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9화

479화 [설화, ‘강철의 지배자’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999회차의 이현성이 만든 강철의 벽이 주변을 덮으며 자라나기 시작했다. <오즈>에서는 무려 행성 하나를 방어할 수 있었던 힘이었다. 콰콰콰콰콰! 자라난 강철은 이내 「무대화」와 어우러지며 지하철의 격벽을 이루기 시작했다. 내겐 한없이 익숙한 무대. 지금도 눈을 감으면 선명한 첫 번째 시나리오의 객실. [신화급 성좌의 ‘무대’가 발생했습니다!] 츠츠츠츠츳! 본래 「무대화」는 일종의 증강 현실에 가깝다. 즉, 무대화가 발생한다고 해서 실제로 주변의 지형지물이 바뀌거나 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이번에는 경우가 좀 달랐다. [<스타 스트림>이 당신의 ‘무대’에 주목합니다.] [절대다수의 성좌들이 ‘무대’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대도깨비들이 당신의 ‘무대’를 질투합니다.] [다수의 시선으로 ‘무대화’의 무대 등급이 상승합니다!] <스타 스트림>에서 개연성은 곧 시선의 숫자와 직결된다. 많은 이들이 관음하는 시나리오는 강력한 설화를 발생시키고, 많은 이들이 지켜보는 무대는 파급력이 발생한다. 무수한 시선에 깃든 기대감이 개연성을 움직이는 것이다. 「그날, 망상악귀와 구원의 마왕은 그곳에서 처음으로 조우했다.」 그리고 움직인 개연성은, 때로 ‘가짜’를 ‘진짜’로 만든다. [‘끊어진 필름 이론’의 영향으로 ‘무대화’의 구현이 불완전합니다!] [해당 무대에서 등장인물 ‘김남운’과 등장인물 ‘위대한 심연의 군주’는 동일 인물로 취급됩니다.] [‘위대한 심연의 군주’의 무대 적합도는 87.351% 입니다!] [갑작스런 폐막의 가능성이 존재합니다.] 가짜가 진짜가 될 수 있는 것은 무대에서도 잠깐뿐. 모두가 집중하는 이 순간, 무대의 신비가 해체되기 전에 나는 모든 것을 끝내야만 했다. 【너······!】 나는 망설이지 않고 김남운을 향해 다가갔다. 무대화의 영향에도 딱히 강해졌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다만 자신감이 차올랐다. 마치 늑대가 토끼를 사냥할 때 갖는 확신 같은 것. 【무슨 개 같은 짓이야!】 분개한 999회차의 김남운이 달려들었다. 「무대화」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은 녀석의 몸놀림은 심각할 정도로 둔해져 있었다. 마치, 첫 번째 시나리오에서 평균 능력치가 10도 되지 않던 그 김남운 같았다. 문제는 내 육체도 첫 번째 시나리오의 그때와 별반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었다. 휘이익! 나는 고개를 숙여 단검을 피했다. [전지적 독자 시점]을 통해 공격 방향을 읽고 있었기 때문에 회피가 그리 어렵지는 않았다. [해당 ‘무대’에 ‘첫 번째 시나리오’의 규칙이 적용됩니다!] [하나의 생명을 살해할 때마다 ‘무대’의 화신체가 강화됩니다.] 새록새록 떠오르는 기억들. 맞다. 첫 번째 시나리오에서 우리는 그렇게 싸웠다. 고작 100코인의 생존비 때문에 사람들이 죽어 나갔다. 100코인을 얻기 위해 사람들은 서로를 죽였다. 우리는 그런 세계에서 살아남았다. [다수의 성좌들이 자신의 ‘첫 번째 시나리오’를 떠올립니다.] 두통이 오는지, 관자놀이에 손을 가져다 댄 999회차의 김남운이 쿡쿡거리며 웃었다. 【하하······ 이렇게 나오시겠다? 꽤 재밌네.】 “전혀 재밌는 표정이 아니신데?” 김남운의 시선에서 찌릿한 살기가 느껴졌다. [‘위대한 심연의 군주’의 무대 적합도가 미세하게 감소합니다!] 아무리 「무대화」의 영향력이 절대적이라 해도, 이 「무대화」는 꼼수를 통해 구현된 것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999회차의 김남운과 3회차의 김남운 사이의 연결은 약해져 갈 것이다. [뭐야, 메뚜기 남! 이거 뭔데, 어떻게 된 건데?] 한쪽 구석에서 몸을 일으킨 3회차의 김남운이 보였다. 「무대화」의 영향으로 작은 장난감 로봇으로 변한 녀석이 엉거주춤 내 다리에 붙어섰다. 그 꼴을 본 999회차의 김남운이 중얼거렸다. 【한심하군. 저런 녀석에게 죽어서 깡통 로봇이 되었을 줄이야.】 [뭐라는 거야. 뒈지고 싶냐? 야, 메뚜기 남! 저 새끼 죽여버려!] 내 정강이를 붙든 김남운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앞으로 5분 안에 살해 행위가 발생하지 않을 시 객실 안의 모든 화신체가 절멸합니다!] 「무대화」가 이렇게 강력한 제약을 거는 것은 처음이었다. 이 정도면 거의 메인 시나리오 수준인데. 【죽어!】 공기를 가르며 단검이 날아왔다. 나는 지형지물을 이용해 공격을 피해냈다. 화신체의 움직임이 둔하다곤 해도, 나 역시 그때의 김독자는 아니었다. 김남운의 공격은 지하철의 철문과 바닥을 긁었다. 쿵쿵 내리찍는 녀석의 힘이 조금씩 강해지고 있었다. 희미하게 올라오는 혼돈의 기운. 벌써 「무대화」의 영향력이 감소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대로 시간이 흐르면 승세는 녀석을 향해 기울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999회차의 김남운은 오히려 초조한 기색이었다. [등장인물, ‘위대한 심연의 군주’가 동요합니다.] [등장인물, ‘위대한 심연의 군주’가 다급히 주변을 둘러봅니다.] 왜일까. 녀석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자세히 보니 녀석의 뺨과 목덜미에 식은땀이 맺혀 있었다. [등장인물, ‘위대한 심연의 군주’가 이 공간을 싫어합니다.] 【쥐새끼 같은 놈이······!】 [일부 성좌들이 ‘이계의 신격의 왕’의 격을 의심합니다.] [소수의 성좌들이 잡배 같은 대사를 경멸합니다.] 초조함 때문인지 999회차 김남운의 움직임이 점점 더 단순해지고 있었다. [앞으로 3분 안에 살해 행위가 발생하지 않을 시 객실 안의 모든 화신체가 절멸합니다!] 이제 남은 시간은 3분. “독자 씨? 이게 무슨······.”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나와 김남운의 고개가 동시에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향했다. 순간 소름이 돋았다. 「그곳에 그들의 싸움을 목격한 이가 있었다.」 잊고 있었다. 「그날, 3807칸에서 가장 정의로웠던 사람.」 그때, 지하철에 있었던 것은 나와 김남운뿐만이 아니었다는 것을. 【하하하하하하하!】 광소를 터트린 김남운이 나를 내팽개치고 유상아를 향해 달려갔다. 「무대화」의 영향 때문인지 유상아 또한 첫 번째 시나리오의 그 날과 같은 불편한 복장이었다.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김남운의 단검이 유상아를 향해 쇄도했다. 쐐애액, 하고 그어지는 날붙이. 파스슷! 잘려나간 머리카락이 허공을 날았다. 표정을 굳힌 유상아가 유연한 동작으로 김남운의 공격을 피하고 있었다. 나보다도 더 날쌘 움직임이었다. 【제법인데!】 [등장인물 ‘위대한 심연의 군주’가 ‘흑화’ 효과를 받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김남운의 움직임은 더 빨라질 것이었다. 「그날, 망상악귀는 자신의 세계를 깨달았다.」 무대화의 영향이 거세어지고 있었다. 「새로운 세계에는, 새로운 법칙이 필요한 법이라고.」 파리하게 질려가는 유상아의 얼굴이 보였다. 시간이 없다. 방법을 찾아야 했다. 어떻게든― “형.” 내 옷깃을 붙잡는 작은 손. 「그날, 그 소년이 곤충을 잡지 않았더라면.」 이길영이 그곳에 있었다. 아직 자라지 않은 앳된 얼굴. 첫 번째 시나리오 속 내가 기억하는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부모를 잃고도 절망하지 않았던 그 아이가, 단호한 얼굴로 내게 손바닥을 내밀었다. [성좌, ‘무저갱의 지배자’가 음흉하게 웃습니다.] 샛노란 메뚜기 몇 마리가 소년의 손바닥 위에 있었다. “고맙다.” 나는 메뚜기를 쥔 채 달렸다. 뿌드득 하는 소리와 함께 터져 나가는 메뚜기들. [생명체를 살해했습니다.] [무대화의 효과로 화신체가 강화됩니다!] [생명체를 살해했습니다.] [무대화의 효과로 화신체가 강화됩니다!] ······. 폭발적으로 증가한 근력과 함께, 객실을 달렸다. 미친놈처럼 웃어대는 김남운의 뒤통수가 코앞에 보였다. 【죽어! 죽어! 죽어! 죽어엇!】 나는 녀석의 덜미를 잡아 그대로 지하철의 바닥에 처박았다. 짓밟힌 벌레처럼 김남운의 다리가 부들부들 떨렸다. 【이런 개―】 잽싸게 내 손아귀에서 벗어난 김남운이 나를 향해 단검을 휘둘렀다. 나는 그 단검을 피하지 않았다. 카가가가각! 피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나이프는 계속해서 생채기만을 남겼다. 핏줄기는 흘렀지만, 칼날은 살가죽 아래를 헤집지 못했다.」 첫 번째 시나리오의 마지막 장면이 오버랩되듯 스쳐 지나갔다. 김남운의 공격은 점점 더 빨라지고 있었지만, 녀석의 공격은 강화된 이현성의 [강철화]를 뚫지 못했다. 【이게, 이게 무슨······.】 999회차의 김남운이 욕설을 내뱉으며 단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아무리 휘둘러도 소용없는 일이었다. 이미, 이 ‘무대’의 끝은 정해졌으니까. “이제 2분 남았네.” 【으아아아아아아!】 일그러진 김남운이 마구잡이로 단검을 내리그었다. 애꿎은 날붙이만이 뚝 부러져 바닥을 나뒹굴었다. 1분 30초, 1분 20초······ 줄어드는 시간 앞에서 김남운의 신형이 천천히 무너졌다. 단순히 힘이 빠져서는 아니었다. 녀석을 공격하는 것은 그보다 더 근본적인 원죄였다. 「망상악귀 김남운의 근원 설화」 주변의 공간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없던 객실 바닥에 피가 번지고 있었다. 우리가 흘린 피가 아니었다. 【그럴 리가, 그럴 리가 없어······!】 벌벌 떠는 999회차의 김남운이 자리에 주저 앉았다. [거대 설화, ‘망상설계’가 폭주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곳에서, 녀석의 설화인 ‘망상설계’가 발아했다. [비정상적인 적응력]을 통해 자신이 살아갈 새로운 세계를 만들었던 김남운. 하지만 그 ‘세계’의 끝을 본 지금, 김남운에게 그 세계는 어떤 의미일까. 【이, 이따위. 이따위 것들······!】 바닥의 시체들이 눈을 부릅뜬 채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지키지 못했던 이들. 머리가 잘리거나 심장이 뚫린 이들. 피를 토하며 죽어간 이들이 우리를 보고 있었다. 김남운의 얼굴이 발작하듯 흔들렸다. 녀석에겐 어울리지 않는 표정이었다. “이제 와서 죄책감이라도 드나?” 부들거리며 나를 올려다보는 999회차의 김남운이 입술을 달싹거렸다. 「“맞아, 난 쓰레기야. 그래서 뭐?”」 초반 회차의 김남운이라면, 분명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김남운도, 999회차에서는 다르게 말한 적이 있었다. 「“······나도 가끔은 생각해. 그곳에서 죽는 건 나였어야 했다고. 대장도 그렇게 생각하지?”」 사이코패스 망상악귀 김남운. 원작을 다 읽은 이후에도, 녀석에 대한 내 평가는 변하지 않았다. [전용 스킬, ‘독해력’이 발동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김남운의 전부는 아닐 것이다. 내가 읽은 ‘멸살법’은 세계의 티끌에 지나지 않을 것이고. 그러니 내가 모르는 김남운도, 분명 존재할 것이다. 누군가를 위해 한 세계의 끝을 볼 수 있는 김남운. 누군가를 사랑하여 4만 년을 방황할 수 있는 김남운. 동료들과의 신의를 지키기 위해 살아가는 김남운. 만약, 그런 김남운이 세상 어디엔가 존재한다면. 그리고 그 김남운이, 999회차의 끝을 본 녀석이라면. 【난, 나는······ 나는······.】 녀석의 망상이 녀석을 좀먹고 있었다. 인격을 교체하며 버텼던 세월들. 가면의 아래에 자리 잡고 있던 청일고교 2학년 김남운의 자아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내가, 내가 죽였어······ 그래, 내가······.】 부들부들 떠는 김남운이 부러진 단검을 쥔 채 울고 있었다. “맞아. 네가 죽였어.” 나는 그 말을 하며 지하철의 뒤칸을 돌아보았다. 「무대화」와 어우러진 이현성의 강철 통로가 보였다. 끝없이 이어진 그 통로가 빼곡한 시체들로 뒤덮여 있었다. 이제는 이름조차 잊어버린, ‘이름 없는 것들’이 울부짖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구하지 않은 사람들이야.” 「새로운 세계에는, 새로운 이야기가 필요하다.」 ‘단 하나의 설화’가 완성되기 위한 대가. 그 알량한 기승전결의 완성을 위해 우리는 살아왔다. [당신의 ‘히든 시나리오’가 완성을 앞두고 있습니다!] [당신의 모든 설화들이 당신의 ‘결’을 원합니다!] [<스타 스트림>의 모든 성좌들이 당신의 ‘결’이 가까워졌음을 느낍니다!] 그리고 이제, 나는 그 빌어먹을 이야기의 끝을 보아야만 한다. 【아, 아아, 아아아······!】 눈의 초점이 흐려진 김남운이 부러진 단검을 자신의 목에 가져다 대었다. [‘무대화’의 규칙 적용까지 15초 남았습니다.] [시간이 모두 경과하면 규칙을 지키지 않은 모든 화신은 절멸합니다.] 유상아와 이길영이 내 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장난감 로봇이 된 3회차의 김남운도 나를 보고 있었다. 만약 이대로 시간이 경과하면 999회차의 김남운은 무대 위에서 죽게 될 것이다. 이 무대는 가짜지만, 이곳에 투입된 녀석의 설화는 모두 진짜다. 그는 이곳에서 죽는다. 그가 죽였던 이들처럼. 혹은 그가 3회차에서 그랬던 것처럼. 자신의 삶을 받아들인 채 비참하게 죽게 될 것이다. 문제는, 그렇게 된다면 ‘끊어진 필름 이론’으로 연결된 3회차의 김남운까지 소멸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둘 수는 없었다. [‘무대화’가 해제됩니다!] 주변의 경관이 바뀌며, 무대가 사라졌다. [끊어진 필름 이론]으로 이어졌던 기억이 흐려지고 있었다. 지하철이 흩어지고, 배우들은 제자리로 돌아갔다. 하지만 999회차의 김남운은 여전히 무릎을 꿇은 채였다. 어떤 이야기는 가짜라도 진짜와 같은 힘을 가지고 있다. 무대는 끝났지만, 원죄는 사라지지 않은 것이다. 황폐하게 너덜거리는 녀석의 설화가 흩어지고 있었다. 나는 여전히 고개를 숙인 녀석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녀석이 쥔 단검을 발로 툭 찼다. “김남운, 너는 구원받을 수 없어.” 그리고 품속에서 [부러지지 않는 신념]을 꺼내 들었다. 형형하게 빛나는 백청의 강기가 울부짖었다. 나는 일부러 모두가 볼 수 있도록 그 검을 높이 치켜들었다. 그리고. [<스타 스트림>의 모든 성좌들이 ‘이계의 신격의 왕’의 죽음을 고대합니다!] 【안돼!】 어디선가 들려오는 끔찍한 절규와 함께, [부러지지 않는 신념]이 무언가를 베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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