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2화
422화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건데?”
한수영의 말에, 비형의 고개가 축 처졌다.
“큰소리 뻥뻥 치더니 입구 컷이라니······ 어이 도깨비, 대답 좀 해보라니까?”
[그게······ 후······.]
결론부터 말하면, <김독자 컴퍼니>는 ‘마지막 시나리오’로 가지 못하고 지구로 되돌아왔다. 이유는 ‘자격이 부족하다’는 것.
[아무래도 대도깨비들이 손을 쓴 것 같습니다.]
“그렇게 말하면 다야? 시간 낭비한 우리 입장은 뭐가 돼?”
[······보상금은 줄 테니 너무 채근하지 마시죠.]
투덜거리는 비형이 주머니를 뒤지는 동안, 한수영은 한숨을 내쉬며 일행들을 둘러 보았다.
우여곡절 끝에 지구로 되돌아오긴 했지만, 다들 제정신이 아니었다.
“이번엔 진짜로 죽었을지도 몰라······ 미안해요 형······ 내가······ 내가 자격이 없어서······ 계약을 안 해서······.”
이길영은 아까부터 몸을 웅크린 채 이상한 말들을 중얼거리고 있었고, 신유승은 명상이라도 하듯 눈을 감은 채 관자놀이에 양손 검지를 대고 있었다. 이지혜와 정희원은 [공단]의 아일렌에게 이현성을 데려가느라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집은 그대로네. 아줌만 청소도 안 하나.”
한수영은 낡은 소파 위의 먼지를 쓸어내며 중얼거렸다.
이 집은 한때 그녀와 유상아, 이수경이 함께 머물렀던 집이었다. 김독자가 없던 3년 동안 살았던 장소······.
그녀의 짧은 상념은 이어서 들려온 벨 소리와 함께 사라졌다.
[흑염]을 움직여 원격으로 문을 연 한수영이 피식 웃었다.
“······혹시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도 설화로 있나?”
“오랜만이다, 수영아.”
이수경은 어지러운 집안 꼴을 살펴 보더니 고개를 휘휘 저었다.
“너는 예나 지금이나 그대로구나. 사람이 환기는 하고 살아야지.”
“나 지금 막 돌아왔거든? 그것도 몇 년 만에······.”
한수영은 거기까지 말하다 흠칫했다. 그녀는 ‘환생자들의 섬’에서 수십 년의 세월을 보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섬 내부의 시간이었다. 바깥에서는 정확히 얼마의 시간이 지났는지 알 수 없었다.
이수경은 간단한 손짓으로 집안의 모든 창문을 열어젖힌 뒤 퀴퀴한 먼지들을 집 밖으로 내보냈다. 그러면서도 그녀의 눈은 거실 바닥에 늘어진 일행들을 훑고 있었다.
슬그머니 일행들을 가린 한수영이 흠흠 헛기침을 하며 물었다.
“저, 혹시 정희원이 말했어?”
“뭘 말이니?”
한수영은 슬그머니 입술을 깨물었다.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감이 오질 않았다.
“그게, 여기 지금 김독자가 없잖아?”
“흐음, 그렇구나. 방금 알았네.”
괜히 말 꺼냈다 싶었지만, 이미 엎지른 물이었다.
한수영은 두 눈을 질끈 감은 채 말했다.
“왜 김독자가 여기 없냐면······ 나랑 유중혁이랑 정희원이 아줌마 아들을 구해보려고 영혼의 한타를 했는데······.”
“요점만 말하렴.”
“응, 사실 아줌마 아들이 누구랑 어딜 좀 갔어. 근데 그게······.”
“혹시 저걸 말하는 거니?”
한수영은 이수경의 손가락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벽걸이 텔레비전에서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새카만 하늘 위에 떠 있는 흰 코트의 사내와, 그의 손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김독자의 모습.
―특보! <김독자 컴퍼니> 대표이사 납치!
한수영은 입을 딱 벌린 채 중얼거렸다.
“······뭐야 저거?”
대체 어떻게 된 건지, 지구의 언론들이 벌써 이 일을 알고 있었다.
여전히 한가로운 표정으로 화면을 보던 이수경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 녀석, 인기가 많네.”
“아줌마. 지금 저거 되게 심각한 거거든?”
“저거 유중혁 군인 것 같은데. 뭐가 심각하다는 거니?”
“저게 유중혁이 아니니까 문제지.”
한수영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런데 텔레비전 화면이 갑자기 멋대로 되감기더니, 똑같은 장면을 방송하기 시작했다.
―특보! <김독자 컴퍼니> 대표이사 납치!
이건 또 뭔가 싶어 돌아보니, 넋이 나간 채 리모콘을 꾹꾹 누르는 유중혁이 보였다. 몇 번이고 뒤로 감기를 눌러서 같은 장면을 반복하고 있는 유중혁의 모습. 한수영이 물었다.
“······너 괜찮냐?”
“······.”
“그거 돌려도 회귀 안 되거든? 이제 회귀하는 법도 잊어버린 거냐?”
유중혁은 한수영의 말을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마치 ‘은밀한 모략가’의 모습을 각인하려는 것처럼 이글거리는 유중혁의 동공. 자신의 패배를 인정할 수 없는 회귀자의 격이 스멀스멀 흘러나와 거실 공기를 후텁지근하게 만들었다. 한수영이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제기랄, 저 영상은 대체 어떤 놈이 뿌린 거지······.”
[험험.]
고개를 돌리자 헛기침을 하는 비형이 있었다.
“······아직 안 갔냐?”
[여기 보상금.]
그러고 보니 보상금을 받는 것을 잊고 있었다. 한수영이 손을 내밀자, 비형의 자그마한 손이 500코인을 올려놓았다.
“지금 장난치냐?”
[그게 요즘 서울 관리국 재정 상태가 안 좋아서······ 그리고 신경 써야 할 일이 워낙 많다 보니······.]
비형은 휘파람을 불며 하늘 저편을 향해 흘끗 눈길을 보냈다.
맑아야 할 서울의 하늘이 불길한 황색과 적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새카맣게 소용돌이치는 [그레이트 홀]과 벼락처럼 내리치는 개연성의 스파크.
한수영이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서울에 무슨 일 있어?”
“얼마 전부터 하늘이 저꼴이야.”
이제 서울은 주력 메인 시나리오 지역이 아니다. 그런데도 저런 세기말적 현상이 벌어진다는 것은······.
[묵시룡의 영향입니다.]
비형은 씁쓸한 표정으로 하늘을 보더니 품속에서 길쭉한 곰방대를 꺼내 입에 물었다. 그 모습이 같잖았는지 한수영이 곰방대를 빼앗으며 다그쳤다.
“그건 뭔 개소리야? 묵시룡의 영향이 왜 여기까지 와?”
[모르는 겁니까? 김독자가 당연히 알려줬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놈은 제일 중요한 정보는 안 알려줘.”
품속에서 자연스럽게 두 번째 곰방대를 꺼낸 비형이 곰방대에 불을 붙이며 말했다.
[묵시룡의 부활은 대멸망의 첫 번째 단추입니다. 일단 녀석이 깨어나면 세계선은 끝을 향해 달려가는 거라고 볼 수 있죠. ······이래서 내가 ‘마지막 시나리오’로 빨리 가자고 했던 건데.]
“······마지막 시나리오로 못 가면 어떻게 되는데?”
[말 그대로 멸망하는 겁니다. 당신들도, 나도, 이 세계도.]
그 담담한 선언에, 한수영이 어이없다는 듯 쏘아붙였다.
“아니 뭐 그런······ 이 세계가 멸망하면 ‘마지막 시나리오’가 대체 무슨 소용이 있어? 왜 그딴 시나리오를 짜는 건데!”
[대멸망은 도깨비가 짜는 시나리오가 아닙니다. 그저 그렇게 되도록 만들어져 있는 것이죠. 그리고 대멸망이 존재하기에, ‘마지막 시나리오’도 비로소 의미를 갖는 것입니다.]
비형은 회한 가득한 얼굴로 먼 하늘을 바라보았다. 황급히 어딘가로 향하는 성단의 움직임. 하늘의 별들이 유성처럼 멀어지고 있었다.
*
【오오오오오오!】
【아아아아아아아아아!】
‘이계의 신격’들이 새카만 격을 발산하자, 은가이의 숲은 완연한 칠흑에 휩싸였다.
넝쿨 속에서 나를 꺼낸 꼬마 유중혁들이 전후좌우로 나를 둘러쌌다. 꼬마 유중혁 [999]가 말했다.
“김독자를 지켜라.”
“내가 누누이 말했지. 이놈 사고 칠줄 알았다.”
“역시 처음에 죽여 없앴어야 했다.”
무시무시한 말을 내뱉으면서도, 모든 유중혁들은 일제히 [진천패도]를 쥔 채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다가오는 촉수들을 베어내면서, 유중혁들은 조금씩 전진했다.
충격적인 것들을 본 직후라서 그런지 전신에 냉기가 감돌았다. 꼬마 유중혁 [999]가 자신의 검은색 코트를 내게 덮어주었다.
“내가 책을 읽으랬지, 언제 이 녀석들을 건드리라고 했나?”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999]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네놈.”
【오오오오오오오!】
포효하는 ‘이계의 신격’들의 진언이 하늘을 쩌렁쩌렁 울렸다. 숲의 벌레들이 진액을 토하며 죽어갔고, 심지어는 자기들끼리도 상잔이 일어나는 중이었다. [999]가 침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래도록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한 자들이다. 너는 그들을 건드렸어.”
‘이계의 신격’들이 폭주하고 있었다.
【내놔내놔내놔내놔내놔】
【김독자김독자김독자김독자김독자】
더욱 심각한 것은, 모든 ‘이계의 신격’들이 같은 감정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는 것이었다. 내 존재를 눈치챈 일부 상위 신격들은 나를 향해 거침없는 적의를 발산해댔다.
【빌 어 먹을 성 좌 가 우 릴 엿 보 았 다】
【죽 여 없 애 라】
【모 략 의 손 님 이 라 도 용 서 치 않 는 다】
“물러나라, 샨타크의 족속들이여!”
“다가오면 모두 베어버리겠다.”
꼬마 유중혁들이 일제히 격을 발출하며 저항했지만, ‘이계의 신격’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한 걸음씩 다가오며 아득한 격을 내뿜는 신격들이 포효하듯 소리쳤다.
【모 략 이여! 우 리는 더 이상 기다 릴 수 없 다!】
【언 제까 지 기다려 야 하는가. 세 계선의 끝이 다 가오 고 있다!】
나는 그들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이 세계선의 끝.
그들 역시 ‘마지막 시나리오’를 자각하고 있는 것이다.
【이 세 계는 우리를 이 해 해 야 한다.】
“물러나라!”
다가오는 촉수들의 기세가 더욱 강맹해졌다. 이윽고 그 격이 꼬마 유중혁들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을 때.
숲이 갈라지며, 녀석이 나타났다.
누구도 막아내지 못한 촉수들을 가로지르며 걸어오는 존재. 그 걸음걸음에 영겁의 고독과 1863회차의 세월이 묻어 있었다.
한때 그의 이름은 유중혁이었고.
이제는 ‘은밀한 모략가’였다.
모든 세계선의 슬픔을 아는 존재.
그 압도적인 숭고 앞에 이계의 신격들이 무릎을 꿇었다.
【위 대 한 모 략 이 시 여.】
하지만 모두가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자신의 존재가 무화되어가는 고통 속에서도 의견을 굽히지 않는 신격들이 있었다.
【위 대 한 모 략 이 여 이 제 우 리 는 기 다 릴 수 없 습 니 다.】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한 자들이 통곡하고 있었다. 분노하고, 슬퍼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분노와 슬픔은 이해되지 못했다. 그것들은 이 세계선의 것이 아니었고, 기존의 ‘설화’로는 이야기되지 않았다.
그들의 분노를, 슬픔을, 비애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노력이 필요했다.
【우 리 는 이해 받 고 싶 습 니 다.】
【우 리 도 설 화 가 되 고 싶 습 니 다.】
이해하기 위해 노력해야만 하는 이야기는 설화가 될 수 없다.
자신을 내던져야만 느낄 수 있는 이야기는, 소비되지 못한다.
‘은밀한 모략가’가 입을 열었다.
【너희는 이해받지 못할 것이다.】
그들 하나하나를 섬세한 눈길로 돌아보며, 그 모든 존재들을 살피며 잔혹한 진실을 전하고 있었다.
【이 <스타 스트림>이 너희를 ‘공포’라 부르기 때문이다. 이 세계가 너희를 질서를 무너뜨리는 혼돈으로, 무엇으로도 이해되지 않는 재앙으로 묘사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제야, ‘은밀한 모략가’가 이들의 편에 선 이유를 이해하고 있었다.
「이미 모든 결말을 아는 존재가, 어째서 그 모든 이야기를 다시 한번 반복하는가?」
생각해 보면 의문의 해답은 간단했다.
「자신이 본 결말이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에.」
원작에서 유중혁은 성좌들과 함께 ‘이계의 신격’들을 물리쳤다.
그는 시나리오의 끝에 도달했고, <스타 스트림>을 부쉈다.
【너희는 성좌들과 같은 하늘에서 빛날 수 없다. 이 세계의 주역이 될 수도 없다. <스타 스트림>이 존재하는 한, 너희는 언제나 ‘이계의 신격’일 뿐이다.】
하지만, 그가 원하는 것은 얻지 못했다.
그리고 이제 ‘은밀한 모략가’가 된 유중혁은, 다시 한번 같은 전장에 섰다.
【멸망의 전쟁이 시작될 것이다. 별이 떨어지고, 세계가 무너지며, 모든 설화들이 소멸하는 최후의 멸망이 시작될 것이다.】
멀리서 나를 보는 ‘은밀한 모략가’의 눈이 보였다.
새카만 동공 속에서 회전하는 [현자의 눈].
【위대한 모략이시여······!】
【오오오오오오오!】
원작의 전개대로라면 이들은 패배할 것이다.
「김독자가 원하는 결말을 위해서, 그들은 패배해야만 했다.」
<스타 스트림>은 폐허가 될 것이고, 하늘의 별들과 고독한 외신들은 기억되지 못한 채 죽어갈 것이다.
패자는 비통하게 죽어갈 것이고, 승자는 승리를 누리지 못할 것이다.
나는 ‘은밀한 모략가’를 향해 걸어갔다.
“······김독자?”
[999]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으나, 나는 돌아보지 않았다.
[소형화]를 해제하자 세계의 눈높이가 달라졌다. [999]가 내게 걸어준 검은색 코트가 내 걸음걸이에 맞추어 흔들렸다.
[<스타 스트림>의 개연성이 움직이고 있습니다!]
[거대한 메인 시나리오의 흐름이 당신에게 깃듭니다.]
덩굴이 걷힌 숲의 하늘로 <스타 스트림>의 은하가 보였다.
한쪽 하늘에는 별들이 환한 빛을 내뿜고 있었고, 다른 쪽 하늘에는 [그레이트 홀]과 불길한 은하가 흐르고 있었다.
절반의 빛과 절반의 어둠.
곧 최후의 전쟁이 시작될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나는 그들 중 한쪽 편에 서서 세계의 결말을 보아야만 할 것이다.
[당신의 두 번째 수식언이 결정되었습니다.]
하늘의 건너편에서 작은 별빛이 반짝였다. 나는 그 별빛을 오래도록 바라보다가, 천천히 지상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계의 신격’들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그들을 마주 보며, 내가 설 자리를 택했다.
[당신의 두 번째 수식언은 ‘빛과 어둠의 감시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