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화
134화
“으, 으헉?”
제일 앞에 있던 사내들의 목이 그대로 떨어지자, 주변의 인원들이 기겁하며 물러났다.
“죽였어! 저놈이 죽였다고!”
“불살의 왕이라며? 말이랑 다르잖아!!”
당황한 놈들이 다급하게 일제히 냉병기를 꺼내 들었다.
이런 잔챙이들 잡는 데야 특별한 기술도 필요 없다. 나는 그대로 ‘신념의 칼날’을 전개해 달려드는 녀석들을 베었다.
“으아아악!”
포위한 녀석들을 깔끔하게 죽여 없앨 생각이었다.
그런데 마지막 한 녀석이 반쯤 베이다 말았는지 비명을 질러대기 시작했다.
나는 고통스럽게 몸부림치는 녀석에게 칼을 꽂았다. 망설임 없이.
“이, 이 정도 실력이라는 말은 못 들었는데······?”
“도망쳐!”
그동안은 누가 공격해오든, 살의를 품든 가능하면 죽이지 않으려고 했다.
물론 ‘불살의 왕’을 잃지 않기 위해서였지만, 그런 행동을 반복하다 보니 나 스스로 살인을 자제해온 경향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부터는 다르다.
보다 적극적으로 행동하지 않으면, 약점을 만들게 된다.
그리고 그 약점은, 앞으로 무수히 나타날 잔꾀 많은 하이에나 녀석들에게 약점이 되겠지.
일단 결심하자 손씀에 망설임은 없었다.
나머지 하이에나들이 순식간에 핏물 속에 쓰러졌다.
하나만 남겨두고.
“느리군.”
들려오는 소리에 보니, 어느새 유중혁은 칼을 거두고 있었다.
나보다 훨씬 많은 숫자를 죽인 녀석의 표정에는 별다른 감상이 느껴지지 않았다.
“으, 으으, 분명 패왕과는 협력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하나 남은 사내가 손발을 떨며 뒷걸음질쳤다.
“누가 이런 짓을 시켰지?”
“그, 그건······.”
[등장인물 ‘설인구’가 깊은 고뇌에 빠집니다.]
다음 순간 사내의 표정이 홱 변하더니, 갑자기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으아아아!”
······이럴 리가 없는데?
이상한 일이었다.
승산이 아예 없는 상황에서 죽을 길로 달려든다고?
선뜩한 감각이 뇌리를 스쳤다.
그때 사내가 고함쳤다.
“인류 해방을 위해!”
무슨 순교자라도 되는 듯한 어설픈 눈빛.
······인류해방?
서걱!
유중혁의 검이 움직이는 순간 사내의 목이 떨어졌다.
“뭘 멍청하게 보고 있는 거냐?”
퉁명스러운 유중혁의 목소리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뭔가 이상하단 생각 안 드냐?”
“드물게 충성심이 강한 놈이군.”
“너도 알겠지만, 인간이란 게 그렇게 쉽게 충성하는 동물이 아냐. 더군다나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네가 시간을 끄는 사이 숨어 있던 한 놈이 도망쳤다.”
정말이지 대화가 안 통하는 자식이다.
일단 우리는 도망갔다는 놈의 흔적을 쫓기로 했다.
“······근데 넌 계속 나랑 같이 다닐 거냐?”
“······.”
“혹시 나 때리려고 기회 보는 거 아니지?”
유중혁은 특유의 무시무시한 눈길로 나를 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그런 말을 했었군. 알려줘서 고맙다.”
“······그냥 계속 잊어버린 상태로 있어주면 내가 더 고맙겠는데.”
한숨을 돌리고 주변 일대를 확인하니 이곳은 5호선의 까치산 인근이었다.
유중혁이 먼저 의아하다는 듯 말했다.
“······이상하군. 서울 돔에선 사냥 시나리오가 진행중이었어야 하는데.”
“모르지. 그 사냥이 그 ‘사냥’이 아닐지도.”
까치산을 비롯해 우장산, 신정, 목동으로 향하는 모든 길목은 화신들이 흘린 피로 짙게 물들어 있었다. 가는 거리마다 사람들의 시체가 보였다. 이전에도 시체야 즐비했지만, 이번에는 살해 형태가 문제였다.
그 상흔들을 바라보던 유중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의 짓이다.”
괴수 사냥 시나리오가 진행되었다면, 시신의 몸에 난 상흔들은 전부 괴수의 이빨 자국이나 발톱 자국이었어야 했다. 그런데 시신들은 명백히 날카로운 병기나 마력탄에 맞아 죽었다.
즉, 이곳에서 시나리오와는 무관하게 싸움이 벌어졌다는 이야기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달아난 남자를 발견했다.
“저기 있군.”
하지만 우리가 채 접근하기도 전에, 남자는 어디선가 날아온 화살에 의해 목이 꿰뚫려 죽었다.
휘이익, 퍼억!
또 새로운 적이 나타났나 싶어 칼을 뽑아드는데, 뜻밖에도 나타난 패거리의 모습이 익숙했다. 화랑의 갑옷. 그들은 죽은 사내를 둘러싸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틀림없습니다. 구원교도의 잔당입니다.”
“처리하세요.”
적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한 내가 그들을 향해 달려갔다.
“잠깐만요!”
그러자 여자가 나를 돌아보았다. 고된 전투로 인해 지친 얼굴.
“김독자 씨······?”
그녀는 미희왕 민지원이었다.
*
그녀에게, 우리는 예상치도 못한 소식들을 연달아 들었다.
“······왕 파벌이 해체됐다고요?”
“제일 먼저 미륵왕이 당했고, 그 다음에는 방랑자들의 세력이 당했어요.”
나는 깜짝 놀랐다.
잠깐이지만, 귀 뒤가 강하게 당겨오며 현기증이 이는 느낌이었다.
“설마 방랑자들의 왕이 죽었습니까?”
“생사는 몰라요. 지금은 행방불명 상태거든요. 중립의 왕 전일도 같은 경우는 아예 그놈들 편에 붙어버렸어요.”
그 ‘중립의 왕’이라면 확실히 가능한 이야기다.
때로 ‘중립’이란 가장 비겁한 자들을 일컫는 말이니까.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어머니가 당했다면, 정희원이나 유상아라고 무사하리란 보장이 없다. 대체 어떤 놈들이지?
“혹시 전에 봤던 그 여의도 세력인가요?”
“아뇨, 신진 세력이에요. 스스로를 ‘구원교’라 일컫는 놈들······ 여의도고 뭐고 지금 죄다 그놈들 손에 넘어갔어요.”
······구원교?
물론 나는 그 이름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구원교’는 원작에서 중요한 위상을 차지하는 단체니까.
하지만 뭔가 이상했다.
본래 ‘구원교’가 등장하는 것은 최소 열 번째 시나리오, 즉 서울 해방 시나리오가 종료된 이후였기 때문이다.
“‘구원교’는 여러분이 떠난 날 갑자기 나타났어요. ‘인류를 시나리오에서 해방시키겠다’면서······ 자기들 뜻을 거스르는 세력들은 망설임 없이 제거하고 있어요.”
유중혁이 물었다.
“그런 세력이 어디에 숨어 있었지? 서울 안의 거대 세력은 여섯 번째 시나리오가 시작될 때 모두 집결했을 텐데.”
“······서울 안에 있었던 자들이 아니에요.”
그 말이 무슨 뜻인지는 바로 알 수 있었다.
우리가 향한 터미널 쪽에서 빛들이 쏟아졌다.
슈우우우우―
허공에서 떨어지는 빛줄기는 한 두 개가 아니었다. 마치 하늘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뿌리듯이, 빛줄기와 함께 소환되는 인간들. 반 정도는 아직도 제정신을 못 차리는 듯했지만, 나머지 절반은 굉장히 또렷한 눈빛들이었다.
그리고 메시지가 들려왔다.
[신규 시나리오 지대에 입장하였습니다!]
[현재 서울 돔에서는 일곱 번째 메인 시나리오가 진행 중입니다.]
광장에 소환된 인파는 무려 백여 명을 넘어섰다.
다들 전투용 아이템이 아니라 캐주얼한 생활복을 걸치고 있었다.
유중혁이 중얼거렸다.
“벌써 신규 인원이 투입될 시간이었군.”
현재 세계적으로 ‘메인 시나리오’가 진행중인 곳은 오직 세계 각국의 수도 뿐이었다. 그러나 시나리오를 진행하다 보면 지나치게 많은 화신들이 소진되기 마련이다. 그럴 때마다 관리국은 내부 규정에 따라 일정한 양의 인간을 추가로 소환한다. 대부분 해당 국가의 전역에서 무작위적으로 소환된 사람들이었다.
바로 지금처럼.
“으, 으으······ 으어어······.”
대부분은 공포에 질려 있었지만, 상당수의 화신들은 벌써부터 눈에 불을 켜고 주변을 탐색하기 시작했다. 꼴을 보아하니, 아마 저들은 막 ‘첫 번째 시나리오’를 겪고 들어온 듯했다.
유중혁의 눈이 가늘어졌다.
“‘구원교’도 저들처럼 소환된 녀석들이었나?”
“그래요.”
“말이 안 되는군. 소환된 지 얼마 안 되는 녀석들이 기존의 화신들을 이길 수 있을리 없다.”
유중혁의 말은 맞았다.
물론 근래 소환자들은 밸런스 조절을 위해 내가 받았던 보상들보다 더 좋은 것들을 받으며 출발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죽었다 깨어나도 기존의 화신들을 이길 수 없다.
민지원이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구원교주’는 처음부터 강했어요.”
부르르 떨리는 그녀의 어깨는, 진짜 공포를 맛 본 사람의 그것이었다.
“패왕, 당신이 강하다는 건 알아요. 하지만 그 자와는 절대 싸우지 마세요. 강함도, 지략도, 이미 그 자는 인간을 초월했어요. 인간이 아니라, 마치 다른 생물을 보는 듯한······.”
웅성거리는 사람들의 사이에 도깨비가 나타난 것은 그때였다.
[자, 여러분들. 당황하지 마시고, 진정하고 여길 보세요.]
신규 화신들이 말 잘듣는 아이들처럼 도깨비에게 주목했다.
[당장 소환된 여러분들은 어미를 잃은 병아리 같은 상태에요. 물론 벌써 좋은 배후를 선택한 분들도 계시겠지만, 그것만으로 이 세계에서 살아남는 게 쉽지 않다는 건 이미 알고들 계시겠죠? 그러니 여러분들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그룹’을 찾아야만 해요. 당당한 한 명의 화신이 될 때까지, 여러분을 지켜줄 어미를.]
그때, 화신들 중 몇몇이 소리를 질렀다.
“난 또 뭔가 했네. 그런 정보도 모르고 들어온 줄 알아?”
“다 말했으면 이제 꺼져!”
도깨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화신들은 움직이기 시작했다.
<선지자들>에 관련된 사건도 있었고, [인터넷] 능력을 가진 화신들에 의해서 내부의 정보도 제법 풀렸을 터.
아마 저들 중 다수는 이미 예습을 하고 투입된 상태겠지.
“패왕! 패왕 옆에 붙어야 해!”
“맞아! 화신들 중 최강은 패왕이라 그랬다고!”
스스로 죽을 길을 찾아가다니, 불쌍한 놈들이다.
부디 명복을 빈다.
“미희왕이 인자하다고 했어.”
“인자하면 뭐해. 약하잖아.”
“엄청 예쁘대.”
“······일단 한번 가볼까?”
······그래, 그쪽은 좀 나을지도 모르겠네.
반면 좀 신중한 녀석들도 있었다.
“멍청한 놈들. 진짜 실세는 패왕도 미희왕도 아냐.”
어둠침침한 눈빛을 번뜩이며 모인 몇몇 녀석들이 수군대는 소리가 들렸다.
“말살의 왕인가 불사의 왕인가 하는 녀석이 최고랬어.”
“불사의 왕?”
“죽여도 죽지 않는 왕이라던데.”
“헐. 대박이네.”
“사실 패왕도 미희왕도 전부 그놈 따까리란 소문이 있다고. 쫓아다니는 여자도 엄청 많다던데?”
어······.
그거 혹시?
“진짜? 그놈 누군데? 왕 이름이 뭐야?”
“이름은 잘 모르겠고······.”
“젠장, 그럼 어떻게 찾아?”
“제일 못 생긴 왕을 찾으면 된다고 들었어.”
문득 시선이 느껴져서 흘낏 옆을 보니 유중혁이 가만히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뭘 봐 인마.
“아냐, 최근 대세는······.”
그 사이에도 화신들의 대화는 이어졌다.
어떤 왕이 좋냐느니, 누구 밑으로 들어가야 하냐느니······.
기껏 [절대 왕좌]를 없애놨더니 하는 얘기가 저런 것들이라니 허탈한 기분이다.
그때, 멀리서 뿔나팔 소리 같은 것이 들렸다.
민지원이 흠칫 몸을 떨며 뒷걸음질을 쳤다.
“도망가야 해요.”
민지원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바람을 타고 목소리가 들려왔다.
“불쌍한 중생들이 높은 존재들의 시나리오에 놀아나고 있구나.”
마치 공간 전체가 울리는 듯 광대한 울림.
거대한 코끼리를 닮은 괴수종을 타고 나타난 자들이었다.
수행이라도 하는 중인 듯, 구원교도들이 코끼리 위에서 가부좌를 튼 채 뭔가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행진만으로도 기이한 그 정경에 모든 화신들이 압도당한 채 고개를 들었다.
“우리가 너희들을 구원하기 위해 왔노라!”
구원교의 등장이었다.
헌데, 무리의 중심을 보던 유중혁의 표정이 이상했다.
“설마 이번 생까지 쫓아올 줄은 몰랐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