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5화
465화
[당신은 대도깨비가 되었습니다.]
[대도깨비의 ‘최종 투표’에 참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메시지를 보며, 비형은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도깨비 왕을 만난 직후 비형의 모습은 많이 바뀌어 있었다. 그는 이제 바람처럼 완전한 인간형의 모습이었다. 어깨를 덮은 백호의 가죽과 노랗게 돋아난 세 개의 뿔에서 느껴지는 설화의 힘.
그는 이제, 완연한 ‘대도깨비’가 되었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바람님.]
[그들에게 갈 셈이겠지?]
비형은 대답하지 않았다. 바람이 말했다.
[모든 도깨비는 최후의 때가 오면 자신의 마지막 이야기를 선택해야 하지. 설령 그 이야기를 이야기하다가, 자신이 죽게 되더라도 말이야.]
[······.]
[자네가 택할 그 ‘이야기’는 승리할 확률이 매우 낮아.]
[압니다.]
[심지어 그들은 다수의 대도깨비와 관리국을 적으로 돌려버렸네.]
[그것도 압니다.]
이 <스타 스트림>에서 관리국의 적이 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모르는 도깨비는 없다.
[그래도, 저는 그 이야기로 세계의 마지막을 보고 싶습니다.]
비형은 자신의 마지막 설화를 선택했다.
*
“독자 씨.”
“포상 휴가 나오신 겁니까?”
“짓궂으십니다. 휴가가 아니라 전역이라 말씀드렸는데.”
“진짜 전역이요?”
“예.”
이현성이 환히 웃었다.
“이제 저 군인 안 할 겁니다.”
나는 이현성의 전신에서 흘러나오는 은빛 설화를 지켜보았다.
어떤 소설은 첫 문단만 읽어봐도 감이 오는 것처럼, 설화도 그렇다.
「결연한 은빛. 오랜 세월에 걸쳐 단련된 견고한 의지.」
‘환생자들의 섬’에서 일권무적 유호성은 말했다. 어떤 설화를 지배하기 위해서는 그 설화를 먼저 이해해야 한다고. 하지만 사람을 완전히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하듯, 설화를 이해하는 것도 불가능하다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각자 나름의 해석을 내놓는 것뿐이다.」
그렇다면 저것이 바로, 이현성이 내놓은 해답일 것이다.
[설화, ‘강철의 지배자’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강철의 주인’이 가진 핵심적인 설화. 마침내 저 설화를 다룰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드디어 이현성이 [강철화]의 최종 단계에 도달했다는 뜻이었다.
“독후감은 못 썼지만, 독자 씨가 책을 읽어보라고 한 이유는 이해했습니다.”
이현성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덧붙였다.
“그건 혹시 999회차 세계선의 이야기입니까?”
나는 조금 놀랐다. 설마 이현성이 거기까지 생각할 줄이야.
“아마 그럴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가 『오즈의 마법사』로 둔갑해 있었다는 건······.”
내가 알기로 <오즈>의 근원 설화는 『오즈의 마법사』다.
그런데, 그 근원을 이루는 설화가 바뀌었다.
그것도, 999회차의 이야기로.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아직 불분명했지만, 짐작이 가는 것은 있었다. 어떤 설화의 근원이 바뀌었다는 게 뜻하는 바는 명백하니까.
[화신 ‘이현성’의 배후성이 당신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예전이었다면 알아채지 못했을, 미묘하게 바뀐 시선.
내가 알던 ‘강철의 주인’의 아우라가 아니었다.
나는 제단이 있는 에메랄드 탑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그곳의 알현실에서 본 거대한 강철검을 떠올렸다.
“현성 아저씨!”
탑 아래쪽에서 공격에 대비하고 있던 일행들이 달려왔다.
“현성 아저씨! 괜찮으세요?”
방방거리는 신유승과 이길영이 이현성의 손을 꼭 붙잡았다.
한발 늦게 달려온 유중혁이 중얼거렸다.
“무사히 전역한 모양이군.”
유상아와 한수영도 한마디씩 거들었다.
“전역 축하해요.”
“중대장 또 필요하면 불러.”
마지막으로 달려온 이는, 가장 멀리서 적의 공습에 대비하고 있던 정희원이었다. 십여 미터 정도 남겨 두고 멈춰선 정희원은 몇 번이고 입술을 달싹이며 이쪽을 보고 서 있었다.
이현성이 미소지었다.
“희원 씨.”
나는 이쯤에서 자리를 피해줘야 하나 고민이 되었다.
고민을 해결해 준 것은 전혀 의외의 인물이었다.
“거기! 감동적인 해후는 나중에 해! 아직 끝난 게 아니란 말야!”
창공에서 [터틀 드래곤]을 소환한 이지혜가 외쳤다.
이지혜의 말이 맞았다. 아직 행성 외부의 성운들은 전열을 물리지 않았다. 아니, 물리기는커녕 오히려 더 많은 전함들이 밀려들고 있었다. 개중에는 행성 파괴, 성운전을 목적으로 제작된 대전함들도 보였다.
“걱정 마십시오, 제가 그냥 두지 않습니다.”
든든한 이현성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실제로 지금도 외부 폭격이 계속되고 있었지만, <오즈>의 방벽은 끄떡도 없었다. 이미 말했다시피 <오즈>에서 ‘강철의 주인’의 설화 역량은 신화급 성좌에 준하는······.
치이이익······.
어디선가 불길한 소리가 들려왔다. 뭔가가 타는 듯 고약한 냄새가 났다.
고개를 들자, 불투명한 강철막의 한쪽 방위가 용접이라도 하는 듯 눈부시게 발광하고 있었다.
무언가가, 이현성의 강철을 녹이고 있었다.
[성좌, ‘정오의 태양’이 행성 <오즈>를 응시합니다.]
순간 이현성의 몸이 빳빳이 굳어지는 게 느껴졌다. 우리를 대신해 행성 전체를 감싼 그는, 저 시선의 격에 그대로 노출된 것이다.
신화급 성좌에 준한다고 해서, 정말 신화급 성좌와 같다는 의미는 아니다.
나는 이현성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러자 성운의 개연성을 나눠 받은 이현성의 떨림이 조금 잦아들었다.
조금 강해졌다고 해서 혼자 싸워서는 안 된다.
저들이 성운이듯, 우리 또한 성운이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거물이 직접 왕래한 것 같군요.”
‘정오의 태양’이라면 나도 알고 있는 수식언이었다. 본래라면, 이곳에 절대 올 수 없는 존재. 그는 무려 성운 <파피루스>의 최고 성좌였다.
그리고 그가 직접 이곳에 왔다는 것은,
[성좌, ‘정오의 태양’이 자신의 의지를 <스타 스트림>에 드러냅니다.]
더이상 그들의 속내를 숨기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성운 <파피루스>가 성운 <김독자 컴퍼니>에게 적대감을 드러냅니다.]
[‘단 하나의 설화’ 후보에 등재된 두 성운이 충돌합니다!]
생전 처음 들어보는 메시지에, 일행들의 표정이 굳어졌다.
뭔가가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성운 <파피루스>가 성운 <김독자 컴퍼니>에 성운전을 선포합니다.]
<스타 스트림>에서 거대 성운이 공식 전쟁을 선포하는 경우는 정말 드물다. 왜냐하면 성운전은 서로에게 좋을 것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런 공식 전쟁을 선포했다면,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제한된 메인 시나리오의 발동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해당 시나리오는 ‘단 하나의 설화’ 후보에 등재된 성운들에게만 발송됩니다.]
+
<메인 시나리오 # 98 ― 후보 결정전 (제한)>
분류 : 메인
난이도 : ???
클리어 조건 : ‘단 하나의 설화’에 등재된 모든 성운들은 지금부터 자유로운 성운전이 가능해집니다. 패널티 없는 선전포고 및 전쟁 선포가 가능해지며, 성운 간의 자유로운 동맹 및 지원 또한 허용됩니다.
후보 결정전에 승리할 경우 <스타 스트림>의 주목을 받게 되며, ‘단 하나의 설화’에 선출될 가능성이 상승합니다.
제한시간 : ―
보상 : 성운 인지도 상승. 성운전과 관련된 신화급 설화 획득.
실패시 : 성운 인지도 감소. 최종 시나리오 자격 박탈.
+
······역시나.
[현재 당신의 성운은 <파피루스>와 전쟁 중입니다!]
[적대 세력의 수장을 물리치십시오.]
[해당 전쟁에서 승리할 경우 승점이 적립됩니다.]
긴장한 일행들이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이제까지와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강대한 적의가 행성 전체를 감싸고 있었다.
[성좌, ‘구원의 마왕’이 성운 <파피루스>를 노려봅니다.]
지금껏 우리는 몇 번이나 다른 거대 성운들과 싸워본 적이 있었다.
<기간토마키아>에서는 <올림포스>와 싸웠고.
『서유기 리메이크』에서는 <황제>와 대적했다.
하지만 그때와 지금은 이야기가 다르다.
<기간토마키아> 때는 개연성 제약이 커서 성좌들이 제힘을 발휘할 수 없었고.
『서유기 리메이크』때는 ‘제천대성’과 심사위원들이 우리에게 힘과 개연성을 빌려주었다.
그렇다면 지금은 어떤가.
[설화, ‘구원의 마왕’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지금, 우리를 도와줄 성운은 있는가.
[거대 설화, ‘마계의 봄’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일행들이 나를 보고 있었다.
모두 결심을 마친 얼굴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이제부터 우리가 싸울 전장이 어디인지를 너무나 잘 아는 눈빛들이었다.
“갑시다.”
누구도 우릴 도와주지 않아도 좋다.
나는 창공을 바라보며 말했다.
“우린 이제 약하지 않습니다. 하늘을 열어주세요, 현성 씨.”
이현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화신 ‘정희원’이 ‘심판의 시간’의 발동을 요청합니다!]
정희원이 먼저 칼을 빼 들었다. [심판자의 검]에 신살의 기운이 감돌았다.
[화신, ‘이현성’이 심판에 찬성합니다.]
일행들의 병장기 위로 이현성의 강철이 덧입혀졌다.
일행들을 지키기 위한, 세상에서 가장 단단한 맹세.
[화신 ‘이지혜’가 심판에 찬성합니다.]
이지혜의 [터틀 드래곤]위로 은빛의 설화 금속이 내려앉았다.
[화신 ‘신유승’이 심판에 찬성합니다.]
[화신 ‘이길영’이 심판에 찬성합니다.]
역시나 은빛으로 물든 키메라 드래곤이 포효하며, 두 아이가 날아올랐다.
[화신 ‘유상아’가 심판에 찬성합니다.]
유상아의 주변으로 은빛 강철을 머금은 연화대가 회전하기 시작했다.
[화신, ‘한수영’이 심판에 찬성합니다.]
어느새 붕대를 풀어헤친 한수영이, 붕대 끈으로 자신의 머리를 묶었다.
[화신 ‘유중혁’이 심판에 찬성합니다.]
초월좌의 격이 담긴 유중혁의 [흑천마도]가 차가운 검광을 발했고.
[성좌, ‘구원의 마왕’이 심판에 찬성합니다.]
나는, [부러지지 않는 신념]을 뽑았다.
.
.
.
[‘심판의 시간’이 발동합니다!]
새카만 밤하늘이 열리는 순간, 일행은 이지혜의 함선을 타고 창공으로 도약했다.
가까워지는 적의 함대. 적어도 육백 척 이상은 되어 보이는 함대 앞에서, 우리는 각자 병장기를 쥐었다.
「그것은 김독자가 아주 오랫동안 그려온 정경이었다.」
제일 먼저 뛰쳐나간 정희원의 검격이 쏟아졌다.
멸망의 심판자 정희원.
내가 아는 가장 강력한 혼돈의 검사.
쿠구구구구구!
콕핏부터 엔진까지 정면으로 꿰뚫린 대함선에서 폭음이 일었다. 곧이어 선체 곳곳에서 크고 작은 폭발이 일더니 그대로 균열이 번졌다. 탑승한 성좌들이 탈출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이지혜의 [터틀 드래곤]이 강습을 시도했다.
콰아아아앙!
폭발을 정면으로 돌파한 함선에는 상처 하나 남지 않았다. 이현성의 설화 금속이 모두를 보호해주고 있었다.
그리고 이지혜가 앞으로 나섰다. 단 한 척으로 백여 척의 함대를 거꾸러뜨릴 수 있는 대군전 최강의 화신.
해상제독 이지혜가 발포를 명령했다.
“아저씨, 가요!”
그 포화의 꼬리를 물고 신유승의 [키메라 드래곤]이 나섰다.
이 전쟁은 수장을 쓰러뜨려야만 끝난다. 그러니 구성원의 숫자가 적은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하나뿐이었다. 속전속결.
비스트 로드 신유승.
충왕 이길영.
내가 아는 가장 완벽한 테이머들이 길을 뚫었다. 신유승의 통제를 받는 [키메라 드래곤]의 브레스가 중형 함선들을 격추시켰고, 틈새를 비집고 날아드는 수십 척의 소형 함선들을 이길영의 벌레들이 상대했다.
“어딜!”
소형 함선의 엔진으로 기어들어간 벌레들이 대폭발을 일으키자, 한순간 전장은 아비규환이 되었다.
더이상 안 되겠다고 생각했는지, 설화급 성좌들이 하나둘 전함에서 기어나오기 시작했다.
[화신, ‘유상아’가 자신의 격을 개방합니다!]
[설화, ‘만다라의 시간’이 발동합니다!]
유상아가 설화를 발동하는 순간, 적측 성좌들의 움직임이 눈에 띄게 느려졌다.
나는 깜짝 놀랐다. 유상아가 석존의 힘을 일부 계승한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정도의 권능이 가능할 줄은 몰랐다. ······무려 시공간의 흐름을 통제하는 능력이라니.
“오래는 못 끌어요.”
“오래 걸리지 않을 겁니다.”
유상아가 벌어준 시간을 딛고, 나와 유중혁, 그리고 한수영이 밤하늘을 달렸다.
[거대 설화, ‘마계의 봄’이 이야기를 계속합니다!]
[거대 설화, ‘신화를 삼킨 성화’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김독자 컴퍼니>를 지켜 준 두 개의 거대 설화.
지금까지 우리는 이 두 설화를 주력으로 싸워왔다.
설화의 아우라가 유성우의 꼬리처럼 남았다. 우리가 지나간 우주로 별자리들이 새겨지고 있었다.
무수한 전함들을 지나쳤음에도, 여전히 수백의 성좌들이 우리를 가로막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주눅들면 그들의 격에 밀려 압살 되어버릴 것이다.
[성운 ‘파피루스’가 거대 설화의 격을 개방합니다!]
이것이 성운 대 성운의 싸움이었다.
“이제 내 차례야.”
본래 한수영의 자리는 망상악귀 김남운이 있어야 할 자리였다.
하지만 그녀는 사라진 녀석의 몫을 충분히 해냈을 뿐만 아니라, 그 이상의 존재가 되었다.
[거대 설화, ‘빛과 어둠의 계절’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마침내 우리의 세 번째 거대 설화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어디선가 환청처럼 들려오는 묵시룡의 울음.
성마대전에 참가했던 <파피루스>의 성좌들이 몸을 떠는 것이 보였다.
[이, 이건······!]
「무대화」와 함께 하늘이 빛과 어둠의 방위로 갈라졌다. 경계가 흐려진 빛과 어둠의 간격을 딛고, 한수영의 신형이 날아올랐다.
등 뒤에 활짝 펼쳐진 ‘심연의 흑염룡’의 날개.
나를 구하기 위해 날아왔던 그때처럼, 한수영의 양손에서 보랏빛 [흑염]이 몰아쳤다.
콰아아아아아!
우리는 그 설화의 폭풍 위에 올라타 진격했다. 설화급 성좌들조차 감당하지 못하는 압도적인 거대 설화의 위용.
묵시룡의 충격파처럼 돌진하는 우리를 막아선 것은, 거대한 하나의 태양이었다.
[성좌, ‘정오의 태양’이 <김독자 컴퍼니>를 응시합니다.]
눈부신 광원의 중심에 검은 인형이 있었다.
바로 태양신 ‘라’의 진체였다.
[너희는 이곳에서 죽는다.]
유중혁의 [흑천마도]가 거친 울음을 터트렸다.
우리가 가진 모든 설화가 울부짖고 있었다. 아무리 나와 유중혁이라도 완전체의 신화급 성좌와 정면으로 대결하는 것은 무리였다.
우리는 고작 3회차였으니까. ······3회차?
[설화, ‘영원불멸의 지옥도’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한때는, 그랬었다.
[‘함께 읽기’를 시작합니다.]
스르르 넘어가는 페이지의 잔영. 주변을 물들이는 지옥도의 풍경과 함께 내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무수한 활자로 이루어진 길, 자신의 오래된 생을 유중혁이 달려갔다.
「41회차의 유중혁이 창을 던졌고.」
「362회차의 유중혁이 권장을 뻗었다.」
「999회차의 유중혁이, 자신의 마도를 휘둘렀다.」
츠츠츠츠츳!
강렬한 스파크가 내 몸을 파고들기 시작했다.
[당신의 격이 당신의 독해력을 감당하지 못합니다!]
서유기에서 나는 잠깐이지만 1863회차의 독해에 도달했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제천대성과 이계의 신격들이 내게 개연성을 빌려주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이것이 신화다.]
쏟아지는 유중혁의 [파천검도]에도, 라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너희는 신화를 넘을 수 없다.]
신화급 성좌를 쓰러트리기 위해 필요한 유중혁의 최소 회차는 1700회차.
힘이 부족했고, 격이 부족했다. 하지만 나는 물러서지 않았다.
“아니, 넘을 수 있어.”
왜냐하면, 우리에겐 아직 설화 하나가 더 남았기 때문이다.
『서유기 리메이크』를 클리어하고 얻었던, 우리의 네 번째 거대 설화.
[거대 설화, ‘잊혀진 것들의 해방자’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다음 순간, 풍부한 설화의 개연성이 내 전신으로 스며들었다.
제천대성, 그리고 이계의 신격과 함께했던 그 설화가 나의 별을, <김독자 컴퍼니>의 맥락 위를 도도히 흐르고 있었다.
[<스타 스트림>이 당신의 격에 크게 놀랍니다.]
[<스타 스트림>이 당신의 격을 재평가 중입니다.]
비릿한 혈향이 코끝을 적셨다. 죽은 이계의 신격의 사체들로 붉게 물든 통천하의 강.
나를 잠식하던 스파크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지옥도의 페이지가 다시 넘어가고 있었다.
······1321회차.
······1582회차.
.
.
.
그리고, 1701회차.
유중혁이 움직였다. 1701회차의 힘을 품은 [흑천마도].
바다를 베고, 태양을 부수고, 신화급 성좌인 포세이돈의 심장을 도려냈던 그날의 유중혁이 눈을 뜨고 있었다.
「그것은, 김독자가 아주 오랫동안 그려왔던 풍경.」
경악한 라가 뒤늦게 자신의 거대 설화를 방출하는 것이 보였다. 라의 눈이 나를 보고 있었다. 녀석의 입이 묻고 있었다. ‘어떻게’.
나는 웃었다.
“어떻게는.”
신화급 성좌를 죽이기 위해서는, 신화급 성좌에 맞먹는 힘이 필요하다.
신화급 성좌. ‘단 하나의 설화’를 시작해 자신의 ‘결’을 얻었거나, 막대한 거대 설화를 쌓아 ‘결’의 코앞에 도달한 존재들.
[절대 다수의 성좌들이 당신의 격에 큰 충격을 받습니다!]
[거대 성운의 성좌들이 당신의 격에······!]
그러니까, 마치 나처럼.
[<스타 스트림>이 당신의 격을 발표합니다.]
[당신의 격은 ‘신화급’입니다.]
가공할 폭음과 함께, 유중혁의 [흑천마도]가 라의 태양을 베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