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9화
499화
우리는 <아스가르드>의 성좌들을 피해 복잡하게 배열된 통로를 달려나갔다.
[성좌, ‘멸망의 늑대에게 팔을 잃은자’가 피냄새를 맡습니다.]
[성좌, ‘하프와 호른의 신’의 음표들이 당신의 귓가에 아른거립니다.]
[성좌, ‘환생자들의 시조’가 당신의 영혼을 추적합니다!]
[성좌, ‘아비도스의 주인’이 당신에게 두 번의 기회는 없다 선언합니다!]
채널을 통해 우리를 응원하는 성좌들이 있는가 하면, 그 채널의 시야를 통해 우리를 쫓아오고 있는 성좌들도 있었다.
우리의 위치가 공개된 순간, 자신의 세계관 장벽을 넘어서 우리에게 살의를 드러낸 별들.
그럼에도 우리가 아직 잡히지 않은 것은, 지금 모인 멤버가 바로 이 넷이었기 때문이다.
“오른쪽으로 꺾으면 안 돼요. 좋지 않은 예감이 드니까.”
안나 크로프트의 직감을 믿고 방향을 틀었다. 비록 적이지만 이럴 때는 가장 든든한 우군이었다.
연이어 갈림길이 나타났다.
[설화, ‘예상표절’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오른쪽으로 가면 죽을 확률 92%. 왼쪽으로 가면 죽을 확률 44%. 계속 직진!”
머릿속으로 수많은 클리셰의 패턴을 읽어내며 한수영이 소리쳤다.
“직진하면 살 확률이 얼만데?”
“나도 몰라!”
나를 쏘아본 한수영이 앞서 달려나갔다.
“위에서 온다.”
다른 누구도 아닌 주인공의 직감이었다. 유중혁이 [파천강기]를 줄기차게 발산했다. 선제공격에 당한 성좌들이 비명과 함께 복도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간간이 [파천검도]가 뭔가를 썰어대는 소리가 들려 왔다.
“계속 달려라.”
문득, 나는 우리 네 사람이 모인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이 넷은, 이 시나리오를 가장 안전하게 클리어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한 사람은 예언자, 한 사람은 작가, 또 한 사람은 회귀자.
그리고 마지막 한 사람은······.
“멈춰.”
내 말과 함께, 일행들의 걸음이 동시에 멈췄다. 세 사람 모두가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그들을 흘끗 보고는, 앞의 선실을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안나 크로프트가 내 어깨를 붙잡았다.
“······설마 그 방으로 들어갈 생각은 아니겠죠?”
유중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일행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여길 통과하는 게 유일한 방법입니다.”
“지금 그 선실에 뭐라고 적혀 있는지 안 보여?”
아주 잘 보인다. 그리고 이 뒤에서 느껴지는 어마어마한 성좌들의 격도 아주 잘 느껴졌다.
<올림포스>.
「내가 원하는 장소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올림포스>의 세계관을 지나가야만 한다.」
비형이 남긴 설화에 따르면 다른 길은 없었다.
당연한 일이지만 방주 밖에서 우리에게 치욕을 당한 제우스는 결코 길을 내주지 않을 것이다.
“뒤는 오딘, 앞은 제우스로군.”
유중혁이 앞으로 다가오며 말했다.
“여기만 돌파하면 놈들에게 대적할 방법이 있는 건가?”
“있어, 반드시.”
바로 뒤쪽에서 쫓아오는 오딘의 격이 느껴졌다.
한수영이 소리쳤다.
“젠장, 그럼 빨리 열어! 저 새끼들 쫓아오니까!”
우리는 <올림포스>의 문을 박차고 들어갔다. 뭔가가 우리를 강하게 흡입한다 싶더니, 정신을 차렸을 때 우리는 <올림포스>의 창공을 활공 중이었다.
멀리서, 웅장한 <올림포스>의 하늘성이 보였다.
[성운 <올림포스>의 성좌들이 침입자의 정체를 확인했습니다!]
대기가 딱딱하게 굳어가고 있었다. 삽시간에 몰려든 뇌운이 하늘을 뒤덮었다.
[성좌, ‘번개의 좌’가 <올림포스> 전체에 자신의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올림포스>의 왕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왕의 주변을 지키는 12신좌들.
[성좌, ‘전능의 태양’이 자신의 마차를 움직입니다!]
[성좌, ‘흉포의 군신’이 자신의 검을 집어듭니다!]
[성좌, ‘순결한 달빛의 사냥꾼’이 활시위를 겨눕니다!]
해역 아래로 우리를 기다리는 신화의 괴물들이 보였다.
[성좌, ‘미궁의 괴물’이 당신을 향해 울부짖습니다!]
[성좌, ‘죽음을 노래하는 요정’이 당신의 죽음을 노래합니다!]
이 세계관 전체가, 우리의 적이었다.
쿠르르르르르!
“움직여!”
내 [바람의 길]과 유중혁의 [허공답보]가 동시에 발동했다.
안나 크로프트의 [질풍가도]와 한수영의 [흑운칠성]이 그 뒤를 이었다. 우리가 낼 수 있는 최고의 속도로, 우리는 창공을 질주하고 있었다.
하늘의 뇌운이 점점 더 불길한 빛을 띠었다.
[구원의 마왕!]
12신좌들도 우리의 뒤를 바짝 쫓았다.
허공을 가르고 날아드는 아레스의 거검. 나는 [부러지지 않는 신념]을 휘둘러 가까스로 그 공격을 막아냈다. 꽈드득, 하는 소리와 함께 관절의 마디마디가 내려앉는 느낌이 들었다. 마치 중전차 아래에 깔린 듯한 느낌. 이것이 자신의 세계관을 등에 업은 12신좌의 진짜 힘이었다.
나는 전신의 격을 개방하며 진언을 발출했다.
[얕보지 마라, 아레스.]
[거대 설화, ‘신화를 삼킨 성화’가 포효합니다!]
다른 존재라면 모를까, 적어도 ‘아레스’에게는 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나는, 이 녀석에 대한 승리 설화가 있기 때문이다.
[설화, ‘전쟁의 신을 패퇴시킨 자’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하지만 상황은 이미 난항이었다.
[흑염]을 두른 한수영을 향해 ‘순결한 달빛의 사냥꾼’ 아르테미스가 달려들었고, 허공을 누비는 유중혁은 이미 ‘정의와 지혜의 대변자’ 아테나와 격전을 벌이는 중이었다.
가장 아래쪽에 있던 안나 크로프트를 <올림포스>의 하위 성좌들이 물고 늘어졌다.
[나는 너를 응원했다, 김독자.]
내 배후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이 하늘에서는 누구보다도 빠른 성좌. 신발 끝에 달린 날개 무늬.
[하지만 너는 이곳으로 오지 말았어야 했어.]
‘하늘 걸음의 주인’, 헤르메스였다.
그가 안타까운 눈으로 나를 보며 말을 이었다.
[아버지께서, 몹시 분노하셨다.]
그리고 새하얗게 백열하던 뇌운이 폭발했다. 모든 것이 슬로우모션처럼 움직였다. 하늘의 시야가 녹아버리듯 사라지고 있었다.
이 세상 모든 것을 뒤덮는 낙뢰. 세계관 안에 살아있는 그 어떤 존재도 제우스의 분노를 피해갈 수 없었다.
이쪽을 보는 한수영이 뭐라고 외쳐대고 있었다. 나는 그런 그녀를 향해 말해주었다.
‘괜찮아.’
천천히 숨을 들이켜고, 정신을 집중했다. 벌써 승부가 끝났다는 듯 의기양양하게 웃는 아레스가 보였다. 나는 녀석을 무시하고 하늘을 향해 피뢰침처럼 검을 들었다.
콰아아아앙!
하늘의 낙뢰가 나를 향해 모여들었다. 단번에 모든 설맥이 타버릴 정도의 격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버텨냈다. 정확히는, 내 손끝에서 일렁이는 어둠이 제우스의 낙뢰를 빨아들이고 있었다.
내 입에서 알 수 없는 비명이 터져 나왔다.
[거대 설화, ‘신화를 삼킨 성화’가 으르렁거립니다!]
시야가 붉게 물들고, 입에서 설화가 꾸역꾸역 쏟아져 나왔다.
파츠츠츠츠츠츠······!
제우스가 더욱 강한 격을 방출했다.
더 이상은 버틸 수 없었다. 힘이 빠진 몸이 추락하기 시작했다.
「이제 됐다.」
[끝이다, 구원의 마왕. 아무리 네놈이라 해도 우리 ‘세계관’에서는―!]
낙뢰를 맞고 하염없이 추락하던 내 몸이 허공에 멈춰 섰다. 놓치기 직전이었던 [부러지지 않는 신념]에 다시 힘이 들어갔다. 딱딱하게 굳어진 아레스의 표정이 보였다. 그 어떤 공포에도 굴복하지 않는 전쟁의 신의 눈동자에 두려움의 감정이 번지고 있었다.
「누군가가, 김독자의 검을 함께 쥐고 있었다.」
아주 크고 튼튼한 손. 고결한 밤을 깎는 듯한 진언이 울려 퍼졌다.
[왜 이 세계관이 너희 것이라 생각하지?]
추락하는 내 몸을 안아 든 온화하고 깊은 어둠.
[오만하기 짝이 없구나, 아레스.]
낙뢰를 삼키는 밤이 창공에 번지고 있었다.
[성좌, ‘부유한 밤의 아버지’가 ‘최후의 방주’에 현현했습니다!]
[성좌, ‘가장 어두운 봄의 여왕’이 ‘최후의 방주’에 현현했습니다!]
<올림포스>의 신화는 제우스만의 것이 아니다.
그들의 빛나는 낮이 ‘신화’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을 낮이라 불러 준 밤이 있었던 까닭이다.
[‘명계’가 지상에 현현합니다!]
지하의 가장 깊숙한 곳에 잠들어 있던 세계가 깨어나고 있었다.
[하데스······!]
나를 지상에 내려놓은 명계의 왕이 하늘을 보며 담담히 말했다.
[승부를 가릴 시간이 왔다, 늙은 형제여.]
하늘을 향해 치켜든 하데스의 낫이 울자, 지하의 어둠이 폭포처럼 하늘을 향해 쏟아졌다.
명계의 군세였다. 심판관들의 진군 명령이 떨어지자, <타르타로스>의 지하를 지키던 켈베로스가 울부짖었다.
[지하의 천한 것들이―!]
세계관의 영웅들이 병장기를 부딪쳤다. 아르고 호의 영웅들이 전장에 투입됐다.
제우스와 12신좌의 군세는 막강했다. 심판관 아이아코스와 헤파이스토스가 충돌했고, 켈베로스와 미노타우로스가 서로를 물어뜯었다.
아르테미스를 위시한 숲의 병사들이 몰려왔다. ‘현명한 점성술사’ 케이론의 말발굽이 명계의 군세를 짓밟았다.
[그대들의 밤이 아무리 깊다 한들―!]
그런 케이론의 머리통이 허공을 날았다.
지하에서 기어 나온 괴물들이 거대한 손가락으로 그의 머리통을 떼어 으적으적 씹어먹었다.
[제―우―스―!]
깊은 설움과 원한으로 얼룩진 목소리.
나는 그들을 알고 있었다.
「그렇게, <올림포스> 최후의 <기간토마키아>가 시작되고 있었다.」
거신족, 기간테스. 비통한 세월을 견디며 지하에 웅크리고 있던 모든 거신족이 <올림포스>의 밤 위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심지어 그런 기간테스보다 몇 배는 더 커다란 몸집을 가진 괴물들도 있었다. 언젠가 <명계>의 감옥에서 만난 적 있던 자들이었다.
[연옥의 모든 거신들이 <올림포스>의 하늘을 올려다봅니다.]
헤카톤케이레스 삼형제.
그리고 <기간토마키아>에서 함께 싸웠던 백수거신 브리아레오스.
[결국 여기까지 왔구나, 아이야.]
브리아레오스의 손 중 하나가 내 머리 위를 가볍게 스쳤다.
[이 전장은 너를 위한 것이다.]
하늘의 권좌에 도전하는 거신들이 밤을 딛고 일어났다. 그들의 포효에 <올림포스>의 천공이 흔들리고 있었다. 제우스의 옥좌를 위협할 정도의 격.
전장의 중심에서 하데스와 격전을 벌이는 제우스의 모습이 보였다. 두 신화급 성좌의 충돌에 새카만 낮과 밤이 뒤섞이며 세계의 시공간이 뭉그러지고 있었다.
명계의 병력들을 지휘하던 페르세포네가 나를 향해 말했다.
[가거라. 절대 뒤를 돌아보지 마라. 네가 원하는 끝을 보거라.]
나는 고개를 끄덕인 후, 휘청이는 몸을 일으켰다. 이설화가 준 [생사환]을 삼키자 타버린 신경들이 조금씩 회복되기 시작했다. 살점이 부서지고 피가 튀는 전장을, 나는 비틀거리며 걸어 나갔다.
아수라장을 헤쳐온 한수영과 유중혁, 그리고 안나 크로프트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달려온 한수영이 나를 부축했다. 뒤를 돌아보자, 눈을 부릅뜨고 죽어간 영웅들의 시체가 그곳에 있었다. 하늘에서 추락한 별들. 이제 더 이상 이야기되지 않을 설화들이, 원망스럽다는 듯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내가 선택한 길이었다.」
처음부터 이렇게 될 것을 알고 있었다.
내가 이곳에 오면, 명계가 움직일 것은 당연했다.
나는 내가 원하는 ■■를 위해 그 모든 설화를 이용한 것이다.
[거대 설화, ‘신화를 삼킨 성화’가 울음을 토합니다!]
멀리, <올림포스>의 출구가 보였다. 우리가 가야 할 길이었다.
그러나 그런 우리를 막은 성좌가 있었다.
나는 그를 향해 물었다.
“디오니소스. 우릴 막을 겁니까?”
자신의 신도단을 이끈 ‘술과 황홀경의 신’ 디오니소스가 나를 보고 있었다. 그는 이미 술을 몇 병이나 마신 듯 얼큰하게 뺨이 달아올라 있었다.
취한 듯 몽롱한 눈길로 나를 보던 디오니소스가, 술병을 쥐며 말했다.
[모두 비켜라.]
주인의 말에, 바쿠스의 광신도들이 길을 비켰다. 우리는 그 길을 걸어 나갔다. 어디선가 세이렌의 노랫소리와 오르페우스의 연주가 들렸다. 내가 아는 누군가가 죽어가는 듯한 소리도 들렸다.
「김독자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내 사위 또한 취한 것처럼 흔들렸다.
우리는 걷고, 다시 걸었다. 그리고 마침내 <올림포스>의 출구에 도착했다.
우리의 뒤엔 디오니소스가 있었다. 뒤를 돌아보면 슬픔으로 물든 그의 표정을 볼 수 있을 것이었다. 우리의 이야기를 몹시 좋아했던 성좌였다.
[김독자. 네가 가는 결말에 우리 <올림포스>는 없겠지?]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그야, 네 이야기를 좋아하기 때문이지.”」
아주 오랫동안 내 설화를 지켜 보아준 이.
몇 번이나, 나를 구해주었던 존재.
「“나와 몇몇 성좌들은, 네가 ■■에 도달할 수 있는 존재라 믿는다.”」
뒤를 돌아보려는 나를 향해, 디오니소스가 말했다.
[그동안 즐거웠다, 위대한 별이여.]
등 뒤로 하나의 세계가 닫히는 소리가 났다.
쉽게 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한참이나 말없이 서 있는 나를 향해, 누군가가 말했다.
“아직 끝난 게 아니다.”
우리는 불이 꺼진 방주의 어둠을 걸어 나갔다.
이제 목적지가 눈앞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