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9화

509화 도깨비 왕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눈앞에 드리워진 999회차의 설화들. <스타 스트림>에서 버림받은 설화들이, 하나둘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었다. 깊은 ‘회귀 우울증’으로부터 유중혁을 일깨우고 있었다. 도깨비 왕이 눈살을 찌푸렸다. [왜 이곳에 온 거지? 너희는 나와 계약했을 텐데? 너희에겐 그를 도울 명분이 없어.] [최후의 벽] 위로 문장이 떠올랐다. 「도깨비 왕이랑 약속도 했어. 이 세계선만 멸망시키면, 우릴 그때로 돌아가게 해주겠다고. 대장의 배후성인 ‘가장 오래된 꿈’과 접선해서―」 999회차 이지혜의 말이었다. 도깨비 왕이 다시 입을 열었다. [너희를 이 세계로 불러온 것은 나다. 다시 세계선으로부터 버려지고 싶은 건가? 저 끔찍한 차원의 틈새를 방랑하며, 영원의 고통을 맛보고 싶은 거냐고.] 협박하듯, 도깨비 왕의 말이 이어졌다. [저 ‘유중혁’은 바로 너희가 찾던 적이다. 너희 세계선을 멸망시켰고, 너희들의 설화를 도탄에 빠뜨린 장본인이란 말이다.] ‘이계의 신격’들의 표정에 가벼운 동요가 일었다. 도깨비 왕의 말이 맞았다. 유중혁이 그러했듯, 그들 또한 자신이 살았던 세계의 원한을 갚기 위해 이곳까지 왔다. 그때, 누군가가 입을 열었다. 【뭔 개소리야. 우릴 이 게임에 빠뜨린 건 네놈이잖아. 애초에 시나리오 같은 게 시작되지 않았으면 내가 여기서 이 지랄하고 있겠냐?】 건들거리는 999회차 김남운, ‘위대한 심연의 군주’였다. 이미 결심을 마쳤는지 그의 전신에서 가공할 혼돈의 힘이 방출되고 있었다. [거대 설화, ‘망상설계’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크으, 다 같이 싸우는 거 진짜 오랜만이네.】 김남운이 킬킬 웃으며 손의 붕대를 풀었다. 자신의 배후성이었던 ‘심연의 흑염룡’조차 뛰어넘은 괴물. 한수영의 그것보다 훨씬 더 짙고 사악한 기운으로 충만한, 새카만 흑요석 같은 손이 <스타 스트림>의 밤을 빨아들이고 있었다. [거대 설화, ‘슬픔을 봉인한 심장’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그의 바로 뒤에서 거체를 일으키는 사내도 있었다. 999회차의 이현성이었다. ‘은빛 심장의 왕’. 충만한 ‘설화 금속’의 장갑이 사내의 전신을 감싸고 있었다. 【도깨비 왕. 나는 너와 계약한 적이 없으니 해당 되는 바가 없다.】 이어서 자신의 거대한 전함을 창공에 부유시키는 ‘가라앉은 섬의 주인’, 999회차의 이지혜가 있었다. [거대 설화, ‘영원한 수평선의 방랑자’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그녀의 쌍룡검에서 대해의 기상이 느껴졌다. 【······.】 그녀는 말없이 검을 뽑으며 유중혁의 오른편을 지켰다. 그것으로 왕들의 선택은 분명해졌다. [전용 스킬, ‘전지적 독자 시점’이 강제로 발동합니다!] 그들의 생각과 결심이 온전히 내게 전달되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은밀한 모략가’를 증오했다. 하지만 그 증오는, 결국 뿌리 깊은 갈망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 어떤 우주에도, 그들만큼 ‘유중혁’이란 존재를 아끼는 이들은 없었다.」 그들이 이곳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유중혁 덕분이었다. 그들을 여기까지 보내기 위해 999회차의 유중혁은 모든 것을 희생했다. 팔이 잘리고, 다리가 끊어지고, 두 눈을 잃고, 마침내는 자신의 목숨까지 바쳤다. 「그들을 살린 것도, 죽인 것도 유중혁이었다.」 오직 유중혁을 생각하며 살아온 이들이었다. 그런 그들이 어떻게 유중혁을 잊을 수 있을까. 가라앉은 섬에 스스로를 가둬야만 했던 분노, 심장을 강철로 덮어야 견딜 수 있었던 슬픔, 심연에 자신을 내던져야만 잊을 수 있는 아픔. [거대 설화, ‘영겁의 불꽃’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그리고 스스로를 불태워야만 속죄할 수 있는 고통. 끊길 듯 끊어지지 않은 필름을 잇고 또 이어서, 그들은 마침내 이야기의 마지막 장에 도달했다. 【비켜라, 도깨비 왕. 우리가 원하는 건 하나뿐이다.】 999회차의 우리엘, ‘살아있는 불꽃’이 말했다. 【우리의 세계선에서 확인하지 못했던 ‘끝’을 이곳에서 보는 것.】 그 말과 함께 [업화의 불꽃]이 움직였다. 콰콰콰콰콰! 은가이의 숲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던 [지옥 염화]가, 벽의 내부를 불태웠다. 그와 거의 동시에 999회차 김남운의 오른손이 도깨비 왕의 허벅다리를 찢었다. 【하하하! 도깨비 한번 죽여 보자!】 김남운의 광기 어린 성흔이 시공간을 베고 설화를 파괴하며 도깨비 왕의 몸통을 노렸다. 정확한 양의 설화를 주고받는 공수. 망상이 구현한 병장기들이 김남운의 오른팔에서 돋아났고, 도깨비 왕이 소환한 성유물들이 벽의 곳곳에서 나타나 그런 병장기들을 받아냈다. 츠츠츠츠츳! [최후의 벽]은 도깨비 왕의 설화가 가장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곳. 아무래도 무대가 무대다 보니, 공방은 김남운에게 불리한 쪽으로 흐르고 있었다. 「바다를 찢고 해안선의 경계를 긋는 창이여」 「태양의 눈을 쏘아 떨어트린 화살이여」 벽의 곳곳에서 흘러나온 문장들이 곧 실체가 되었다. 슈슈슈슉! 도깨비 왕의 수신호에 맞춰 날아든 성유물들이 ‘위대한 심연의 군주’의 전신을 벌집으로 만들고 있었다. 허벅지에 창이 꽂히고, 팔뚝에 화살이 박혔다. 새카만 설화를 뚝뚝 흘리면서 김남운은 웃었다. 【가라! 태권 현성!】 김남운의 외침과 동시에, 그의 배후를 점한 이가 있었다. 꽈드드드드······. 999회차 이현성이었다. 단단한 팔로 도깨비 왕을 구속한 그의 전신으로 공간을 점유하는 강철이 자라났다. 막대한 스파크와 함께, 강철이 도깨비 왕의 팔과 다리를 구속했다. 【지혜야!】 999회차 이현성의 신호와 함께, ‘가라앉은 섬의 주인’이 움직였다. 【장전.】 방주의 충격으로 생겨난 틈새 사이로, 밤하늘에 띄워진 거대 전함의 모습이 보였다. 그 최전선에서 뭔가가 소용돌이치며 장전되고 있었다. 하나의 행성을 통째로 날리기에 충분한 양의 격. 자세히 보니, 거대한 포신에 장전된 것은 포탄이 아니었다. 【발사!】 굉음과 함께 전함에서 유성이 쏘아졌다. 눈부신 꼬리와 함께 떨어지는 별. ‘살아있는 불꽃’. 그녀가 스스로 탄환이 되어 도깨비 왕을 향해 쇄도하고 있었다. 걸리적거리는 모든 것들을 녹여버리며, 가공할 속도로 돌진하는 999회차의 우리엘. 그녀의 검극에 집약된 999회차의 설화가 거칠게 타올랐다. 【패왕만이 너를 죽여본 것은 아니다.】 「저것이, 999회차의 인물들이 최종장을 클리어 한 방법이었다.」 백열하는 태양이 벽의 껍질을 까부수며 돌진했다. 최후의 벽에 들러붙어 있던 설화들이 그 열기에 고통스럽게 몸부림쳤다. 이 세계선의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일격. 「그 일격을, 도깨비 왕이 받아내고 있었다.」 그그그그그그그극― 지옥 같은 열기 속에서 도깨비 왕이 형형한 눈을 빛냈다. 아아아아아아아아! 그의 전신에 새겨진 무수한 성흔들이 울부짖었다. [최후의 벽]에서 옮겨온 듯한 활자들이었다. 거대 설화들이 그들을 향해 경배하고 있었다. 내가 가진 설화들도 동요하고 있었다. 「‘이야기의 왕’이라는 수식언은, 그저 허울이 아니었다.」 <스타 스트림>의 정점에 존재하는 ‘이야기의 왕’. 그의 얼굴은 숭고했고, 사악했고, 아름다웠고, 슬퍼 보였다. 「그는 한때 인간이었다.」 [최후의 벽]에서 쏟아진 병장기들이 [업화의 불꽃]과 부딪쳤고. 「악마였고.」 도깨비 왕의 뿔에서 흘러나온 잿빛의 설화가 다가드는 우리엘의 움직임을 막아섰다. 「구원자였으며.」 흰 날개에서 뻗어 나온 신성한 빛이 도깨비 왕의 체력을 회복시켜주었고. 「끝내는 도깨비가 된 존재.」 끝나지 않는 설화들이 그의 주변을 감싸고 있었다. 이 세계는 여기서 끝날 수 없다는 듯이. 「이곳은, 999회차가 아니었다.」 999회차의 인물들이 일제히 내 쪽을 돌아보는 것이 느껴졌다. 「움직여라.」 「네가 마무리해야 한다.」 「우리와의 약속을 잊지 않았겠지?」 하지만 나는 움직일 수 없었다. [거대 설화, ‘세계의 수호자’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거대 설화, ‘세계의 수호자’가 다음 수호자를 바라봅니다!] 도깨비 왕의 설화 또한, 나를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김독자!] 도깨비 왕이 나를 향해 소리치고 있었다. [네게 정해진 운명을 거스르지 마라. 너는 이 세계의 누구보다 설화를 사랑하는 존재다. 나 또한 그랬지. 나는 이 세계의 누구보다, 네가 이 세계에 갖는 감정을 잘 이해하고 있다!] 그의 전신에서 뻗어 나온 설화가 나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곁에 있던 한수영이 나의 귀를 막으며 으르렁거렸다. “듣지 마. 들을 필요도 없는 이야기야.” 정희원과 이현성이 내 앞으로 나섰고, 유상아와 신유승, 이길영이 지키듯 나를 보호하고 섰다. 등 뒤에서 이지혜의 검명이 울려 퍼졌다. [성운, <김독자 컴퍼니>의 모든 별자리가 환하게 빛납니다!] 하지만 막으려 할수록 더욱 잘 보이는 것들이 있다. 가리려 할수록, 더욱 선명해지는 말들이 있었다. [전용 스킬, ‘전지적 독자 시점’이 폭주합니다!] 「[흑염룡! 흑염룡! 시발, 눈 안 뜨냐?]」 「[김유신! 정신차려라! 아직 우리의 황산벌은―]」 「[제천대성!]」 [최후의 벽]을 흐르는 설화들. 이곳보다 훨씬 더 열악한 전투가 벌어지는 전장에서, 성좌들이 스러지고 있었다. 걸레짝이 된 제천대성의 몸에서 끊임없이 설화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양쪽 눈을 잃었는지, 눈부시던 화안금정의 빛이 꺼져 있었다. 「[······막내가 보이질 않는다.]」 그런 그를 우리엘이 부축했다. 양쪽 날개가 찢어진 대천사는 그의 손을 쥐고 밤의 정경을 쓰다듬었다. 「[무사해. 저기 빛나고 있어.]」 아비규환의 밤하늘 사이로, 끈덕지게 살아남은 성좌들이 그들을 향해 날아들고 있었다. 장면이 바뀌자, 쓰러진 하데스를 끌어안은 페르세포네의 모습이 보였다. 하데스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자, 페르세포네가 고개를 저었다. 「[걱정 말아요, 나의 오래된 밤.]」 그녀의 머리 위로 <올림포스>의 태양이 지고 있었다. 그 모든 최후가 참담한 문장이 되어 벽의 위를 질주했다. 오직 그들을 끝장내기 위해서 쓰여지는 문장들이었다. [저 별들을 살리고 싶지 않아?] 울컥, 하고 몸속 깊은 곳에서 구역질이 올라왔다. 도깨비 왕이 외쳤다. [지금의 너는 저들을 살릴 수 없어. 이야기를 사랑하는 존재는, 결코 그 이야기를 바꿀 수 없다.] 사랑하기에, 그것을 바꿀 수 없다. [오직 그 이야기에서 벗어난 존재만이, 그 모든 것의 하찮음을 이해하는 존재만이, 개연성의 억압에서 벗어날 수 있어.] 까가가가각, 하는 소리와 함께 주변의 후폭풍이 더욱 거세지고 있었다. 조금씩, ‘도깨비 왕’에게서 흘러나오는 설화의 힘이 999회차 인물들의 그것을 압도하고 있었다. 이현성의 설화 금속을 찢어낸 도깨비 왕이 나를 향해 한쪽 손을 뻗었다. [네가 쌓은 ‘단 하나의 설화’는 <스타 스트림>의 자리를 계승하기에 충분해. 나의 손을 잡아라. 내가 원하는 것은 네가 원하는 것과 같아. 나는 저 별들의 이야기가 사라지길 원하지 않는다.] ‘도깨비 왕’의 목소리는 간절하기까지 했다. 그의 눈빛이, 설화가, 그의 말이 진심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그의 전신에서 <스타 스트림>의 설화가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아주 오랫동안 읽어온 이야기는, 결국 그의 일부가 된다.」 그는 <스타 스트림> 그 자체였다. 그는 정말로 이 이야기가 끝나기를 원하지 않는 것이다. [계속······, 이 이야기를 계속해. 새로운 세계선의 주인공이 되어서, 네가 만든 설화와 함께, ‘가장 오래된 꿈’의 연회를 계속해. 너는 그러기 위해 태어난 존재야. 오직 그것만을 위해, 너는 이 자리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이다!] 그 말들을 들으며, 이제껏 내게 일어났던 행운들이 떠올랐다. [<스타 스트림>이 당신을 바라봅니다.] 어째서 <스타 스트림>의 개연성이 그토록 내게 관대했는가. 도깨비 왕의 설화가 그 이유를 알려주고 있었다. 눈앞에서 연속해서 섬광이 폭발했다. [네가 진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잊지 마. 너는 ‘종장’이 아니야. 너는 ‘영원’이다!] 도깨비 왕의 배후로, 성좌들의 설화가 흘러가고 있었다. 맞다. 나는 저 이야기가 끝나길 원하지 않는다. 「추락하는 운석을 보며, 제천대성은 자신의 죽음을 예감했다.」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회귀 우울증’에서 거의 벗어난 유중혁의 모습이 보였다. 텅 빈 유중혁의 동공이 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끝나야만 하는 이야기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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