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6화
506화
「태초의 우주는 ‘하나’였다.」
정신을 차렸을 때 눈앞에 그 문장이 있었다. 그것이 문장인지, 아니면 문장을 빙자한 기억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 세계에서 ‘하나’는 전지전능했다. ‘하나’는 곧 우주였고, 우주는 곧 ‘하나’였기 때문이다. 그 안에서 ‘하나’는 완벽했다. 완벽하게 혼자였다.」
뒤이어 눈부신 폭발이 일어났다.
「그렇게 ‘하나’는 ‘둘’이 되었다.」
최초의 폭발. 훗날 사람들이 빅뱅이라 부르게 된 것이었다.
「그리고 ‘하나’는 더 이상 전지전능하지 않게 되었다.」
나는 어마어마한 현기증과 함께 바닥을 짚었다.
이곳은 문의 안쪽이었다. ‘최후의 벽’의 가장 깊은 곳.
더 이상 벽은 나를 빨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아마도, 이미 빨려 들어왔기 때문일 것이다.
곁을 돌아보자 한수영이 쓰러져 있었다. 나는 쓰러진 한수영을 업고 일어났다. 고개를 들자, 그곳에 안나 크로프트가 있었다.
[······최초의 설화를 본 모양이군.]
안나 크로프트에게 빙의한 혹부리 왕이 나를 향해 웃고 있었다.
[처음 그것을 보았을 때 나도 그대와 같은 표정이었지.]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런 설왕설래를 하고 있을 틈이 없었다. 일행들은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내 초조함을 읽었는지 혹부리 왕이 계속해서 말을 걸었다.
[궁금하지 않은가? 왜 이 세계에 ‘설화’라는 것이 존재하게 되었는지.]
“······그런 이야기를 하러 여기까지 온 게 아니야.”
[하지만 그 이야기를 하지 않고서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나도 그랬거든.]
등에 업힌 한수영의 숨소리가 들려왔다. 그 숨이, 곧 설화가 되어 눈 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세계가 일그러지며, 진열장처럼 장식된 복도가 눈앞에 나타났다.
「우주가 ‘둘’이 되어, ‘하나’는 외로워졌다.」
「‘하나’였을 때는 필요 없었던 것들이 생겨났다. 」
진열장 위에서, 피규어 같은 존재들이 싸우고 있었다.
지구를 비롯한 수많은 행성 위에서 시작된 ‘시나리오’의 역사가 그곳에 있었다.
「둘을 구별할 ‘선악’이 만들어졌고.」
아가레스와 메타트론이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붉은 설화를 토하면서도 끝내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는 천사와 악마의 ‘성마대전’.
「둘의 외로움을 달랠 ‘소통’이 발명되었으며.」
[공단]의 내벽을 사이에 두고 싸우는 공민들과 악마들. 그 흉벽의 사이에서 싸움을 만류하는 장하영의 모습이 보였다.
「다시 하나였던 시절로 돌아가고 싶은 ‘윤회’가 창조되었다.」
자신의 방에서 수조 속 화신체를 어루만지는 석존의 모습. 한때 석존이 사랑했던 존재, 죽은 삼장의 화신체였다.
「하지만 ‘둘’은 다시는 ‘하나’로 돌아갈 수 없었고.」
내가 읽어왔던 모든 설화들이 그곳에 전시되고 있었다.
정해진 결말 안에서 반복되는 싸움.
서서히 정신을 차리는 모양인지, 한수영의 작은 떨림이 느껴졌다.
「‘둘’은 곧 갈라진 서로를 이어줄 무언가를 필요로 하게 되었다. 이 모든 설화를 살아가며, 그들의 선악과, 소통과, 윤회를 대리해 줄 존재.」
나는 우뚝 자리에 멈춰 섰다.
「‘등장인물’.」
더 이상은 태연하게 지켜볼 수가 없었다.
곁에서 유령처럼 걷던 ‘혹부리 왕’이 말했다.
[아주 악질적인 농담이지. 그렇지 않은가?]
킬킬 웃던 혹부리 왕이 내 그림자 속으로 숨어들었다.
진열대 위에 떠오르는 인물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었다. 프라모델처럼 전시된 이들도 있고, 아직 조형이 덜 끝난 것인지 얼굴만 내놓은 채로 벽 속에 갇혀 있는 이들도 있었다.
“······지혜! 유승아!”
내가 아는 얼굴들이었다.
나는 어떻게든 그들을 꺼내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안간힘을 쓸수록, 둘의 얼굴은 벽 안으로 더욱 빨려 들어갈 뿐이었다.
나는 진열대를 따라 달렸다. 이설화, 공필두, 이길영, 유상아······ <김독자 컴퍼니>의 모든 이들이 그곳에 있었다. 그리고.
“······유중혁.”
짙은 안개 속에서 유중혁의 모습이 나타났다. 녀석은 눈을 감은 채 동색 사슬에 전신을 구속당한 채였다.
유중혁의 아래쪽에 어렴풋한 인형이 보였다.
「그가 바로 ‘이야기의 왕’이었다.」
안개 때문에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기에, 나는 천천히 그를 향해 다가갔다.
[당신은 ‘이야기의 왕’과 조우했습니다!]
[메인 시나리오의 끝이 다가왔습니다!]
‘멸살법’의 어디에도 도깨비 왕의 정보를 상세히 기술한 곳은 없었다. 하지만 ‘멸살법’에 없다고 해서 그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나는 그들을 만났던 이들을 알고 있으니까.
「하지만 그들도, ‘도깨비 왕’이 어떻게 생겼는지 말한 적은 없었다.」
‘최후의 안개’의 끝.
그곳에서, ‘이야기의 왕’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야기의 왕’이 당신을 향해 웃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4의 벽’이 격렬하게 흔들립니다!]
나는, 내 눈을 의심해야 했다.
「그것은 아주 오래된 기억이었다.」
지끈거리는 어지럼증과 함께, 시야 전체가 흔들렸다.
「그럴 리가 없다. 그런 일이, 가능할 턱이 없다.」
[드디어 만나게 되는군요. ■■의 사도······ 아니.]
눈앞에 작은 스파크가 튀더니, 필터링이 해제되었다.
[‘영원과 종장의 사도’여.]
「김독자는 벼락같은 고함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생각할 틈도 없었다. 나는 그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당장이라도 숨통을 조여 죽여버리고 싶었지만, 왜인지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키가 컸다. 항상 너무 높은 곳에서 그를 내려다 보았다.」
이곳에 있을 리가 없는 사람이었다.
「항상 얼굴이 붉었던 사람. 늘 취한 채였고, 그래서 좀처럼 시선을 마주친 적이 없던 사람. 시선이 마주치지 않기를 바랐던 사람.」
[독자야, 김독자.]
「그와 시선이 마주치면, 세상은 악몽으로 바뀌었다.」
[내가 이름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 지었어.]
츠츠츠츠츠츳!
나는 온 힘을 다해 주먹을 내질렀다.
「그토록 커 보였던 키는 이제 그와 비슷해졌고.」
시간의 유속이 느려지는 것 같았다.
「도드라진 혈관은 오히려 그를 앙상해 보이게 만들었다.」
츠츠츠츠츳!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제 그는 무력한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힘껏 내지른 주먹은 그의 코앞에서 멈춰 섰다.
눈부시게 튀어 오르는 스파크가 남자의 얼굴을 환하게 밝히고 있었다. 푸른 안광을 빛내며 악마처럼 웃는 ‘도깨비 왕’이 그곳에 있었다.
[무슨 짓이냐, 아버지에게.]
나는 고함을 질렀다.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무슨 행동을 하고 있는지조차 제대로 인식할 수 없었다. [제4의 벽]이 무너지고 있었다.
“김독자! 정신 차려!”
그리고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 등을 짚는 따뜻한 온기가 있었다. 한수영의 설화가 내게 전해지고 있었다.
「이것은 독자(讀者)의 설화.」
나를 지켜준 이야기였다.
“제4의 벽! 뭐해! 일어나!”
[‘제4의 벽’이 강하게 활성화됩니다!]
[‘제4의 벽’이 철옹성처럼 두터워집니다!]
그 순간, 도깨비 왕의 표정이 바뀌었다.
[방해를 하네?]
그는 내가 아니라 내 안의 무언가를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았다.
[최후의 벽의 마지막 파편. 이제 너의 임무는 끝났다.]
[‘제4의 벽’이 거칠게 으르렁거립니다!]
[너는 무사히 모든 이야기의 끝에 도달했다. 자격을 갖춘 계승자를 데리고 말이지.]
내 안에서 [제4의 벽]이 말하고 있었다.
「그 건 김독 자 가 결 정할 일」
그 말을 들으며 차츰 정신이 돌아왔다.
「눈앞의 존재는 아버지가 아니었다.」
어머니와의 기억이 설화가 되어 눈앞을 흘러갔다.
[제4의 벽]에 삼켜졌던 어머니의 기억. 그 벽 위에 떠올랐던 어머니의 문장들이 내게 말하고 있었다.
「그는 그날 죽었다.」
“······너는 내 아버지가 아니야.”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지?]
“장난은 그만둬. 네가 내 ‘아버지’라는 건 개연적으로 불가능해.”
[개연적이라. 하하, 그런 말을 듣게 되다니 할 말이 없네. 이쯤에서 나오기에 누구보다 자연스러운 얼굴이라 생각했는데 말이지.]
내게 멱살을 잡힌 도깨비 왕이 웃었다.
그의 얼굴이 변하고 있었다.
[아니면, 이 얼굴은 어떠냐?]
그는 어머니의 모습으로 변했고.
[이 얼굴도 나쁘지 않지.]
그다음에는 페르세포네와 하데스의 얼굴이었다.
나는 다시 한번 주먹을 휘둘렀다. 그러자 이번에는 강렬한 스파크와 함께, 내 몸이 반대로 튕겨 나갔다.
“한 번만 더 그들의 얼굴을 보이면 죽여버리겠다.”
[후후, 장난이 과했던 모양이군. 미안.]
“지금 당장 모습을 바꿔! 본모습을 드러내!”
[나도 그러고 싶지만 그게 안 돼. 내 원래 모습이 무엇이었는지는 이미 오래전에 잊었어. 너무 많은 존재로 바뀌어 살아왔거든.]
그는 여전히 하데스의 모습을 유지한 채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그러자, 그의 뒤쪽에서 설화들이 흘러나왔다. 어딘가 익숙한 설화들이었다.
「그날,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악마가 경외 속에 승천했다.」
[나는 한때 마계의 왕이었고.]
「<에덴>의 모든 대천사들이 그를 숭배하기 마지않았다.」
[대천사들의 메시아였다.]
등 뒤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그 설화들은 내가 익히 들은 적이 있는 이야기들이었다.
사라진 마계의 대마왕과, 에덴의 메시아. 그에게서는 다른 신화급 성운들의 창조 설화도 느껴졌다. <황제>의 반고, <올림포스>의 크로노스······ 전신에 오소소 솜털이 돋았다.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존재는, 내가 지금껏 상대했던 어떤 신화급 성좌와도 차원이 달랐다.
「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존재.」
나는 긴장을 놓지 않은 채 [부러지지 않는 신념]을 굳게 쥐었다.
“그 모든 게 당신이었단 건가? <에덴>도, <마계>도 너였다고? 그런 말을 하고 싶은 건가?”
내 말에 도깨비 왕이 고개를 휘휘 저었다.
[결국 모든 것은 지나간 이야기의 환생일 뿐이란 얘기지. 우리는 그저 거대한 이야기의 환생에 불과해. 너도, 나도.]
그는 먼 <스타 스트림>의 흐름을 보고 있었다. 별이 떨어진 하늘이 공허하게 펼쳐져 있었다. 그 하늘은 거대한 벽처럼 보였다.
끝없이 뻗어 나간 [최후의 벽].
이 세계는 결국 이 아득한 벽 속의 이야기였다. 쓰다 흘러내린 잉크처럼, 희미한 별들이 추락하는 것이 보였다. 그토록 많은 별들이 떨어졌음에도, 여전히 남아 있는 별들이 있었다.
자세히 보지 않고서는 볼 수 없는 별들. 나는 그 별들의 이름을 기억했다. 그리고 내가 해야 할 일을 되새겼다.
“내 일행들을 풀어 줘.”
[그들은 쓸모가 끝난 수단일 뿐이야. 그들을 풀어주는 것이 너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데?]
“······그 사람들은 내 전부야.”
도깨비 왕이 천천히 나에게 다가왔다.
한수영이 [한낮의 밀회]를 통해 말을 걸며 내 곁에 다가섰다.
―김독자.
넝마가 된 붕대를 팔에 질끈 감으며, 녀석은 마지막 전의를 불태우고 있었다.
―셋 센다. 신호하면 동시에 제압해. 하나, 둘······.
[눈앞에서 귓속말하지 마. 다 들리니까.]
우리는 빳빳이 굳은 채 시선을 교환했다.
<스타 스트림>의 모든 설정들은 ‘도깨비 왕’의 손을 거친 것. 이 세계에 그가 읽을 수 없는 문장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한수영도 나도 칼자루를 쥔 채 녀석을 노려보았다. 이미 수가 읽힌 상황에서 덤벼봤자 기습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도깨비 왕은 그런 우리를 재미있다는 듯 바라보더니, 내게 천천히 손을 뻗었다.
[이야기의 후계자. 오직 너만이 정확한 시간에 맞춰 이곳까지 왔어.]
“······뭐? 시발, 난 보이지도 않는―”
츠츠츠츳, 하는 소리와 함께 한수영의 목소리가 사라졌다. 마치 수조 속에 갇힌 것처럼 한수영이 자신을 감싼 투명한 벽을 탕탕 내리치고 있었다.
[당신은 모든 메인 시나리오를 통과하였습니다.]
[당신은 범우주적인 <스타 스트림> 통합체에 기록될 것입니다.]
들려오는 시스템 메시지와 함께, 내 존재의 격이 격상되고 있었다.
[그토록 멋진 설화를 보여줘 놓고, 왜 아직도 낡은 인식의 틀에 갇혀 있는 거지? 숭고한 벽의 파편을 가졌음에도, 왜 이 세계를 떨어져서 바라보지 못하는 거냐고.]
나를 힐난하는 듯한 목소리. 그 목소리의 아득한 심층부에는 이 모든 이야기에 대한 경외가 묻어 있었다.
그는 자신이 서 있던 벽을 바라보았다. 정확히는, 그 벽의 너머에 있는 무언가를 상상하는 듯했다.
[네가 가치를 둔 모든 것에는 의미가 없어. 이 세계는 오직 위대한 존재에게 헌정되기 위한 이야기에 불과해. 이 세계의 모든 것은, 그저 그 위대한 존재의 백일몽에 지나지 않아.]
위대한 존재의 백일몽.
“[최후의 벽]은 그 ‘존재’가 꾸는 꿈을 기록한 것인가?”
[맞아.]
나는 그 존재가 누군지 알 것 같았다.
이 모든 비극을 초래한 원흉.
나는 이곳에 들어오며 보았던 ‘최초의 설화’를 떠올렸다.
「태초의 우주는 ‘하나’였다.」
최초의 ‘하나’.
유중혁을 회귀시키고, 이 세계의 모든 ‘신화’를 탄생시킨 존재.
“그 녀석이, tls123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