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5화

415화 가장 오래된 꿈의 꼭두각시. 몇 번이나 들은 그 말에, 유중혁이 인상을 찌푸렸다. “또 꼭두각시 타령이군. 그게 대체 무슨 뜻이지?” 【그 의미를 헤아리지 못하니 네가 아직 3회차인 것이다.】 “잘난 듯 떠들지 마라. 네가 이 회차에 대해 뭘 안다는 거냐?” 【네놈보다는 훨씬 더 잘 알고 있지.】 순간, 발끈한 유중혁의 오른쪽 눈동자가 황금빛으로 물들었다. [전용 스킬, ‘현자의 눈 Lv.???’을 발동합니다!] 지금의 유중혁은 초월좌였고, 설화급 성좌들과도 싸울 수 있을 정도로 격의 상승을 거듭한 상태. [현자의 눈]이 사용자의 격에 비례해 식별 수준이 상승한다는 것을 고려하면, 그는 이제 성좌의 파편화된 정보도 읽을 수 있어야 했다. 츠츠츠츠츳! 지금껏 그의 [현자의 눈]을 완벽히 방어해낸 인물은 둘이었다. 하나는 예언자인 안나 크로프트. 그리고 다른 하나는 김독자. 하지만 유중혁의 생각이 맞다면, 그가 절대로 읽을 수 없는 존재는 하나 더 있었다. 【3회차 답게 판단도 둔하군.】 ‘은밀한 모략가’의 오른쪽 눈동자에서 유중혁의 그것과 똑같은 찬연한 황금빛이 감돌고 있었다. 오른쪽 시야가 일순간 붉게 물들며, 흘러내린 피눈물이 유중혁의 뺨을 적셨다. [전용 스킬, ‘현자의 눈’이 ‘현자의 눈’에 의해 완벽히 방어됩니다!] [성좌, ‘은밀한 모략가’가 화신 ‘유중혁’을 바라봅니다.] “네놈 따위가 ‘유중혁’일 리가 없다.” 인정할 수 없었다. “어떤 회차의 ‘유중혁’이라 해도, 다른 존재의 ‘시나리오’를 유희로 삼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은 확신이었다. 설령 그가 다른 회차에 존재한다 해도, 몇 번의 회귀를 거친다 해도 변하지 않을 신념에 대한 확신. ‘은밀한 모략가’의 눈동자가 고요히 빛났다. 【네놈 말이 맞다. 지금의 나는 그저 ‘은밀한 모략가’일 뿐이니까.】 그저 은밀한 모략가일 뿐. 그것은 ‘은밀한 모략가’가 몇 번이고 주워섬겨온 말이었다. ‘은밀한 모략가’가 말했다. 【3회차의 ‘유중혁’은 <스타 스트림>을 부수기 위해 존재했지.】 “······잘 아는군.” 강맹한 울음을 터트리는 [흑천마도]를 보며, ‘은밀한 모략가’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아니, 그것은 미소라기보다는 차라리 ‘사이한 입술의 움직임’이라고 표현해야 할 법한 것이었다. 【<스타 스트림>을 부수면 모든 성좌들은 추락한다. 그렇다는 것은, 이 녀석도 죽게 된다는 뜻이지.】 ‘은밀한 모략가’의 시선 끝에 축 늘어진 김독자가 있었다. 마치 당장이라도 숨이 끊어질 것처럼 흔들리는 그 모습에, 유중혁이 달려들었다. 까아아아앙! [진천패도]와 [흑천마도]가 교차하며 검고 푸른 불꽃이 튀었다. 유중혁의 입에서 선혈이 흘렀다. [거대 설화, ‘신화를 삼킨 성화’가 포효합니다!] 그것을 닦지도 않은 채 유중혁은 다시 한번 칼을 휘둘렀다. 불필요한 생각을 덜어내기 위한 움직임이었다. 사고의 프로세스를 단순하게 만들고, 눈앞의 목표에만 집중하기 위한 발악이었다. 하지만 상대는 이미 그런 유중혁의 속내를 짐작하고 있었다. ‘은밀한 모략가’가 놀리듯이 [흑천마도]를 피해내며 물었다. 【왜 김독자를 구하려 하지? 이 녀석도 결국은 네가 그토록 증오하는 ‘성좌’가 아닌가?】 [흑천마도]의 칼날이 희미하게 동요했다. 유중혁이 발산하던 거대 설화의 격이 흔들리자, ‘은밀한 모략가’가 빈틈을 노리지 않고 한 걸음을 내딛었다. 【네 신념대로라면, 이 녀석은 진즉에 죽었어야 한다. 세상에 좋은 성좌 따윈 존재하지 않으니까.】 성좌. <스타 스트림>의 시나리오를 탐하고, 화신들을 관음하며, 세상 모든 것을 설화의 소재로 탐식하는 존재. 엄밀히 말하면 ‘구원의 마왕’은 그런 성좌들 중 하나일 뿐이었다. 그리고 유중혁의 목적은, 그 모든 성좌들을 파멸시키는 것이었다. 하지만 유중혁은 성좌가 된 김독자를 죽이지 않았다. 「왜?」 섣불리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었다. 그렇기에, 줄곧 미뤄왔던 질문이기도 했다. 「왜 유중혁은 김독자를 죽이지 않는가?」 김독자를 둘러싼 무수한 관계들이 유중혁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신유승과 김독자. 이길영과 김독자. 성좌들과 싸우는 김독자. 동료들을 위해 목숨을 거는 김독자. 그래서, 결국 저런 꼴이 되어 죽어가는 김독자······. “김독자는······.” 김독자의 주변에 떠오른 설화의 파편들이 ‘구원의 마왕’으로 살아온 ‘김독자’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유중혁도 물론 알고 있는 설화들이었다. 그가, 함께 살아온 설화들이었다. [바아앗······.] 아주 멀리서 들려오는 비유의 목소리. 그 목소리를 들으며, 유중혁이 입을 열었다. “‘구원의 마왕’은 성좌지만.” 세상에 좋은 성좌는 없다. 그것은 0회차부터 3회차까지 4번의 삶을 살아온 유중혁의 변하지 않는 기치였다. 좋은 별은 추락한 별뿐이고, 좋은 도깨비는 죽은 도깨비뿐이며, 좋은 시나리오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유중혁은, 지금 그런 자신의 신념을 배반하고 있었다. “‘김독자’는······ 성좌가 아니다. 그놈은 그냥 인간일 뿐이야.” 그것이, 말이 안 되는 말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륵. 그리고 어둠 속에서 뭔가가 울었다. 그륵. 그륵그륵그륵. 마치 어둠 그 자체가 울고 있는 것 같은 소리. 아니, 어쩌면 웃고 있는 것 같은 소리였다. 그 어둠의 중심에 ‘은밀한 모략가’가 있었다. 【가장 오래된 꿈의 꼭두각시여. 너는 ‘김독자’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은밀한 모략가’의 손에 쥐어진 [진천패도]가 고독한 울음을 터트렸다. 지금껏 누구도 이해하지 못할 삶을 살아온 자만이 품을 수 있는 검명(劒鳴)이었다. 유중혁은 지지 않겠다는 듯 기세를 끌어 올리며 말했다. “네놈은 뭔갈 아는 것처럼 말하지 마라.” ‘은밀한 모략가’는 그 말에 대답하는 대신 기절한 김독자를 툭, 건드렸다. 그러자 울음을 참고 있던 아이가 눈물을 쏟아내듯 김독자의 몸에서 설화들이 쏟아져 나왔다. 「“나는 유중혁이다.”」 그 말을 되뇌는 어린 시절의 김독자가 있었다. 사촌의 집에서 나와, 최저 시급보다 못한 알바비를 받는 김독자의 모습. 「“나는 유중혁이다.”」 초라하고 뻔한 이야기였다. 흔한 가난, 흔한 불행. 너무나 흔해서 소설로조차 남지 못 할 이야기. 그런 이야기를 살아가는 김독자가 그곳에 있었다. 「“······나는 유중혁이다.”」 그 말을 되뇌며 고등학교를, 대학교를, 군대를, 회사를 전전하는 한 등장인물이 그곳에 있었다. 웹 소설을 읽으며, 주인공에 이입하며, 그 이야기로부터 힘을 얻으며, 감동하거나 분노하거나 슬퍼하며. 「“나는······.”」 김독자는 그렇게 살았다. 유중혁의 ‘설화’를 읽으며, 별 볼 일 없는 일생을 살아남았다. 자신의 불행 대신 유중혁의 불행을 소비하고. 자신의 불행 대신 유중혁의 죽음을 소비하며. 댓글을 쓰고. 이야기에 간섭하며. 「“작가님. 혹시 다음 에피소드는······.”」 【김독자는 태생부터 성좌였다.】 ‘은밀한 모략가’의 위상이 불안해지고 있었다. 마치 깊은 어둠에 감화되기라도 하듯, 하얀 코트의 끝자락이 새카맣게 흩어지고 있었다. 그 코트의 끝자락을 따라, 김독자의 삶도 함께 부서져 나갔다. 【다른 존재의 삶을 소비해, 자신을 연명하는 성좌였지.】 유중혁도 그런 김독자의 삶을 들여다보았다. 언젠가 본 적이 있는 설화들이었다. 유상아가 강제로 끌어들인 ‘도서관’이라는 곳에서, 유중혁은 저 기억의 파편들을 보았다. 【······3회차. 네놈은 아무것도 기억하지―】 “과거의 김독자가 어떻게 살아남았든, 그건 내가 알 바 아니다.” 유중혁의 몸에서 황금빛 아우라가 흘러나왔다. 마치 지금껏 ‘은밀한 모략가’의 이야기를 들은 것은 오직 이 순간만을 위해서였다는 듯이. 천천히 눈을 뜬 유중혁의 전신이 완연한 황금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초월형 5단계의 격이 유중혁의 내부에서 충만한 격을 방출하고 있었다. “중요한 건 이 세계의 끝을 보기 위해 놈이 필요하다는 것.” [흑천마도]에 실린 파천의 결이 달라지고 있었다. “그리고 놈을 죽여야만 한다면, 그건 내가 될 거라는 것이다.” 유중혁의 [허공답보]가 우주를 내딛었다. [‘방주’가 화신 ‘유중혁’을 부르고 있습니다!] [성좌, ‘만다라의 수호자’가 화신 ‘유중혁’을 호출합니다!] 이제 시간은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 [거대 설화, ‘마계의 봄’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거대 설화, ‘신화를 삼킨 성화’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두 개의 거대 설화가 그의 칼날에 깃들었다. 그 위로 그가 잘 아는 빛과 어둠의 격이 함께하고 있었다. 한수영과 정희원이 전한 마력.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화신 ‘유중혁’에게 가호를 내립니다.]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화신 ‘유중혁’에게 가호를 내립니다.] 그 순간 유중혁은 혼자가 아니었다. 상극의 격이 하나의 칼날에 깃들자 [흑천마도]의 영롱한 빛이 파괴적인 설화를 발산하기 시작했다. 유중혁은 그 칼날이 인도하는 길을 따라 달렸다. 그 길의 곳곳에 <김독자 컴퍼니>가 살아온 시간의 모든 국면들이 배어 있었다. 파천검뢰(破天劒雷). 새파란 전격이 유중혁의 칼날을 휘어 감았다. 묵시룡의 전격파가 밀려왔을 때도 줄곧 아껴두고 있었던 파천검도의 오의. 거기에, 유중혁이 전심전력으로 단련해 온 비전이 더해졌다. 파천검도(破天劍道). 비전오의(秘傳奧義). 유성참(流星斬). 저 강력한 <베다>의 로카팔라인 인드라조차 격침시킨 기술. 황홀할 정도로 파멸적인 선을 그리는 그 검격이, 하나의 별을 베어내기 위해 움직였다. 그것은 유중혁의 3회차 전부가 걸린 일격이었다. 【말을 전혀 못 알아듣는군.】 그리고 다음 순간, 유중혁은 보았다. 주변의 시공간이 왜곡되며, 어떤 설화가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었다. 「“네놈들을 반드시 죽일 것이다.”」 그것은 유중혁도 잘 알고 있는 목소리였다. 하늘을 향한 증오의 목소리. 「“몇 번이고.”」 0회차부터 1863회차까지. 총 1864번의 삶이 만들어 낸 설화. 「“다시, 몇 번이고 되살아나서.”」 그것은 영원불멸(永遠不滅)의 지옥(地獄). 「“네놈들을, 모조리 죽일 것이다.”」 검과 검이 부딪치는 순간, 유중혁은 자신이 지워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압도를 넘어 차라리 경외를 느낄 정도의 격차. 유중혁은 그 설화의 면면에 새겨진 절망을, 후회를, 슬픔을, 증오를 이해했다. 이해 할 수 없었다. 그 까마득한 감정의 깊이를, 유중혁은 가늠 할 수 없었다. 그랬기에 유중혁은 무수한 설화 속의 유중혁들처럼 절망했다. 그 설화 앞에서, 그는 ‘은밀한 모략가’의 말처럼 그저 ‘3회차’의 유중혁이었다. 대체 무엇을 더해야, 저 아득한 시간을. 정신을 차렸을 때, 유중혁은 허공을 날고 있었다. 정희원과 한수영이 내준 날개들은 찢어졌다. 반토막난 그의 [흑천마도]는 부서진 그의 삶처럼 회전하며 추락하고 있었다. 천천히 움직이는 [진천패도]가 그의 심장을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혼돈 수치가 급격하게 상승합니다!] [누군가가 ‘은밀한 모략가’의 존재를 경계합니다!] [‘심연을 좇는 사냥개’가 등장합니다!] 이변이 일어난 것은 그때였다. 휘어진 공간의 각도로부터, ‘이계의 신격’만큼이나 불길한 괴생물체들이 등장했다. 마치 훈련된 사냥개처럼 울음을 토한 녀석들은, 마치 가속이라도 한 것처럼 시공간의 법칙을 무시한 채 ‘은밀한 모략가’를 향해 달려들었다. 츠츠츠츠츳······! 【귀찮은 사냥개들이······.】 유중혁을 향해 떨어지던 [진천패도]가 방향을 틀어 사냥개들을 쳐냈다. 하지만 모두 막아내지는 못했다. 유중혁은 그 사냥개가 바로 ‘은밀한 모략가’가 꺼리는 존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사냥개에 물린 ‘은밀한 모략가’는 서둘러 [그레이트 홀]을 향해 멀어지기 시작했다. 그의 손에 쥐어진 김독자도 함께. 유중혁은 힘없이 손을 뻗었지만, 이미 별은 까마득히 먼 곳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그에겐 이제 별을 향해 나아갈 기력이 존재하지 않았다. 꺾인 두 장의 날개가 모래처럼 바스러졌고, 유중혁은 그대로 지상의 어둠을 향해 추락했다. * [이제 출발해야 합니다.] “기다려! 아직 사부랑 아저씨가 안 왔다고!” 강짜를 부리는 이지혜를 보며, ‘방주의 주인’은 곤란한 얼굴로 식은땀을 흘렸다. [89번 시나리오― ‘묵시록의 최후룡’의 종료가 임박했습니다.] 이제 섬의 폐쇄까지 남은 시간은 30초. 아무리 늦어도 20초 안에 이 섬을 떠나야만 한다. 결국 결단을 내린 ‘방주의 주인’이 노를 저으려는 순간. “저기 온다!” 허공에서 뭔가가 떨어져 내렸다. “유중혁!” 넝마가 된 코트. 의식을 잃은 유중혁이 지상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사부! 어떻게 된 거야?” 이지혜가 추락하는 유중혁을 받아 방주로 되돌아왔다. 한수영과 정희원이 다가와 유중혁을 흔들었다. “유중혁! 뭐야, 왜 혼잔데? 김독자는······!” “독자 씨는 어딨죠?” 유중혁은 대답이 없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달은 정희원과 한수영이 허공을 올려다보는 순간, 방주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잠깐, 잠깐만 기다려! 아직 한 사람 안 왔어!” “멈추라고, 씨발!” 그러나 일행들의 말은 밀려온 충격파와 ‘형언할 수 없는 아득함’의 암무에 휩쓸려 사라져버렸다. [시나리오 지역이 폐쇄됩니다!] [워프가 시작됩니다!] 성좌들의 비명. 추락하는 유성우들 속에, 하나의 세계가 저물고 있었다. 거대한 멸망을 막기 위한 작은 멸망. 그 정경 속에, ‘환생자들의 섬’이 영원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안돼! 멈춰! 멈추라니까!” 선명한 빛줄기 속으로 사라지는 방주. 그 방주 안에서 사람들이 손을 뻗었다. 누군가는 주저앉았다. 누군가는 울부짖었다. 그리고 누군가는, 그 모든 것을 지켜보았다. “김독자―!” [시나리오 정산 보상을 획득하였습니다.] [<스타 스트림>의 누군가가 ‘전(轉)’을 완성하였습니다.] [거대 설화, ‘빛과 어둠의 계절’이 탄생했습니다!] 그리고 누구도 원하지 않던 이야기만이, 그곳에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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