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2화
212화
시공간의 흐름이 이상해지고 있었다.
장하영의 입술이 아주 천천히 움직였고, 목소리는 심하게 분절되어 정상적인 형태로 들려오지 않았다.
마치 세상 전체가 슬로우 모션으로 움직이는 듯한 광경.
「김독자는 깨달았다. 이것이 ‘도깨비’의 시간이구나.」
수많은 채널을 동시에 관리하고 판단하기 위해, 도깨비의 인지 속도는 다른 생명체들에 비해 월등히 빠르다.
나는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보송보송한 털이 자라난 아기 도깨비 위로, 희끄무레한 빛의 구체가 떠있었다. 일전에 본 적이 있는 구체. 그것은 신유승의 영혼이었다.
‘오랜만이다, 유승아.’
구체 속에서 반투명한 빛이 일렁이더니, 언뜻 사람의 실루엣 같은 것이 비쳤다.
세계를 구하겠다는 마음과, 유중혁에 대한 신의로 먼 차원을 건너온 존재.
41회차의 신유승이 내 눈앞에 있었다.
[믿을 수 없는 업적을 달성했습니다!]
[당신은 도깨비의 알을 품은 최초의 인간이 되었습니다.]
[새로운 설화를 획득하였습니다!]
[설화, ‘도깨비의 아버지’를 획득하였습니다.]
내 표정을 읽었는지, 신유승이 말했다.
―사과하지 마. 내가 선택한 거잖아.
‘그래도 미안해.’
―아저씨 대단하더라. 41회차의 대장도 아저씨 정도는 아니었어.
‘아직 약과야. 해야 할 일도 많이 남았고.’
―내 도움이 필요한 거지?
고개를 끄덕이자, 신유승이 옅게 웃었다.
―내가 잘 할 수 있을까?
‘잘 할 수 있을 거야. 내가 도와줄게.’
시나리오의 가장 밑바닥에 도달해 본 자만이 시나리오의 무게를 안다.
내가 41회차의 신유승을 믿는 것은 그 때문이었다.
물론, 그것이 신유승이 나를 믿어야 하는 이유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41회차의 대장은 실패했어.
신유승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앞으로 더 끔찍한 일들을 겪게 될 거야.
‘그렇겠지.’
―지금까지의 아저씨가 상상하지도 못한 것들이 기다릴 거라고.
‘네가 같이 갈 거야.’
신유승은 잠시 침묵했다.
내 말의 의미를 헤아리는 것 같기도 했고, 지난 세월의 깊이를 어림하는 것 같기도 했다. 어느 쪽이든 그녀에겐 고통스러운 일일 것이다. 이윽고, 신유승이 입을 열었다.
―나, 완전히 태어나고 나면 곧바로 아저씨를 떠올리진 못할 거야.
‘알아.’
―멍청하게 굴어도 너무 놀리지 마.
‘노력할게.’
피식 웃는 음색이 곱다.
잔잔한 음악 같은 침묵 속에, 신유승이 계속해서 이야기했다.
―시나리오에 대해 좋은 기억은 거의 없어.
무심했지만, 무심했기에 진심이 담긴 말.
그 말을 들으며 나는 ‘멸살법’의 이야기들을 떠올렸다.
내가 아는 ‘신유승’의 이야기들.
백 개의, 천 개의 문장이 더 있더라도 온전히 설명될 수 없던······.
―그래도, 내가 아직 뭔가를 더 이야기해야 한다면······.
그 말을 하기 위해 고민해야 했을 시간을 나는 모른다.
아무리 ‘멸살법’을 많이 읽었어도, 설령 [전지적 독자 시점]으로 속내를 읽을 수 있다고 해도, 나는 41회차의 신유승이 겪어온 시간과 그 시간으로 인해 감당해야 할 고통을 알지 못한다.
―이번에는 아저씨를 위해 이야기할게.
그렇기에, 그녀의 대답에 내가 줄 수 있는 것은 보잘 것 없는 경외 뿐이다.
‘고맙다.’
나는 울컥하는 마음을 감추기 위해 입술을 꾹 깨물었다.
환하게 빛나며 떠오르는 문자열들과 함께, 인지 시간의 흐름이 점차 원래대로 되돌아갔다.
[73번째 마계 최초의 채널이 열렸습니다.]
[채널명 : #BI-90594]
분절된 소리들이 다시 들러붙으며, 장하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애 이름은 뭐라고 지을 거야?”
······뭔 말을 하나 했는데, 그거였나.
안 그래도 이름 때문에 많이 고민했다.
아기 도깨비가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그 눈을 들여다보며, 조용히 말했다.
[채널 관리자 : 비유(譬喩)]
자신의 이름을 듣기라도 한 것일까.
아기 도깨비가 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솜털이 돋은 작은 손에 내 손가락을 쥐어주자, 그것을 잠시 옴지락대던 아기 도깨비가 이내 나를 향해 배시시 웃어보였다.
*
신유승은 울고 있었다.
서울 돔에서 탈출한 후, 종종 있는 일이었다.
고단한 하루가 끝나고 잠에 빠져들 때나, 멍하니 ‘특성창’을 열어놓고 자신의 ‘배후성’ 칸을 바라볼 때도.
신유승은, 알게 모르게 자꾸만 눈물이 나왔다.
그런 신유승에게 핀잔을 퍼붓는 것은 언제나 이길영이었다.
“야. 또 왜 울어. 독자 형은 어른스러운 거 좋아한다고.”
그 말에 신유승이 붉어진 눈을 작게 부라렸다.
“저리 꺼져!”
“형 금방 돌아올 거야. 너도 봤지? 나한테 인사 남긴 거. ‘다시 만나자, 이길영.’”
“아저씨는 그런 말 한 적 없거든?”
“나한테 말했어! 분명 들었다니까?”
뒤쪽에서 이야기를 듣던 이지혜가 피식거리자, 이길영이 눈을 가늘게 떴다.
“뭘 웃어요?”
“귀여운 것.”
신유승과 이길영, 그리고 이지혜는 열두 번째 시나리오의 재앙으로 출현한 괴수들을 해치우고 약속 장소로 향하는 길이었다.
일행들과 다시 조우하기로 약속한 장소는 성남시.
이 부근에서 재회하기로 했으니, 곧 다른 일행들도 곧 모여들 것이다.
이지혜와 이길영이 티격대는 사이, 신유승은 자신의 특성창을 열어보았다.
[배후성과의 연결이 끊겼습니다.]
서울 돔에서 벗어난 직후, 신유승의 특성창에는 늘 그런 메시지가 떠올라 있었다.
신유승의 침울한 얼굴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이길영이 또 한 마디를 했다.
“야, 이 동전 잘 봐.”
“······뭔데?”
“이 동전 던져서 앞면이 나오면 독자 형 살아 있는 거.”
이길영이 꺼내든 100원짜리 동전을 보며 신유승이 입술을 내밀었다.
“그거 전에도 했잖아.”
“그래도 또 해보자는 거지.”
“······하면 뭐해. 앞면 나온다고 아저씨가 돌아오는 것도 아닌데.”
동전 던지기.
그것은 신유승과 이길영이 불안해질 때마다 하는 놀이였다.
“지금까지 독자 형이 몇 번 죽었지?”
“······41번.”
“살았던 건?”
“59번.”
동전의 앞면이 나오면 김독자는 살아 돌아올 것이고, 동전의 뒷면이 나오면 김독자는 죽을 것이다.
이야기를 듣던 이지혜가 어이없다는 투로 물었다.
“너네 진짜 아저씨가 살아 있길 바라는 거 맞아?”
이길영이 허공으로 동전을 튕겼다.
거의 동시에, 세 사람의 시선이 동전을 따라 움직였다. 핀잔을 주던 이지혜도 어느새 집중해서 동전을 바라보고 있었다.
땡그랑, 하고 바닥에 떨어진 동전이 바닥에서 팽그르르 돌았다.
세 사람은 숨을 죽인 채 동전을 노려보았다.
앞면, 뒷면, 앞면, 뒷면. 그리고······.
“앞면이다! 것봐, 내가 뭐랬어?”
자신만만한 이길영의 목소리와 함께, 동전은 이순신 장군의 초상이 그려진 앞면에 멈췄다.
별 생각이 없던 이지혜조차 그 결과에는 미미하게 기분이 좋아졌다.
하지만 이지혜는 저 결과가 ‘확률’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츠츠츠츳.
[성좌, ‘해상전신’이 개연성을 소모합니다.]
이지혜가 쓴웃음을 지었다.
어쩐지 최근에 배후성이 힘이 많이 빠졌다 싶더니, 이런데 개연성을 낭비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그걸 뭐라고 할 수도 없었다.
[성좌, ‘해상전신’이 안타까운 눈으로 아이들을 바라봅니다.]
희망을 가지고 싶은 것은, 어쩌면 성좌들도 마찬가지일 테니까.
그렇게 되고 보니 이지혜는 문득 이 장난에 어울려주고 싶어졌다.
이지혜는 떨어진 동전을 주우며 입을 열었다.
“아저씨 살아있는 건 알겠으니까, 이제 다른 거 걸고 해보자.”
“응? 뭐요.”
그녀가 끼어든 게 못마땅한 모양인지 이길영이 데면데면한 목소리를 냈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지혜는 계속해서 말했다.
“독자 아저씨는 널 더 좋아할까. 아니면 유승이를 더 좋아할까?”
“당연히 나지!”
“뭐래. 가터벨트 사건 잊었어? 내 호감도가 더 높았다고.”
“야! 그건······.”
뒤쪽에서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15살 여중생이야!”
그 목소리의 주인은 신유승도, 이지혜도, 당연하지만 이길영도 아니었다.
멀리서 다가오는 두 여자가 보였다.
과천의 괴수종들을 퇴치하고 돌아오는 한수영과 유상아.
이지혜는 목소리의 주인을 알아보았다.
“15세 여중생이라고. 그 자식이 내 흑염룡한테 그딴 소리를 하고 스킬을 뜯어 갔단 말이야!”
이지혜와 아이들이 그쪽으로 다가가려는 순간, 수원 방향에서도 한 여인이 나타났다. 긴 장도를 허리에 멘 호리호리한 여자.
“그게 무슨 얘기에요?”
수원 쪽 정리를 맡았던 멸악의 심판자 정희원이었다.
“희원 언니!”
이지혜가 반색하며 정희원을 향해 달려갔다. 그런데 정희원의 상세는 좋지 않았다. 입고 있던 방어구는 상당 부분 파손되어 있었고, 허벅지와 팔뚝에도 자상이 가득했다. 정희원의 전투력을 생각하면 있을 수 없는 상처였다. 이번 괴수종은 그렇게 강한 편이 아니었으니까.
“엇, 괜찮아요? 우리 쪽이랑은 다른 괴수가 나왔었나?”
“그건 아니고, 성흔에 문제가 좀 생기는 바람에.”
“성흔요?”
뭔가를 설명하려던 정희원은 가볍게 도리질을 했다.
대신 그녀는 다시 한수영 쪽을 바라보며 채근하듯 물었다.
“그보다 한수영 씨, 방금 얘기 좀 계속 해보세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정희원의 관심이 달가웠는지, 한수영은 곧장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가만히 이야기를 듣던 이지혜가 상황을 정리했다.
“무슨 얘긴지 잘 모르겠는데······ 누가 15세 여중생인데요?”
사람들의 시선이 한수영에게 쏠렸다. 이걸 어떻게 이야기해야 할지 잠깐 횡설수설하던 한수영은, 이내 약간은 흥분한 듯한 목소리로 선언했다.
“김독자, 살아 있어.”
“뭔 결론이 그래요? 그러니까 왜······.”
누가 들어도 한수영의 이번 추론은 비상식적인 데가 있었다.
그때, 정희원이 말 꼬리를 빼앗았다.
“15세 여중생이랑 김독자 씨가 무슨 연관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주 가능성이 없는 것 같지는 않군요.”
이지혜가 황당하다는 듯 물었다.
“언니 지금 저 사람 말 이해한 거예요? 새로운 스킬이라도 배웠어요?”
“그건 아닌데, 내 생각에도 독자 씨가 살아 있는 것 같아서 그래.”
정희원의 말에 일행이 동시에 숨을 삼켰다.
김독자가, 정말로 살아 있다고?
정희원은 상처가 고통스러운지 호흡을 가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저, 갑자기 성흔을 쓸 수 없게 됐어요.”
“네?”
이건 또 무슨 소린가 싶었다.
정희원이 성흔을 쓸 수 없는 것과, 김독자의 생사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정희원은 곧바로 그 의문에 대답했다.
“내 배후성이 갑자기 사라졌거든요.”
“배후성이요?”
고개를 끄덕인 정희원은 자신의 특성창을 바라보았다.
[배후성과의 연결이 끊겼습니다.]
생전 처음으로 보는 메시지. 덕분에 그녀는 당분간 배후성의 힘을 빌릴 수 없는 처지가 되어버렸다. 그런데 메시지는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찾았다, 김독자.
*
그리고 그 시각, ‘73번째 마계’에 한 남자가 도착했다.
[16번째 개인 시나리오 지역에 도착했습니다!]
[해당 시나리오에는 시간 제한이 걸려 있습니다!]
[정해진 시간 안에 반드시 메인 시나리오 지역으로 복귀하세요!]
포탈을 넘어 발을 내딛는 순간, 펼쳐진 것은 황량한 이야기의 지평선과 설화 파편의 쓰레기산이었다. 잠시 눈살을 찌푸린 채 그 광경을 보던 유중혁이 물었다.
“······진짜 여기가 맞는 건가?”
그러자 그의 어깨에 앉아 있던 조그만 천사 인형이 머리를 꼼지락거렸다.
“꼭 이딴 장난감으로 대답해야 하나?”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아직 여기는 채널이 없어서 어쩔 수 없다고 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