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7화
417화
나는 눈앞의 존재를 찬찬히 훑어보았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고, 호흡이 거칠어졌다. 뭔가가 건드려서는 안 될 기억의 상자를 건드렸고, 어둠 깊숙이 묻어뒀던 상자에서 말들이 흘러나왔다.
「“‘아론다이트’는 어디 있지? 네놈이 가지고 있나?”」
그것이 녀석과 내가 처음으로 대면한 순간이었다.
내 멱살을 틀어쥔 채, 놈은 그렇게 물었다.
「“대답할 생각이 없다면 강제로 알아내는 수밖에.”」
그때와 똑같이 빛나는 황금색 [현자의 눈]이 그곳에 있었다.
머릿속이 지끈거리며 시야가 추상화처럼 뭉그러졌다. 목소리는 계속해서 들려왔다.
「“네가 보여준 ‘그 세계’는, 정말로 존재하는 것인가?”」
.
.
.
「해당 인물은 ‘등장인물’이 아닙니다.」
누구에게나 잊고 싶지만 잊어서는 안 되는 기억이 있고, 어쩌면 내게 그 회차의 기억은 그런 것이었다.
나는 그 회차의 유중혁을 구하지 못했다. 백색의 코트를 입고 새로운 회차를 향해 떠나던 유중혁.
1863회차의 한수영과 나를 남겨둔 채, 환한 빛으로 자유로이 떠나던 그 뒷모습을 나는 단 한순간도 잊어본 적이 없다.
“너는······.”
나는 한참이나 넋을 잃은 채 왕좌의 유중혁을 올려다보았다.
뺨의 흉터도, 마른 볼도, 어둡게 가라앉은 눈빛도.
모두 내가 기억하는 1863회차의 유중혁이었다.
그런데 놀라움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성좌, ‘은밀한 모략가’가 당신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은밀한 모략가?
그 순간에야, 나는 유중혁의 전신에서 피어오르는 불길하고 사악한 기운을 눈치챘다. 마왕들의 그것과는 다른 악(惡). 그것은 <스타 스트림>의 선악으로는 정의되지 않는 혼돈이었다.
입을 떼려는 순간, 내 품에서 뭔가가 환한 빛을 내뿜었다.
[전용 특성, ‘시나리오의 해석자’가 발동합니다!]
[거대 설화, ‘빛과 어둠의 계절’이 당신의 특성에 반응합니다.]
기다렸다는 듯, 설화가 말들을 토해내고 있었다.
두 명의 유중혁이 그곳에 있었다.
「【돌아가라. 너는 아무것도 구할 수 없다.】」
「“······은밀한 모략가?”」
빨리 감기 중인 화면처럼 장면들이 머릿속을 스쳐 갔다. 단편적인 정보들이었지만, 내가 상황을 이해하기엔 충분한 정보이기도 했다.
······그렇게 된 거였나.
조금씩 지금의 상황이 이해가 갔다.
이어서 추락하는 유중혁의 모습, 그런 유중혁을 받아내는 이지혜, 섬을 떠나는 방주의 모습이 차례로 흘러갔다. 다행히 <김독자 컴퍼니>는 무사히 ‘환생자들의 섬’을 탈출한 모양이었다.
[거대 설화, ‘빛과 어둠의 계절’이 이야기를 멈춥니다.]
나는 가볍게 한숨을 돌린 뒤 왕좌 위의 존재를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은밀한 모략가’도 나를 내려다보았다.
[‘제4의 벽’이 강하게 발동합니다!]
심장이 차분하게 가라앉으며 이성이 조금씩 되돌아 왔다.
나는 가볍게 심호흡을 한 후 입을 열었다.
“그 모습으로 날 당황 시키려는 전략이었다면 대성공이라고 말해주지.”
【전에는 존댓말을 쓰지 않았나?】
“유중혁 모습으로 나타났으니 그에 걸맞게 대우해주는 것뿐이야.”
그의 기세에 전혀 꿀리지 않는 내 모습에 ‘은밀한 모략가’가 재미있다는 듯 입술을 움직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말을 계속했다.
“은밀한 모략가. ‘신성한 삼문답’을 제안한다.”
【왜 내가 그걸 받아들여야 하지?】
“당신이 ‘1863회차’의 유중혁일 리 없어. 그건 불가능해.”
【왜 그렇게 생각하지?】
“알고 싶어? 참고로 이유는 세 가지나 있는데 말이지.”
‘은밀한 모략가’의 눈빛에 이채가 스쳤다.
“할 거야, 말 거야?”
【무척 흥미롭지만 공평하지는 않은 제안이군.】
‘은밀한 모략가’는 고요한 눈으로 잠시 나를 바라보았다. 뭔가를 생각하는 것 같기도 하고, 화가 난 것 같기도 한 눈이었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은밀한 모략가’의 왼쪽 눈썹이 크게 꿈틀거렸다. 순간 ‘멸살법’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심각한 결심을 했을 때, 유중혁은 왼쪽 눈썹을 꿈틀거린다.」
‘은밀한 모략가’가 말했다.
【조건을 하나 걸겠다.】
“무슨 조건이지?”
【내가 왜 이곳에 너를 데려왔는지 궁금하겠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궁금하다.
【하지만 너는 그것을 내게 질문할 수 없다. 알려줄 수 없기 때문이다. 어떤 해답은, 스스로 질문을 찾아내야만 해결할 수 있다.】
“그건 뭔 석존 같은 소리야?”
【‘신성한 삼문답’을 받아 주겠다. 너는 지금부터 내게 세 가지 질문을 할 수 있다. 단, “너를 이곳으로 데려온 이유”에 관해서는 질문할 수 없다.】
“그게 조건이야?”
【하나 더, 삼문답을 모두 사용했을 때, 너는 ‘네가 이곳에 와야만 했던 이유’를 알아내야 한다.】
그건 정말이지 예상 밖의 말이었기에, 나는 순간 당황했다.
“알아내지 못하면?”
‘은밀한 모략가’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긴 손가락을 천천히 들어 팔걸이 위에 툭 올려놓았을 뿐이었다.
그것만으로도 등줄기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지금이라면 이길 수 있을까?」
나는 내가 가진 설화들을 하나씩 점검해 보았다.
전설급 설화에서부터 거대 설화에 이르기까지······.
“어리석은 짓은 그만두는 편이 좋아.”
그 말을 한 것은 내 곁에 있던 꼬마 유중혁 [999]였다. 나는 피식 웃으며 녀석을 내려다보았다.
“지금 걱정해주는 거냐?”
“시체를 치우는 게 귀찮을 뿐이다.”
“······너넨 대체 뭐야?”
【질문권을 사용하는 건가? 좋다.】
“아니, 잠깐―”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신성한 삼문답(三問答)이 시작됩니다.
―양측은 세 가지 질문과 대답을 교환할 수 있습니다.
―양측은 각자 한 번씩, 문답의 대답을 거부할 수 있습니다.
―질문과 대답이 온전히 교환되기 전까지, 문답은 끝나지 않습니다.
―첫 번째 질문권을 사용합니다.
곁에 있던 꼬마 유중혁 [666]이 비릿하게 웃는 것이 보였다.
망할 자식들이.
하지만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이 이야길 듣는 것도 나쁘진 않겠다 싶었다.
【그 녀석들은 나의 권속이다.】
“진짜 그 정도만 알려주고 끝내려는 건 아니겠지. 기왕 알려주는 거 좀 더 알려주면 좋겠는데. 대체 뭔 권속이라는 거야. [아바타] 같은 건지, 아니면 마왕들이 가진 권속 같은 건지 제대로 확실히 말해주면 고맙겠는데.”
나는 그게 두 번째 질문처럼 들리지 않도록 최대한 조심하며 지껄였다.
그러자 꼬마 유중혁 [777]이 탄식하며 말했다.
“어지간히 말이 많은 놈이군.”
“너한테 물은 거 아니다.”
【그들은 내 기억을 받은 존재들이다.】
―첫 번째 대답을 얻었습니다.
“[아바타] 스킬 같은 거란 뜻이네.”
【내 차례로군. 내가 ‘1863회차의 유중혁’이 아닌 첫 번째 이유를 말해라.】
“당신이 정말 1863회차에서 온 유중혁이라면, 그 ‘백색 코트’를 입고 있을 리가 없으니까.”
【······왜지?】
“성흔 ‘회귀’는 영혼을 과거로 전송시킬 뿐, 보유 중인 아이템을 함께 전송하진 않아. 내가 준 코트는 1863회차의 유중혁이 회귀하면서 소멸됐어. 그러니 당신이 정말 1863회차라면 그걸 입고 있을 턱이 없지.”
【흥미롭군. 하지만 이건 내가 개인적으로 구한 아이템일뿐이다.】
“유중혁은 흰색 잘 안 입어.”
【······두 번째 질문을 말해라.】
―두 번째 질문권을 사용합니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입을 열었다.
“두 번째 질문. 당신은 ‘1863회차의 유중혁’인가?”
내 물음에, ‘은밀한 모략가’의 안색이 미미하게 흔들렸다.
【······장난치자는 건가?】
“아니, 진지하게 묻는 건데.”
【나는 1863회차를 겪은 유중혁이었다.】
“과거형이네.”
【지금은 그저 ‘은밀한 모략가’일 뿐이니까.】
―두 번째 대답을 얻었습니다.
‘신성한 삼문답’은 예외 조항을 두지 않는 한, 반드시 진실만을 말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곧바로 개연성의 후폭풍에 휘말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은밀한 모략가’에게서 딱히 후폭풍의 징조는 보이지 않았다.
【내가 ‘1863회차의 유중혁’이 아닌 두 번째 이유를 말해라.】
“그쪽이 1863회차의 유중혁이라기엔 모순된 게 너무 많아.”
【무엇이 모순되었다는 거지?】
“당신이 정말 1863회차의 유중혁이라면, 왜 나를 1863회차로 보내 자신을 죽이도록 시킨 거지? 논리적으로 말이 안 되잖아.”
【그래야만 내가 만들어질 수 있었으니까. 간단한 타임 패러독스다. 나는 1863회차의 유중혁이었고, 그곳에서 네가 나를 죽여야만 나는 ‘은밀한 모략가’로 거듭날 수 있었다.】
“꽤 오랫동안 준비한 대답인가봐? 엄청 자연스럽네. 근데 당신 말이 맞다고 쳐도, 내가 임무에 성공한 뒤 그쪽 반응이 영 신통찮던데? 굉장히 놀라는 것 같았다고.”
【······다음 질문을 해라.】
“아니, 이번엔 당신이 먼저 해. 나는 마지막에 하겠어.”
‘은밀한 모략가’는 잠시 나를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
【좋다. 내가 ‘1863회차의 유중혁’이 아닌 마지막 이유는 뭐지?】
“나만 알 수 있는 특별한 방법이 있어. 나한텐 상대방의 내면을 읽는 스킬이 하나 있거든.”
【그래서?】
“그런데 1863회차의 유중혁은, 내가 읽을 수 없는 존재가 됐어.”
나는 1863회차의 유중혁이 다음 회차로 떠나던 순간을 똑똑히 기억한다. ‘등장인물’에서 벗어나며, 내 전용 스킬인 [전지적 독자 시점]에 읽히지 않던 그 모습을.
【그 말은, 내 속내는 읽을 수 있다는 건가?】
“아니, 당신도 읽을 수 없어.”
【그러면?】
“그런데 읽을 수 없는 이유가 달라.”
[‘전지적 독자 시점’의 스킬 발동이 취소됩니다!]
[해당 존재에 대한 당신의 이해도가 턱없이 부족합니다!]
[해당 존재의 격을 당신의 이해도가 도저히 따라가지 못합니다!]
나는 허공에 떠오르는 메시지를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은밀한 모략가’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런 것은 이유로 납득할 수 없다. 너는―】
“마지막 질문을 하지.”
나는 틈을 주지 않고 말을 이었다.
“내가 살았던 행성에는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세 가지 방법』이라는 소설이 있어.”
순간, 주변의 공기가 달라졌다. ‘은밀한 모략가’의 표정이 한없이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마치 당장이라도 나를 도륙할 듯 냉정한 눈빛.
나는 그 기세에 필사적으로 저항하며 말을 이었다.
줄곧, 너무나 묻고 싶었던 질문이었다.
“은밀한 모략가. 당신은 그 소설의 에필로그를 아는 존재인가?”
*
유중혁은 꿈을 꾸었다.
아주 오래되고 낡은 꿈이었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꿈속에서 그는 하얀 코트를 입고 있었다.
손에 딱 들어맞는 [진천패도]. 그 묵직한 칼을 쥔 채, 그는 누군가와 싸우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눈앞의 존재는 그와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검은 코트를 입은 유중혁.
왜 이런 꿈을 꾸는 것인지는 모른다.
‘1863회차.’
어쩌면, 놈을 만났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래서 이런 꿈을 꾸는 것이다.
유중혁은 이를 악물었다. 은밀한 모략가와 격돌하던 순간 느꼈던 압도적인 격의 차이가 지금도 그의 뇌리에 생생했다.
유중혁의 감정과는 무관하게, 기억은 그에게 천천히 스며들어왔다. 그는 1863회차의 유중혁이 되어 검을 휘둘렀다.
「나는 죽는다.」
「나는 회귀한다.」
검이 부딪칠 때마다 유중혁은 1863회차의 절망과 고독을 느꼈다. 이상하게도, 모든 것이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마치 오래전부터 그 감정이 자신의 것이었던 것처럼.
푸우욱!
마침내 두 개의 검이 서로의 배를 파고들었다.
「이 이야기는 이곳에서 끝난다.」
「그럼에도 다시 한 번, 그 모든 것은 처음부터 시작된다.」
검정 코트의 유중혁이 먼저 흩어졌고, 이어서 그의 몸도 흩어지기 시작했다. 기억들이 산개하며, 그가 간신히 이해한 감정들이 그를 떠나가고 있었다. 유중혁은 마지막 힘을 다해 뒤를 돌아보았다.
시야가 흐려져 그곳에 있는 게 무엇인지는 보이지 않았다.
다만 아주 밝고, 눈부신 별을 본듯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그 세계의 ■■가 궁금해졌다.”」
「“다음 회차에서는······.”」
삐이이이― 하는 소리와 함께, 유중혁은 번쩍 눈을 떴다.
헐떡거리는 숨소리. 하얀 병실의 천장이 보였다.
이어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드디어 잠자는 숲속의 왕자님께서 깨어나셨군.”
고개를 돌리자, 한수영과 정희원의 모습이 보였다. 까드득, 하고 사탕을 깨문 한수영이 퉤, 하고 바닥에 막대를 뱉으며 으르렁거렸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말해보실까, 회귀자 나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