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6화

386화 Episode 74. 성마대전 허공에서 푸른 빛 전류가 튀어 오르며, 달려들던 마지막 안드로이드가 주저앉았다. 푸슈슉. 잘린 케이블 사이에서 검을 뽑아낸 이지혜가 이마를 닦았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곁에서 그 광경을 보던 이길영이 코를 후비며 말했다. “누나 이제 꽤 하네?” 그 하늘을 찌르는 건방에 이지혜는 꿀밤을 한 대 갈겨 주려다가 말았다. [대상은 공격할 수 없습니다.] 어차피 이 세계관에서, 저 꼬맹이들은 무적이다. 괜히 심기를 건드려서 좋을 게 없었다. 이지혜는 이길영과 신유승을 번갈아 보며 물었다. “니들 지금 몇 렙이야?” “난 84.” “전 87이요.” “뭐? 너 며칠 전까지 83이었잖아!” “거짓말이지 멍청아.” 투닥거리는 두 아이를 보며 이지혜는 한숨처럼 대답했다. “난 79인데······.” 그래도 두 아이 덕분에 그녀는 빠르게 레벨 업을 할 수 있었다. 말 그대로 쩔을 받는 듯한 광속의 레벨 업이었고, 덕분에 그들은 넥스트 시티의 수배자 명단에도 올랐다. [안드로이드 이지혜 - 1888G] 정확히는 그녀 혼자 올랐다. 애초에 아이들은 공격 자체가 불가능한 대상이니 수배 명단에도 오르지 않는다. “슬슬 이 세계관에서 탈출할 때가 된 거 같은데.” “아마 저걸 무너뜨리면 끝날 거 같아요.” 신유승의 손끝이 가리킨 곳에, 넥스트 시티의 중심부를 차지한 거대한 탑이 있었다. 그 탑의 꼭대기에는 전함 한 기가 부유하고 있었는데, 그 전함을 볼 때마다 이지혜는 배후성의 메시지를 받곤 했다. [성좌, ‘해상전신’이 저 성유물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웬일이래. 검소하신 우리 장군님께서.” [성좌, ‘해상전신’이 헛기침을 합니다.] 하지만 이지혜도 그런 배후성의 심정을 이해 못 할 바는 아니었다. 전함의 생김새를 보면 아마 누구라도 그 마음을 이해할 것이다. “왜 저런 게 저기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저걸 가져갈 수 있다면, 이 모든 세계의 하늘은 해상전신의 바다가 되겠지. 칼자루를 불끈 쥔 이지혜가 말했다. “아저씨랑 사부랑 깜짝 놀라게 해주는 것도 재밌겠네. 얘들아, 이제 그만 클리어할까?” “좋아, 슬슬 버그 쓰는 것도 지겨워지던 참이라.” “그렇게 해요.” 뜻밖의 메시지가 들려온 것은 의기투합한 세 사람이 탑을 향해 걸음을 옮기는 순간이었다. [긴급 패치가 업데이트 되었습니다!] [금일 자정을 기점으로 해당 시나리오에 셧다운(shutdown) 제도가 도입됩니다.] [앞으로 0시부터 6시 사이에 18세 미만의 청소년들은 해당 시나리오를 이용할 수 없습니다.] 올망졸망 잘 뛰어가던 이길영과 신유승이 휘청거렸다. 이길영이 당황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누나, 나 졸려―” “언니, 도망······!” 두 아이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풀썩 쓰러지며 잠들었다. 코에 손을 가져다 대보니 죽은 것은 아니었다. [해당 플레이어는 현재 셧다운 상태입니다.] 이지혜로서는 어이가 없는 노릇이었다. “아니, 애초에 이 세계관 18금 아니었어? 셧다운제는 왜 도입되는데?” 하지만 한가롭게 그런 불평을 늘어놓고 있을 틈은 없었다. 활짝 열린 탑에서, 그녀를 잡기 위한 수백 기의 드론이 일제히 출격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시발.” 아무래도 오늘은 유독 긴 밤이 될 것 같았다. * [113번째 국지전이 종료되었습니다.] [해당 국지전은 승패가 가려지지 않았습니다.] 전쟁에는 승자도 패자도 없었다. 중상을 입은 마왕들은 서로를 부축하며 물러났고, 패닉에 빠진 우리엘도 하급 천사들에게 떠밀려 사라졌다. 텅 빈 전장에 남은 것은 패잔병처럼 늘어진 환생자들과, 그런 환생자들 사이에서 함께 너부러진 다섯 명의 남녀뿐. “······이게 될 줄은 몰랐네.” 한수영이 어이가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국지전에 참가한 <김독자 컴퍼니>가 한 일은 간단했다. 선악의 전장에 참가해, 그들을 제외한 모든 참가자들을 제압하는 것. 그리고 승부가 나지 않는 전쟁을 남은 사람들끼리 계속하는 것. [해당 전장의 승패를 가릴 수 없습니다.] [해당 전장의 참가자들에게 전투 의사가 없음을 확인하였습니다.] <김독자 컴퍼니>의 대결은 사투가 아닌 놀이였고, 대련이었으며, 승자나 패자가 존재하지 않는 게임이었다. 그랬기에 이것은 선악의 전쟁이 아니었으며, 자연히 성마대전도 아니었다. [해당 국지전은 ‘성마대전’의 분류에서 제외됩니다.] [새로운 113번째 국지전이 생성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강제로 하나의 전장을 해체해버리는 무력. 그것이 바로 지금의 <김독자 컴퍼니>가 가진 힘이었다. “······제 배후성이 꽤 섭섭해하겠는데요.” “이번에는 어쩔 수 없었습니다, 희원 씨.” “가능하면 우리엘이랑은 싸우고 싶지 않아요.” “저도 마찬가집니다.” 살짝 씁쓸한 표정을 지은 정희원이 이현성과 함께 전장의 환생자들을 살폈다. 많은 사람들이 죽어 환생의 굴레로 되돌아갔지만, 아직 살아 남은 이들도 있었다. 정희원과 이현성은 자신이 가지고 있던 [엘라인 숲의 정기]를 쪼개어 그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김독자 또한 주변의 환생자들을 하나씩 부축하여 [점혈]로 상처를 지혈했다. 그런 김독자를 보던 한수영이 말했다. “이번엔 생각하고 저지른 거 맞지?” “난 늘 생각하고 저질렀어.” “그럼 언제까지 이런 식으로 버틸 수 없을 거란 것도 알겠네.” 이번에야 전장에 난입하는 타이밍이 좋았다지만, 다음번에도 지금처럼 운이 좋으리라는 법은 없었다. 선이나 악에 속한 성좌나 마왕들 중에는 <김독자 컴퍼니>의 힘만으로 당해낼 수 없는 존재도 분명 있을 것이고, 전력의 격차가 심한 전장에 뛰어들었다가 위험에 처할 수도 있다. 하지만 김독자는 침착한 표정이었다. ―오래 버틸 필요 없으니 괜찮아. 자연스러운 밀회의 전환에, 한수영도 목소리를 낮추며 물었다. ―그럼? ―혼돈 수치가 90을 돌파할 때까지만 버티면 돼. [현재 혼돈 수치는 56입니다.] 기다렸다는 듯 허공에 떠오른 메시지를 한수영은 유심히 노려보았다. ―이 수치는 뭐야? 선악 수치랑은 다른 거 같은데? ―맞아. 김독자는 혼돈 수치에 관해 짧게 설명해주었다. 선이나 악, 둘 중 누구도 승리하지 않았을 때. 그리하여 이 세상의 질서가 무너졌을 때 상승하는 것이 바로 이 ‘혼돈 수치’라고. ―이거 꽉 차면 어떻게 돼? ―묵시록의 재앙이 발생하지. ―묵시록의 재앙? ······잠깐만, 설마 ‘묵시룡’ 말하는 거야? 묵시록의 파멸룡, 혹은 묵시록의 최후룡. 소위 ‘묵시룡’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존재. 1863회차의 95번 시나리오에 재림해, 꼬리짓 한 번으로 <스타 스트림>의 성좌들을 휩쓸어버렸던 대재앙. 김독자가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잘 아네? ―······그걸 알고도 혼돈 수치를 올리겠다고? 너 미친놈이냐? 묵시룡이 부활하면 어쩌게? 1863회차에서 어떻게 됐는지 잊었어? 만약 묵시룡이 이 시나리오에서 깨어난다면, 그것은 ‘성마대전’ 자체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의 대파멸을 불러일으키게 될 것이다. 하지만 김독자의 표정은 단호했다. ―부활 안 할 거야. ―그걸 어떻게 알아? 한수영의 물음에, 김독자는 그저 어깨만 으쓱이고 돌아섰다. 발끈한 한수영이 뭐라고 외치려는 순간, 누군가가 불쑥 끼어들었다. “작가라더니, 상상력이 부족하군.” “뭐 이 자식아?” 유중혁은 한수영의 작은 주먹을 가볍게 받아냈다. 한수영이 으르렁거렸다. “왜 남의 대화에 끼어들어?” “네가 한심한 소리를 하고 있길래 참을 수 없었던 것뿐이다.” “뭔 개소리야?” “1863회차에서 있었던 일을 알고 있는 건 저놈만이 아니다.” 한수영은 유중혁의 말을 바로 알아들었다. 김독자는 혼자서 1863회차에 다녀온 것이 아니었다. 두 명의 대천사와 함께 떠났고, 돌아올 때도 한 명의 대천사가 함께했다. 그리고 그 사실이 뜻하는 바는······. “······<에덴>도 그곳의 일을 알고 있겠네. 그리고 저 녀석은 그걸 이용하고 있는 거고.” 김독자의 의도는 명백했다. 혼돈 게이지가 100이 되면 묵시룡이 해방된다. 그리고 <에덴>은, 이미 1863회차의 정보를 들어 묵시룡이 해방되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고 있는 상황이다. <에덴>이 멸망하는 꼴을 보고 싶지 않다면, 지금 당장 ‘성마대전’을 중지하라는 것. 그게 바로 김독자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인 셈이었다. 태연자약한 얼굴로 환생자들을 다독이는 김독자를 보며, 한수영은 살짝 어이가 없었다. 세상 그 어느 누가, 대성운을 상대로 그런 협박전을 펼칠까. “저 사악한 자식······ 다 같이 살거나, 다 같이 죽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는 거잖아.” “잘만 된다면 그렇겠지. 우리만 죽는 미래가 올 수도 있다.” 표정을 굳힌 채 [흑천마도]를 닦는 유중혁은 그 어느 때보다도 진중한 표정이었다. 한수영은 그 표정에서 유중혁의 각오를 읽을 수 있었다. 아마 지금쯤 유중혁의 머릿속에서는 최악의 가설들이 줄줄이 이어지고 있을 것이다. 김독자의 계획이 실패하고. 이곳에서 <김독자 컴퍼니>의 일행들이 전멸하며. 그가, 다시 한 번 회귀하게 되는 것. 한수영이 투덜거렸다. “끔찍한 미래만 떠올리는 건 회귀자 특유의 버릇이냐?” “최악을 가정해야 최악 이후도 가정할 수 있는 법이다.” “누가 들으면 1만 번쯤 회귀한 줄 알겠네.” “어떤 우주에서는 그럴지도 모르지.” “······네가 그런 말도 할 줄 아냐?” 한수영은 피식 웃으며 멀찍이 떨어진 김독자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비실비실대는 꼴이 흐느적거리는 바람 인형 같았다. 텅 빈 바람 인형의 속을 읽을 수 없듯, 한수영은 김독자의 속내를 읽을 수 없었다. 가끔 알 것 같은 기분이 들 때도 있었지만, 그건 대개 인형에서 새어 나온 바람 같은 것이었다. 저런 걸 뭘 믿고. 어쩌면 정말 알 수 없는 것은 자기 자신이었다. 왜 자신은 김독자와 함께 싸우고 있는 것인가. [예상 표절]을 돌리면 알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한수영은 구태여 그러지 않았다. 그러면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돌아보니 유중혁도 자신과 같은 광경을 보고 있었다. “야, 물어볼 거 있어.” “내가 순순히 대답해주리라고 착각하고 있다는 게 신기하군.” “하긴, 너 지독하긴 하더라. ‘카이제닉스 제도’에서 그렇게나 고문을 당하고도 신음 한 번 안 흘린 걸 보면.” 유중혁의 표정이 굳어졌다. “역시 네놈이 시킨 짓이었나?” “내가 시킨 건 아니고, 착한 우리 유리가 내 마음을 알아준 거지.” [설화, ‘카이제닉스의 왕’이 고개를 주억입니다.] 유중혁은 그 지독한 유리의 고문을 당하면서도 자신의 정체나 관련된 정보들을 밝히지 않았다. 툭툭 엉덩이를 털며 일어난 한수영이 물었다. “아무튼, 너 이제 진짜 괜찮은 거냐? 전엔 김독자 죽이려고 했었잖아.” “네가 상관할 바가 아니다.” “너 같은 녀석이 그렇게 생각이 빨리 바뀔 리는 없고. 생각이 바뀐 게 아니라면 원래부터 저놈을 죽일 생각이 없었다는 얘긴데······.” “······.” “그때 널 부추겼던 게 누구야? 메타트론?” 메타트론의 이름에 유중혁의 굵은 눈썹이 살짝 움직였다. “흐음, 관계가 있긴 한가 보네.” “······뒷조사라도 한 모양이지?” “그딴 걸 할 시간이 어딨냐? 네가 갑자기 <에덴> 이야기를 하니까 떠봤을 뿐이야. ······그런데 반응을 보니, ‘메타트론’이 핵심은 아닌 것 같네.” 한수영의 추리력에, 이번에는 유중혁의 양쪽 눈썹이 동시에 꿈틀거렸다. “흐음, 누굴까나. 우리 귀한 회귀자님의 속내를 들쑤신 분이.” “네놈 따위가 알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역시, ‘은밀한 모략가’냐?” 유중혁이 한수영을 올려다보았다. 한수영이 뭘 그렇게 놀라냐는 듯 입술을 실룩였다. “나 바보 아니거든? 네가 생각하는 것 정도는 나도 생각할 수 있어.” [화신, ‘한수영’이 ‘예상표절’을 발동 중입니다.] “정확히는 ‘나들’이지만.” 수백, 수천, 어쩌면 수만 명의 한수영이 모여 다음 전개를 예상하는 설화. 이번엔 유중혁이 물었다. “넌 은밀한 모략가에 대해 알고 있나?” “아주 강력한 이계의 신격.” 유중혁은 잠깐 실망스런 표정을 짓더니 이내 납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바보가 수천 명 모인다고 천재가 되는 건 아닌 모양이군.” “죽을래? 그러는 넌 녀석이 누군지 알아?” “짐작 가는 존재는 있다.” “호오? 누군데?” 유중혁은 곧장 대답하는 대신 기억을 더듬는 듯했다. “······녀석은 내가 살아온 모든 역사를 알고 있었다. 0회차부터, 내가 아직 겪지 않은 먼 미래의 회차까지.” “흐음······.” “내 예상이 맞다면, 그런 존재는 이 모든 세계선을 통틀어 하나뿐이다.” 그러자 한수영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네. 제일 가능성이 높은 건 하나뿐이야.” 잠시 서로를 바라보던 두 사람은, 동시에 자신의 해답을 말했다. 그런데. “······누구라고?” “무슨 헛소리지?” 두 사람의 대답이 달랐다.
🏠 인덱스 ← 이전 화 다음 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