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9화
519화
[현재 해당 회차에는 ‘덮어쓰기 제약’이 걸려 있습니다.]
[현재 해당 세계선의 저작권자가 부재중입니다.]
[당신은 ‘최후의 벽’의 주인으로서 저작권자를 대리할 수 있습니다.]
[‘덮어쓰기’를 실행하여 세계관에 간섭하시겠습니까?]
허공에 일제히 떠오른 경고 메시지.
그와 거의 동시에 들려오는 [제4의 벽]의 목소리.
「김 독 자」
‘······알고 있으니까 자꾸 무섭게 부르지 마.’
[제4의 벽]이 무슨 말을 할지는 이미 잘 알고 있었다.
또 정해진 과거를 바꾸는 건 의미가 없다느니 하는 소릴 늘어놓겠지.
「······.」
허공에서 나를 노려보는 시선이 느껴졌지만, 나는 애써 그것을 무시했다.
본래의 0회차가 정확히 어떤 전개였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제4의 벽]의 도서관에서 얼핏 읽은 0회차의 문단이 사실이라면······ 0회차의 유중혁은 후반까지 배후성을 갖지 않는다.
그는 이 회차에서 이설화를 잃고, 이지혜를 잃는다.
간신히 만난 소중한 이들을 잃고.
다가오는 죽음 앞에서, 간절히 생각하게 된다.
「‘만약, 내게도 ‘배후성’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나는 흔들리는 눈으로 시스템 메시지를 읽는 유중혁을 바라보았다.
이 회차를 통해서, 유중혁의 회귀는 시작될 것이다.
무수한 회귀를 반복하여 ‘영원불멸의 지옥도’를 걸어갈 것이다.
「이 회 차를 바꾼 다 고 해서······.」
‘은밀한 모략가가 살았던 과거가 사라지지는 않겠지. 알고 있어.’
내가 이 세계선을 바꾸어도 앞으로 예정된 비극들은 사라지지 않는다.
내가 알고 있는 유중혁은 1회차를, 2회차를, 3회차를, 다시 1863회차를 살아갈 것이다.
‘은밀한 모략가’가 될 것이고. 나를 증오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될지라도.
‘이 회차에서는, 내가 아닌 가장 오래된 꿈의 흔적이 느껴지지 않아.’
아마도 그것은 어린 시절의 내가 유중혁의 0회차를 알지 못하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았다.
어쨌거나 확실한 것은, 적어도 이 세계선에 한하여 나는 그 녀석의 역할을 대신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이 세계선에서 유중혁의 배후성이 될 수 있다.
「그 녀석을 회 귀 시 킬 거 야?」
[제4의 벽]이 흥미롭다는 듯 물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나는 이 녀석이 회귀하지 않도록 만들거야.’
「그 녀 석을 바 꿔 도 미 래는―」
‘그래. 그래서 더 안심이야.’
내가 바꾼 과거는 내가 알고 있는 유중혁을 부정하지 않는다.
「적어도 한 번쯤은, 유중혁에게도 불행하지 않은 회차가 있다면.」
나는 허공을 향해 천천히 손을 뻗었다.
[‘덮어쓰기’를 실행합니다!]
[해당 세계관에 대한 간섭을 시작합니다!]
[당신의 꿈 장악력이 부족하여 적극적 간섭이 불가능한 상태입니다.]
츠츠츠츠츳, 하고 튀어 오르는 스파크와 함께, 연이어 메시지가 떠올랐다.
[‘구원의 마왕’이 당신의 임시 성좌명으로 등록됩니다.]
[당신은 현재 ‘배후 선택’의 성좌로 참가 중입니다.]
[<스타 스트림> 시스템이 당신의 자격 여부를 의심스러워합니다.]
[하급 도깨비 ‘비형’이 당신의 수식언을 낯설어합니다.]
[소수의 성좌들이 당신의 출현에 당황합니다!]
창백한 유중혁의 표정을 보며, 나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잘못된 선택일 수도 있다.
내가 이 세계선을 바꾸는 바람에, 유중혁은 더 불행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의 나라면.
[호오라, 구원의 마왕? 이거, 새로운 성좌님이 나타나셨군요!]
한 세계의 끝을 보고, 시나리오의 종장을 아는 ‘가장 오래된 꿈’이 된 김독자라면, 정해진 운명을 바꾸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후보가 늘어났으니 시간을 조금 연장해야겠군요.]
비형이 허공의 메시지를 갱신했다.
[배후 선택 대기 시간이 5분 연장됩니다.]
가까스로 살아남은 주변의 생존자들이 하나둘 입을 열었다.
“······이게 대체 뭐죠?”
“배후 선택이라니······.”
나야 ‘멸살법’을 읽었기에 낯설지 않았지만, 생전 처음 이런 상황에 부딪친 이들이 얼마나 당혹스러울지는 짐작이 갔다.
[화신 ‘유중혁’의 특성이 발동합니다!]
그 와중에도, 유중혁은 홀로 제정신을 차리고 있었다. 차분하게 가라앉은 녀석의 눈동자가 그것을 증명했다.
······어디, 무슨 생각을 하는지 궁금한데.
[전용 스킬, ‘전지적 독자 시점 Lv.???’이 활성화됩니다!]
심약한 0회차의 속을 들여다보는 게 좀 미안하긴 했지만, 그래도 이번에는 봐야만 했다. 만에 하나 녀석이 다른 배후성을 고르기라도 한다면―
[당신은 ‘가장 오래된 꿈’입니다.]
[대상에 대한 이해도와 무관하게 당신은 해당 스킬의 능력을 백 퍼센트 사용할 수 있습니다!]
유중혁의 머릿속이 인체 해부도처럼 낱낱이 펼쳐졌다.
「미아는? 미아는 어떻게 됐을까.」
「미아를 구해야 한다.」
「그러려면 먼저 눈앞의 선택지를 해결해야 한다.」
「배후 선택. 아마 후원자를 고르라는 것 같은데.」
나는 조금 긴장했다.
본래의 0회차에서 녀석은 초반 배후 선택을 하지 않은 모양이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본래의 이야기. 이번에는 어떻게 될지 모른다.
그런데 뜻밖에도 내게 관심을 보인 것은 유중혁이 아니라 다른 성좌들이었다.
[성좌, ‘술과 황홀경의 신’이 당신에게 인사합니다.]
[성좌, ‘술과 황홀경의 신’이 당신의 수식언이 멋있다고 생각합니다.]
디오니소스의 넉살은 어떤 회차든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만약 그가 최후의 방주에서 양보해주지 않았더라면, 전투는 더욱 힘들었겠지.
나 역시 반갑게 인사하려는 순간, 누군가가 끼어들었다.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당신을 견제합니다.]
······그러고 보니 이놈도 있었지. 넌 옆 칸의 김남운도 보고 있을 텐데, 대체 몇 다리를 걸치고 있는 거냐.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당신이 자신의 수식언을 따라 했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대체 어디가 비슷하냐고 물으려다가 참았다.
남은 선택시간은 3분.
괜히 쓸데없는 곳에 기력을 낭비할 필요가 없었다.
고개를 돌리자, 어느덧 유중혁의 본격적인 판단이 시작되고 있었다.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
1. 술과 황홀경의 신
+
잠시 수식언을 바라보던 유중혁이 눈을 돌렸다.
「뭔가 난잡한 이름이군.」
이어서 유중혁의 눈이 2번 후보를 바라보았다.
+
2. 손톱을 먹는 쥐
+
유중혁이 제법 오랫동안 그 수식언을 들여다보았기에, 나는 초조해졌다.
정신 차려라, 유중혁. 차라리 흑염룡을 선택해.
「약해 보여.」
나는 가까스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사람 긴장하게 만들지 말라고 자식아.
이어서 유중혁은 세 번째 후보로 눈길을 돌렸다.
+
3. 심연의 흑염룡
+
당연한 얘기지만, 유중혁이 3번을 택할 리 없었다. 유중혁은 겉으로야 제 잘난 맛에 사는 녀석이지만, 사실 저렇게 화려하고 겉멋든 단어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꽤 강해 보이는 이름인데.」
······뭐? 아니······.
「어쩌면 상당히 강한 후원자일지도 모른다.」
실제로 강한 건 사실이지만······ 그놈은 자기 화신에게 이상한 소환 주문을 외우게 하는 녀석이라고.
중혁아, 제발 눈깔을 똑바로 뜨고 봐라.
그런 녀석을 감당할 수 있는 건 김남운 아니면 한수영뿐이란 말이다.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당신을 향해 으스댑니다.]
[배후 선택 종료까지 1분 남았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유중혁의 눈이 4번 후보를 향했다.
+
4. 구원의 마왕
+
나는 가까스로 마음을 다잡고서, 유중혁의 뒤에서 배후 선택지를 함께 바라보았다.
술과 황홀경의 신, 손톱을 먹는 쥐, 심연의 흑염룡, 구원의 마왕······.
‘제4의 벽. 네 생각은 어때?’
질문의 의도를 모르겠다는 듯 [제4의 벽]이 뜸을 들였다.
‘그러니까, 네가 보기엔 누가 제일 세 보이냐?’
「그 야······.」
‘실제 무력 말고, 수식언만 보고 판단했을 때.’
금방 대답이 돌아올 줄 알았는데, [제4의 벽]은 고민하는 눈치였다.
나는 기다리지 않고 말했다.
‘이건 내가 「구원의 마왕」이라서 하는 말이 아니고, 솔직히, 그래도 객관적으로······.’
아니, 객관적일 필요까지도 없다. 그냥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자.
술과 황홀경의 신? 그냥 주정뱅이로 보일 뿐이다.
손톱을 먹는 쥐? 손톱깎이 대용도 아니고 그런 녀석을 어디다 쓰겠어.
심연의 흑염룡? 딱 봐도 절대 고르면 안 되는 선택지다.
0회차의 유중혁이 아무리 멍청해도 여기서 실수를 하진 않겠지.
여기서 정상적인 수식언은 나밖에 없다.
실제로 유중혁은 마치 나의 수식언에 감탄이라도 한 듯, 손가락을 들어 4번을 가리켰다. 그리고 생각했다.
「거만해 보이는 이름이군.」
······.
「약한 녀석들이 주로 이런 이름을 쓰지.」
내가 뭐라 외치기도 전에, 벌떡 일어난 유중혁이 말했다.
“결정했다. 나는―”
의기양양한 유중혁의 미소와 함께, 천천히 입술이 열렸다.
나는 지하철의 천장을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츠츠츠츳, 하는 소리와 함께 내 손끝에 강한 열감이 맺혔다.
[세계선에 간섭합니다.]
[‘덮어쓰기’가 시작됩니다.]
[과도한 간섭은 세계선으로부터 강한 저항을 불러올 수······.]
나는 온 힘을 다해 유중혁의 뒤통수를 갈겼다.
*
“커헉!”
김독자는 뒤통수에서 느껴지는 강한 충격과 함께 일어났다.
“언제까지 쳐 잘 건데? 안 일어나냐?”
눈을 뜨자, 손을 탈탈 터는 한수영이 보였다.
김독자는 소파에 묻은 침자국을 닦으며 부스스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지? 내가 왜 여기 있어? 그러니까······.
“뭐해 빨리 준비 안 하고? 오늘 어디 가기로 했는지 잊었어?”
한수영의 곁에 특유의 포즈로 선 유중혁이 역시나 눈동자를 이글거리고 있었다.
“쓸데없이 기다리게 하는군.”
유중혁뿐만이 아니었다. 유중혁의 뒤로 고개를 쏙 내미는 정희원과, 그런 정희원의 곁에서 뭔가를 한 아름 들고 있는 이현성의 모습.
“이거 피자에요?”
“치킨이지, 멍청아.”
이현성이 든 비닐봉지를 보며 침을 삼키는 신유승과 이길영.
그리고 그런 두 아이 옆에 선 이지혜까지.
“빨리 가자. 나 배고파!”
그 광경을 보며, 김독자는 오늘이 무슨 날인지를 기억해냈다.
「세계의 시나리오는 끝났다.」
고개를 돌리자, [공단]의 창으로 환한 볕이 스며들고 있었다.
「그리고 오늘은, <김독자 컴퍼니>가 처음으로 나들이를 가는 날이었다.」
.
.
.
목적지로 가는 내내, 한수영은 구시렁거렸다.
“야, 김독자.”
“왜.”
“오늘 무슨 날인지 진짜로 잊고 있었던 거 아니지?”
“무슨 날인데?”
“12월 25일이잖아. 무슨 날이겠냐?”
김독자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미트라가 태어난 날?”
“그건 <베다>식 개그냐?”
그들은 실없는 소리를 하며 계속해서 걸었다. 가끔 유중혁이 거슬린다는 듯 앓는 소리를 냈다.
붉은색 스포츠카 한 대가 굉음과 함께 길가에 멈춰선 것은 그때였다.
“상아 씨!”
유상아를 제일 먼저 알아본 정희원이 손을 번쩍 들었다. 흰색 롱패딩에 청바지를 입은 유상아가 선글라스를 벗으며 말했다.
“미안해요, 촬영 때문에 늦었어요.”
그런 유상아가 못마땅했는지 한수영이 태클을 걸었다.
“어쭈, 아주 연예인 다 되셨어.”
“그런데 이렇게 추운데 꼭 한강에서 먹어야 해요?”
“여기 추위 내성 없는 사람도 있나? 아직 그 정도 스킬은 남아있을 거 아냐.”
“그냥 공단에서 먹어도 될 텐데. 크리스마스라 사람도 많을 거라고요.”
“애들이랑 약속했잖아.”
아웅다웅 말싸움을 벌이는 두 사람을 보며, 김독자는 갑자기 마음 한구석이 짜르르 아파왔다.
왜, 이 풍경이 이토록 그립게 느껴지는 것일까.
시나리오가 모두 끝난 지 벌써 3개월이나 흘렀는데······.
“설화 씨랑 필두 씨는요? 한 부장님도 안 보이고.”
“곧 올 거야. 아, 저기 있네. 어이! 이설화!”
여의나루역 앞.
하얀 털옷을 입은 이설화가 해맑게 양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 옆에는 심통맞은 얼굴로 다른 곳을 보고 있는 공필두도 있었다.
“너무 안 오길래 또 우릴 잊은 줄 알았어요.”
그 말에 뭔가가 찔렸는지, 정희원이 낼름 대답했다.
“에이, 설마 그러겠어요?”
“······그때도 우리 방치해놓고 [공단]으로 돌아가버렸잖아요.”
“흠흠, 결국 찾으러 갔잖아요.”
“찾으러 오긴 뭘 와요! 사서들이 우리 내보내 줘서 돌아온 건데. 정말이지 그때만 생각하면 지금도······.”
“한명오는?”
“명오 씨는 못 왔어요. 크리스마스는 가족이랑 보내야 한다고······.”
“그 아저씨가 가족이 어딨어? 아······.”
시끌벅적한 분위기 속에서, 일행은 계속해서 걸음을 옮겼다.
김독자의 양팔을 하나씩 붙잡은 이길영과 신유승이 서로를 향해 으르렁거렸다.
“야, 자꾸 그쪽으로 당기지 마라.”
“너나.”
“아저씨, 근데 산타클로스도 성좌로 있을까요?”
일행은 마침내 한강 공원에 도달했다. 추운 날씨라 그런지 바깥에 사람은 많이 보이지 않았다. 대신 보이는 것은 무너진 한강의 대교들과 새카맣게 물든 하늘뿐. 이제 거의 남지 않은 극소수의 별들만이, 그곳에 <스타 스트림>이 있었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분명, 모든 것은 끝났다.」
일행은 돗자리를 깔고 아이들의 곁에 휴대용 난로를 설치했다. 난로의 옆에 간이 탁자를 설치한 유중혁은, 이지혜와 함께 뭔가를 만들고 있었다.
김독자가 물었다.
“······뭐야, 여기서 만드는 거였어?”
“그럼, 치킨집도 피자집도 없는데. 직접 만들어야지.”
그러고 보니 그렇다. 시나리오가 끝난지 고작 3개월인데, 피자집과 치킨집이 벌써 부활했을 턱이 없다. 한수영이 말했다.
“만들어 줄 사람이 있는 것에 감사하라고.”
순식간에 해체된 닭다리가 허공을 날았고, 그 위로 유중혁의 특제 소스들이 영롱하게 튀어 올랐다. 칼자루 끝에서 맹렬하게 회전하는 도우. 피자를 만드는 것인지 치킨을 만드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대단한 것이 만들어지고 있다는 것만은 틀림없었다.
“결국 이런 날이 오긴 오네요.”
돗자리 위에 무릎을 감싸고 앉은 유상아가 말했다. 깊은 감회에 젖은 듯, 그녀의 눈이 한강을 보고 있었다. 김독자가 물었다.
“요즘 많이 바쁘시죠?”
“그냥······ 그래요. 처리할 일들이 많다 보니.”
시나리오가 끝난 지 고작 3개월. 아직 사회는 안정되지 않았다.
아직 시스템의 영향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고, 스킬이나 성흔을 보유한 범죄자들의 난립은 계속되고 있었다. 유상아는 그들을 퇴치하고 시민들을 보호하는 세계의 히어로였다.
“보기 좋네요.”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정희원과 이현성이 나란히 서서 한강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수영이 퉁명스럽게 말을 내뱉었다.
“1년도 못 간다에 100코인 건다.”
그때, 멀리서 뭔가가 폭발하는 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란 일행들이 본능적으로 병장기에 손을 가져갔다.
자세히 보니, 소리의 정체는 먼 빌딩에서 쏘아 올린 폭죽이었다.
“······벌써 저런 걸 하는 사람이 있네.”
한수영이 어이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김독자는 새삼스레 그 광경을 보았다. 폭죽이라니. 살아서 다시 저런 것을 볼 수 있을 줄은 몰랐다. 조금씩 요리가 익어가는 냄새가 났다.
“김독자.”
“응?”
“요즘 너 그거 잘 안 읽네.”
“뭐?”
김독자는 잠시 생각하다가 답했다.
“아, 그렇지. 읽어야 되는데.”
김독자가 황급히 스마트폰을 꺼냈다. 하지만 배터리가 방전되어 있어서 스마트폰은 켜지지 않았다. 새카만 액정 너머로 한수영의 모습이 비쳤다. 좀처럼 생각을 읽을 수 없는 눈빛. 말없이 김독자를 들여다보던 한수영이 혼잣말로 뭔가를 중얼거리다니 으쌰, 하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괜히 왔나. 이것저것 생각나서 머리만 복잡하네.”
“응?”
“그냥 혼잣말이야. 그보다 멸살법에서도 이런 적 있었는데, 기억나냐?”
······멸살법.
“왜, 유중혁 3회차에······ 다 같이 모여서, 한강에서, 땅강아쥐 다리 뜯으면서······.”
이어지는 한수영의 말을 듣던 김독자의 표정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비틀거리는 김독자를 향해 한수영이 손을 뻗었다.
“야, 왜 그래. 괜찮아? 어디 안 좋은 거 아냐?”
“그냥 갑자기 머리가 좀 아파서······”
“내가 아까 너무 세게 때렸나? 잠깐 좀 쉬는 게······.”
“아냐. 그보다······ 네 말이 맞아.”
“무슨 말?”
“멸살법 말이야. 나도 그 장면 참 좋아해. 3회차에서 제일 좋아하는 장면이야.”
한수영은 김독자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이내 싱긋 웃었다.
“하여간 멸살법 오타쿠 새끼.”
멀리서 다시 한번 폭죽이 터졌다. 아까보다 훨씬 더 큰 폭죽이었다. 밤하늘을 아름답게 수놓는 불꽃들을 보며, 아이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김독자는 생각했다. 어쩌면 이것이, 오랫동안 그가 그리던 풍경이었다. 아주 오랫동안······ 오랫동안.
한수영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근데 김독자.”
“응?”
언제부터였을까. 한수영의 얼굴이 부쩍 가까워져 있었다.
또렷한 이목구비. 새하얀 뺨. 반짝이는 눈동자 아래에 찍힌 눈물점.
코끝에서 느껴지는 레몬 향기에 당황한 김독자가 무슨 말을 꺼내려는 순간, 한수영이 먼저 다가왔다. 귓가에 입술을 가져다 댄 한수영이 천천히, 아주 또렷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멸살법 3회차에는 그딴 거 안 나와.”
허공으로 흩어지는 폭죽과 함께, 어디선가 맹렬한 스파크가 내리치는 것 같았다. 시야가 한 바퀴 뒤집어지는 듯한 느낌이 들더니, 김독자는 어느새 자신이 바닥에 내동댕이쳐져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야.”
냉막한 한수영의 두 눈이 바로 앞에 있었다.
「분명 모든 것이 끝났는데.」
「왜, 아무것도 끝나지 않은 것처럼 느껴지는 것일까.」
멀리서 이쪽을 향해 달려오는 정희원과 이현성이 보였다. 그리고 표정 없는 유중혁의 얼굴도. 모든 이야기가 끝난 세계. 밤하늘을 물들인 불꽃 속에, 한수영의 서슬 퍼런 단도가 하얗게 빛났다.
“너, 대체 누구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