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8화

398화 멀리서 경악한 마왕의 표정이 보였다. 바르바토스가 쏜 [멸성탄]의 포화에도 끄떡없는 선체. 별조차 지워버리는 탄환도 거북의 딱딱한 등껍질을 뚫지 못했다. [화신 ‘이지혜’가 지휘를 시작합니다.] [화신 ‘이지혜’가 성흔 ‘유령함대 Lv.10’을 발동합니다!] 열두 척의 유령함대가 밀려든 ‘어툼 투사’들을 파도 삼아 떠올랐다. 일제히 포격을 시작한 유령함대의 포신들. 갑작스런 폭격에 바르바토스가 이를 갈며 외쳤다. [고작 그 정도로······!] 바르바토스의 함선 [나이트 호크]는 단단했다. 미래 기술의 집합체는 아니었지만, 나름 마계의 설화들을 정교하게 모아서 만든 병기. [유령함대]만으로는 상대할 수 없는 적이었다. 하지만 이지혜는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침착한 표정으로 적을 응시할 뿐이었다. 쿠구구구! [유령함대]가 포격을 이어갈 때마다, 하늘을 덮은 함선의 용 머리 선수상이 붉게 충전되고 있었다. [거대 설화, ‘넥스트 시티’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정희원은 그런 이지혜의 모습을 올려다보았다. 이지혜가 대체 어떻게 이곳에 올 수 있었는지, 어떤 세계관을 겪고 여기까지 왔는지 정희원은 알지 못했다. 다만 확실한 것은, 그녀가 ‘카이제닉스 제도’에서 겪었던 비극만큼, 저 아이들도 무언가를 겪어 이겨냈다는 것. [조잡한 설화로 만들어진 배 따위가······!] 에너지 축적을 끝낸 바르바토스 쪽이 먼저 발포했다. 콰아아아아아! 아까보다 두어 배는 강력해진 격발. 이지혜의 함선이 아무리 튼튼하다 한들, 이번만큼은 [멸성탄]을 견뎌내기 쉽지 않아 보였다. 선두에 나가 있던 [유령함대] 너덧 척이 포화의 마력을 견디지 못하고 소멸했다. 그러나 이지혜는 침착하게 기다렸다. 느릿하지만 확실한 속도로 밀려오는 저 포화가, 함선의 코앞에 닥칠 때까지. 조금 더. 조금만 더. [성좌, ‘해상전신’이 자신의 화신을 바라봅니다.] 흩날리는 설화의 부스러기가 이지혜의 뺨을 스쳤다. 연이어 궤멸당한 [유령함대]의 설화가 새하얀 포말처럼 일행들을 덮치는, 바로 그 순간. 이지혜가 검을 내렸다. “발사!” 그리고 사방이 빛살로 물들었다. 광폭한 반동이 선체를 휩쓸었다. 강풍에 풀어 헤쳐진 이지혜의 머리카락이 흐트러졌다. 용 머리에서 뿜어져 나온 설화의 에너지가 사위의 모든 것을 휩쓸어버리고 있었다. 전방을 까맣게 물들였던 [멸성탄]의 포화는 이미 소멸하고 없었다. [다수의 성좌들이 해당 ‘설화 병기’의 개연성을 의심합니다!] 설화 병기 [터틀 드래곤]. 그것은 오래전, ‘해상전신’이 넥스트 시티를 방문했을 때 제작을 의뢰했으나 미처 회수하지 못한 병기의 이름이었다. [다수의 성좌들이 입을 벌린 채 놀라움을 감추지 못합니다!] 굉음과 함께 무언가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고, 마왕의 끔찍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이지혜는 다시 한번 말했다. “발사!” 쌓아둔 울분을 토해내듯이, 흔들리지 않는 목소리였다. 다시금 떠오른 [유령함대]가 일제 포격을 개시했고, [터틀 드래곤]의 메인 포신이 불을 내뿜었다. “발사!” 전장 건너편의 모든 것이 사라지고 있었다. 바르바토스의 함선도, 어둠 투사들도. 정희원과 이현성의 이야기를 비극으로 소비하던 모든 것들에게, 이지혜가 분노하고 있었다. 우리의 설화는 너희들의 유희가 아니라고. 연이은 포화에 이지혜의 신형도 조금씩 비틀거렸다. 하지만 그녀는 쓰러지지 않았다. 그녀는 이제 바다를 두려워하던 소녀가 아니라, 이 배의 지휘관이었다. “발사!” 콰아아아아아아! 포화가 만들어 낸 에너지의 폭발 속에서 바르바토스의 격이 지워져 가고 있었다. 마왕의 설화가 단 하나도 남지 않을 때까지, 이지혜는 포격을 지시하고 또 지시했다. 정희원은 그 광경을 올려다보았다. 저 아이는 지금 무리하고 있다. 츠츠츠츠츳! 전장을 뒤덮은 스파크. 연달아 터지는 굉음을 뚫고 두 아이가 허공에서 내려왔다. 신유승과 이길영이었다. “희원 언니······ 괜찮으세요?” “누나!” 정희원은 아이들의 도움을 받아 이현성을 함선으로 옮겼다. 그리고 선상에서 여전히 포격을 지시하는 이지혜에게 다가갔다. “지혜야······.” [성좌, ‘해상전신’이 남은 자신의 진력을 한계까지 소진합니다.] 상대는 최상위권의 마왕이었다. 아무리 [설화 병기]를 손에 넣었다고 해도, <김독자 컴퍼니>의 개연성을 빌렸다고 해도, ‘해상전신’이 설화급 성좌에 도달했다고 해도······. 이런 이적을 일으키기 위해서는, 반드시 대가가 필요하다. “지혜야, 이제 괜찮아.” 정희원은 이지혜가 무엇에 분노했는지 안다. 전장에 나타난 순간, 이지혜는 이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눈치챘을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까지 힘을 아끼지 않는 것이다. [‘유령함대’가 귀환합니다.] 멀리서 시나리오 메시지가 들려왔다. [마왕, ‘무자비한 역천의 사냥꾼’이 사망하였습니다.] [마왕, ‘무자비한 역천의 사냥꾼’이 국지전에서 패배하였습니다.] 고작 세 명의 화신이 이루어낸 쾌거. 서열 8위의 마왕을 비롯한 네 명의 마왕이, 이 전장에서 목숨을 잃었다. 쏟아지는 환생자들의 환호 속에서, 간접 메시지들이 날아들었다. [절대 악 계통의 성좌들이 믿을 수 없는 결과에 눈을 떼지 못합니다.] [절대 선 계통의 성좌들이 복잡한 표정을 짓습니다.] [중립 계통의 성좌들이 불가능한 전투에 환호합니다.] [다수의 성좌들이 불가능한 시나리오에 대가를 지불합니다.] [후원계의 큰 손이 거액의 후원금을 지불합니다.] [1,100,000코인을 후원받았습니다.] 주륵, 흘러나온 코피를 닦은 이지혜가 배시시 웃었다. 웃으면서도, 울고 있었다. “언니.” [117번째 국지전이 종료됩니다.] [117번째 국지전의 정산이 시작됩니다.] [117번째 국지전은 승자와 패자가 존재합니다.] 정희원은 멍한 눈으로 그 메시지를 올려다보았다. [해당 국지전은 ‘선’의 승리입니다.] + [성마대전 진행 현황] 절대선 수치 : 68 절대악 수치 : 67 혼돈 수치 : 70 + 117번 국지전은 <김독자 컴퍼니>의 계획대로 되지 않았다. 뒤늦게 전장에 참가한 이지혜는 <김독자 컴퍼니>의 ‘성마대전’ 계획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계획이 완전히 실패한 것도 아니었다. [해당 전장에 ‘혼돈’의 힘이 개입했습니다.] [혼돈 수치가 5만큼 상승합니다.] [혼돈 수치가 75를 넘겼습니다.] [혼돈 수치의 증가 속도가 빨라집니다!] [음침한 이계의 신격들이 화신 ‘정희원’을 부릅니다.] [은하 너머의 외신들이 화신 ‘정희원’의 격에 주목합니다.] 정희원은 자신의 양손등에 나타난 무한대의 심볼을 내려다보았다. 새로운 특성인 ‘멸망의 심판자’를 각성하며 얻은 심볼이었다. 김독자도 이 표식에 대한 이야기는 해준 적이 없었다. “······현성이 형?” 늘어진 이현성의 맥박을 짚던 이길영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깜짝 놀란 신유승도 이현성의 가슴에 귀를 대어보았다. 정희원은 그 모습을 보며 참담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현성 씨는······.” 죽었어. 하지만 말을 끝까지 맺을 수 없었다. 그 말을 해버리면, 그 말이 정말로 현실이 될 것만 같았기 때문에. [모든 국지전장이 종료되었습니다.] [시나리오의 혼돈 수치가 지나치게 높아 메인 시나리오가 갱신됩니다.] [시나리오 점핑이 발생합니다.] [연계 시나리오가 발동했습니다!] 그들에게는 애도의 시간조차 주어지지 않는다. <스타 스트림>의 세계에서, 시나리오는 결코 뒤를 돌아보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 [새로운 메인 시나리오가 도착했습니다!] + <메인 시나리오 # 84 ― ‘성마결전’> 분류 : 메인 난이도 : 측정 불가 클리어 조건 : 절대 선도 절대 악도 아닌 누군가가 전장의 선악을 불분명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가장 오래된 선’과 ‘가장 오래된 악’은 확실한 승패를 원합니다. 그들은 단 하나의 ‘대전장’에 승부의 향방을 걸기로 결정했습니다. 거대 설화의 끝을 보고 싶다면, 지금 당장 ‘대전장’에 참가하십시오. 제한시간 : ― 보상 : ‘성마대전’과 관계된 거대 설화, ??? 실패시 : 사망 + [성마대전의 ‘대전장’이 열립니다!] [이 ‘대전장’의 승자는 30포인트의 선악 수치를 획득하게 됩니다.] “······뭐야?” 이지혜의 중얼거림과 함께, 국지전장 전체에 둔중한 땅 울림이 퍼졌다. 츠츠츳, 하며 튀어 오르는 스파크 속에서 도깨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간 작은 전장에서 노느라 심심하셨죠? 지금부터가 진짜 ‘성마대전’입니다!] 하늘과 땅이 격변하며 찢어져 있던 시공간이 하나로 합쳐지고 있었다. 눈을 떴을 때, 정희원과 아이들은 끝이 보이지 않는 대평원에 도착해 있었다. 어둑한 하늘. 붉은 벌판에는 오래전 삭아버린 천사와 악마들의 설화 파편과 두개골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이곳은, 1차 성마대전의 최종 결전이 펼쳐졌던 장소. 각자 다른 국지전장에 참가해 있던 성좌와 화신들도 모이기 시작했다. [성운, <파피루스>가 대전장에 참가했습니다!] [성운, <탐라>가 대전장에 참가했습니다!] [성운, <홍익>이 대전장에 참가했습니다!] [성운, <수호의 나무>가 대전장에 참가했습니다!] “······야, 신유승. 저거······.” “괜찮아. 우리 레벨업 열심히 했잖아.” [거대 설화, ‘넥스트 시티’가 아이들을 보호합니다.] 그저 벌판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기가 죽을 정도의 격. 대체 얼마나 많은 성좌들이 이 대전장에 참가한 것인지, 정희원은 짐작할 수조차 없었다. [상당수의 성좌들이 <김독자 컴퍼니>에게 적의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실체화된 시선은 그것 자체로도 위협이 된다. 정희원은 가누기 힘든 몸으로 선체의 정면에 섰다. 그녀는 <김독자 컴퍼니>다. 그러니, 저런 성운들 앞에서 절대 약한 모습을 보일 수는 없다. 그녀를 향해 가공할 격의 파랑이 다시금 밀려들려는 순간. “정희원.” 누군가가, 그녀의 등을 떠받쳤다. [화신, ‘한수영’이 대전장에 참가했습니다!]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대전장의 성좌들을 위협합니다!] “꼴이 말이 아니네. 머리는 또 왜 그래?” “남 말할 처지는 아닐 텐데 말이지.” 건조하게 웃는 정희원을 향해, 얼굴 곳곳에 검댕을 묻힌 한수영이 눈을 부라렸다. 정희원은 한수영의 뒤를 따라온 성좌를 바라보았다. “우리엘······.”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자신의 화신을 바라봅니다.] 상처투성이의 우리엘이 정희원을 보고 있었다. 희미한 탁기가 낀 날개. 그 모습을 보는 순간, 정희원은 이상하게 마음이 놓이는 느낌이었다. 우리엘은 그녀를 배신하지 않았다. 그저 시선의 교환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괜찮아요, 우리엘.” 우리엘은 입을 다물었다. 정희원은 잠시 우리엘을 바라본 뒤, 말없이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그들은 성좌와 화신. 서로 말하지 않아도 서로가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 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고통스럽게 눈을 감습니다.] 반대편 전장에서도 거대한 게이트가 열렸다. 이제껏 열린 게이트와는 차원이 다른 크기였다. [성운 <에덴>이 대전장에 참가했습니다!] 황금빛 뿔 나팔과 함께 전장에 입장하는 대천사와 발키리들. [성좌, ‘젊은이와 여행의 수호자’가 화신 ‘정희원’을 바라봅니다.] [성좌, ‘정의와 화목의 친구’가 화신 ‘정희원’을 동정합니다.] [성좌, ‘물병자리에 핀 백합’이 화신 ‘정희원’을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 순간, 눈을 내리깔았던 정희원의 동공이 다시금 불타올랐다. 동정이라고? 역겹다. 당신들이 ‘심판의 시간’에 동의만 해주었더라면, 그랬더라면. [성좌, ‘하늘의 서기관’이 대전장에 입장합니다!] 눈부신 광휘와 함께 입장하는 <에덴>의 수장. 정희원은 [심판자의 검]을 꾹 쥔 채 메타트론을 노려보았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다른 한쪽의 게이트에서도 입장을 시작했다. [마왕, ‘지옥 동부의 지배자’가 대전장에 참가했습니다!] 서열 2위의 대마왕, 아가레스와 다른 마왕들이었다. [마왕, ‘검은 갈기의 사자’가 대전장에 참가했습니다!] [마왕, ‘헤아릴 수 없는 엄격’이 대전장에 참가했습니다!] [마왕, ‘격노와 정욕의 마신’이 대전장에 참가했습니다!] 대천사들의 기세에 전혀 꿀리지 않는 최상위권의 마왕들. 그들의 숫자가 늘어날 때마다, 정희원과 아이들의 안색도 어두워졌다. 그제야 이 전장이 어떤 곳인지 실감이 났다. 그들이 상대하는 <성운>들이 어떤 곳인지. 그리고 <김독자 컴퍼니>가 아직 얼마나 작은 곳인지. [대전장의 성좌와 마왕들이 <김독자 컴퍼니>를 노려봅니다.]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강적들. <김독자 컴퍼니>를 겁박하는 성좌들의 기세에, 점점 가빠오는 동료들의 숨소리가 들려왔다. [성운 <아스가르드>가 대전장에 참가합니다!] [화신 ‘안나 크로프트’가 대전장에 참가합니다.] 흠칫 놀란 정희원이 뒤를 돌아보자, 안나 크로프트가 양손을 든 채 그녀를 보고 있었다. “그렇게 경계할 필요 없습니다. 지금은 적이 아니니까.” 그게 무슨 말이냐고 물으려는 순간. [화신 ‘유중혁’이 전장에 참가했습니다.] 하늘의 한쪽이 무너지며 검은 코트의 사내가 등장했다. 오연하게 버티어 선 등. 사납게 울부짖는 [흑천마도]의 검극이 성좌들을 향해 이빨을 드러냈다. 한수영이 한쪽 입꼬리를 실룩거리며 말했다. “또, 또 주인공 행세하네.” “사부!” 단지 한 사람이 나타났을 뿐인데 전장의 분위기가 달라진 느낌이었다. 일행들을 돌아본 유중혁이 말했다. “한 놈 빼고 모두 모였군.” “아니, 모두 모였어.” 모두가 기다린 목소리. 울컥 올라오는 그 마음을 어쩌지 못한 채, 정희원은 그 방향을 돌아보았다. 말하고 싶었다. 저 빌어먹을 성좌들이 이곳에서, 어떤 일을 저질렀는지. “이미 알고 있습니다, 희원 씨.” 하얀 코트의 김독자가, 쓰러진 이현성을 고요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마왕, ‘구원의 마왕’이 대전장에 참가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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