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8화
268화
[오만한 초월좌여, 무슨 헛소리를······!]
결전의 시작과 동시에 유중혁이 움직였다.
성좌들의 비웃음도, 압도적으로 불리한 전력도 지금의 유중혁에게는 중요치 않았다. 그는 3회차에 돌입한 뒤 처음으로, 오직 눈앞의 적을 죽이는 것에 모든 정신을 집중하고 있었다.
퍼져 나오는 유중혁의 아우라에, 최전방에 있던 몇몇 위인급 성좌들이 침음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성좌들은 여전히 유중혁을 얕보고 있었다.
아무리 초월좌라 해도, 고작 인간.
수적으로도 압도하는 상황에서, 성좌들이 질 턱이 없다.
그리고 그것이, ‘바나라의 장군’이 떠올린 마지막 생각이 되었다.
[전용 스킬, ‘거신화 Lv.6’을 발동합니다!]
찰나에 발동한 [거신화]는, 성좌들과 유중혁 사이의 거리를 순식간에 좁혔다.
콰콰콰콰콰!
마치 유성처럼 쏘아진 유중혁의 신형.
‘바나라의 장군’이 그 속도를 깨닫고 황급히 거검(巨劍)을 들었을 때, 그의 머리통은 이미 [흑천마도]에 베여 허공을 날고 있었다.
[감히······!]
눈을 부릅뜬 ‘바나라의 장군’은 목이 잘린 상태로도 경악성을 내뱉었다.
유중혁은 그대로 [흑천마도]를 그어 날아가는 장군의 머리통을 쪼개버렸다.
퍼거거거걱!
방심이 낳은 어처구니없는 최후였다.
츠츠츠츠츠츠츳!
과도하게 집약된 마력이 유중혁의 모든 기혈을 녹이고 있었다. 초월형 3단계를 극한까지 발동한 결과였다. 이 상태로 그가 운신할 수 있는 최대 시간은 10분. 그 10분에, 유중혁은 모든 것을 걸었다.
“다음.”
‘바나라의 장군’의 죽음은 성좌들에게 커다란 충격을 안겨 주었다.
성좌는 화신체가 죽는다고 해서 소멸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화신체를 헛되이 잃고 싶은 성좌는 아무도 없다.
치명적인 죽음은 성좌의 격에 영구적인 손상을 입히기 때문이다.
모든 성좌가 경직된 찰나.
그 짧은 틈새를 이용해, 유중혁은 두 번째 공격을 시도했다.
서거거걱!
섬전처럼 움직인 [흑천마도]가 검은 궤적을 남기며 거대한 새의 날개를 베었다. ‘우레를 먹는 새’가 거센 울음을 토했다.
그제야, 성좌들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네놈!]
‘인류의 시조’의 ‘원시의 창’이 유중혁을 노렸다.
보통의 화신이었다면 단번에 가루가 되어버렸을 일격이었다.
콰가가가각!
그러나 유중혁은 그 일격을 받아냈다. 오른쪽 전완근이 파열되는 듯한 충격과, 몸 전체를 짓누르는 거력. 입으로 피를 쏟아내면서도, 유중혁은 집중력을 놓치지 않았다.
[과도한 집중이 ‘특성’의 적용 범주를 확장시킵니다!]
[전용 특성, ‘유희의 지배자’가 발동합니다!]
그의 집중력은 특성의 힘을 깨웠다. 다가오는 성좌들의 기척이 모두 데이터가 되어 유중혁의 뇌리에 흘러들어오고 있었다. 그 순간 유중혁에게 이 세계는 게임이었다.
유중혁은 절제된 동작으로 성좌들의 공격을 피해내고, 마력을 사용해 반격했다.
[크아아아앗!]
[흑천마도]에 손가락이 베인 ‘인류의 시조’가 괴성을 질렀다.
빈틈을 파고든 유중혁의 [흑천마도]가 굉음을 내며 솟아올랐다.
파천검도(破天劍道).
절기(絶技).
파천유성결(破天流星決).
땅에서 하늘로 솟구친 검강이, 벼락처럼 밤하늘을 내찔렀다. 먹구름 사이로 숨어버린 검강의 갈래가 천둥을 만들었고, 번쩍이는 밤하늘 속에서 쏟아진 검뢰(劍雷)가 운석처럼 성좌들에게 직격했다.
꽈르르르릉!
허공에서 떨어지는 수십 갈래의 검뢰에, 몇몇 성좌들의 화신체가 꿰뚫렸다.
초월형 3단계의 모든 것을 담은 혼신의 일격이었다.
[크아아아아아!]
고통에 몸부림치는 성좌들을 보며, 유중혁은 죽어가는 자신을 느꼈다.
3회차의 시간들이 그의 머릿속을 흘러갔다.
짧은 회차였다.
그럼에도, 많은 일들이 있었다.
[설화, ‘패왕의 이름을 계승한 자’가 울부짖습니다.]
그의 감정에 반응하듯, 검극에 깃든 설화들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마치 그 모든 설화 하나하나가 의지를 가진 것처럼.
대부분 혼자서 쌓은 설화는 아니었다.
[설화, ‘이적에 맞서는 자’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귀환자에 맞섰던 설화.
[설화, ‘절망의 낙원’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버림 받은 낙원을 지키고 얻은 설화.
[설화, ‘이계의 신격에 맞서 싸운 자’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이계의 신격과 맞섰던 설화.
[설화, ‘공단의 지배자’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평소라면 결코 하지 않을 짓을 하고 얻은 설화도 있었다.
지금 이 상황과는 관계 없는 설화들이었다.
하지만 모두 누군가와 관계되어 있는 설화였고.
그 혼자서는 결코 얻을 수 없었던 설화였다.
그 설화들이 동시에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었다.
마치, 여기서 이 이야기가 끝나기를 원치 않는 것처럼.
후두두둑.
쓰라린 통증과 함께 유중혁의 가슴팍에서 피가 쏟아졌다.
언제 다친 것인지 조차 알 수 없는 상처들.
쓰러진 화신체 몇이 주변을 나뒹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지고한 빛의 신’ 수르야가 말했다.
[대단하다. 이미 너는 ‘인간’이라 부를 수 없겠구나, 아이야.]
그 진언에 대항하듯, 유중혁의 설화들이 환한 빛을 내뿜었다.
[설화, ‘재앙의 왕을 사냥한 자’가 포효합니다.]
유중혁은 초월좌.
설화는 성좌들의 전유물이기에, 그것을 가졌다 하여 밤하늘의 별들과 동등한 격을 누릴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그 순간 유중혁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설화의 빛은 그 자리에 있는 그 어떤 성좌의 것보다 눈부셨다.
유중혁은 자신의 몸에서 흘러 나오는 설화들을 바라보았다.
어떤 것은 알고 있는 것이었지만, 어떤 것은 낯설었다.
다시는 얻을 수 없을 것 같은 설화도 있었다.
[설화, ‘생과 사의 동료’가 이야기를 계속하고 싶어합니다.]
어느새 저만치 달아난 유상아와 일행들이 보였다.
이현성의 등에 업힌 김독자의 모습도 보였다.
유중혁은 손에서 미끄러지는 [흑천마도]를 꾹 쥐었다.
······죽을 수는 없다.
여기서, 고작 이런 곳에서 죽을 수는 없다.
덜덜 떨리는 그의 검이, 마지막 힘을 다해 수르야를 가리켰다.
그 광경이 재미있다는 듯, 수르야가 빙긋 웃었다.
[그러나 고작 인간의 설화.]
환한 빛을 산란하는 수르야의 뒤로, 수천 년에 걸친 설화들이 떠올랐다.
항거할 수 없는 격.
그 가공할 세월 앞에, 유중혁의 짧은 역사가 위태롭게 떨리고 있었다.
[어리석은 인간이, 신의 권좌가 드높음을 모르도다.]
모든 것을 녹여버릴 태양빛이 유중혁을 향해 쏟아졌다.
*
콰콰콰콰콰콰!
성좌들에 의해 파괴되는 [공단]의 정경.
반항 한 번 하지 못하고 죽어 나가는 화신들.
갑작스런 재앙에 절망한 몇몇 사람들의 표정이 클로즈업되어 패널 화면을 채우고 있었다. 제일 처참한 것은, 한쪽 팔을 잃고 신체의 절반이 넝마가 된 후에도 싸움을 지속하는 한 사내의 모습이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대노합니다!]
[성좌, ‘가장 어두운 봄의 여왕’이 화신 ‘유중혁’을 안타까워합니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비겁한 성좌들에게 손가락질합니다!]
[다수의 성좌들이 전장의 성좌들을 향해 불만을 쏟아냅니다!]
무수한 성좌들의 간접 메시지가 쏟아졌고, 관리국의 도깨비들 또한 그것을 듣고 있었다. 개중에는, 이번 ‘마왕 선발전’을 담당하는 도깨비 비형도 있었다.
[이게 대체 뭐하자는 겁니까?]
좀처럼 화를 내거나 흥분하지 않는 비형도, 이 순간만큼은 채널의 성좌들과 같은 마음이었다.
[2차전은 ‘유중혁―김독자 공단’의 승리였습니다! 간발의 차이긴 했지만,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고요. 그런데 왜 승자 발표를 하지 않느냔 말입니다!]
2차전이 끝난 직후, 비형은 곧장 관리국의 승인팀에 연락을 취했다.
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준비 중]이라는 답변뿐.
결국, 비형이 찾은 마지막 연줄은 차기 대도깨비 후보인 ‘바람’이었다.
치지직, 하는 소리와 함께 패널 화면 위로 ‘바람’의 얼굴이 떠올랐다.
[관리국의 결정일세.]
관리국의 결정.
그야말로 마법 같은 말이었다.
이것도 ‘관리국의 결정’. 저것도 ‘관리국의 결정’.
[바람님. 이건 ‘메인 시나리오’입니다.]
아무리 관리국이라고 해도, 건드려선 안 될 것은 있다.
[관리국이 언제부터 ‘메인 시나리오’의 전개에 본격적으로 간섭했습니까? 그것도 ‘거대 설화’가 얽힌 시나리오에······ 이런 짓을 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바람님께서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바람은 대답이 없었다.
[말해주십시오. 대체 누가 이런 짓을 벌인 겁니까? 윗분들 중 하나입니까?]
비형은 화면 속에 언뜻언뜻 비치는 ‘독각’을 일별했다.
분명 ‘독각’도 이 사태와 연관되어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이번 일은 겨우 저런 상급 도깨비 하나둘이 움직여서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침묵하던 바람이 입을 열었다.
[······지금 ‘대도깨비’를 의심하는 건가?]
[그분들 말고 이런 짓을 벌일만한 이야기꾼이 있습니까?]
[비형, 정신 차리게. 그분들이 왜 이런 짓을 벌이겠는가?]
[거야 저도 모르죠. 뒷돈이라도 받아 쳐드셨는지.]
바람이 인상을 찌푸렸다.
[대도깨비쯤 되면 그런 사사로운 이해에는 얽매이지 않네.]
[그럼 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겁니까? 바람님께서는 뭔가 알고 계실 것 아닙니까!]
[비형.]
비형의 몸이 순간적으로 움찔했다. 바람의 목소리에 분노가 깃들고 있었다.
필시 엄한 나무람이 떨어질 것이라 생각했는데, 뜻밖에도 바람은 금방 표정을 풀었다. 마치, 그런 비형을 이해한다는 듯이.
화면 속의 바람이 패널을 통해 ‘마왕 선발전’의 정경을 보고 있었다.
천천히, 바람의 입술이 열렸다.
[그래, 어쩌면 자네 말대로 대도깨비들 중 하나가 이런 ‘지연’을 만들어 냈을지도 모르지.]
[그럼 역시······.]
[하지만 대도깨비라 해도, 거기까지가 고작일세. 이 정도 규모의 시나리오에 개입한 후 닥쳐올 후폭풍은 ‘대도깨비’들이라 해도 견뎌낼 수 없단 말일세.]
[······그럼 누가 저런 짓을 한단 말입니까?]
순간, 굉음과 함께 ‘관리국’의 천장이 흔들렸다.
거대한 용이 지나가는 듯한 소리.
‘개연성’이 움직이는 소리였다.
비형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설마······, 그런 말도 안 되는······.]
[이제 알겠는가?]
이만한 ‘개연성’을 움직일 수 있는 존재.
그런 존재는, 이 <스타 스트림>에 하나뿐이다.
애초에 그것을 ‘존재’라 칭해도 좋을지 알 수 없지만.
쐐기를 꽂듯, 바람이 말했다.
[<스타 스트림>의 의지가, 이걸 원한 걸세.]
[말도 안 됩니다!]
[그것 말고는 설명할 방법이 없네.]
원망할 곳조차 앗아가는 듯한 그 말에, 비형은 멍하니 패널 화면을 돌아보았다.
화면 속에는 김독자의 일행들이 비치고 있었다.
본래라면, 승리에 들떠 있어야 할 이들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들은 끔직한 몰골이 되어 바닥을 나뒹굴고 있었다.
무려 <성운>들이 지원하는 성좌들과의 대결.
처음부터 말이 안 되는 싸움이었음에도, 일행들은 잘 싸웠다.
강력한 성좌들에 맞서 게임을 치루었고, 마침내 ‘거대 설화’를 내건 선발전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지금, 그들은 단지 ‘승자 발표’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이유로 패자가 될 참이었다.
단지, <스타 스트림>이 이것을 원했기 때문에.
황망히 입술을 뻐끔거리는 비형의 눈빛에, 원망 섞인 분노가 깃들었다.
[그럼······ ‘이야기꾼’이란 건 대체 왜 존재하는 겁니까?]
도깨비가 된 이후, 처음으로 비형은 압도적인 무력감을 느꼈다.
덜덜 떨리는 손끝에서, 그가 매만지던 시나리오의 부속들이 떨어지고 있었다.
[저런 말도 안 되는 전개도 막지 못한다면······ 이 세계의 ‘이야기꾼’은 대체 무슨 가치가 있느냔 말입니다.]
[비형.]
슬픈 비형의 눈을 보며, 바람이 천천히 말을 덧붙였다.
[이야기꾼도, 이야기의 일부일 뿐일세.]
절망한 비형이 화면을 바라보았다.
눈부신 빛살 속에 조금씩 녹아 내리는 유중혁의 모습.
이제 이 ‘이야기’는 이야기꾼의 손조차 떠나갔다.
그러니, 이제 믿을 존재는 하나뿐이었다.
[다수의 성좌들이 한 성좌를 바라봅니다.]
이현성의 등에 업힌 채 흔들리고 있는 한 사내의 모습.
화면 속에서, 그 사내가 서서히 눈을 뜨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