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54화 자칭 1168번이 실드에 의해 갈라지는 불꽃의 길을 바라보며 말했다. “정체라뇨? 갑자기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잊었나? 나한테 [현자의 눈]이 있다는 걸.”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 이 녀석의 정보는 내게 보이지 않았다. [전용 스킬, ‘등장인물 일람’을 발동합니다!] [해당 인물의 정보는 ‘등장인물 일람’으로 열람할 수 없습니다.] [‘등장인물 일람’에 등록되어 있지 않은 인물입니다.] 업데이트가 된 인물과, 업데이트가 되지 않은 인물의 차이는 뭘까? 아직 정확한 이유를 모른다. 하지만 이유야 뭐든, 놈을 속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어쨌든 놈은 나를 ‘유중혁’이라 믿고 있으니까. “······유중혁 님 눈치는 못 당하겠군요.” “너는 <사도>다. 그렇지?” “그렇습니다. 벌써 거기까지 알고 계셨군요.” 정체를 쉽게 밝혔다는 것은, 아직 남은 꿍꿍이가 있다는 것. “역시 이건 함정이었군. 나비 효과 때문이냐?” “하하, 맞습니다.” 내 말이 재미있다고 생각했는지, 1168번이 웃으며 다른 하차자들을 바라보았다. “날아다니는 나비가 많으면, 불필요한 폭풍이 발생하는 법이니까요.” 발판을 찾지 못한 하차자들이 ‘파멸의 불꽃’ 속에서 부나방처럼 녹아내리고 있었다. 끔찍한 비명과 함께 그들이 알고 있던 정보도 먼지로 사라졌다. 제대로 된 정보도 없이 성유물을 탐한 대가였다. “나비가 아직 애벌레일 때 죽이겠다는 거군.” “번데기가 되기 직전의 애벌레들이 제일 죽이기 쉽거든요.” 화르르르륵! 후끈한 열기가 조금씩 잦아들더니, 주변의 염화가 차츰 가라앉는 것이 보였다. 이윽고 앱솔루트 실드가 꺼졌다. [1분 뒤, 발판의 위치가 재생성됩니다.] 이 히든 시나리오는 총 10번의 ‘발판’을 찾아내고 전체 공격기를 버텨야 비로소 끝이 난다. 이제 겨우 한 번이 지나갔으니, 앞으로 무려 9번이 남은 셈이다. 나는 시험 삼아 실드가 펼쳐지지 않은 자리를 발로 눌러 보았다. 고열이 올라오긴 했지만, 이 정도면 버틸만한 수준의 열기였다. ―대표님! 나는 멀리서 달려오려는 일행들을 손짓으로 막았다. 지금은 저들을 챙길 시간이 없었다. ―대강 패턴은 익혔을 테니, 각자 알아서 피하세요. 지금부터는 일일이 챙겨 드리지 못합니다.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챈 일행들이 걸음을 멈췄다. <사도> 녀석들의 힘이 명확하지 않은 상황에서, 함부로 일행들을 끌어들이는 것은 위험했다. 1168번이 나를 보며 말했다. “계시에 나오는 모습이랑은 다르시군요. 정말 3회차가 맞습니까?” “시끄럽고, 네놈은 ‘몇 번째’냐?” “흐음? 직접 확인하셨다면 아실 텐데요.” “나는 겉과 속이 똑같은 놈을 좋아하거든. 양면이 다른 놈이랑은 거래를 틀 수 없으니까.” 사도의 눈에 이채가 깃들었다. “재미있군요.” “네놈이 쉽게 정체를 밝힌 이유가 있을 테지.” 휘이이익! 허공을 가르며 날아든 레서 드래곤의 꼬리가 우리가 있던 자리를 강타했다. 민첩이 30을 넘는 내게야 피하기 쉬운 공격이었지만, 1168번의 기민한 움직임이 놀라웠다. 나는 극장 던전에서 얻었던 [냉철한 관찰력]을 발동했다. 애초에 [등장인물 일람]이 안 먹히는 놈들을 위해 아껴둔 스킬. 각력과 속력, 그리고 호흡의 간격······. 체근민 합은, 대략 49에서 50 정도인가. 지금껏 살펴본 선지자들 중에서는 상당한 수준이었다. 내가 놈의 뒤로 따라붙자, 녀석이 입을 열었다. “정식으로 인사드리죠. 저는 1195번. <사도> 중에서는 ‘다섯 번째 사도’로 통하고 있습니다.” 멸살법의 1화 조회수는 1200. 1195번이면, 하차자들 중에서는 정보력에서 다섯 손가락에 꼽히는 녀석일 터다. 그러니 ‘붉은 운석’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군. “목적이 뭐지? 네놈도 내 도움을 필요로 하는 거냐?” “후후, ‘유중혁 님’을 구하기 위해서······라면 어떻습니까?” “송충이가 나비가 된다는 거짓말이 더 그럴듯하겠군, 그래.” “하긴, [거짓 간파]를 가지고 계셨죠, 참.” 놈이 열기에 마른 입술을 핥았다. 그냥 지금 해치울까? ······아니다. 조금 더. 조금 더 들어야 한다. “하지만 유중혁 님을 구하기 위해서란 말은 거짓이 아닙니다. 여기서 당신이 죽으면 곤란하니까요. 그러면 계시가 크게 망가집니다.” “내가 올 것을 알았군.” “몇 시간 전에 알았습니다. 그래서 계획을 황급히 수정한 거죠.” 타다닷, 불똥이 튀며 근처에 있던 선지자 몇이 더 죽어 나갔다. 여전히 죽지 않고 버티는 녀석들도 있었다. 마치 레서 드래곤의 패턴을 알고 있는 듯한 녀석들. 나는 녀석들을 눈여겨 보였다. “본래 저희는 참전할 계획이 없었습니다. 유중혁 님이 안 계셨다면 말이지요.” “그래서?” “답은 이미 예상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발판의 위치가 재생성되었습니다!] [5급 화룡종, 레서 드래곤 이그니르가 ‘파멸의 불꽃’을 준비합니다.] 일행들은 이번에도 무사히 발판 위에 올라섰다. 나와 사도도 2가 붙은 발판을 찾았다. 정확히는, 이미 누군가가 차지하고 있던 발판을 사도가 힘으로 빼앗은 것이었다. 잔인하게 튀어 오른 핏방울이 사도의 볼에 묻었다. 볼을 문질러 닦으며 사도가 말을 이었다. “저희는, 레서 드래곤을 사냥할 겁니다.” 쿠구구구구! [5급 화룡종, 레서 드래곤 이그니르가 ‘파멸의 불꽃’을 사용합니다.] 발동한 앱솔루트 실드가 다시 한번 불꽃을 막아냈다. 갸오오오오오―! 고작 두 번의 발판이 지나갔을 뿐인데, 남은 <선지자들>의 숫자는 사분의 일도 채 되지 않았다. 일행들은 꾸역꾸역 버티고 있지만, 그것도 얼마나 지속될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히든 피스에 패널티가 발생합니다.] [다음 턴부터 생성되는 발판의 개수가 줄어듭니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고작 너희 힘으로?” “가능합니다. 준비는 충분히 해 왔으니까요.” 자신감 넘치는 놈의 목소리에, 꺼림칙한 느낌이 스쳤다. 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놈은 이 열기 속에서 땀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있었다. 놈의 피부 위를 감도는 푸르스름한 냉기. 저건······ 그렇군. 준비성이 탁월한 놈들이다. “청빙환(靑氷丸)인가.” “맞습니다.” 강서지역에 나타나는 7급 원소종을 사냥하면 일정 확률로 얻을 수 있는 비약. 놈들은 벌써, 그 비약을 손에 넣은 것이다. 저걸 먹으면 적어도 30분간은 강력한 냉기 속성을 방출할 수 있다. 즉, ‘레서 드래곤’에게 타격을 줄 만한 기반은 갖출 수 있다는 얘기다. 문제는 공격력. “하지만 너 혼자론 무릴 텐데.” “혼자라고 한 적은 없습니다만?” 나는 살아남은 하차자들을 살폈다. 아까 유독 눈여겨 봐두었던 몇 명의 하차자들. 자세히 보니, 녀석들의 몸에도 푸르스름한 냉기가 감돌고 있었다. “후후, 혼자 올 리가 없지 않습니까?” 눈대중으로 세어봐도 5명이나 되는 숫자. 설마 이 작전을 위해 전력의 절반을 투입했을 줄이야. 다섯 <사도>들이 모두 청빙환을 먹었다면 자신감을 가질 만도 하다. 하지만. “몇 명 더 있다고 해서 크게 달라지는 건 없다.” “그래서 도움을 구하는 겁니다. 저희를 도와주신다면, 유중혁 님께도 청빙환을 드리겠습니다.” “거절한다면?” “적어도 유중혁 님의 일행은 여기서 모두 죽겠죠.” “너희는 무사할 것 같으냐?” “레서 드래곤은 못 죽여도, 각자 자기 몸 하나 정도는 챙길 수 있습니다.” 아주 넘치는 자신감이시군. 내가 ‘진짜 유중혁’이었다면 벌써 목이 달아났을 놈들이. “내가 일행 따윌 걱정할 것 같나? 사람은 어차피 다 죽는다. 괜찮은 놈들은 다시 모으면 돼.” 나는 [부러지지 않는 신념]을 뽑아 놈의 목에 들이댔다. 그러자 놈이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후후, 과연 계시 그대로군요. 하지만 신중하게 생각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무슨 뜻이냐?” “지금쯤 유중혁님의 ‘본진’은 저희 손에 넘어왔을 테니까요.” “······뭐?” “해상제독 이지혜에, 이상한 능력을 쓰는 꼬마. 그리고 십악 중 하나. 본래의 ‘계시’와는 다르지만, 꽤 괜찮은 파티를 구성하셨더군요. 과연 그들이 다 죽어도, 유중혁 님이 다시 시작하시는 데 문제가 없을까요?” 벌써 거기까지 조사를 마쳤던 건가. 이 자식들이······. “거기에 설상가상으로 ‘충무로 역’까지 빼앗겨 버린다면? 지금은 그저 제안에서 그치고 있지만, 이게 언제까지나 ‘제안’으로 끝날 거라 생각하진 마십시오. 저희 그룹은 이미 열 개의 역을 장악해 ‘왕의 길’의 시나리오를 완료했습니다. ‘왕’을 가진 그룹과 아닌 그룹의 격차는, 구태여 말하지 않아도 알고 계시겠지요.” “······.” “아마 지금쯤 상황 정리는 끝났을 겁니다. 왕께서는 충무로의 깃발 꽂이 앞에서 유중혁 님의 선택을 기다리고 계실 겁니다.” ······그랬군. 놈들의 작전을 알겠다. 이 녀석들은, 내가 <선지자들의 밤>에 온다는 정보를 입수한 순간, 충무로를 칠 계획을 세웠던 것이다. “만약 ‘유중혁 님’이 저희와 함께하는 것을 ‘서약’해 주신다면, 일행의 안전은 물론이고 앞으로의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드립니다. ‘왕의 명예’를 걸고, 약속드리지요.” 이렇게 치밀한 협박은 오랜만이라, 심장이 두근거릴 지경이었다. 게다가 그 유중혁을 상대로 이런 담대함이라니. ‘멸살법’에서도 이만한 지략가는 드문 편인데. “네놈들의 ‘왕’은 누구냐? 그놈은 ‘몇 번째 하차자’지?” “흠······ 왕께서는 자신을 ‘하차자’라 부르는 것을 싫어하십니다.” “그럼 뭐라고 불러?” “아무리 유중혁 님이라 해도, 그분에 대해 함부로 말하는 것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그분은 모든 <선지자들> 가운데 유일하게 ‘모든 계시’를 읽은 분. 유중혁 님의 과거와 미래를 모두 알고 계신 분입니다.” ······뭐? 잠깐 놀라긴 했지만, 크게 당황하지는 않았다. 이거 흥미가 샘솟는다. 나 말고 소설을 다 읽은 독자가 또 있다고? 웃음이 나온다. 헛웃음이 아니라, 비웃음이. 왜냐하면 그런 일은 ‘절대로’ 있을 수 없으니까. 쿠오오오오! 마침내 화룡종의 세 번째 전체 공격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나는 사도 녀석을 일별한 후, 발판에서 조용히 내려왔다. 태연히 앞으로 걸어가는 나를 보며 당황한 사도가 물었다. “유중혁님? 무슨 짓입니까?” 놀란 것은 멀리 떨어진 다른 일행들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짧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무슨 일이 있어도 거기서 움직여서는 안 됩니다. 알겠죠? 나는 ‘레서 드래곤’이 있는 방향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천천히, 확실한 발걸음으로. ‘파멸의 불꽃’을 충전하던 화룡종이 나를 보며 흉포한 살기를 드러냈다. “무슨 짓입니까! 돌아오십시오!” 뒤쪽의 사도가 다급하게 외쳤다. 나는 놈을 돌아보며 웃어주었다. “너희 ‘왕’이 이런 미래에 대해선 안 알려준 모양이지?” 놈의 설명을 들으며 나는 계속 생각했다. 이놈들은 절대로 살려둬서는 안 된다. 하지만 놈들은 ‘공략법’을 알고 있고, 나 혼자 힘으로 놈들을 몰살시킬 수는 없다. 그렇다면······ 나는 씩 웃으며 말을 이었다. “너희들, 잊었나 봐? 내 ‘성흔’이 무엇인지.” 만약 내가 놈들이라면. 지금 가장 ‘두려운 것’은 무엇일까. “난 죽음이 두렵지 않아. 몇 번이고 다시 시작하면 되니까.” 답은 간단하다. 놈들은 내가 유중혁이라 믿고 있다. 그렇다면. “그런데 궁금하네. 너희들은 어떨까? 이번 ‘회차’의 이례적인 존재들인, 너희들은.” 놈들이 가장 ‘두려운 것’은 곧,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일이다. “내가 여기서 죽어도, 과연 다음 회차에 존재할 수 있을까? 아니면, 이 세계와 함께 이대로 소멸할까?” 유중혁이, 절대로 하지 않기를 바라는 일. “정말 ‘계시’를 읽었다면, 네놈들도 답을 알고 있겠지?” 사도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머리를 쓰는 놈들은 오히려 다루기 쉬울 때가 있다. “유중혁을 잡아!” 발판 위를 지키던 다섯 사도들이 일제히 나를 향해 달려오기 시작했다. 그럴 줄 알았다. 아무리 태연한 척하고 있어도, 너희는 그저 이 ‘시나리오’에 말려든 일개 ‘하차자’일 뿐이다. 주인공이 죽은 세계에서 너희가 어떻게 될지. 너희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빨리 잡으라고!” 마치 나처럼. [5급 화룡종, 레서 드래곤 이그니르가 ‘파멸의 불꽃’을 사용합니다.] 플랫폼의 중앙에서 불꽃이 터지는 순간, 나는 모든 근력을 폭발시켜 드래곤의 다리 쪽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그곳에 위치한, 안국역의 [깃발 꽂이]를 향해 힘차게 깃발을 꽂아 넣었다. [‘안국역’을 점거하였습니다.] [현재 점거지 : 충무로(본진), 명동, 동대문 역사문화 공원, 동대문, 동묘앞, 신당, 청구, 약수, 신설동, 안국] [‘갈색 깃발’의 공적치가 상승합니다.] [총 10개의 역을 점거하였습니다!] [히든 시나리오― ‘왕의 길’을 달성하였습니다.] [당신이 걸어온 길에 따라 새로운 ‘왕’의 선택지가 주어집니다.] 1. 오만한 위선의 왕 2. 고독한 취향의 왕 3. 불살의 왕 ······. 나는 떠오르는 선택지를 읽어 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불살의 왕.” [새로운 특성, ‘불살(不殺)의 왕’을 획득합니다!] 이 정도면 됐다. 정말 하고 싶지 않은 방법이었지만, 여기서 놈들을 쓸어버리려면 이 수밖엔 없었다. 터지는 불꽃을 발견하고 허겁지겁 발판 쪽으로 되돌아가는 사도들이 보였다. 하지만, 이미 피하기엔 늦었다. “그러게 조심했어야지. 인생은 한 번뿐인데.” 검붉은 홍염의 파도가 놈들을 덮쳤다. 청빙환을 먹었다 해도 결코 버틸 수 없는 공격이었다. [외장 강화 수트의 내구가 급격하게 감소합니다.] [외장 강화 수트의 내구가 다했습니다.] 곧 내 시야도 어둑해졌다. 불길이 살점을 태우는 느낌과 함께, 나는 의식을 잃었다. [당신은 사망했습니다.] . . 그리고 잠시 후, 시스템 메시지가 들려왔다. [‘불살의 왕’의 특전이 발동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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