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9화

379화 나는 한수영의 얼굴을 한 왕을 바라보았다. 저자는 분명 한수영이 아니다. 그런데, 대체 어떻게 내 이름을 알고 있는 것일까. 왕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어떻게 그대의 이름을 아는지 궁금하겠지.” 왕은 이 세계관의 등장인물이고, ‘거대 설화’의 법칙에 따라 행동하는 존재에 불과하다. 그런 존재가 나를 ‘리카르도’가 아닌 ‘김독자’로 인식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심지어 세계관 밖의 발언에도 불구하고, 개연성의 스파크는 왕을 억압하지 않았다. [세계관이 장르의 확장 가능성을 고려합니다.] [거대 설화, ‘카이제닉스 제도’가 상황을 묵인합니다.] [특정 발언에 관한 개연성의 규제가 완화됩니다.] [세계관에 대한 메타적 발언이 인정됩니다!] 나는 왕을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스킬을 발동했다. [전용 스킬, ‘등장인물 일람’을 발동합니다!] + <인물 정보> 이름 : ??? 나이 : 50세 종합 평가 : 해당 인물은 당신에게 증오를 품고 있습니다. + 여전히 왕의 정보는 떠오르지 않았다. 처음에는 한수영 때문이라 생각했다. 등장인물 일람에 등록되지 않은 존재인 한수영이 빙의함으로써, 빙의체인 왕의 정보까지 불확실해진 것이라고.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너는 한수영인가?” “한때는 그런 이름으로 불리었지.” “무슨 뜻이지?” 천천히 눈을 깜빡인 왕이 이야기를 계속했다. “헛된 희망에 기대어 수십 년의 세월을 버텨온, 한 여자의 이야기를 아는가?” “비슷한 남자의 이야기는 잘 알고 있지.” 그 말을 한 것은 [흑천마도]를 꺼내든 유중혁이었다. 왕이 웃으며 말했다. “가엾은 정인이여, 죽을 자리를 찾아왔구나.” “약혼은 파했을 텐데. 한 번만 더 그딴 식으로 부르면 목을 날려버리겠다.” 거의 동시에, 두 사람의 신형이 사라졌다. 귀청이 찢어지는 듯한 폭음과 함께 두 존재가 격돌했다. 검무장의 천장이 파괴되어 날아올랐고, 검풍과 마력파의 충돌이 하늘에서 용오름을 형성했다. 얼핏 보기에는 막상막하의 대결이었지만, 전투의 세부를 살펴보면 그렇지 않았다. 순식간에 전개된 십여 합의 끝에, 유중혁은 왼팔에 경미한 부상을 입었다. 하지만 왕은 약간의 생채기도 보이지 않았다. 유중혁이 밀린다. 저 강력한 유중혁도, 이 세계관의 왕을 당해내지 못하는 것이다. 심지어 왕의 왼팔에서는 한수영의 특기인 [흑염]의 아우라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독자 씨! 피하십시오!” 달려오는 근위대들에 맞서 이현성이 나를 보호했다. “······독자 씨?” 정희원도 간신히 정신을 차리는 듯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들에게 신경을 쓸 여유가 없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백중세였던 전투는 유중혁에게 급격하게 불리해졌다. 애초에 저쪽은 무려 ‘트리플 마스터’의 빙의체다. “한수영! 정신 차려!” 나는 망설이지 않고 ‘거대 설화’의 힘을 끌어왔다. [거대 설화, ‘마계의 봄’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힘껏 허공으로 쏘아 보낸 설화가 일시적으로 전투에 공백을 만들었다. 나는 틈을 놓치지 않고 전장에 뛰어들었다. 왕이 웃으며 팔을 벌렸다. “구원의 마왕이여. 네가 찾는 여자는 이미 오래 전에 죽었다.” “웃기지 마. 한수영은 그딴 식으로 말 안 해.” “50년이라는 세월이 한 인간에게 어떤 의미인지, 네가 알고 있느냐?” 모른다. 나는 그만한 시간을 살아본 적이 없으니까. [거대 설화, ‘카이제닉스 제도’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세계가 꿈틀거리며, 이 세계를 살아온 한수영의 모습이 허공에 떠올랐다. 그것은 한수영의 설화였다. 이 세계에서 살아온 한수영의 역사. 정확히는, 한수영의 빙의체인 ‘유리 디 아리스텔’이 겪어야 했던 역사. 「아름다운 백작가의 영애」 「오직 왕비가 되기 위해 키워진 여식」 「“너는 18살이 되었을 때 입궁하게 될 거란다.”」 난잡하게 떠오르는 문장들 속에 내가 아는 한수영이 있었다. 「“좋아, 그럼 18세까지는 소드마스터가 되어 볼까.”」 세계와 맞서 싸우는 한수영. 분명한 얼굴로 이 세계를 살아가는 한수영. 내가 모르는 표정으로, 이 세계를 살아낸 한수영. 「“어째서 여자아이가 검을 다루는 것이냐.”」 「“마법은 단지 눈속임일 뿐이다.”」 어떤 클리셰는 클리셰라는 변명으로 인물에게 구속이 된다. 그리고 내가 아는 한수영은, 누구보다 클리셰를 싫어하는 존재였다. 「“씨발, 그까짓 결혼 한다고, 해! 나보다 강한 놈 있으면 해줄게!”」 아름다운 백작가의 영애를 차지하기 위해 수많은 사내들이 나섰다. 그들 중에는 제도의 기사도 있었고, 유명한 마법사도 있었다. 한수영은 다가오는 구혼자들을 자신의 손으로 물리치기 위해 강해졌다. 피나는 고련 끝에 소드마스터가 되었고. 9서클의 대마법사가 되었으며. 사악한 용의 힘을 다루는 공포의 주인이 되었다. 소드마스터의 힘은 그녀의 육체를 젊게 만들었고, 사악한 흑염의 아우라는 그녀의 신비감을 더욱 증폭시켰다. 모순적이게도 그녀가 강해질수록, 세계는 그녀를 더욱더 욕망하게 되었다. 한수영은 그런 세계와 싸웠다. 지구에서보다 더 긴 세월을 이곳에서 보냈고. 그 세월을, 충실하게 견뎠다. 설화는 이야기를 계속하고 있었지만, 어느 순간 나는 그 이야기를 들을 수가 없었다. 외로웠다. 반발감이 들었다. 분명 한수영이 이 세계에 함께 있음에도 그녀가 너무나 멀리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여긴 한수영의 세계가 아니야.” “왜 그걸 네가 결정하지? 네가 한수영을 알아 온 시간은 고작해야 4년도 되지 않을 텐데. 함께 있었던 시간만을 따지면 1년도 채 되지 않을 거고.” 사실이었다. “너는 한수영에 대해 뭘 알지?” 나는 내가 아는 한수영을 떠올렸다. 자존심이 강해서 좀처럼 사과할 줄도, 주장을 굽힐 줄도 모르는 사람. 누구보다 효율을 추구하지만, 일행들을 위해 때로 그 효율을 포기하기도 하는 사람. 이기적인 것처럼 굴면서도, 언제든 “너흰 나 없인 안 된다니까”를 중얼거리며 자신의 목숨을 걸 수 있는 사람······. ······한수영은, 어떤 식으로 말하는 사람이었더라. 내가 아는 한수영은, 정말로 ‘한수영’일까. 한수영은 아직도 내가 아는 이야기 속에 있는 것일까. “네가 알던 한수영은 이제 없다. 50년의 시간은, 그녀를 완전히 새로운 존재로 만들었다. 그게 바로 나다.” 왕의 등 뒤로 밀려온 거대 설화가 우리를 향해 강대한 패기를 내뿜었다. [거대 설화, ‘카이제닉스 제도’가 당신들의 존재를 배척합니다.] 50년의 시간 앞에서, 나와 한수영이 함께한 짧은 기억들은 조금씩 초라해졌다. 그 기억을 더 초라하지 않게 만들기 위해, 나는 웃으며 입을 열어야 했다. “역시 너는 한수영이 아니야. 그 녀석은 너처럼 진지하지 않거든.” 왕의 표정에 희미한 동요가 일었다. 그 동요로 인해, 나는 눈앞의 왕이 누구인지 확신했다. 분명 녀석은 한없이 한수영에 가까운 존재다. 하지만, 결코 한수영이 될 수 없는 자다. “너는 오랫동안 한수영의 삶을 지켜본 백작가의 영애, ‘유리 디 아리스텔’이야. 보나마나 한수영이 거대 설화에게 먹힌 틈을 타서 몸을 빼앗은 거겠지.” “······.” “말해. 진짜 한수영은 어디에 있지?” 대답 대신, 왕의 전신에서 가공할 격이 뿜어져 나왔다. 콰드드드드! 마치 지금까지의 격전이 장난이었다는 것처럼, 왕의 몸에서 해방된 격의 파도가 우리의 몸을 옭아맸다. 유중혁도, 이현성도, 정희원도, 그리고 나도. 움직임이 봉쇄당한 우리를 향해, 왕이 다가왔다. 나는 물었다. “우릴 죽일 건가?” “죽여?” 왕의 입가에 비웃음이 감돌았다. “아직도 이 시나리오에 대해 잘 모르는 모양이군. 여기까지 살아남았으니 너희는 죽지 않는다. 짐도······ 한수영도 그것을 원하고.” “하지만 처음엔 날 사형시키려 했잖아?” “정해진 역경이었지. 거기선 1왕자가 널 구하게 되어 있었다.” 왕은, 마치 한수영처럼 웃었다. “이제 이 시나리오의 끝이 다가왔다.” 허공에서 스파크가 튀며 시나리오 메시지가 들려왔다. [장르 선택의 분기가 다가왔습니다!] [이 세계관의 장르를 선택하십시오!] 왕이 허공을 보며 말했다. “이 세계의 끝은 항상 똑같지.” 오랜 세월 정제된 황폐함이 그녀의 표정을 스쳐 갔다. 환생자들의 섬은 죽은 설화들이 박제되는 섬. 다른 시나리오에 무대를 제공하며 생을 연명하는 설화들의 무덤. 나는 그녀가 살아온 삶을 짐작할 수 있었다. 제도 카이제닉스는 수백 번이나 ‘빙의 시나리오’를 제공했을 것이고, 수백 명의 리카르도와 슈바이첸이 이 시나리오를 각자의 방식으로 수행했을 것이다. “온갖 위험과 역경을 헤치고 자라난 주인공은, 마침내 부와 명예와 사랑을 얻고 해피엔딩으로 향하게 된다. 이번 시나리오의 전개는 조금 특이했지만······ 결국, 마지막은 바뀌지 않는다. 그러니 그만 끝내지.” 지겹다는 듯한 말투. 왕이 내게 명령했다. “나와 결혼해라, 리카르도 폰 카이제닉스.” 얼빠진 유중혁의 표정이 보였다. 경악한 이현성과 정희원이 이쪽을 향해 뭐라 소리치고 있었다. 나는 태연히 되물었다. “그게 이 시나리오의 결말인가?” “그렇다.” “당신과 결혼하면 우릴 다음 시나리오로 보내줄 건가?” “맞아,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한 사람. 왕의 눈동자에서 뿌리 깊은 탐욕의 그림자가 아른거렸다. “한수영은 이 세계에 남아야 한다. 나는 그녀가 무척 마음에 들었거든. 그리고 너희는, 시나리오 속에서 헤어진 비운의 연인이 되겠지.” [해당 시나리오의 장르가 ‘로맨스’ 쪽으로 기울기 시작합니다.] [장르 확정과 동시에 시나리오 클리어 조건이 완수될 것입니다.] 이 세계가, 우리에게 거래를 요청하고 있었다. 한수영을 버리라고. “그녀는 본래의 세계보다, 이 섬에서 살아가는 게 더 어울린다.” 어쩌면 정말 그럴지도 모른다. <김독자 컴퍼니>의 ‘한수영’보다, ‘카이제닉스 제도’의 ‘한수영’이 더 행복한 삶을 살아갈지도 모른다. 오만한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던 왕이 자신의 왼손을 내밀었다. “일어나서 입을 맞춰라. 그리고 너의 오랜 동료에게 작별 인사를 하도록 해라.” 하얀 손이었다. 그 손으로, 한수영은 이 세계와 싸워왔을 것이다. 새하얀 손등에는 수십 개의 생채기와 굳은살이 박여 있었다. 한수영은, 대체 무엇을 위해 그렇게 열심히 싸웠던 것일까. 품속에 들어있는 한수영의 책을 떠올리며, 나는 말했다. “······네 말대로 나는 한수영을 몰라.” “그래, 이제야 인정하는 모양이군.” “그러니까 녀석을 여기서 놓아줄 수는 없어.” “뭐라?” “아직 녀석에게 이 이야기의 결말을 듣지 못했거든.” 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가진 모든 힘을 다해, 이 세계의 설화에 저항하면서. 츠츠츠츠츳! [거대 설화, ‘신화를 삼킨 성화’가 포효합니다!] [거대 설화, ‘마계의 봄’이 고개를 끄덕입니다.] 표정이 변한 왕이 나를 노려보았다. “다 된 시나리오를 망치는구나.” “아니, 이게 제대로 가는 거야.” “······뭐?” “난 처음부터 궁금했어. 왜 하고 많은 시나리오들 중에, 하필 이 ‘카이제닉스 제도’로 오게 되었을까 말이야. 그런데 생각보다 이유는 간단하더라고.” 나는 품속의 검을 뽑아 들었다. “그건, 내가 이 시나리오의 적법한 왕이기 때문이다.” 환하게 빛나는 [부러지지 않는 신념]이 눈부신 백광의 빛을 내뿜었다. [세계관이 성유물 ‘부러지지 않는 신념’에게 반응합니다!] [해당 성유물은 이 세계관의 것입니다.] [성유물 본연의 능력이 크게 증폭됩니다!] 카이제닉스 제도의 초대 가주. 전설 속의 폭풍왕, 율리시즈 카이제닉스의 검. “저, 저 검은······!” “폭풍왕의 검이다!” 검을 알아본 근위대들이 일제히 자리에 주저앉고 있었다. 당황한 왕은 나를 향해 강기와 마력을 퍼부어댔다. 그러나 소드마스터의 힘도, 대마법사의 힘도 ‘부러지지 않는 신념’ 앞에서는 소용이 없었다. [성유물, ‘부러지지 않는 신념’이 울음을 토합니다!] 이것이 ‘성유물’의 진짜 힘이었다. 그것의 탄생 설화 속에서는, 거의 무적의 힘을 발휘하는 아이템. 검을 쥔 손이 벌벌 떨렸다. 성유물은 강하지만, ‘리카르도 폰 카이제닉스’에겐 이 검을 오랫동안 다룰 힘이 없다. 그러니 최대한 빠르게 일을 마무리해야 한다. 나는 왕의 마력파를 쳐내며, 한 걸음씩 그녀에게 다가갔다. 왕은 주저앉아 있었다. 내 검을 보는 순간, 그녀는 모든 것을 체념한 표정이었다. [당신은 ‘역성혁명’ 루트를 택하였습니다.] [왕을 죽이십시오.] [해당 시나리오의 장르가 ‘판타지’ 쪽으로 기울기 시작······.] 한수영은, 자신의 책에서 이 시나리오를 완수할 세 가지 방법이 있다고 했다. 하지만 그녀는, 책에서 가장 중요한 ‘세 번째 방법’은 알려주지 않았다. 여기서 왕을 죽이면 한수영도 함께 죽는다. 그렇다고 왕과 결혼하면, 한수영은 이곳에 남게 된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는, 어떻게 완결되어야 할까. 한수영이 원하는 이 시나리오의 끝은 무엇이었을까. 왕이 말했다. “어서 죽여라.” “그러면 나는 진짜 왕이 될 수 있겠지. 시나리오는 여기서 끝날 테고.” 한수영은 내게 정답을 가르쳐주지 않았다. 그 정도는, 내가 직접 상상해보기라도 하라는 듯이. 그래서 나는 내가 생각한 정답을 실천하기로 했다. 왕을 죽이지 않고, 왕위를 찬탈하며, 한수영도 살려낼 방법. “그런데 말이야, 나는 이미 왕이 없는 세계의 왕이거든.” “뭐?” “게다가 김독자 컴퍼니의 대표에, 명계의 후계자이기도 하고.” 나는 왕의 상처투성이 손을 내려다보았다. 한수영은 저 손으로 소드마스터가 되었고, 대마법사가 되었다. 내가 아는 한수영은, 이 세계에서 고작 ‘생존’ 따위를 목표로 할 만한 위인이 아니다. 그녀는 보다 큰 그림을 그리는 작가니까. 나는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제 왕좌는 지긋지긋해.” [당신은 한 번도 이루어진 적 없는 전개를 선택하였습니다.] [세계관이 당신의 선택에 당황합니다.] 나는 왕의 손을 잡고 천천히 끌어 올렸다. 그리고 그 손에 입을 맞추는 대신, 내가 쥐고 있던 [부러지지 않는 신념]을 쥐어 주었다. “무슨 짓이지? 지금······.” “오해하지 마. 너한테 왕위를 주려는 게 아니니까.” “뭐?” “왕이 되는 것은 네가 아니라, 내 동료.” 커지는 왕의 눈을 보며, 나는 말을 맺었다. “<김독자 컴퍼니>의 한수영이다.” 그리고 다음 순간, 눈앞에서 시나리오 메시지가 폭발했다. [시나리오 선택지에 오류가 발생했습니다!] [장르 선택지 ‘판타지’가 붕괴합니다!] [장르 선택지 ‘퓨전 판타지’가 붕괴합니다!] [장르 선택지 ‘로맨스’가 붕괴합니다!] [당신은 어떤 장르 선택지도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숨겨진 선택지, ‘장르 : 김독자 컴퍼니’가 발동합니다!] . . . 그리고, 누군가가 내게 말했다. 「용케도 알아냈네, 김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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