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3화

213화 조그만 상징체로 잘도 종알대는 인형의 모습에, 유중혁의 미간 주름이 한층 짙어졌다. “······채널이 없는데 어떻게 간접 메시지를 보내는 거지?”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상징체가 화신과 접촉해 있으면 가능하다고 말합니다.] 우리엘의 인형 상징체는 유중혁의 어깨 위에 찰싹 매달려 있었다. 유중혁은 손가락으로 상징체를 슬쩍 밀어내며 물었다. “이런 짓을 해도 괜찮은 건가?”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도깨비에게 들키지만 않으면 괜찮다고 말합니다.] “아니, 도깨비 말고 네놈 말이다.” 우리엘은 일순 그게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하는 듯했다. 유중혁은 말없이 인형의 곁을 가리켰다. 츠츠츠츳. 조그만 고개를 갸웃하던 인형이, 그제야 깜찍하게 눈을 뜨더니 양손으로 자신의 입을 폭 막았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화신 '유중혁'의 마음씨에 크게 감동합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실은 조금 괴롭다고 말합니다.] 아까부터 우리엘의 상징체에는 미약한 스파크가 흐르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마계]는 대천사인 그녀에게는 금역이었던 까닭이다. 마계는 마왕들의 영역. 부자연스런 위험을 감수하는 만큼, 우리엘로서도 개연성의 소진이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는 팔뚝에 찰싹 들러붙은 우리엘을 다시 떼어내며 유중혁이 물었다. “너는 왜 이렇게까지 김독자를 찾는 거냐?”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그러는 너도 마찬가지지 않냐고 묻습니다.] “뭔가 오해를 하는 것 같은데, 나는······.” 사실, 본래였다면 ‘마계’는 지금 시점에 절대 오지 않았을 장소였다. 이곳의 난이도는 같은 차수의 다른 시나리오들과는 비교도 안 되니까. 그나마 위안인 것은 이곳이 기성 마계가 아니라 신생인 73번째 마계라는 점이었다. 마왕은 없고, 아마 마계의 지배자들은 기껏해야 공작일 것이다. 그 정도라면 해 볼 만 했다. 무엇보다도, 지금의 자신은 이전 회차의 같은 시기보다 훨씬 강해졌으니까. “나는 그냥 나를 사칭하는 녀석이 있다는 게 마음에 안 들 뿐이야. 그게 김독자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히죽 웃습니다.] “그리고 마계에는 쓸만한 아이템들도 많고······.”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히죽히죽 웃습니다.] “한 번만 더 히죽거리면 몸통을 찢어버리겠다.” 고개를 돌린 유중혁이 지평선의 드넓은 정경을 응시했다. 아마 이 황량한 세계의 어딘가에 놈도 있을 것이다. 세계를 고요히 둘러본 유중혁이, 마침내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 세이스비츠의 [공장]. 평소보다 스산한 분위기가 감도는 공작의 집무실에서, 백작 시로크는 진땀을 흘리며 보고를 이어가는 중이었다. “······그래서, 혁명으로 인한 소요로 당분간 공단 내외의 출입을 통제할 계획입니다.” 코앞에서 길로바트 측 사절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것을 보며, 시로크는 몇 번이나 가슴이 내려앉았다. 말이 길로바트의 사절이지, 사실 눈앞의 사내는 사절단장이나 맡고 있을 급이 아니었다. 폭렬의 옴브로스. 길로바트 공단의 후작이자, 73번째 마계에서 다음 공작 후보로 가장 유력하게 손꼽히는 존재. 옴브로스의 눈에서 이글거리는 화마(火魔)를 감지한 시로크가 숨을 히끅거렸다. 집무실의 창가에 서서 한가롭게 밖을 보는 세이스비츠 공작이 없었더라면, 시로크의 목은 진즉에 달아났을지도 모른다. ”······하여, 길로바트의 사절들께서는 한동안 이곳에 머물러주시기를 간곡히 청하는 바입니다.” “할 말은 끝났나?” “예, 옙! 저, 저는 그럼 이만······.” 시로크가 황급히 집무실의 문을 열고 달아난 뒤, 옴브로스 후작은 심기를 다스리기 위해 한동안 숨을 씩씩 몰아쉬었다. 귀찮은 상황이었지만 평소 성격대로 다 뒤집어 엎어놓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왜냐하면 그의 뒤에는 지금 73번째 마계의 최강을 자처하는 ‘세이스비츠’가 있었으니까. 한동안 창밖을 내다보던 세이스비츠 공작이 능글맞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렇게 됐다는군.” “······저더러 어쩌란 말입니까?” “안 됐지만 자넨 못 나가겠네. 당분간 [세이스비츠]에 머무르며 사태를 지켜보게.” 그 말에 결국 옴브로스가 터졌다. “······지금 그 발언은 외교 문제로 번질 수 있습니다만?” “너무 예민하군. 동맹 공단의 사절에 대한 보호 조치일 뿐이야.” “그깟 혁명가 하나 때문에 말입니까?” “처형관 일곱이 죽고 후작 둘이 죽었네. ‘그깟’이라고 말할 시기는 지난 셈이지.” ‘혁명가 시나리오’는 공단 내의 모든 처형관이 사망하는 순간 마지막 페이즈로 돌입한다. 그러니 엄밀히 따지자면 지금 세이스비츠 공작은 위기에 처한 셈이었다. 하지만 말하는 것과 달리 세이스비츠 공작의 표정에서는 그다지 위기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 모순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옴브로스가 투덜거리듯 말했다. “하필 이런 시기에 혁명가가 나타나다니······ 조금은 체면이 구겨지셨겠군요, 세이스비츠 공작님.” “그래? 나는 재미있다고 생각하는데. 세이스비츠에서 혁명가가 나온 건 30년 만이거든. 가끔 이런 이벤트라도 있지 않으면 살아갈 수가 없어.” “성좌들이나 할 법한 말씀을 하십니다.” “그러면 안 되는 건가? ‘이야기’는 성좌들만의 것이 아닐세.” 보통의 화신이 그런 말을 했다면 옴브로스는 코웃음을 쳤을 것이다. 하지만 세이스비츠 공작에게는 그런 얘기를 할 만한 자격이 있었다. 저 드높은 하늘의 ‘설화급 성좌’에 비할 바는 아니겠지만, 세이스비츠는 무려 400년 동안이나 이곳 73번째 마계에서 설화를 쌓은 괴물이었다. “마왕 선발전이 시작되기 전까지는 최대한 많은 설화를 쌓아두는 것이 좋아. 강력한 혁명가가 나타날수록 나로서는 기꺼운 일이지.” 혹시나 자신이 ‘혁명’에 당할 거라는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는다. “그렇게 자신만만하신 분이 왜 저를 못 가게 막으시는 겁니까?” “왜라고 생각하나?” 그 은근한 시선을 받은 옴브로스가 침음했다. 어쩌면 뻔한 이야기였다. 세이스비츠는 이번 사태로 두 명의 후작을 잃었다. “전 [길로바트]를 배신할 생각이 없습니다.” “하하, 누가 뭐라고 했나?” “노파심에 말씀드리는 겁니다.” “나도 노파심에 조언 하나 하지. 자네는 길로바트 공작이 ‘마왕’이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나?” 훅 치고 들어온 그 말에, 옴브로스는 조금 당황했다. 세이스비츠는 쉴 틈을 주지 않았다. “아니면 멜레돈이나 베르칸이 새로운 마왕이 될 거라고 생각하나?” “······제가 답할 수 없는 질문이군요.” “아니, 자넨 답할 수 있어. 73번째 마계의 4공작 중 최강이 누구인지는 다들 아는 얘기니까.” 옴브로스가 침을 삼켰다. 저렇듯 담담한 선언이 무섭게 들릴 수 있다는 게 새삼스러웠다. 역시, 73번째 마계에서 ‘가장 오래된 공작’의 연륜은 무시할 수 없다. “쉽지 않으실 겁니다. [멜레돈]은 <베다>와 손잡았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성좌들의 힘을 빌릴 수 있는 건 그쪽만이 아니지.” “그 말씀은 설마······.” 세이스비츠 공작은 대답 대신 창밖의 하늘을 보며 물었다. “이제 곧 도깨비들이 올 걸세. 그럼 또 뭐가 오겠나?” 지금은 새카맣게 물들어 있는 밤하늘이다. 하지만 곧, 저 밤하늘 위에 수많은 별들이 몰려들 것이다. 그리고 성좌들의 출현에 반응한 다른 마계의 마왕들도 속속 모습을 드러내겠지. 후작인 옴브로스조차 심장이 떨리는 느낌이었다. 드디어, 이 ‘73번째 마계’도 제대로 된 시나리오의 전장이 되는 것이다. “······채널 섭외는 끝내셨습니까?” “관리국에 기별은 넣어 놨네.” 순간 옴브로스는 세이스비츠가 구태여 후원자를 구하지 않는 이유를 깨달았다. 어차피 도깨비들이 나타나고 본격적인 시나리오가 시작되면, 성좌들은 더 커다란 사건이 터지는 쪽으로 모여들 것이다. 퍼뜩, 어떤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본격적인 ‘마왕 선발전’이 시작되기 전 작은 여흥으로는 나쁘지 않겠지. 성좌들은 학살을 좋아하니까.” “설마 ‘혁명’을 내버려 두신 게 그런 이유 때문입니까?” 세이스비츠가 묘한 미소를 지으며 연초의 연기를 뿜었다. 옴브로스가 옅게 탄식했다. “······당신은 정말 타고난 악마군요.” 이 세계에서 모든 갈등은 곧 상품이다. 지금 세이스비츠는, [공단]에 있는 수많은 공민들의 목숨을 팔아 성좌들의 관심을 사려는 것이었다. “칭찬 고맙네.” 옴브로스가 질렸다는 듯 고개를 털었다. 이만한 연출을 계획했다면, 세이스비츠 공작은 반드시 최대의 굉장한 한 방을 준비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공단]에서 그게 무엇일지 예측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간만에 공작님의 [공장]이 움직이는 걸 볼 수 있겠군요.” 공작들이 가진 최강의 설화병기(說話兵器), [공장]. 세이스비츠 공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준비 기동 조치를 내렸으니 조만간 볼 수 있을 걸세.” 옴브로스의 눈에 기대감이 어렸다. 73번째 마계 최강자의 설화. 그것을 보는 것은 그리 흔한 기회가 아니었으니까. 그런데 그때. [‘세이스비츠 공단’ 지역에 #BI-90594 채널이 생성되었습니다.] 들려온 메시지에, 옴브로스가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섰다. “벌써 도깨비들을 부르신 겁니까?” 그러나 세이스비츠 공작의 표정을 보는 순간, 옴브로스는 이것이 공작의 의도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집무실의 문이 벌컥 열리며 누군가 뛰어 들어왔다. “공작님! 죄송합니다만, 급한 보고가―” 나타난 것은 아까 쩔쩔매며 자리를 피했던 백작 시로크였다. 빠르게 표정 관리를 마친 세이스비츠가 대답했다. “말해라.” 이런 타이밍에 나타났으니, 저 녀석의 보고는 필시 새로운 채널의 출현과 관계된 것일 터. 그런데 시로크의 입에서 나온 것은 전혀 뜻밖의 말이었다. “공장의 가동 설득력이 부족합니다.” 세이스비츠 공작의 표정이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그게 무슨 소리지? 분명 예비 설득력을 보충해 두라고 했을 텐데?” “그, 그게······ 아무래도 노역을 온 공민 놈들이 설화 파편들을 빼돌린 모양입니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지 눈치챈 옴브로스가 말했다. “제법 머리를 쓰는 놈이 혁명가가 됐나 보군요. 혹시 저놈 때문에 도깨비들이 먼저 움직인 건······.” “그럴 리가 없어. 아직 관리국과 혹부리 측의 협상은 끝나지 않았으니까.” 뜻밖의 상황에 슬그머니 눈살을 찌푸린 세이스비츠 공작이 곧장 지시를 내렸다. “감독관과 노예들을 지평선으로 보내라. 설화 파편이야 다시 끌어모으면 그만이다.” “실은 벌써 보내 놨습니다. 그런데······.” 세이스비츠 공작은 아직도 보고가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그제야 눈치챘다. 떨어질 공작의 엄명이 두려웠는지, 백작 시로크가 어깨를 움츠린 채 말을 이었다. “방금······ 수거를 나갔던 감독관으로부터 연락이 끊겼습니다.” * 세이스비츠 공단 인근의 지평선. 죽은 감독관의 시체를 발로 툭툭 건드려 보던 장하영이 말했다. “공작이 꽤 대대적인 준비를 하고 있었던 모양이군. 이 정도 규모의 수거를 지시하다니······.” 무려 천여 명의 [수거 노예]가 동원된 초대형 수거. 상황은 잘 풀렸지만, 조금만 판단이 늦었어도 위험할 뻔한 상황이었다. 아직 내 화신체가 온전하지 않은 상황에서 [공장]과 전면전을 펼칠 수는 없었다. 만약 이들의 수거품이 고스란히 공장으로 들어갔다면, 상황은 최악으로 흘러갔을 것이다. “잘 된 것 같군요.” 나는 곁에 있는 한명오 쪽을 흘끗 보며 말했다. 공작이 이런 식으로 움직일 거라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스파이인 한명오가 없었더라면 이 계획을 실행에 옮길 정확한 타이밍을 가늠하지 못했을 것이다. 내 칭찬에 의기양양해진 한명오가 샐쭉 웃었다. “험, 내가 누군가? 이래 봬도 ‘미노 소프트의 브레인’ 아닌가?” “혹시라도 나중에 성좌가 되시면 그걸 수식언으로 쓰시죠.” 나는 한명오를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처음에는 이 인간과 같은 편을 먹는다는 게 썩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상황이 이렇게 되고 보니 그리 나쁜 선택이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노예들은 이쪽으로 데리고 오세요! 정신이 멀쩡한 사람부터 수선을 시작할 거니까.” 이제부턴 제대로 된 전쟁이라 마음먹었는지, 아일렌과 공민들의 표정에서도 이전과는 다른 비장함이 느껴졌다. 그들을 보며 나 역시 마음을 다잡았다. 내 어깨에 보송한 솜사탕처럼 앉아 있던 아기 도깨비 비유가 소리를 냈다. “바앗!” 아직 기억은 회복되지 않은 듯했지만, 모든 도깨비에게는 이야기꾼의 본능이 있다. 이야기가 있어야 할 곳에 시나리오를 채워 넣는 것. [새로운 서브 시나리오가 도착했습니다!] [서브 시나리오 ― ‘노예 해방’이 시작됩니다.] “고맙다.” 내가 가볍게 머리를 쓰다듬자, 비유가 자그마한 양손을 번쩍 들며 외쳤다. “다앗!” 당장 ‘메인 시나리오’로 진입은 불가능하다고 해도, 비유의 도움만 있다면 계기가 생길 때마다 ‘서브 시나리오’를 받을 수 있다. 임시방편이기는 해도 이런 식으로 차분히 서브 시나리오를 쌓아 간다면, 공작과 부딪치기 전까지 충분한 수준으로 화신체를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김독자는 생각했다. 급할 건 없다. 어차피 시간은 이쪽 편이니까. 마계 시나리오를 무사히 넘기기 위해서는 지금부터 철저히 준비해 나가야 한다.」 실제로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예상치 못한 메시지가 들려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새로운 성좌가 #BI-90594 채널에 입장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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