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9화
389화
명계의 정식 후계자가 된다.
스스로 그 말을 하고도 현실감이 들지 않았다.
그런데 내 말을 의심했던 것은 나만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모든 밤을 지배하는 타르타로스의 명왕, 하데스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당신은 <명계>에서 거짓을 고하였습니다.]
발끝이 얼어붙는 차가운 감각과 함께, 죽음이 나를 마주 보았다.
[자식이 되자마자 부모를 속이는 법만 배워 왔구나.]
서늘한 목소리로 나를 일별한 하데스는 옥좌에서 일어나더니 곧장 내게 다가왔다. 당장 자리에서 일어나고 싶었지만 몸이 움직이질 않았다.
신화급 성좌의 격이, 내 전신을 옥죄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사달은 나지 않았다. 코앞까지 다가온 하데스는 유유히 나를 지나쳐 대전 밖으로 나가 버렸다.
가까스로 한숨을 돌린 뒤 고개를 들자, 페르세포네가 턱을 매만지며 웃고 있었다.
[흐으음. 말로만 듣던 부자지간의 갈등······?]
곤란한 얼굴치고는 무척 즐거워 보이는 듯한 말투였다.
[어머니를 사이에 둔 아버지와 아들의 유구한 혈투······.]
······뭔가 지극히 올림포스적으로 오염된 서사다.
페르세포네는 걱정말라는 듯 내 어깨를 톡톡 두드려주었다. 그러자 하데스의 격으로 굳어 있던 전신의 근육이 풀리는 느낌이 들었다.
[너무 심려치 말거라. 네 아비는 원래 저런 성격이란다.]
“······.”
[하지만 먼저 거짓을 고한 네 잘못도 크구나. 너는 애초에 <명계>에 남을 생각 따윈 없지 않느냐?]
너무 정곡이었기 때문에 할 말이 없었다. 실제로 나는 하데스를 이어 이곳의 왕이 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내가 원하는 것은 명계의 힘이지 명왕의 자리가 아니니까.
아마도 하데스는 그런 내 속셈을 진즉에 눈치챘을 것이다.
[저치의 화가 풀릴 때까지는 시간이 조금 걸릴 것 같구나.]
“죄송합니다.”
[죄송할 것은 없다. 어차피 네가 이곳에 남지 않을 것이라는 것은 하데스도 나도 알고 있던 사실이니까.]
페르세포네의 눈이 고운 초승달을 그렸다.
[괜찮다면 잠깐 이 어미와 식사라도 하자꾸나.]
*
간만에 마주한 페르세포네의 식탁은 여전했다. 먹음직스레 구워진 스테이크와 대접 위로 켜켜이 쌓인 샐러드. 겉보기엔 흔히 먹는 음식들처럼 보이지만, 저것이 평범한 음식이 아니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다.
[강호를 평정한 검후의 용기]
[평생을 서가에서 보낸 3서클 마법사의 지혜]
[검기도 검강도 쓰지 못하는 소드마스터의 의지]
나는 뭔가 잘못 본 건가 싶어서 다시 한번 메뉴들을 읽어 보았다.
[어서 들거라. 메뉴가 마음에 들지 않느냐?]
“······그런 것은 아닙니다만.”
[너도 성좌가 되었으니 제대로 된 설화들을 먹지 않으면 안 된다. 인간들이 먹는 음식만으로는 충분한 영양을 섭취할 수가 없어. 어른이 되어서까지 편식하는 버릇을 못 고친 건 아니겠지?]
저렇게 말하니 진짜 엄마 같다.
[네 어머니가 너를 많이 걱정하고 있다. 밥은 제때 먹고 다니는지, 잠은 잘 자고 있는지.]
그 말에 포크로 가던 손이 멈칫했다.
“제 어머니를 만나 보셨습니까?”
[후후, 가끔 연락하는 사이란다.]
페르세포네라면 충분히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심지어 내 눈앞에 놓인 푸아그라는 다음과 같은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자식을 떠나보낸 어머니의 마음]
······설마 이게 우리 어머니의 마음은 아니겠지.
나는 포크를 내려놓고 말했다.
“예전에 드시던 것들과는 음식의 종류가 달라지셨군요. 전에는 소드마스터나 대마법사 같은 것들이 있었는데요.”
[‘환생자들의 섬’이 열렸으니, 모처럼 별식을 즐겨 보아야 하지 않겠니? 이래 봬도 미식협의 일원인데 늘 같은 음식만 먹을 수는 없지.]
페르세포네가 포크와 나이프를 움직였다. 가볍게 잘린 설화들이 육즙을 뿜으며 향긋한 문장들을 토해냈고, 페르세포네는 우아한 손짓으로 그 음식들을 입안 가득 머금었다. 방금 그녀가 먹은 것은 [검기도 검강도 쓰지 못하는 소드마스터의 의지]였다.
[그리고 어떤 설화들은, 애써 소비하지 않으면 사라지게 된단다.]
죽어가는 설화들이 포크 끝에서 부스러졌다.
오랫동안 누구도 찾지 않았던 설화들은, 먹히는 그 순간까지도 페르세포네의 혀끝에서 황홀한 문장들을 토해냈다.
복잡한 심경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는 나를 보며, 페르세포네가 웃었다.
[네가 성좌들의 식성에 불만이 많다는 건 알고 있단다. 화신들의 희로애락을 너무나 쉽게 소비하는 우리가 마음에 들지 않겠지.]
“······.”
[하지만 우주의 모든 사건은 설화로 남을 수밖에 없어. 너도, 나도. 그리고 다른 모든 화신들과 성좌들도. 결국 무언가에 의해 소비되는 것은 모두 마찬가지란다.]
살아있는 모든 것의 삶은 <스타 스트림>에서 이야기가 된다.
[어차피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면, 최대한 다양한 설화의 스펙트럼을 보존하는 방향으로 행동하는 것이 성좌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
다양한 설화들을 남기고, 다양한 이야기를 보존한다.
어쩌면 페르세포네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그녀는 그녀 나름대로의 원칙을 가지고 <스타 스트림>에서의 정의를 추구하고 있는 것이다. 아마 그녀가 ‘미식협’의 일원으로 활동하는 것 또한 그러한 이유 때문이겠지.
하지만 자신의 설화 철학을 말해주기 위해, 나를 이 자리에 초청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제게 정말 하시고 싶은 이야기가 뭔가요?”
[사실 하데스는 네가 이곳에 남기를 원하지 않는단다.]
“······제게 후계를 넘겨주길 원하지 않는단 말씀이십니까?”
[그것과는 달라. 굳이 말하자면······.]
페르세포네는 중간에 있는 음식 접시에서 음식을 잘라내며 말했다.
[하데스, 그리고 나는······ 네가 ‘명왕’에서 끝나기를 바라지 않는단다.]
“그 말씀은······.”
[올림포스는 몰락했고, 명계 또한 예전의 위상을 잃었다. 이제 와서 ‘명왕’의 자리에 만족하는 것은, 스러져가는 설화의 끄트머리에 자신의 이름을 올려놓는 일에 지나지 않아.]
“명계는 좋은 설화입니다.”
[또한 몰락해가는 설화지.]
실제로 <명계>를 둘러싼 힘은 예전과 같지 않았다. 낡고 오래된 설화. 회자 횟수가 줄어든 이야기는, <스타 스트림>에서 그 힘을 조금씩 잃게 된다.
묘한 눈으로 음식들을 내려다보는 페르세포네의 눈에는 깊은 우울이 담겨 있었다. 여러 설화들을 향유하면서, 어쩌면 페르세포네는 늘 생각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언젠가 그와 그녀의 <명계> 또한, 시간의 뒤안길에 묻혀 ‘환생자들의 섬’에 박제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스타 스트림>에서 살아가는 이상 그것은 당연한 세월의 섭리겠지.]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불가해하리만치 지독한 슬픔을 느꼈다. 그것은 이제껏 느껴본 적 없었던 종류의 슬픔이었다.
페르세포네와 하데스가 사라진다.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나의 기억 속에서. 그들이 쌓아온 이야기가 영원히 사라진다.
나는 성좌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들이 행하는 일들이 싫고, 그들이 세상을 관음하는 방식이 싫다. 그런데 왜 나는
페르세포네와 하데스가 사라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그 사실을 인정하기 싫어서인지, 나도 모르게 거친 목소리가 나왔다.
“왜 제게 잘해주시는 겁니까?”
나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가,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저는 당신들을 이용하려 여기에 온 겁니다.”
<명계>의 힘을 얻지 못하면 <김독자 컴퍼니>는 ‘환생자들의 섬’에서 큰 위기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말했다. 어쩌면 <김독자 컴퍼니>가 아닌 인간 ‘김독자’로서, 뭔가를 확인받고 싶었기 때문에.
[‘제4의 벽’이 희미하게 흔들립니다!]
[‘선악과’가 당신의 죄책감을 자극합니다.]
설령 그 확인이, 아주 부질없는 일에 불과할지라도.
페르세포네는 나를 잠시간 바라보더니, 냅킨으로 가볍게 입을 닦은 후 내 쪽을 향해 손을 뻗었다. 아주 부드럽고 온화한, 조금의 적의도 보이지 않는 친절한 눈빛. 당황한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기도 전에, 페르세포네의 격이 내 어깨에 닿았다.
[아주 오래전, 우리 부부는 ‘운명의 세 여신’에게 계시를 받은 적이 있단다.]
“······계시요?”
[「오래된 신화를 끝낼, 가장 어두운 밤의 후예가 나타날 것이다.」]
문득, 언젠가 디오니소스가 내게 한 이야기가 떠올랐다.
―나와 몇몇 성좌들은, 네가 ■■에 도달할 수 있는 존재라 믿는다.
어쩌면 그때 말한 ‘몇몇 성좌’는 페르세포네와 하데스를 지칭하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페르세포네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처음 그 신탁을 받았을 때, 나는 화가 났단다.]
······화?
[왜냐하면, 나는 ‘아이를 가질 수 없는 설화’를 가지고 있었으니까.]
페르세포네에게 그런 전승이 이어지고 있는 줄은 몰랐다.
설마 지금까지 아이를 갖지 못했던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었을까.
페르세포네의 손길이 내 머리카락을 가볍게 넘겼다.
[처음에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기다렸다. 어쩌면 이번에는 기적이 일어나지 않을까. 우리의 이야기를 기억해줄, 어여쁜 아이가 생기지 않을까. 비록 이곳에 있는 것은 어둠과 지옥과 감옥뿐이지만, 그런 우리에게도 기회가 주어진다면, <올림포스> 12신들 중 누구보다도, 더 아이를 잘 키워낼 자신이 있었다. 아이에게 다른 존재의 어둠을 이해하는 법을 가르치고, 타자에게 공감하지 못하는 지옥을 알려주고, 세계의 정의를 짓밟는 악을 엄벌할 감옥을 보여주겠노라고.]
“······.”
[수백 년 동안, 그런 착각 속에 살았었다.]
페르세포네의 손끝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그 떨림의 의미를 나는 감히 이해할 수 없었다. 단어 하나하나에 담긴 고통을, <올림포스>에 대한 증오를, 나는 헤아릴 수조차 없었다.
간신히 숨을 내쉰 페르세포네가 말을 이었다.
[하데스와 나는 오랫동안 둘이서 모든 것을 헤쳐왔단다. 아이를 가질 수 없다는 걸 알아도, 우리는 불행하지 않았어. 명계가 설령 우리 세대에서 끝나고, 우리가 살아왔던 설화가 누구에게도 기억되지 않는다 해도. 우리는 다른 12신들과는 다르다고, 자신의 설화를 자식에게 억지로 떠넘기는, 그런 부모들과는 다르다고. 우리는 그저 우리로서 오롯하다고.]
“······.”
[그런데 어느 날, 네가 나타나고 말았구나.]
페르세포네의 두 눈이 나를 보고 있었다.
[사실 너를 먼저 발견한 것은 그이였단다.]
마치 꿈꾸는 듯한 목소리로, 페르세포네는 말을 이었다.
[지하철에서 네가 살아남던 순간부터, 그이는 줄곧 너의 역사를 지켜보아 왔단다. 처음에는 너와 같은 아이가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이제 이 세계에 그런 설화는 끝났다고 생각했으니까. 내게 신나서 떠들던 그이의 목소리가 지금도 잊히지 않아.]
“······.”
[외로이 자란 작은 설화가 세상과 싸우는 모습을 우리는 줄곧 지켜보아 왔단다. 쟁쟁한 성좌들과 겨루고, 이계의 신격과 맞서고, 도깨비의 시나리오에 저항하며······ 기어코 다섯 개의 설화를 쌓아 하나의 별자리로 태어난 작은 성좌를.]
오래전, 처음으로 <김독자 컴퍼니>를 만들었던 순간이 떠올랐다.
그때 페르세포네는 나를 지지했던 다섯 명의 성좌들 중 하나였다.
[그때 우리는 처음으로 생각했다. 너의 부모가 되어주고 싶다고.]
울컥하는 뭔가를 나는 간신히 삼켜냈다.
페르세포네가 지금껏 내게 보내왔던 애정의 형태가, 이제야 조금은······ 아주 조금은, 이해될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하데스와 나는 네가 명왕이 되길 바라지 않는다. 네가 우리에게 구속되길 바라지도 않고, 우리가 살아온 삶이, 우리가 살아온 역사가 너의 삶을 규정짓기를 원하지도 않는다. 너는 지금까지 네가 살아온 대로 모든 시나리오의 마지막을 향해 나아가면 된다.]
“저는······ 저는, <명계>의······.”
[너는 우리의 아들이다. 그거면 충분하다.]
그 마음에 보답할 수 있는 무엇도 나는 가지고 있지 않았다.
내가 줄 수 있는 것은 어떤 보장도 없는, 아직 쓰이지도 않은 미래뿐이었다.
“제가 이 모든 시나리오의 ■■에 도달했을 때······ 반드시, 당신들의 이야기도 함께할 겁니다.”
페르세포네가 희미하게 웃었다.
[테라스로 가보거라. 네 아비가 너를 기다린다.]
*
내게 아버지에 대해 좋은 기억은 조금도 없다.
술에 취해 나를 때리던 아버지. 방언처럼 늘어놓는 세상에 대한 불만과 나를 향한 알 수 없는 적대감들.
내가 견디며 살아야 했던 기억들뿐이다.
“저······.”
테라스의 끄트머리에, 숭고한 밤의 그림자를 품은 하데스가 서 있었다. 하데스는 궁의 저편으로 드리워진 명계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는 채로 하염없이 전경만을 바라보았다.
지옥의 강이 흐르는 지류와, 그 지류의 건너편으로 이쪽을 올려다보는 영혼들이 있었다.
[보고 있느냐?]
수많은 사람들의 죽음이 그곳에 있었다. 슬픔이 있었고, 애환이 있었다. 끝내 이루지 못한 숙원들이 강을 따라 내려오고 있었다.
[저것이 명계다.]
성좌들이 시나리오에서 자신들의 욕망을 추구하는 동안, 그 욕망에 희생된 영혼들은 이곳으로 떠밀려 내려온다. 시나리오에서 버림받고, 상처받고, 무너진 자들의 세계. 저것이 바로 명계였다.
나는 하데스를 바라보았다.
그는 저 어둠을 이해했고, 명왕이 되었다.
이승으로부터 떠밀려오는 슬픔들을 외면하지 않고, 그 영혼들을 하나하나 구제하면서. 수천 년, 어쩌면 수만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오직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여다보면서.
그 순간, 나는 어쩐지 오랫동안 하지 않았던 말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버지.”
하데스는 대답이 없었다. 어쩌면 이것은 나뿐만 아니라 그에게도 익숙하지 않은 말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하데스가 말했다.
[군대를 데려가라.]
나는 놀라서 하데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 어둠이 포효하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흉벽 근처의 영혼들이 일제히 궁으로 몰려오고 있었다. 어떤 영혼들은 결연한 모습이었고, 또 어떤 영혼들은 비장한 표정이었다. 그리고 그 영혼들의 앞에, 세 명의 심판관이 서 있었다.
파도처럼 밀려든 막대한 군대.
어디서도 본 적 없는 대군의 격에, 나는 심장이 떨리는 것을 숨기기에 급급했다.
[<명계>를 위하여!]
첫 번째 심판관이 외쳤고.
[<명계>의 왕자를 위하여!]
두 번째 심판관이 부복하며 나를 바라보았다.
세 번째 심판관의 창이 하늘을 찌름과 동시에, 모든 영혼들이 함께 부르짖었다.
[모든 시나리오의 영원과 종장을 위하여!]
그 함성 속에서, 명왕이 말했다.
[가거라.]
하데스는 나를 돌아보지 않은 채 말했다.
돌아보지 않았지만, 그는 나를 보고 있었다.
언제나, 나를 보고 있었다.
[<명계>는 지금부터 너의 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