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6화

496화 허공에서 거무튀튀한 비정형의 덩어리가 폭발하는 순간, 나는 근처에 있던 아이들을 덮은 채 바닥에 납죽 엎드렸다. 이현성이 펼친 강철 방벽 위로, 거센 금속성의 파찰음이 귀를 긁었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소리도, 촉각도 사라졌다. [전송이 완료되었습니다.] 그리고 들려오는 알 수 없는 메시지. 전신의 근육이 흠씬 두들겨 맞은 것처럼 아팠다. 허공을 덮었던 이현성의 방벽이 사라져 있었다. ······어떻게 된 거지? 상황이 잘 이해되지 않았다. 주변을 둘러봐도 보이는 것은 나뿐이었다. 품속의 아이들도, 나를 감싸던 이현성과 정희원도, 허공으로 뛰어 오르며 검을 휘두르던 유중혁도 보이지 않는다. 보이는 것은 드넓은 벌판뿐. 고개를 돌리자 하늘 끝까지 닿은 나무와 우거진 숲으로 이루어진 삼림 지대와 그 반대편을 차지한 유황 지대가 보였다. 「대도깨비들이 ‘관리국’의 힘을 행사해 시나리오에 개입했다.」 거기까지는 명료하게 기억이 났다. 뒤이어 관리국 측의 코인 제재가 시작되었고, 그것도 모자라서 녀석들이 괴이한 미사일 같은 것을 소환했던 것도. 그리고 그 다음에는······. 「[아. 아. 잘 들리시나요? 이것 참, 한글 패치가 안 돼서 고생했네.]」 서늘한 느낌에,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설화. 내가 아주 잘 알고 있는 설화였다. 「[이건 영화 촬영이 아닙니다.]」 연이어 무언가가 허공에 떠올랐다. 거무튀튀한 소환체가 폭발하던 바로 그 순간, 창공을 덮은 작은 그림자. 나는 분주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꿈도 아니고, 소설도 아니며, 당신들이 알던 ‘현실’도 아닙니다. 아시겠어요? 그러니까 모두 닥치고 내 말을 들으세요.]」 분명 이 근처였다. 이 근처에 녀석이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벌판을 헤집었을까. 갈대숲 사이에 쓰러져 있는 녀석이 보였다. “비형.” 나는 녀석을 안아 들었다. 대도깨비가 되며 성인 남성만큼이나 자랐던 녀석은, 이제 다시 아이처럼 작아져 있었다. 내가 녀석을 처음으로 지하철에서 만났던 그날처럼. “비형!” 내 모든 비극의 시작. 이 녀석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나는 지금도 평범한 미노 소프트의 계약직 사원이었을 것이다. 「[잠깐만. 지금 나랑 <스트림 계약>을 맺잔 말입니까?]」 그때 이 녀석과 빌어먹을 계약을 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여기까지 오지 않았을 것이다. 비형의 몸에서 조금씩 설화 부스러기가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그 속도는 점점 더 빨라지고 있었다. 「“당신들이 <김독자 컴퍼니>의 설화에 대체 무슨 기여를 했습니까. 무슨 염치로 코인 수급에 관여하는 겁니까?”」 「“그런 이야기는 이제 지루하지 않습니까? 언제까지 관리국의 공식에 맞는 설화만을 찾아다닐 겁니까?”」 내가 모르는 비형의 설화들이 부서지고 있었다. 나는 다시 한번 비형을 흔들어 깨웠다. 녀석의 뺨을 마구 후려치기도 했다. 그러자 끊어질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프군. 그때 너한테 맞은 바울이 처음으로 불쌍하게 느껴져.” 눈을 뜬 비형이 쓴웃음을 짓고 있었다. 진언이 아닌 흐트러진 육성. 오랜만에 듣는 도깨비 비형의 진짜 목소리였다. 내가 증오했던 목소리. 사람들을 화신으로 만들고, 시나리오를 세상에 퍼뜨려 이 세계를 관음의 왕국으로 만든 놈. 그렇기에, 나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왜 나를 구한 거냐?” 비형이 이렇게 된 것은 건드리면 안 되는 개연성을 건드린 까닭이었다. 시나리오에 무리하게 간섭하여 소멸해버린 대도깨비들처럼, 비형 또한 자신이 막을 수 없는 후폭풍에 뛰어들어 이 꼴이 되었다. 「비형은 여기서 죽을 것이다.」 내가 가진 설화들이 흔들리고 있었다. 이것은 나의 계획이 아니었다. 내가 원했던 설화가 아니었다. [‘제4의 벽’이 격렬하게 흔들립니다!] 비형은 대답 대신 새카만 설화를 토했다. 녀석의 몸이 점점 더 작아지고 있었다. “······잠깐 일어났으면 좋겠군.” 나는 비형을 일으켰다. 창백한 밤하늘 너머로, 별들의 운항이 보였다. 시나리오의 흐름에 따라 이리저리 흘러가는 별들. 아득한 성류의 흐름. 비형은 「스타 스트림」을 보고 있었다. “네 동료들은 모두 전송했다. 그리고 인근에 있던 성좌와 화신들도 대부분 살아남았을 거다. 여긴 외부의 충격으로부터 안전한 곳이야.” “너······.” “자세한 건 곧 알게 될 거다. 넌 똑똑한 놈이니까.” 하늘에서 몇 개의 별들이 추락하는 것이 보였다. 내가 할 말을 찾는 동안, 추락하는 별들은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아득히 ‘별자리의 맥락’에서 죽어가는 별들. 비형은 저 별들의 꿈을 꾸며 살아왔을 것이다. “김독자. 너와 나는 동료가 아니다.” 별들의 설화를 좋아했을 것이고, 그들의 희비극을 함께 지켜보았을 것이다. 무수한 별들의 죽음을 보아왔을 것이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너는 시나리오의 화신이고, 나는 이야기꾼일 뿐이다.” 그런 별들의 죽음을 아름답다고 여겼을 것이다. 내가 비형을 증오하는 것은 사실이었다. 나는 어떻게든 그 감정을 더 불태우려 했다. [설화, ‘왕이 없는 세계의 왕’이 자신의 이야기꾼을 바라봅니다.] [설화, ‘이적에 맞서는 자’가 자신의 이야기꾼을 슬퍼합니다.] [설화, ‘재앙의 왕을 사냥한 자’가 자신의 이야기꾼을 애도합니다.] 비명처럼 흩날리는 내 설화들이, 비형을 향해 말하고 있었다. 비형이 웃었다. 자랑스러운 얼굴로. “네 설화를 끝까지 보고 싶었다.” 비형이 바라보는 하늘의 너머에 「최후의 벽」이 있었다. 비형이 꾸었던 꿈. 이 모든 시나리오의 왕인 ‘도깨비 왕’이 있는 곳. 나는 말하고 싶었다. 겨우 여기서 포기할 거냐고. 내가 그때, 약속하지 않았냐고. 「“도깨비 비형, 나와 계약해라. 그럼 내가 너를 도깨비들의 왕으로 만들어 주겠다.”」 아직 나는, 그 약속을 이뤄주지 못했다. 「그는 김독자가 쌓아온 설화의 첫 번째 독자였다.」 양손이 점점 가벼워졌다. 천천히 고개를 내렸을 때, 이미 비형은 그곳에 없었다. 빌어먹을 이야기꾼답게, 녀석은 마지막까지 자신의 이야기만을 남겨 놓고 떠난 것이다. 나는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누구도 희생하지 않는 설화를 만들고 싶었다.」 [당신의 대서사시가 변화의 계기를 맞이했습니다!] 으스러지도록 쥔 주먹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내 모든 설화들이 절규하고 있었다. <스타 스트림>을 향해, [최후의 벽]을 향해 외쳐대고 있었다. 「아직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 김독자.」 그것은 죽은 비형의 설화였다. 녀석이 죽기 전에 남긴 설화가, 내 곁을 맴돌며 자신의 문장을 소진하고 있었다. 비형은 죽었지만, 녀석이 남긴 설화는 아직도 살아있었다. 나는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비형의 말이 맞았다. 내가 원하는 끝은, 이제부터가 시작이다. 비형이 나를 어디로 보냈는지, 일행들이 어디로 갔는지부터 알아내야 한다. 그리고······. 츠츠츠츠츠츠······! 드넓은 벌판의 허공에서 개연성의 스파크가 내리치고 있었다. 그 스파크 너머로, 외부의 정경이 어슴푸레 드러났다. 폐허가 된 최종장의 무대. 죽은 성좌들과 화신들의 시체가 즐비한, 바로 조금 전까지 내가 있었던 전장. 그 정경을 보는 순간, 나는 내가 어디에 있는 것인지 깨달았다. [‘최후의 방주’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이곳은 바로, 내가 부숴야 하는 바로 그 ‘배’의 내부였다. [현재 ‘최후의 방주’가 이륙 프로세스에 진입한 상태입니다.] [최종 시나리오가 갱신되었습니다!] + <메인 시나리오 # 99 ― ■■■■> 분류 : 메인 난이도 : ??? 클리어 조건 : 방주를 움직이는 설화핵을 파괴하고, 대도깨비와 신화급 성좌들의 세계선 이주 계획을 저지하시오. 제한시간 : 24시간 보상 : 최후의 벽 실패시 : 세계선 멸망. + ······그런 것이었나. 이곳이 ‘최후의 방주’라면 배 안에 이만한 세계가 깃들어 있는 것도 이해가 갔다. 지금 내가 서 있는 곳은, 방주 안에 잠들어 있는 무수한 신화들이 시작된 태초의 땅이었다. 쿠구구구구. 그 땅의 건너편에서, 거친 진동이 들려왔다. 뭔가가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도망쳐라, 김독자.」 자신의 세계관을 등에 업고 본연의 힘을 되찾은 존재들. 신화급 성좌들이 몰려오고 있었다. * 「방주는 일종의 ‘거대 설화 병기’다. 방주를 확실하게 부수려면 내부에 있는 설화핵을 박살 내야 해.」 나는 비형이 남긴 설화들을 읽으며 방주의 내부를 달리고 또 달렸다. [현재 당신은 거주 선실 D-21에 진입한 상태입니다.] [해당 지역에서는 다른 신화의 영향력이 너무 강합니다.] [현재 성운 멤버들과 연락이 닿지 않는 상태입니다.] 다른 거대 설화들의 영향력이 너무 강하기 때문일까, 일행들에게 연락이 닿지 않았다. 다행인 것은, 나와 같은 선실에 떨어진 일행이 하나 더 있다는 것이었다. [같은 성운의 영향력이 강하게 느껴집니다!] “김독자!” 내가 손을 뻗으며 무슨 말을 하려는 순간, 한수영이 외쳤다. “닥치고 달려! 이쪽으로 오지 마!” 한수영의 뒤쪽에서 덤불 숲이 통째로 갈려 나갔다. 뭔가가 쫓아오고 있었다. 재빨리 품속에서 뭔가를 꺼낸 한수영이 뒤를 향해 연막탄을 던졌다. [‘양산형 SSS급 연막탄’이 효력을 발휘합니다!] [20초간 인근 지역의 시야각이 차단됩니다!] 혼란에 빠진 성좌들이 아우성을 벌이는 동안, 우리는 재빨리 덤불 지역을 벗어났다. 한수영은 이미 사태 파악을 끝낸 모양이었다. “그 자식은 뒈졌어?”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숨을 헐떡인 한수영이 바닥에 퉤 하고 침을 뱉었다. “빌어먹을 도깨비 자식, 이걸 마지막 선물이라고 주고 가냐.” 이걸 선물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나는 방주의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이 방주 안에는, 아마 우리 말고도 무수한 ‘거대 설화’의 주인들이 잠들어 있을 것이다. “김독자.” “비형의 설화에 따르면 설화핵은 방주의 중심부에 있어. 여긴 아마 선두 인근일 거야.” 내가 그 말을 뱉자마자, 연막탄 사이에서 성좌들의 진언이 울려 퍼졌다. [쫓아라!] [이 근처에 놈들이 있다. 놈들과 함께 다음 세계선으로 갈 수는 없어!] 한수영이 [한낮의 밀회]를 통해 말을 걸었다. ―그냥 다 죽여버릴까? 그것도 하나의 방법일 것이다. 하지만 전장이 그리 좋지 않았다. 이 선실은 다른 성운의 세계관. 즉, 그들의 「무대화」가 적용되는 장소였다. [거주 선실 D-21 지역은 우주수(宇宙樹) 이그드라실의 뿌리가 자라는 곳입니다.] 한수영이 인상을 찌푸렸다. ―빌어먹을, 하필이면 <아스가르드>야. [성좌, ‘하프와 호른의 신’이 멸망의 진혼곡을 연주합니다.] [성좌, ‘멸망의 늑대에게 팔을 잃은 자’가 자신의 사라진 팔을 찾고 있습니다.] [성좌, ‘목요일의 천둥’이 자신의 위세를 과시하고 있습니다.] 성좌들이 하늘을 떠다니며 우리를 찾고 있었다. 대부분은 설화급 성좌들이었다. 하지만. ―······토르가 저렇게 강했나? 묠니르에 번개를 응축한 ‘목요일의 천둥’이 새파란 눈으로 창공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설화급 성좌인 토르. 그런 그도 이 무대에서는 제우스에 육박하는 수준의 격을 방출할 수 있었다. 나는 한수영을 향해 말했다. ―우리한테 유리한 무대를 찾아야 돼. ―이 안에 그런 무대가 있겠어? 이들과 달리 <김독자 컴퍼니>는 달리 세계관이라 칭할만한 것이 없었다. ―하나 있지. 그럼에도, 내 생각이 맞다면 이곳에는 우리가 싸울만한 무대가 하나 있었다. 그곳이라면, 다른 모든 일행들도 제힘을 충분히 낼 수 있을 것이었다. 문제는 그곳까지 어떻게 가느냐 하는 것인데. [설화, ‘돌멩이와 나’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물론, 그것도 방법은 있었다. 한수영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설화, ‘돌멩이와 나’가 ‘우린 그저 돌멩이일뿐’을 이야기합니다!] ―뭐야 이거? 나는 한수영의 손목을 잡은 채, 굴러가는 돌멩이처럼 조심조심 성좌들의 앞으로 나섰다. 예상대로 성좌들은 우리를 전혀 발견하지 못했다. [성좌, ‘사랑과 고양이의 여신’이 침울한 표정을 짓고 있습니다.] [성좌, ‘큰 뿔 다리의 수호자’가 누군가를 찾고 있습니다.] 바로 앞을 지나치고 있는데도 발견하지 못하는 성좌들을 보며, 한수영이 입을 딱 벌렸다. ―미친, 개사기잖아. 사기는 사기지. 적어도 ‘돌멩이’는 그곳에 돌멩이가 있다는 사실을 애써 인지하기 전까지는 눈에 띄지 않으니까. [성별 바꾸기를 좋아하는 한 성좌가 키득키득 웃고 있습니다.] 순간,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한수영도 표정이 비슷했다. 하지만 이제 조금 남았다. 설령 로키가 우리 존재를 눈치챘다고 해도, <아스가르드>의 주력 성좌들은 이미 저만치 멀어진 상태······. “이번에도 그 방법으로 도망칠 셈인가요?” 설화 「돌멩이와 나」는, 그 설화의 실체를 간파한 사람에게는 통하지 않는다. 그리고 불행하게도, 나는 이미 이 설화를 누군가에게 사용한 적이 있었다. 천천히 등을 돌리자, 소용돌이치는 붉은 눈동자가 우리를 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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