쳐진 순간 도로 들어갔다. 흰색의 도료로 덮인, 그 크기를 한눈에 어림할 수 없는 방. 만약 이곳을 ‘소품 보관실’이라 말한다면 이 방은 세상에서 가장 큰 소품 보관실일 것이다. 「‘시나리오의 모든 것’을 모아 놓은 선실.」 비형의 설화가 들려 왔다. 「이제껏 시나리오에 사용된 모든 소품들이 그곳에 전시되어 있었다. 소모성 아이템부터, 시나리오의 주요 보상들이나 힘을 잃은 성운의 성유물들까지.」 내가 어룡을 사냥할 때 사용했던 ‘망치 해마의 점액’과 ‘스톤호그의 가시’도 있었다. 그땐 진짜 죽는 줄 알았는데······ 이렇게 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나쁘지 않군. 아직 쓸 만한 것들이다.” 어느새 소품들 사이로 뚜벅뚜벅 걸어간 유중혁이 장비를 교체하고 있었다. 놈은 [흑천마도]의 표면을 설화금속 스프레이로 코팅하고, 입고 있던 코트도 새것으로 교체하더니, 낡은 전투화를 내던지고 성유물을 집어 들었다. 번뜩이는 눈동자를 보니 만족스러운 듯했다. “‘쓸 만한 정도’? 지금까지 본 적도 없는 것들인데! 빨리 챙겨서 뜨자.” 어느새 아이템 더미에 뛰어든 한수영도 착용할 물품들을 골라내기에 바빴다. 늘 성운의 풍족한 지원을 받아온 안나 크로프트조차, 허리를 숙이고 아이템들을 물색하고 있었다. 우리는 시나리오의 히든 피스를 발견한 평범한 화신들처럼 아이템들을 찾고, 물품을 교체하고, 서로를 보며 빙긋 웃었다. 「모두가 알고 있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이 순간을 견뎌낼 수 없다는 것을.」 방 밖에서 다시 한번 폭음이 울렸다. 이번에는 매우 가까웠다. “······다음 방은 어디야?” 피로 때문일까, 한수영은 잠시 [예상 표절]의 이야기를 중지한 상태였다. 순간 시선이 마주친 한수영의 눈꼬리가 슬쩍 떨렸다. 「“작가라고 항상 이야기하는 게 즐거운 줄 아냐?”」 저 웃음의 의미를 이제는 이해할 수 있었다. 세계가 멸망해도, 시나리오가 비극으로 향해도, 녀석은 여전히 작가다. 그렇기에 더 고통스러울 것이다. 서술되지 않은 아픔까지도 녀석의 머릿속엔 전부 존재하고 있을 테니까. 「그렇기에 이 선택은 ‘독자’인 그만이 할 수 있었다.」 “아니, 우린 여기서 싸울 거야.” 「어떻게든 원하는 결말을 보고야 말겠다는 탐욕과 아집으로 가득 찬 그만이 할 수 있는 선택이었다.」 한수영이 역정을 냈다. “내핵을 부수러 가는 거 아니고?” “내핵에 도달하려면 거대 성운의 세계관을 더 지나쳐야 해.” “잘 피해서 가면 되잖아! 저 문으로 나가면―” 한수영은 그 말을 하며 한쪽 구석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문을 향해 걸어갔다. “그쪽은 <황제>로 통하는 문이야.” “그럼 저쪽으로―” “거긴 <베다>와 연결된 문이고.” “시발······.” 기겁한 한수영이 문고리에서 떨어지며 선실의 잠금장치를 눌렀다. 다시 한번 폭음이 울려 퍼졌다. 둔중한 진동과 함께, 누군가가 선실의 문을 두들기고 있었다. 뭔가가 터지는 소리와 함께, 선실 벽이 격렬하게 흔들렸다. “······이제 바로 앞까지 왔어요.” 안나 크로프트가 말했다. 가뜩 인상을 찌푸린 한수영이 다시 이마를 짚었다. [설화, ‘예상 표절’이 이야기를 재개합니다!] 결국 한수영이 다시 설화를 발동했다. 예상하고 싶지 않은 전개들이 녀석의 머릿속에 그려지고 있을 것이다. [미래시]를 가진 안나 크로프트도, 무수한 회차를 겪으며 패턴을 읽어온 유중혁도 슬슬 태세를 갖추기 시작했다. “우린 여기서 싸워야만 해. 이곳이 우리가 이길 가능성이 있는 유일한 방이야.” ‘최후의 방주’의 모든 선실에는 거대 성운들의 세계관이 구현되어 있다. 「그러나 이 방주에서 유일하게, 그런 세계관이 만들어지지 않은 장소가 있었다.」 바로, 이 ‘소품 보관실’이었다. 시나리오에 사용될 아이템들을 비축해 놓은 장소. [해당 선실은 어떤 세계관의 영향도 받지 않는 곳입니다.] 그것이 내가 이 방을 전장으로 택한 이유였다. “왔다.” 유중혁이 [흑천마도]의 칼자루를 뽑는 순간, 보관실의 네 방위를 차지하고 있던 문이 한꺼번에 터졌다. 그리고 그 문을 통해 성좌들이 넘어오기 시작했다. [성좌, ‘12월 25일의 주인’이 방주에 현현했습니다!] [성좌, ‘우주의 순환을 책임지는 자’가 자신의 시종들과 함께 전장에 합류합니다!] <베다>. [성좌, ‘아비도스의 주인’이 분노와 함께 현현합니다!] [성좌, ‘지진과 화산의 관장자’가 오랜 잠에서 깨어납니다!] [성좌, ‘들숨과 날숨의 지배자’가 자신의 설화를 일깨웁니다!] <파피루스>. [성좌, ‘외눈의 아버지’가 자신의 창을 바로 잡습니다.] [성좌, ‘멸망의 늑대에게 팔을 잃은 자’가 당신을 발견합니다!] <아스가르드>. [성좌, ‘흙으로 사람을 빚은 대모신’이 방주에 현현했습니다!] [성좌, ‘대라천존’이 방주에 현현했습니다!] [성좌, ‘황천상제’가 자신의 옥좌에 올랐습니다!] [성좌, ‘삼첨창의 주인’이 자신의 보패를 모두 꺼냈습니다!] ······<황제>까지. 보관실의 모든 문이 개방되는 순간, 공간 전체의 설화들이 부딪치며 팽창했다. 서로 다른 세계관의 ‘거대 설화’들이 자신의 언성을 드높이고 있었다. 한수영이 웃었다. “우리 싫어하는 놈들은 다 몰려왔네.” [저쪽이다!] 누군가가 외치는 순간, 우리는 동시에 뒤쪽으로 훌쩍 물러났다. 굉음과 함께 방금전까지 우리가 서 있었던 바닥에 새카만 재가 흩날렸다. [‘거대 설화’들이 새로운 선실을 발견했습니다!] [일부 설화들이 새로운 선실에 자신의 세계관을 이식하기 시작합니다!] 시간은 그리 많지 않았다. 콰아아아앙! 폭발음과 함께 우리는 제각기 병장기를 꺼내 들었다. 나 역시 온갖 종류의 시나리오 소품들을 미리 챙겨둔 상황이었다. 우리는 동서남북으로 등을 맞대고 선 채 다가오는 성좌들을 향해 격을 방출했다. 한수영이 [흑염]을 발출하며 전방으로 몸을 날렸다. “다 뒈져라!” 한수영이 던진 새카만 구체가 허공을 날아 성좌들 사이에 떨어졌다. 뭔가 싶었는데, 다음 순간 구체에서 어마어마한 폭염이 끓어 올랐다. [크아아아아아아!] 나는 그것을 바로 알아보았다. 그것은 241회차 95번 시나리오 보상 아이템인 [악몽 폭염]이었다. <에덴>의 지옥에서 끌어올린 불길을 담은 그 아이템은, 범위 내 지역에 불꽃을 점화시켜 약 10년의 세월 동안 불태우는 지독한 설화 병기였다. [멸망한 성운의 불꽃 따위―] 후우우우, 하는 소리와 함께 여와의 흙이 겁화의 중심에 길을 냈다. <황제>의 성좌들이 그 길을 달리며 우리를 향해 달려들었다. 한때 서유기에서 우리와 맞서 싸웠던 이들도 있었다. 한수영이 바락바락 이를 갈았다. “쟤들도 왔는데 넌 왜 아직이야 흑염룡!”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조금만 기다리라고 외칩니다!] 문을 통해 넘어오는 성좌들의 수가 기백을 넘어섰다. 삼백, 사백, 오백······ 세계관 내에 흩어져 있던 모든 성좌들이 이 광활한 방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성좌들의 숫자가 많아질수록, 그 성좌들을 중심으로 「무대화」가 발생하고 있었다. 무채색의 땅이 황폐한 사막으로 바뀌고, 거대한 피라미드가 솟아올랐다. ‘아비도스의 주인’ 오시리스가 말했다. [나를 잠에서 깨운 게 누구인가 했더니.] 이어서 하늘의 구름이 모여들며 천상계의 전경이 펼쳐졌다. ‘흙으로 사람을 빚은 대모신’ 여와가 말했다. [아직 늦지 않았다, 아이야. 내가 네게 자리를 마련해 줄 수 있다.] [누구 마음대로?] 어디선가 코끼리 울음이 들린다 싶더니, 거대한 거북의 머리에 올라탄 ‘12월 25일의 주인’ 미트라가 말하고 있었다. [내 ‘부활의 축일’을 거부한 녀석에게 처할 형벌은 죽음뿐이다.] 우주수의 가지 끝에 걸터앉은 오딘이, 세상의 삼라만상을 통찰하는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어리석은 별아, 너는 정말로 우리 모두를 상대할 수 있다 믿는 것이냐?] 터져 나오는 웃음소리. 이 안전한 ‘방주’에서 자신의 거대 설화를 보장받고 있던 모든 별들이 우리를 비웃고 있었다. [‘신화’조차 되지 못한 설화로 감히―] 우리를 향해 껄렁한 목소리를 늘어놓던 ‘우레를 먹는 새’의 입이 푸슈슉, 소리와 함께 꿰뚫렸다. 어느새 녀석의 배후를 점한 유중혁이 녀석의 목을 베어낸 것이었다. “말이 너무 많군.” [죽여라!] 싸움이 시작되었다. 숫자에서 압도적으로 불리한 우리는 주변의 소품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며 싸웠다. 곳곳에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설화 병기들이 놓여 있었다. 특히나 80번대 시나리오의 병기 창고는, 그야말로 유중혁의 전장이었다. [설화, ‘생과 사의 동료’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설화, ‘영원불멸의 지옥도’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마왕 선발전’에서 이미 드러났던 유중혁의 재능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올라운더 유중혁. 1863회차의 세월을 거치며 모든 병장기에 숙달된 녀석이 대궁으로 성좌들을 학살하고 있었다. [저놈부터 죽여!] 유중혁의 속사에 위인급 성좌들이 죽어 나가며 별들의 잔해로 이루어진 방호벽이 만들어졌다. 우리는 그 사이를 달리며 싸웠다. [오른쪽으로 피해요!] 안나의 경고와 함께, 신화급 성좌의 맹공이 발치를 휩쓸었다. 한 대만 맞아도 치명상을 피할 수 없는 일격들. 이설화의 [생사환]이 거의 다 떨어진 상황이었기에, 더 이상의 중상을 감수할 수는 없었다. 아스가르드의 하위 성좌들이 안나 크로프트를 향해 달려들었다. [감히 우리 성운을 배신해?] 퍼거걱! 말을 잇던 성좌의 머리통이 그대로 터졌다. 안나 크로프트의 배후에서 긴 혓바닥 같은 것이 튀어나와 성좌의 머리를 터트려버린 것이었다. [성별 바꾸기를 좋아하는 한 성좌가 이죽거립니다.] 안나가 성운을 배신하도록 도운 배후가, 우리를 돕고 있었다. “김독자! 더 버티기 힘들어! 유중혁도 한계야!” 신화급 성좌들의 시선이 유중혁에게 집중되고 있었다. 병장기 창고가 불에 타올랐고, 피칠갑을 한 유중혁이 거대한 해머를 휘둘러 성좌들과 맞서 싸우고 있었다. 「김독자는 보관실을 뒤지며 뭔가를 찾기 시작했다.」 “찾았다.” 나는 [성유물] 카테고리의 가장 끄트머리에 놓여 있는 한 병의 시험관을 끄집어냈다. 그 시험관에는 다음과 같은 이름이 붙어 있었다. [신단수의 씨앗]. 나는 망설이지 않고 그 씨앗을 바닥에 풀었다. 그러자 바닥에 떨어진 씨앗이 곧 싹을 틔웠다. 싹은 순식간에 자라서 내 키만한 나무가 되었다. 그리고는 성장을 멈추었다. [거대 설화, ‘신단수’가 자신의 뿌리를 내립니다!] [거대 설화, ‘신단수’가 당신의 존재를 인식합니다.] [거대 설화, ‘신단수’가 개천(開天)을 위한 설화를 필요로 합니다!] 보관실이 불타고 있었다. 유중혁은 아직까지 잘 버티고 있었다. 독기 어린 유중혁과 눈이 마주친 성좌들이 질겁하며 외쳤다. [이곳은 ‘소품 보관실’이다! 아이템을 사용해 대적해라!] 그들이 가장 먼저 발견한 것은 우리도 잘 아는 아이템이었다. [절대 왕좌]. 네 번째 시나리오의 핵심 아이템이자, 획득하는 것만으로도 ‘이계의 신격’의 가호를 받을 수 있는 아이템. 왕좌를 발견한 위인급 성좌들이 탐욕스런 눈으로 그쪽을 향해 달려갔다. 나는 그쪽을 향해 달려가려는 한수영을 막았다. “내버려 둬.” 몰려가는 위인급 성좌들. [왕좌는 나의 차지다!] 누군가가 [절대 왕좌]에 올라선 바로 그 순간, 나는 [신단수]의 잎사귀를 쥐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녀석에게 먹일만한 설화는 이것뿐이었다. 심상찮은 기색을 느낀 일부 성좌들이 [절대 왕좌]를 향해 소리쳤다. [잠깐, 멈춰라!] [절대 왕좌]로부터 흘러나오는 격이 이쪽을 향해 범람하는 순간, 내 가슴 깊은 곳에서 뭔가가 꿈틀거렸다. [설화, ‘왕이 없는 세계의 왕’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거대 설화 ‘신단수’가 새로운 신화의 시작을 감지합니다!] 「그 이야기는 왕좌를 부수며 시작되었다.」 콰콰콰콰콰! 설화를 먹어 치운 [신단수]가 폭발적인 개연을 얻어 자라나기 시작했다. [새로운 세계관이 해당 지역에 뿌리를 내립니다!] 「신단수」. 거대 성운 <홍익>의 거대 설화. 나는 성좌들을 향해 말했다. “너희 말대로 우리한텐 ‘신화’가 없어. 하지만 우리는, 늘 그 ‘신화’와 싸워왔다.” 설화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 어떤 신화도 그 이야기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다음 순간, 보관실의 천장까지 뻗어 나간 [신단수]가 굉음을 일으켰다. 방주의 천장이 무너지고 있었다. [개천(開天)이 시작됩니다!] 가공할 소용돌이와 함께, 하늘이 열리기 시작했다. [오래된 성운의 늙은 별들이 아득한 잠에서 깨어납니다!] 눈부신 광휘와 함께 찢어진 하늘 사이로 만개한 가지의 그림자가 보였다. 그림자의 끝에 별들이 열매처럼 맺히기 시작했다. [그 왕좌, 오랜만이군.] 가지 끝에 매달린 일곱 개의 별. 내가 [절대 왕좌]를 파괴할 때 도움을 주었던 북두성군들이 그곳에 있었다. 무수한 성좌들이 하늘에서 유성처럼 낙하하기 시작했다. [성좌, ‘대머리 의병장’이 방주에 현현합니다!] [성좌, ‘흥무대왕’이 방주에 현현합니다!] [성좌, ‘매금지존’이 방주에 현현합니다!] [성좌, ‘천제의 풍신’이 방주에 현현합니다!] 이 방주에서, 유일하게 우리의 편이 되어줄 별들. 낙하하는 성좌들 사이로, 벼락같은 일검이 떨어지며 [절대 왕좌]가 폭발했다. 부서진 왕좌 위에서 가짜 왕을 짓밟은 성좌가 나를 보며 입을 열었다. [잘했다, 후예여.] [성좌, ‘고려제일검’이 방주에 현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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