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6화
426화
······오직 나만이 서유기의 결말을 알고 있다?
뭔가 어디서 본 듯한 소개말이었다.
나는 일단 입장해서 방의 상태를 확인해보기로 했다.
[‘플레이어8’님께서 6731 설화방 대기실에 입장하셨습니다.]
다행히 아직 설화는 시작하지 않은 듯했다.
하긴, 손오공 배역이 없는 마당에 설화를 시작할 수 있을 턱이 없지.
방에 입장하자 주변의 정경이 바뀌며 커다란 원형의 데스크가 나타났다.
데스크의 의자에는 사람 대신 네모난 창이 하나씩 띄워져 있었다. 배역 별 선정 인원을 명시한 창이었다.
[현재 플레이어1이 ‘저팔계’ 배역을 선택한 상태입니다.]
[현재 플레이어2가 ‘사오정’ 배역을 선택한 상태입니다.]
[현재 플레이어6이 ‘삼장법사의 백마’ 배역을 선택한 상태입니다.]
플레이어의 얼굴들은 전부 물음표로 표시되어 있었는데, 아무래도 실제 플레이어의 신상 정보를 보호하기 위함인 듯했다.
그나저나······ 저 많은 플레이어가 있는데 ‘손오공’을 선택한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플레이어8 : 다들 안녕하세요.
다들 잠수 중인 건지 내가 입장했는데도 채팅방에는 아무도 메시지를 띄우는 사람이 없었다. 그때.
―시나리오 마스터 : ㅎㅇ?
―시나리오 마스터 : 무슨 배역하러 오셨?
나는 중앙의 채팅방에 곧바로 메시지를 입력했다.
―플레이어8 : 손오공 배역 아직 비었습니까?
―시나리오 마스터 : ㅇ비었음
―플레이어8 : 특이하네요
―시나리오 마스터 : 원래 하려던 사람이 있었는데 늦는대서.. 손오공 하실?
이 녀석, 말을 끝까지 안 하는 버릇이 있군.
이런 녀석을 시나리오 마스터로 믿고 맡겨도 될까 고민이 되던 찰나, 역시나 내 속을 읽기라도 한 양 메시지가 떠올랐다.
―시나리오 마스터 : 저 장르 잘 알. 시나리오 퀄은 걱정 안 해도 됨.
통 신뢰가 안 가는 말투였다. 나는 일단 몇 가지를 시험해보기로 했다.
―플레이어8 : 방제 말인데요. [은퇴한 SSSSS급 손오공이 되었다].
―시나리오 마스터 : ㅇ 내가 지음
―플레이어8 : 왜 S가 다섯 개나 되죠?
―시나리오 마스터 : 그 정도는 붙여야 어그로 끌림.
······뭘 좀 아는 녀석인가?
중간중간 반말을 하는 게 좀 거슬리긴 하지만.
나는 질문을 계속했다.
―플레이어8 : 손오공이 주인공 맞죠?
―시나리오 마스터 : ㅇㅇ맞음
―플레이어8 : 원작 주인공을 그대로 계승하는 건 식상하지 않나요? 요즘은 조연이나 엑스트라를 주인공으로 만드는 게 트렌드일 텐데
나름 정곡을 찔렀다고 생각했는데, 마스터의 응수는 침착했다.
―시나리오 마스터 : 오 시장 조사 좀 하셨나 보네
―플레이어8 : 좀 훑어본 정도입니다.
―시나리오 마스터 : 님 말대로 엑스트라물이 대세이긴 함. 근데 어차피 1등 하려면 손오공이 주인공이 되어야 됨. 님이 서유기 심사위원이라 생각해보시길
―플레이어8 : 흠...
―시나리오 마스터 : 중요한 건 누가 주인공이냐가 아니라 얼마나 ‘낯선 캐릭터’이냐임. 그리고 지금 엑스트라물 너무 많아
······요 녀석 봐라?
되는대로 지껄이는 것 같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이럴 때일수록 의외로 1등은 정통파 주인공이 되는 경우가 많다.
실제로 페이후의 [진 서유기]도 손오공이 주인공이고.
―플레이어8 : 그래서 ‘은퇴한 손오공’을 주인공으로 하신 건가요?
―시나리오 마스터 : ㅇㅇ
―플레이어8 : 은퇴한 손오공이 뭘 한단 거죠?
―시나리오 마스터 : 아무것도 안 해
―플레이어8 : ??
―시나리오 마스터 : 아 지금 미리 말하면 스포임. 그래서 할 거임 안 할 거임?
고민이 되었다.
―시나리오 마스터 : 안 할거면 빨리 나가고. 어차피 지금 시간도 없음. 5초 안에 대답 안 하면 강퇴
은퇴한 손오공이 주인공이라니 뭔가 궁금하기도 하고······.
[5분 뒤 4차 설화방 목록이 마감됩니다!]
이제 와서 다른 방을 선택하기에도 시간이 촉박하다.
젠장, 어쩔 수 없지.
시나리오야 어떻든, 내가 잘하면 되는 거니까.
―플레이어8 : 하겠습니다.
―시나리오 마스터 : 흠, 그럼 저도 질문 좀
―플레이어8 : 뭐를요?
[시나리오 마스터가 당신을 확인하고 싶어합니다.]
[공개할 정보를 선택하십시오.]
내 정보를 보겠다고?
―플레이어8 : 꼭 보셔야 합니까?
―시나리오마스터 : 그냥 이름만 볼 거임.
······이름이라.
나는 일부 정보를 공개했다.
[플레이어8님은 ‘성좌’입니다.]
[플레이어8님의 수식언은 ‘빛과 어둠의 감시자’입니다.]
[해당 정보는 ‘시나리오 마스터’에게만 공개됩니다.]
시나리오 마스터는 잠시 말이 없었다.
자식, 충격이라도 받은 모양이지.
―시나리오 마스터 : 엥? 님 성좌였음? 왜 이런 후진 방에???
나는 재빨리 답했다.
―플레이어8 : 제가 이래 봬도 싸움 좀 합니다. 은퇴한 손오공 꼭 하고 싶습니다!
―시나리오 마스터 : 뭔가 좀 수상한디
―플레이어8 : 인기 없는 설화를 처음부터 키우는 게 진짜 재미 아니겠습니까.
―시나리오 마스터 : 근데 그 만두는 뭐임?
······만두?
[현재 애완용 ‘무림만두’가 당신과 동행중입니다.]
젠장, 그러고 보니 이 자식도 있었지.
―시나리오 마스터 : 펫은 배역 못 주는데?
―플레이어8 : 그냥 만두입니다. 펫도 뭐도 아니에요.
―시나리오 마스터 : 흠, 곤란한데. 님들 생각은 어떠심??
놀랍게도 시나리오 마스터는 다른 플레이어들의 의견을 구했다.
[플레이어1 님께서 ‘무림만두라면 상관없다’고 말합니다.]
[플레이어4 님께서 ‘마스터 마음대로 하라’고 말합니다.]
[플레이어3 님께서 ‘빨리 게임 하고 싶다’고 말합니다.]
다행히 다른 플레이어들의 반발은 없었다.
―시나리오 마스터 : ㅇㅋ 기왕 하는 거 무림 쪽 PPL 좀 알아보겠음
―플레이어8 : 감사합니다.
―시나리오 마스터 : ㄱㄱ
그리고 잠시 후, 카운트다운이 시작되었다.
5, 4, 3, 2, 1······.
[설화방 ‘은퇴한 SSSSS급 손오공이 되었다’의 이야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설화방의 전개는 시나리오 마스터의 플롯을 따릅니다.]
[설화방의 주요 전개에 심사위원이나 관객들의 간섭이 있을 수 있습니다.]
[‘서유기 리메이크’가 시작됩니다!]
환한 빛살과 함께, 시야가 잿빛으로 물들었다.
《 은퇴한 SSSSS급 손오공이 되었다 》
어둠 속에서 화려하게 등장하는 폰트.
이제 나는 이 이야기의 주인공인 ‘손오공’이 되어 본격적인 플레이를 시작하게 될 것이다.
솔직히 조금 두근거렸다.
내가 진짜로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다니······.
「김 독 자김 칫 국」
[제4의 벽]의 목소리와 함께, 뒤이어 눈앞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프롤로그가 시작됩니다.]
[프롤로그는 회상 장면으로 처리됩니다.]
[해당 구간에서 인물들은 정해진 대사만을 말할 수 있습니다.]
[시나리오 마스터의 내레이션이 시작됩니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삼장 일행과의 오랜 여행 끝에, 손오공은 결국 서방 세계에 도착해 경전을 얻는 것에 성공한다.)
오, 시작인가.
실제로 화면이 바뀌더니, 내 몸은 어느새 손오공의 그것으로 바뀌어 있었다. 주변에 일행으로 보이는 이들이 있었지만, 회상이라 그런지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는 않았다. 그리고 내 입이 멋대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드디어 은퇴인가······ 정말 긴 여정이었다.”
동시에 손오공의 기억들이 눈앞에 스쳐갔다.
삼장법사에게 쫓겨나거나, 저팔계에게 뒤통수를 맞거나, 사오정에게 버려지거나. 도움이라곤 쥐뿔도 안 되는 오합지졸 일행들을 이끌고 혼자서 요괴들과 싸우고 피투성이가 된 기억들······.
이렇게 보고 있자니 뭔가 짠한 느낌이 들었다.
손오공 시점에서의 서유기란 이런 느낌이구나.
그런데 그 순간,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말 여기서 끝낼 셈이냐?】
내려다보니 경전이 말을 하고 있었다.
【정말 너는 이런 이야기에 만족한 것이냐?】
나는 조금 감탄했다.
이런 식으로 전개되는 이야기인가.
경전 위에 계속해서 문장들이 떠오르고 있었다.
【억울하지 않으냐? 너는 비합리적인 이유로 몇 번이나 삼장에게 추방을 당하고 박해를 당했다.】
【어디 그뿐이냐? 너는 네가 짓지 않은 죄 때문에 긴고아로 고문을 당했고.】
【근두운을 타면 순식간에 도착할 수 있는 곳임에도, 불법을 수행한다는 이유로 삼장법사를 지키며 힘겨운 여정을 계속해야 했다.】
확실히 서유기가 손오공에게 좀 가혹한 면이 있기는 하지.
【그런 고행의 결과가 고작 ‘극락세계’로 귀의하는 것이라니, 너는 정말로 억울하지 않은 것이냐?】
듣고 보니 좀 억울한 것 같기도 하다.
【너는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할 수 있다.】
“······모든 것을 다시?”
【이 여정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단 말이다.】
그쯤에서 나는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시발, 이거 회귀물이었나?
내 입이 또 멋대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니, 내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그 고생을 처음부터 다시 하라고?”
【고생하지 마라.】
“뭐?”
【철저히 동료들을 이용하고, 누구도 구원하지 않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오직,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살아가는 ‘마왕’이 되는 것이다.】
그 순간, 경전에서 눈부신 빛이 퍼져 나왔다.
[회상 장면이 종료되었습니다.]
[본격적인 플레이가 시작됩니다!]
아무래도 여기까지가 이야기의 프롤로그였던 모양이다. 지금부터가 제대로 된 에피소드라는 거겠지. 기다렸다는 듯, 에피소드 1의 폰트가 떠올랐다.
그리고 나는 경악했다.
~ Episode 1. 구원의 마왕 ~
······뭐?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내레이션이 시작되었다.
(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지만, 사실 손오공은 한때 ‘구원의 마왕’이라 불리었다.)
이게 뭔 개소리인가 싶었지만, 나는 일단 들어 보기로 했다.
(이 작은 돌원숭이는 멋대로 자신의 목숨을 희생해 남을 구원하는 취미가 있었고, 그 원치 않은 구원으로 많은 존재들은 심적 고통을 받았다.)
(하늘의 뭇 신령 및 보살들이 그를 지탄했으나, 그럼에도 이 돌대가리는 자신의 목숨을 던져 남을 구원하고 또 구원했다.)
아니, 잠깐만.
(하늘의 옥황과 부처는 그러한 손오공의 만행을 더 이상 용납할 수 없다고 여겨, 손오공을 오행산 밑 돌 궤짝 속에 가두었다.)
(그리고 모든 이야기는, 바로 이곳에서부터 시작된다.)
[심사위원 ‘돌원숭이의 왕’이 이 전사(前事)를 좋아합니다.]
[일부 심사위원이 최근 트렌드를 반영한 전개에 가산점을 부여합니다.]
[2점을 획득하였습니다.]
‘최근 트렌드를 반영’했다는 메시지에 눈길이 갔다.
아, 설마 이것 때문에?
[첫 번째 에피소드가 시작됩니다.]
[자유 대사 구간이 시작되었습니다]
[자신의 배역에 맞는 발언으로 흥미진진한 설화를 꾸며보세요.]
나는 부르르 몸을 떨며 정신을 차렸다. 몸 곳곳이 으슬으슬 추웠고, 등이 뻐개질 것처럼 아팠다. 새카만 흙이 주변에서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고, 나는 고개만 간신히 산 밖으로 내민 상태였다.
[현재 당신은 오행산(五行山)에 봉인된 상태입니다.]
아무래도, 나는 오행산 밑에 깔린 모양이었다.
[관객들이 당신의 반응을 궁금해합니다.]
(시나리오 마스터가 당신의 대사를 재촉합니다.)
주인공이 막 회귀한 후의 첫 장면.
소설을 볼 때마다 자주 나온 상황이라 익숙하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내가 그 상황이 되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전혀 감이 오지 않았다.
일단 뭐라도 말해보기로 했다.
“여긴 어디지? 난 분명 경전을 가지고 돌아가고 있었는데?”
평범한 사람이 이딴 혼잣말을 할 리가 없었다.
“······오행산? 맙소사, 설마 회귀한 건가?”
그런데도 이딴 대사를 잘도 지껄이고 있는 내 자신이 믿기지 않았다.
[관객들이 당신의 상황을 이해했습니다.]
(시나리오 마스터가 당신의 대사 감각에 고개를 끄덕입니다.)
(시나리오 마스터가 당신을 인정합니다.)
빌어먹을,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심정이다.
[일부 관객들이 다음 상황을 기대합니다.]
나는 서유기의 다음 내용을 떠올렸다.
원작에 따르면, 손오공은 오행산 밑에서 오백 년의 세월을 기다리게 된다. 그렇게 5분이 지나고, 10분이 지났다.
······에이, 설마?
(멀리서 들려오는 떠들썩한 목소리에, 손오공은 귀를 기울였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원작대로라면, 손오공이 처음으로 만나게 될 이는 삼장법사일 것이다.
(눈앞에 다가오는 익숙한 인물들을 보며, 손오공은 오래된 기억을 떠올렸다.)
두 명의 아이가 나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귀여운 법의를 갖춰 입고, 장난감 같은 관을 쓴 두 아이.
(처음으로 삼장을 만났던, 그날의 기억.)
(손오공은 오래된 추억에 젖었다.)
천천히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다.
희미하게 느꼈던 기시감들이 현실이 되고 있었다.
웅웅거리는 [제4의 벽]이 묻고 있었다.
「정 말 몰 랐 어 ?」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다섯 개의 S를 처음 본 순간 스쳤던 예감. 아닐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마음 한편으로는 기대하고 있었던 그 마음.
나는 이를 악문 채 흐려지려는 시야를 간신히 바로잡았다.
“아, 저기 있다. 저 아저씬가 보네.”
“내가 물어볼게.”
세상에서 가장 작은 두 명의 삼장.
내 머리채를 잡은 이길영이 나를 향해 묻고 있었다.
“네놈이 ‘구원의 마왕’ 손오공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