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7화

457화 시나리오 제한시간은 금일 자정까지였다. 지금이 벌써 9시니, 이제 3시간 남짓 남은 셈. ······대체 시간이 왜 이렇게 빨리 가는 거지? 행복한 시간은 빨리 지나간다더니, 진짜였던 건가. 「앞으로 해결해야 할 불만은 4개. 그리고 남은 시간은 세 시간.」 아무리 생각해도 빠듯했다. 애초에 하루 안에 저 힘든 일을 다섯 개나 해결하라는 것부터 무리였다. 결국 내가 선택한 해답은 다음과 같았다. “비유야.” 서브 시나리오는 도깨비의 관할로 통제가 가능하다. 게다가 실패 대가도 ‘사망’이 아니라 ‘사망(?)’이기 때문에, 설마 날 죽이진 않을 거라 생각하고 싶지만······ 비유가 대답이 없었다. “우리 비유 어디 있니.”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당신의 불행에 킬킬 웃습니다.] [성좌, ‘가장 어두운 봄의 여왕’이 시나리오에 정직하게 임할 것을······.] 채널이 열려 있는 걸 보면 분명 비유가 근처에 있는 건 확실한데. 나는 비장의 수법을 쓰기로 했다. “바앗.” 그러자 허공이 꿈틀, 하고 움직이더니 작은 뿔과 솜뭉치 같은 것이 솟아났다. [아바앗.] 뿅, 하고 머리 위에 나타난 비유가 까르륵 웃었다. 나는 웃지 않았다. “비유야, 미안한데 시나리오 취소 좀······.” [에오바앗.] 에바라는 건지 오바라는 건지 모르겠다. [해당 시나리오의 개연성에 동의한 성좌들이 시나리오 취소를 거부합니다.] ······이거 혹시 현상금 시나리오였나?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이 시나리오는 당신에게 꼭 필요한 시나리오라 주장합니다.]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비겁한 수 쓰지 말라며 당신을 타박합니다.] [성좌, ‘대머리 의병장’이 당신이 진정한 동료라면 의기와 근성으로······.] [성좌, ‘고려제일검’이 그냥 취소를 거부합니다.] ······이럴 때는 아주 죽이 잘들 맞으시는군. “······예에. 알겠습니다.” [성좌, ‘가장 오래된 해방자’가 막내를 응원합니다.] 제천대성은 수식언이 바뀌고 나서부터 뭔가 적응이 안 되었다. 서유기 시나리오가 끝나고 곧장 헤어졌는데, 아마 조만간 다시 만날 수 있겠지. 아무튼······ 누구냐. 누구한테 먼저 말을 걸어야 하지? 당연히 나한테 불만이 많아 보이는 사람이 먼저겠지? 나는 저녁을 다 먹고 한가롭게 모여있는 일행들을 하나하나 살폈다. 그러자 곧장 [한낮의 밀회]가 날아왔다. ―뭘 봐? 일단 한수영은 제끼고. 어차피 쟤 고민은 내가 해결 가능한 게 아닐 거야. ―씹냐? 나는 다음 후보를 계속해서 물색했다. 그다음으로 눈에 띈 것은 유승이와 길영이었다. 볼록 솟은 배를 두들기며 나란히 누워 있는 아이들을 보고 있자니, 마음속 깊은 곳에서 [선악과]가 속삭이는 것 같았다. 「애들 고민이라면 편하게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비겁한 이유를 제외하고라도, 사실 길영이와는 이야기를 좀 나눌 필요가 있었다. [화신 ‘이길영’의 배후성이 당신을 응시하고 있습니다.] 겉보기엔 평소와 같은 모습이지만, 이길영의 격에 희미한 마기가 스며들어 있었다. 지금 이야기하는 게 좋을까? 하지만 이곳은 너무 개방되어 있었다. [성좌, ‘하늘 걸음의 주인’이 당신의 행동을 관찰합니다.] [성좌, ‘물병자리에 핀 백합’이 당신에게 주목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성좌들도 보고 있고. 지금 내가 섣불리 저쪽과 접선했다가, 채널의 성좌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짐작되지 않았다. 그래도 일단 말을 걸어보긴 해야······. [현재 ‘전지적 독자 시점’ 2단계가 발동 중입니다.] ······찌릿, 하고 머리가 울리더니 또 강제로 스킬이 발동되었다. 최근 들어 이런 일이 잦았다. ‘멸살법’을 자주 읽어서 그런 건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두근두근두근두근두근두근두근두근」 그리고,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독자 형이 와서 말 걸어주겠지?」 「지금 오시려나?」 ······응? 「어마어마한 고민을 말해야지」 「진짜 엄청난 걸 말해야겠다」 「······신유승이 나보다 심각한 거 말하면 어쩌지?」 「무조건 이길영보단 더 엄청난 거 말해야지.」 나는 걸음을 멈췄다. ······결단코 아이들이 두려워서는 아니었다. 아무튼, 나는 그 옆에 웅크리고 있는 사람에게 시선을 돌렸다. 「······보고 싶네.」 처연한 얼굴로 먼 하늘을 보는 이지혜가 슬픈 눈을 하고 있었다. 늘 재잘대며 떠들던 녀석이 그런 표정을 지은 것은 간만이었다. 그녀가 ‘보고 싶다’고 말할 법한 사람이 누구인지 나는 안다. 모두에게 첫 번째 시나리오는 악몽이지만, 그녀에겐 특히 그럴 것이다. 아무리 <김독자 컴퍼니>가 있다고 해도, 인간은 다른 인간을 대체할 수 없다. 말없이 다가간 내가 녀석의 어깨를 콕 찌르자, 이지혜가 돌아봤다. “엇, 뭐야, 아저씨. 설거지 다 했어?” “그래.” “흐음······ 혹시 시나리오 때문에 온 거야?” “딱히 그런 건 아니고.” “난 고민 없으니까 안 들어줘도 돼. 다른 사람한테 가봐.” 이런 와중에도 다른 사람을 배려한다. 아무리 아파도, 다른 사람의 고통을 먼저 생각한다. 충무로의 이지혜는 그렇게 자랐다. 그렇게, 어른이 되었다. “언제든 말해도 돼. 나한테 말하고 싶지 않으면 다른 사람이라도 좋아. 하지만 웅크려 놓고 혼자 썩히지는 마.” 내가 그런 말을 할 줄은 몰랐다는 듯, 이지혜가 눈을 깜빡였다. “아저씨, 잘난 척하지 마.” 피식 웃은 이지혜가 주먹으로 내 정강이를 갈겼다. 아무래도 부러진 것 같았다. [현재 당신이 해결한 불만은 1건입니다.] 겨우 이런 대화로 이지혜의 고민은 해결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래도 해야만 하는 말이었다. 맥주잔을 흔들던 이지혜가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으쌰. 그럼 배도 부르겠다 몸 좀 풀러 가볼까.” “술 먹고 운동하는 거 아니다.” “난 괜찮거든?” 휘휘 검을 휘두르는 꼴이, 그 사부에 그 제자다. ······잠깐만. 그러고 보니, 나한테 제일 불만이 많을 인간이 하나 있었지. 나는 재빨리 야영장 주변을 돌아보았다. 그런데, 아무리 살펴봐도 그놈이 보이질 않았다. “야, 귀 먹었냐? 사람이 부르면 말을······.” 딱, 하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내 뒤통수를 갈겼다. 나는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한수영······.” “왜.” “유중혁 어디 갔어?” “유중혁? 방금 전까지······ 어?” 한수영도 그제야 눈치챈 모양이었다. 사실 유중혁이야 본래 혼자서 행동하는 놈이고, 시도 때도 없이 사라지는 녀석이니 딱히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문제는, 그놈 혼자 없어진 게 아니라는 것이었다. 활짝 열린 [X급 페라르기니]의 뒷좌석을 바라본 한수영이 말했다. “······‘은밀한 모략가’도 없어.” * 투명한 봉인구에 휩싸인 ‘은밀한 모략가’가 거친 흙바닥을 나뒹굴었다. 여전히 의식을 잃은 상태였다. 유중혁은 그런 ‘은밀한 모략가’를 잠시 내려다보더니, 조용히 [흑천마도]를 뽑으며 말했다. “깨어 있다는 거 알고 있다.” 그러자, ‘은밀한 모략가’가 천천히 눈을 떴다. 희미한 스파크와 함께 ‘은밀한 모략가’의 전신에 설화의 기운이 넘실거렸다. 일시적으로 설화들이 되돌아오고 있었다. 【짧은 평화를 즐길 줄 모르는 녀석이군.】 “적과 함께 평화를 즐기는 취미는 없다.” 【나를 죽일 셈인가? 그것도 좋겠지. 하지만 그런 짓을 해도 진짜로 나를 죽일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을 텐데.】 사실이었다. ‘은밀한 모략가’ 또한 유중혁. 그를 죽이는 것은 그저 또 다른 세계선을 만들어내는 행위일 뿐이었다. 그럼에도 유중혁은 [흑천마도]를 놓지 않았다. “네가 이 세계선을 망치는 것을 두고 보는 것보단 낫겠지.” ‘은밀한 모략가’가 웃었다. 그들은 유중혁이었다. 서로 다른 삶을 살고 있지만 분명 같은 본질의 유중혁이었고, 그렇기에 누구보다 서로의 생각을 잘 이해할 수 있었다. 【너의 힘만으로 나를 죽일 수 있을 거라 생각하나? 지금의 너는 김독자의 설화 없이 ‘이계의 신격’과 싸울 수 없다.】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네놈을 죽이는 건 간단하다. 그 [봉인구]만 부수면 되니까.” 그 말에 ‘은밀한 모략가’의 표정에 희미한 동요가 스쳤다. 지금 ‘은밀한 모략가’는 999회차의 우리엘이 시전한 불완전한 [묵시록의 봉인구]에 들어 있는 상태였다. “네놈은 일부러 [봉인구]를 해제하지 않고 있겠지. 그걸 부수면, 시공간의 틈새에서 ‘심연을 좇는 사냥개’들이 나타날 테니까.” 잠깐이지만 「영원불멸의 지옥도」에 새겨진 1864회차의 기억을 훔쳐보게 되면서, 유중혁은 ‘이계의 신격’에 대한 일부 정보들을 알게 되었다. 심연을 좇는 사냥개― 틴달로스의 사냥개에 대한 것도 그때 알았다. 세계선의 뒤틀림을 감지하는 청소부들. “녀석들은 90도 이하의 각도가 존재하는 곳에서만 출몰할 수 있지. 보통의 네놈이라면 사냥개 따윈 문제가 안 되겠지만, 지금처럼 약해진 상태라면 이야기가 달라질 것이다.” [흑천마도]에 실린 격의 흐름이 짙어졌다. 유중혁 또한 부상에서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은밀한 모략가’와의 전면전은 무리였다. 하지만 저 봉인구를 깨는 것 정도라면 문제 없었다. 유중혁의 진심을 읽었는지, ‘은밀한 모략가’의 표정도 변했다. 뭔가를 받아들인 듯한 얼굴. 그렇게 유중혁의 [흑천마도]가 움직이려는 순간, “오빠.” 수풀 사이로 누군가가 고개를 내밀었다. “지금 뭐하는 거야?” 놀란 유중혁이 그쪽을 돌아보며 외쳤다. “유미아! 이쪽으로 오지 마!” 유중혁의 얼굴에 낭패감이 스쳤다. ‘은밀한 모략가’에게 모든 기감을 집중한 까닭에, 어처구니 없는 실수를 저질렀다. “일행들에게 돌아가 있어! 여긴 위험하다!” “싫어.” 지금껏 한 번도 내지 않았던, 냉정한 목소리. 유중혁이 얼빠진 목소리로 되물었다. “······뭐?” “지구에 잘 오지도 않으면서 잔소리하지 마. 요 며칠 동안은 같이 있어 주기로 했잖아? 수경 아줌마랑 경란 아줌마는 항상 바쁘단 말야. 복순 할머니 옛날이야기 듣는 것도 지겹고!” 따박따박 말을 쏟아내며 성큼성큼 걸어온 유미아의 모습에, 유중혁은 일순간 판단력이 흐려졌다. 그 틈을 타서 유미아가 ‘은밀한 모략가’의 앞으로 달려왔다. “근데 얘 오빠랑 똑같이 생겼네? 누구야, 너?” 어느새 유미아는 ‘은밀한 모략가’의 지척에 있었다. 유중혁은 초조해졌다. 당장이라도 검을 휘둘러 [봉인구]를 깨버리고 싶었지만 여기서 자칫 잘못했다간 유미아까지 격류에 휩쓸리게 된다. 그가 고민하는 사이, 유미아는 어느새 투명한 [봉인구]의 위로 손을 가져다 대며 천진하게 묻고 있었다. “여기 갇혔어? 꺼내줄까?” 유중혁은 당장이라도 움직여 동생을 떼어 내고 싶었다. 하지만 왜일까. 그럴 수가 없었다. ‘은밀한 모략가’가 유미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주 깊은 동요로 흔들리는 눈동자. 저토록 오랜 세월을 살아온 ‘은밀한 모략가’도 그런 표정을 지을 수 있다는 사실에 유중혁은 놀랐다. 유미아가 채근했다. “얘, 대답 좀 해봐.”
🏠 인덱스 ← 이전 화 다음 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