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화
126화
쏟아지는 포화를 보며 나는 조금 놀랐다.
[무장지대]가 아니라 [무장요새].
그새 공필두의 성흔 레벨이 10을 돌파하여, 상위 단계로 진입한 것이다.
[당신은 ‘사유지’를 침범하였습니다!]
이것 참.
이 메시지가 이렇게 반가운 순간이 있을 줄이야.
“으아악! 아파! 이거 뭐야!”
족히 백여 문은 될 듯한 포탑들이 동시에 탄환을 발사하자, 일본인들이 고통스러운 비명을 질러댔다.
한 발 한 발은 큰 타격이 아니더라도, 백여 문의 포탑이 수천 발의 탄환을 쏟아내기 시작하니 아무리 재앙이라도 타격이 없을 수가 없었다.
심지어 움직임이 묶여 있는 상황이었기에 피해는 더욱 컸다.
두두두두두!
탄환에 맞은 일본인들의 몸 곳곳에서 작은 핏줄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눈! 내 눈!”
“뭐야! 뭐냐고!”
사각도 없이 날아오는 포탄이 화망을 형성했고, 급소를 맞은 일본인들이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았다.
“전군 진격하라!”
숲 지대의 입구에 숨어 있었던 모양인지, 소인들의 군대도 함께 가세했다. 본래였다면 별 도움 안 되는 전력이었겠지만, 일본인들의 몸 곳곳에 생채기가 난 상황이었기에 상황은 조금 달라졌다. 탄환이 만든 생채기 사이로 작은 칼날들이 파고들자 일본인들이 연달아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들려오는 중후한 중년의 목소리.
“사유지 침범하지 말고 꺼져. 여긴 내 땅이야.”
과연 무장성주.
이계에 와서도 사유지를 깔다니, 십악이 괜히 십악이 아니지.
당황한 일본인이 부상자를 부축하며 외쳤다.
“무, 물러서! 일단 후퇴한다!”
대단한 일이었다.
포탑들의 크기로 보아 공필두 역시 소인화가 진행된 듯한데, 그 상태로 재앙 셋을 물러서게 만들 정도로 강해졌을 줄이야.
쿠구구구구.
등을 돌리자, 땅에서 솟아오른 작은 성채가 보였다.
아직 제대로 된 무장요새라고 말하기에는 어설프지만, 그래도 저 정도면 이제 무장성주라는 이름이 아깝지가 않다.
“와아아아아!”
“이겼다! 우리가 재앙을 물리쳤다!”
기뻐하는 소인들이 성채의 주변으로 몰려와 승리의 함성을 내질렀다.
성채의 꼭대기에는 두 인영이 서 있었다.
하나는 공필두. 그리고 다른 하나는······.
“여기가 왜 당신 땅이야? 사유재산이 인정되는 곳도 아닌데.”
“어린 계집애가 반말이나 찍찍하고······.”
“흐음, 이 여신님께 좀 더 예의를 갖추는 게 좋을 텐데?”
······저 목소리는?
소인들이 다시 한번 함성을 질렀다.
“여신님, 만세! 만세!”
······여신님?
성채의 꼭대기에서 나를 발견한 여자가 아래로 뛰어내렸다.
짧은 드레스가 나풀나풀 바람에 흩날리며, 바닥에 가벼운 착지음이 들렸다.
특유의 오만한 눈빛에 오연한 표정.
정말이지 변한 게 없군.
모세라도 되는 양, 그녀의 걸음마다 소인들의 길이 열리며 파도를 탔다.
나는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거, 아주 출세하셨는데 그래?”
코앞까지 다가온 한수영이, 손가락으로 내 턱을 척 들어 올리며 말했다.
“오랜만이야, 김독자. 못생긴 건 여전하네.”
다시 만난 한수영은 [피스 랜드]의 여신이 되어있었다.
*
왕성으로 가는 내내, 나는 한수영에게 그간 있었던 일에 관해 전해 들었다.
“차도를 걷다가 갑자기 끼어든 생존자 버스에 치였어.”
“그리고?”
“눈을 떠보니 여기였지.”
“그게 말이 되냐? 그럼 공필두는?”
“한강에 빠졌는데 눈을 떠 보니 여기였다더라.”
“······무슨 판타지 소설이냐?”
“지금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잊은 모양이네?”
대강 그런 식의 대화였다.
어이없다는 듯 대꾸하긴 했지만, 사실 ‘멸살법’의 세계에선 있을 법한 일들이었다. 실제로 이곳의 귀환자들 중에는 한강에 투신하거나 버스에 치여서 다른 세계로 간 녀석들이 꽤 있었으니까.
하지만 시나리오 도중에 그런 일을 겪다니······.
도깨비 새끼들은 대체 일 처리를 어떻게 하는 건지.
“······근데 여신은 또 뭐야? 네가 그렇게 부르라고 시켰냐?”
한수영이 치맛자락을 털며 투덜거렸다.
“거참, 기껏 구해줬더니 말 많네.”
“뭔데? 말을 해.”
“너 그새 내가 누군지 잊어버린 거야?”
“어?”
“머리가 작아졌다고 뇌 용적량까지 줄어든 거냐고.”
생각해 보니, 멍청한 질문이었다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 한수영은 서울 돔에 남은 유일한 ‘선지자’였다.
게다가 지구의 하루는 [피스 랜드]에서의 3일.
우리가 헤어진 지 이제 일주일 남짓 지났으니 한수영이 [피스 랜드]에서 보낸 시간은 약 3주인 셈이다.
미래를 알고 있는 상황에서 3주의 시간이 주어진다면, 그 한수영이 갑자기 낯선 세계의 여신이 되어있다고 해도······ 아니, 그래도 뭔가 조금 이상한데.
여왕이라면 모를까, 여신은 또 뭐야?
“연놈들이 쿵짝이 아주 잘 맞는군.”
목소리에 곁을 돌아보니 공필두가 못마땅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안 하려고 했는데, 그래도 할 말은 해야겠지.
“공필두.”
“왜.”
“미안해.”
“뭔 개소리냐?”
“잘 못 챙겨줘서 미안하다고.”
“······누가 들으면 내가 챙겨 달라고 한 줄 알겠군.”
“진짜로 미안합니다. 그리고 구해줘서 고마워요.”
정말로 미안했기 때문에, 이번에는 존댓말을 했다.
솔직히 다섯 번째 시나리오가 진행되는 내내 너무 바빠서 공필두에 대해 거의 신경 쓰지 못했다.
심지어 이번에는 구명을 받기까지 했으니, 디펜스 마스터에게 후원자가 되어주겠답시고 호언을 했던 게 부끄러워질 지경이었다.
[성좌, ‘디펜스 마스터’가 당신의 사과에 콧방귀를 뀝니다.]
“······쳇.”
쿵짝이 잘 맞는 게 어느 쪽인지 모르겠군.
[당신은 ‘디펜스 마스터’에게 5000코인을 후원하였습니다.]
[성좌, ‘디펜스 마스터’가 마지못해 고개를 까딱입니다.]
잠시 나를 노려보던 공필두가 고개를 홱 돌리며 짓씹듯 말했다.
“그럼 다음부턴 잘하든가.”
자존심만큼 배가 솟은 저 아저씨가 저런 모습을 보이니, 그것 또한 진풍경이긴 하다.
아무튼, 소인이 되긴 했어도 둘 다 살아있어서 다행이다.
어? 잠깐만. 소인이 되긴 했어도······?
나는 잠시 멍해져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이 녀석들, 대체 왜 재앙을 그만두고 소인을 선택한 거지?
둘 다 그럴 위인들이 아니신데?
“저, 고맙다는 인사를 드리러 왔습니다.”
돌아보니, 이현성을 비롯한 일행들이 다가와 있었다.
곤충을 타고 왕성 베로니카로 달아나던 일행들은 마침 지나가던 공필두 무리와 우연히 조우했던 것이다.
“아니에요. 할 일을 했을 뿐이죠.”
가볍게 웃으며 손사래를 치는 한수영을 보니 악마가 가면을 쓰면 어떤 모습인지 잘 알겠다.
그런 한수영을 유심히 보던 이지혜가 물었다.
“그런데······ 처음 보는 분인데, 누구세요?”
그러고 보니, 지금 일행들은 아바타가 아닌 한수영의 본 모습을 처음 보는 상황이었다. 즉, 일행들은 이 녀석이 ‘첫 번째 사도’라는 걸 전혀 모르고 있다는 뜻이다.
나를 힐끔 보는 한수영을 대신해, 내가 입을 열었다.
“어, 그게······.”
만약 이 녀석이 ‘첫 번째 사도’라는 것을 알게 된다면, 이지혜는 분명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충무로의 대 사도전에서 가장 큰 부상을 입었던 것이 바로 이지혜였으니까.
정체가 밝혀진다면 파티가 뒤집어지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이 자리에서 혈투가 벌어질지도 모른다.
결국 나는 눈을 질끈 감고 양심을 배반하기로 했다.
“그냥 원래 알던 친구야.”
친구, 라는 말을 이럴 때 써도 되는 건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뭐 상관없겠다 싶었다.
어차피 난 친구도 없으니까.
고개 숙인 한수영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저, 말씀하시는데 죄송하지만······ 뭐 하나만 여쭤봐도 될까요?”
어색해지던 분위기를 깨트린 것은 내가 새장에서 구해준 일본인, 아스카 렌이었다.
한수영이 저 일본인은 누구냐는 듯 나를 바라보았다.
이지혜도 거들었다.
“······그러고 보니 저 일본인은 또 누구야? 이 사람도 친구?”
어쩐지 살짝 비꼬는 듯한 음색이었다.
망할 녀석이.
“‘아스카 렌’이라고······ 일본의 화신이야. 친구는 아니고, 포로로 갇혀 있길래 구했어.”
“······뭐하러 구했어? 일본인인데.”
“이 싸움은 일본 대 한국이 아니야. 소인 대 재앙이지.”
이지혜가 못마땅하다는 듯 입술을 비죽였지만, 그래도 납득한 눈치였다.
한수영이 귓속말을 해왔다.
“쟤 뭔데? 원작에 저런 애도 있었나?”
“······몰라?”
이 녀석, 아마 4회차까지는 읽었을 텐데 그래도 모르는 건가?
아, 그때까진 아스카 렌이 활약을 안 했던가?
초조한 눈길로 나와 한수영을 번갈아 보던 아스카 렌이 재차 입을 열었다.
“저기, 질문이······.”
“아, 말씀하세요.”
“어떻게 벌써 [피스 랜드]의 북구를 손에 넣으신 거죠?”
그렇군.
확실히 내가 아는 ‘아스카 렌’이라면 그게 궁금할 법도 하지.
“김독자, 저 사람 뭐라고 하는 거야?”
“네가 어떻게 여신이 된 거냐고 묻는데.”
“아아, 그거?”
다른 이들도 뒤늦게 질문을 깨닫고 한수영에게 궁금한 눈빛을 보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한 건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빨리 성장했다고 해도, 3주 동안 단순히 강해지는 것과 한 왕국의 여신이 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였으니까.
“아까 말했잖아. 우리가 처음 떨어진 곳이 북쪽이었다고. 나랑 저 아저씨는 베로니카 왕성이 습격당하는 한 가운데에 떨어졌어.”
“습격당하던 중이었다고?”
“일본 쪽 1차 투입자들 몇 명이 베로니카를 공격하고 있었거든.”
“그래서?”
“아, 일본 애들이 우릴 보고 뭐라고 하더라고. 그래서 짜증나서 죽여버렸지 뭐.”
나는 잠시 할 말을 잊었다.
그제야 이야기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알 것 같았다.
재앙으로 인해 멸망해가는 베로니카 왕국.
그 와중 왕궁의 중심에 떨어진 두 사람이, 갑자기 재앙들을 쳐 죽여버렸다. 아마 소인들 입장에서는 한수영과 공필두가 신처럼 보였을 것이다.
“뭐······ 소인으로 작아질 줄 알았으면 안 죽였겠지만.”
“시나리오도 안 읽어 봤냐?”
“길 걷다가 갑자기 차원문으로 이송됐다고. 그 와중에 여기가 여섯 번째 시나리오 지역인지 뭔지 알 게 뭐야?”
······그래서 일본인들이 우릴 보고 죽자고 달려든 거였군.
혐한 정서의 원인은 바로 이 두 사람이었다.
“너 때문에 우리가 얼마나······.”
“아, 저기 보이네.”
평원 너머 멀리 버려진 세계의 왕성이 보이기 시작했다.
우리는 모두 그 왕성을 바라보았다.
부서진 왕궁. 폐허가 된 흉벽 곳곳에 재앙이 지나간 흔적들이 남아있었다. 짓밟힌 왕도 위에서 백성들이 울부짖고 있었다.
“여신님!”
“여신님이 돌아오셨다······!”
압도적인 재해 앞에 수척해진 백성들.
꾀죄죄한 군중들이 우리를 마중 나오고 있었다.
씁쓸한 미소를 지은 한수영이 입을 열었다.
“······벌써 다 왔네. 빌어먹을 [피스 랜드]에.”
그 말을 들으며, 나는 새삼 깨달았다.
지금까지는 운이 좋았지만, 앞으로의 싸움은 지난할 것이다.
재앙과의 싸움은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고, 우리는 승산이 없는 싸움을 이어나가야 할 테니까.
나는 다가오는 백성들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이 세계의 백성들은 옛 지구인들과 닮았다.
소드마스터도, 9서클 대마법사도 없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심지어는 ‘시스템’ 사용조차 제한된 세계.
아무리 노력해도 이계인들에게 침탈당할 수밖에 없는, 소위 ‘정통 판타지’의 백성들······.
그리고 나는 이 세계가, 누구의 ‘작품’인지 알고 있었다.
“아스카 렌.”
내 말에 적발의 미인이 움찔하며 나를 돌아보았다.
이번 시나리오의 열쇠는 바로 이 여자였다.
적어도 [피스 랜드]에 관한 한, 아스카 렌은 ‘멸살법’을 읽은 나보다도 더 이 세계를 잘 알고 있다.
“한국 그룹에 합류하세요. 우리는 당신의 도움이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