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6화
526화
Epilogue 2. 어디에도 없는
「병실, AM. 9:12.」
―내일 오후 7시까지 모두 공단 동쪽 입구에 모여. [최후의 벽] 너머로 김독자를 구하러 간다.
정희원이 그 문자를 받은 것은 어젯밤의 일이었다. 발신인은 한수영. 언제나 그렇듯 건방진 문자였다.
문자를 받고서 정희원은 한참이나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정희원은 다시 시나리오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어떤 화신보다도 열심히 싸웠던 그녀였다. 누구보다 김독자를 구하길 원했고, 시나리오를 끝내길 원했다. 그리고 마침내 이곳까지 왔다.
「시나리오의 종장에서 보았던 최후의 벽.」
지금도 눈을 감으면 그때의 기억이 선연했다.
‘이야기의 적’이 된 김독자와 함께 싸우던 기억.
끔찍한 설화의 범람 속에서 무언가를 베고, 베고 또 베며 그녀는 살아남았다. 벽을 부수고, 자신의 종착역에 도착했다.
「그런데, 한수영은 다시 한번 그 열차를 타라 말하고 있었다.」
[최후의 벽]이 있었던 그곳으로 다시 한 번 가자고 말하고 있었다.
우리가 내렸던 그 열차에 두고 온 것이 있다고.
“희원 씨.”
커튼을 쥔 자신의 손이 떨리고 있다는 사실을, 정희원은 그때야 깨달았다.
“현성 씨도 받았어요?”
“예.”
“어떻게 생각해요?”
“······우리가 기억하는 독자 씨는 이곳에 있습니다.”
그들이 기억하는 김독자가 곤히 잠들어 있었다. 세상 모든 비극을 잊은 눈꺼풀. 정희원은 그런 김독자의 눈에 가만히 손을 덮어주었다.
어떤 불행은 보지 않는 것만으로도 사라진다.
「이 김독자는 그들이 기억하는 김독자였다.」
함께 금호역을, 충무로를, 광화문을, 마계를, 올림포스와 서유기를, 최후의 벽을 이겨낸 김독자가 눈앞에 있었다. 그는 정희원의 검명을 기억했고, 이현성의 트라우마를 기억했다. 일행들과의 약속을 기억했다.
정확히 이만큼이, 그들이 사랑하는 김독자였고.
그녀가 지키고 싶어하는 김독자였다.
사람이라는 것이 그렇게 간단히 나누어져도 좋은 것인가 싶었지만, 이것은 비단 ‘아바타’의 문제가 아니었다.
애초에 누군가를 좋아할 때, 그것은 그 사람의 일부를 좋아하는 것이니까.
김독자의 상처에 묻은 혈흔이 파스스, 소리를 내며 연기로 화했다.
부서지는 설화들이 허공을 떠다니다 이내 창밖 하늘로 흩어졌다. 저 설화들이 어디로 향하는 것인지 정희원은 알 수 없었다. 영영 소멸하는 것일 수도 있고, 어쩌면 또 다른 김독자에게 돌아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멸살법’을 기억하고, 하나의 이야기를 줄곧 사랑해온 김독자.」
정희원은 그런 김독자에 관해 알지 못한다.
누구도 잘 모르는 것을 사랑할 수는 없다.
“현성 씨.”
“예.”
“만약 독자 씨가 우리였다면, 어떻게 했을까요.”
이현성은 오랫동안 대답이 없었다.
*
「병실, PM. 1:31.」
이미 많은 사람들이 다녀간 듯, 병실의 테이블 위에는 꽃과 선물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언젠가 김독자가 깨어났을 때를 대비한 선물들.
장하영은 꽃잎을 잠시 만지작거리다가, 김독자를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넌 내가 기억하는 김독자야. 그렇지? 마계에서 날 구해줬던 김독자.”
머리맡에 놓인 시계가 움직이고 있었다.
멈춰있던 73번째 마계의 시간을 흐르게 만든 사람.
재능의 벽에 좌절했던 그녀를 움직이게 만든 사람.
구원의 마왕.
“사실 그때 지구로 돌아오고 싶지 않았어.”
장하영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여기엔 좋은 기억 하나도 없거든.”
그녀는 차원이동자였다.
대부분의 차원이동자들이 그렇듯, 경위는 불가해했다. 평소처럼 회사에서 야근하던 어느 날, 그녀는 심장에 불현듯 통증을 느끼며 쓰러졌다. 숨이 멎는 순간 ‘너무 열심히 살았다’고 생각했고, 다음 생이 있다면 ‘절대 열심히 살지 않을 거야’라고 다짐했다. 그리고 눈을 떠 보니 마계였다.
점심을 먹으러 분주히 움직이는 공단 주민들을 보며, 장하영이 중얼거렸다.
“너 때문에 또 열심히 살아버렸잖아.”
*
「병실, PM. 6:24.」
“던져. 네 차례야.”
이길영의 말과 함께, 신유승이 백 원짜리 동전을 던졌다. 팽그르르 허공에서 회전하던 동전이 신유승의 손등 위에 탁 떨어졌다. 나온 것은 앞면.
“몇 번 던졌지?”
“99번.”
“그럼 49대 50이네.”
이길영이 손을 탁탁 털며 자리에서 일어나자, 보호자 침대에 앉아있던 이지혜가 물었다.
“너네 또 그 내기 하고 있어? 앞면 나오면 독자 아저씨가 살아 있니 어쩌니 하는?”
“무슨 소리에요? 아저씬 여기 살아 있잖아요.”
“그럼 무슨 내긴데?”
아이들은 말이 없었다. 이지혜가 눈살을 찌푸렸다.
“너네 정말 그 말 믿는 거야?”
“무슨 말이요?”
“우리가 모르는 독자 아저씨가 존재한다는 얘기. 아직도 그 열차에서 내리지 않고 있다는 그런······.”
두 아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멍하니 김독자를 내려다보던 이지혜가 벌떡 일어나 김독자를 가리켰다.
“이 아저씨가 내가 아는 독자 아저씨야.”
“······.”
“너흴 구해준 것도, 나를 구해준 것도 이 아저씨라고.”
“알아요.”
“그것뿐인 줄 알아?”
이지혜는 계속해서 말했다. 이 독자가 진짜 김독자인 이유.
그런데 이상하게도, 말을 이어갈 때마다 이지혜는 김독자가 자신에게서 멀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이지혜가 창백한 김독자의 손을 꽉 잡았다.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는 이 손의 주인과 함께 간신히 자랐다. 소중한 사람의 상실을 배웠다. 지켜야만 할 가치를 알게 되었다. 엉망진창인 세계 위로, 간신히 숨통을 틔웠다.
김독자도, 누군가에게 그것을 배웠을 것이다.
신유승이 중얼거렸다.
“······아저씨도 어린 시절이 있었겠죠.”
<스타 스트림>에서 ‘구원의 마왕’의 탄생 설화는 ‘왕이 없는 세계의 왕’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구원의 마왕’의 탄생 설화지, 김독자의 탄생 설화는 아니었다.
「아마도, 인간 김독자의 탄생은 그리 거창하지 않았을 것이다.」
김독자라는 이름으로 존재하기 위해, 김독자는 어떤 이야기를 살아와야 했을까.
“언니.”
“왜.”
“내일 갈 거예요?”
“안 가기로 했잖아.”
“하지만 갈 거죠?”
“안 가. 난 또 시나리오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은 없어.”
이지혜는 어느덧 부쩍 커진 아이들의 머리통을 내려다보았다.
여전히, 그녀가 지켜야 할 아이들이었다.
신유승과 이길영은 그런 그녀를 가만히 올려다보더니, 손을 내밀었다.
“누나도 던져볼래?”
이지혜는 자신의 손에 쥐어진 동전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동전을 허공으로 띄웠다. 빙그르르 돌던 동전이 이지혜의 손안에 감겨들었다. 하지만 이지혜는 손바닥을 펴지 못했다.
“언니?”
손안에 들어온 동전의 감각. 앞면인지 뒷면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곳에는 분명히 동전이 있었다.
“괜찮아요?”
이지혜는 손안에 있는 동전의 감각을 오래도록 느꼈다.
*
「병실, PM. 10:48.」
제일 먼저 입을 연 것은 유상아였다.
“설화 수치가 점점 떨어지고 있어요.”
마치 수십 년에 걸쳐 일어날 생물 분해가 일시지간에 벌어지는 것처럼, 김독자의 피는 계속해서 증발했다. 이수경이 물었다.
“설화 씨, 방법은······?”
“지금으로서는······.”
“우릴 살릴 때 사용했던 방법은 쓸 수 없나요? 설화 수선이라든가.”
가볍게 한숨을 내쉰 이설화가 유상아 쪽을 돌아보며 말했다.
“수경 씨나 상아 씨에게 설화 수선을 사용할 수 있었던 건 <스타 스트림>의 시스템이 건재했기 때문이에요.”
스킬과 성흔이 존재하는 세계. 세계의 모든 것이 이야기의 구성품이었던 세계. 그곳에서 치료란 곧 설화를 수선하는 것이었다.
“최근 스킬이나 설화가 예전처럼 작동하질 않아요. 저도, 아일렌 씨도 점점 힘을 잃어가고 있어요.”
“······<스타 스트림>의 영향력이 사라지고 있기 때문인가요?”
“지금으로서는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어요.”
“독자 씨의 상처가 낫지 않는 것도 비슷한 이유겠군요.”
눈앞의 김독자는 [아바타] 스킬을 통해 만들어진 존재였다.
그리고 [아바타]는, <스타 스트림>의 시스템 스킬이었다.
이설화가 최종 진단을 내렸다.
“이곳에 있으면 독자 씨는 결국 소멸할 거예요.”
이수경은 말없이 김독자를 바라보았다.
김독자가 평생에 걸쳐 이룬 세계가, 이제 그를 죽이고 있었다.
마치, 이야기가 끝난 세계에 김독자는 필요하지 않다는 것처럼.
이수경은 잠든 김독자의 뺨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그때 너를 막을 걸 그랬구나.”
뺨이 손끝에 닿는 순간, 두 사람 사이에서 설화가 피어났다. [암흑성]에서 싸웠던 두 사람. 이수경은 지금도 그때를 기억했다.
[제4의 벽]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던 얼굴. 두 사람 사이에는 항상 벽이 있었다. 하지만 김독자가 그 벽을 먼저 두드렸던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다시 돌아가도, 그녀는 자신의 아들을 막지 못할 것이다.
한참이나 김독자를 바라보던 이수경이 아들의 손을 잡았다. 항상 책을 좋아했던 손. 또 다른 김독자는 지금도 이 손으로, 지하철에 탄 채로, 어디선가 스크롤을 내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네게 독자라는 이름을 주지 말 걸 그랬구나.”
*
「공단 동쪽 출입구, PM. 8:00.」
한수영과 유중혁은 키가 맞지 않는 나무처럼 서서 일행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추운 겨울바람이 뺨을 적셨고, 입가에서는 따뜻한 입김이 흘러나왔다.
파카 속에 손을 집어넣은 한수영이 투덜거렸다.
“······아무도 안 오네.”
어쩌면 이렇게 될지 모른다고 예상은 했다. 한수영이 팔꿈치로 유중혁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야, 그냥 우리끼리 해도 되지 않냐? 내 천재적인 머리와 네 무식한 전투력이 힘을 합친다면―”
“둘로는 무리다.”
“아 왜. 지금까지 혼자서도 잘 해왔잖아. 이번엔 무려 둘이라고.”
유중혁은 대답 대신, 자신의 손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 손위에, 투명한 고리가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성흔, ‘회귀’가 진화 중입니다.]
그가 살아온 무수한 회차들이 그 고리 위에서 요동치고 있었다.
“너는 내 ‘회귀’가 어떤 의미인지 모른다.”
유중혁이 손안의 고리를 천천히 일그러뜨리며 말했다.
“내가 회귀를 반복할 때마다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너는 모른다.”
움켜쥔 주먹 안에서 설화들이 고통스럽게 울부짖었다.
벌레 알처럼 터져 나가는 문장들. 그의 삶 속에서 몇 번이고 되풀이해 죽어간 이들의 비명이었다.
“완벽한 회차 같은 것은 없다. 무엇도 희생하지 않는 설화가 없는 것처럼. 만약 이번에 또 회귀하게 된다면······.”
어쩌면, 또 누군가를 잃게 될 것이다.
세계는 다시 비극으로 침잠할 것이다.
김독자를 구하기 위해 만들어진 세계는, 누구도 구하지 못한 채 파멸할 수도 있다. 한수영이 말했다.
“나도 알아. 그리고······.”
그녀는 공단의 입구를 바라보며 말했다.
언제부터였을까. 차가운 겨울의 볕 속에 긴 그림자들이 드리워져 있었다.
“저 사람들도, 모두 알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