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0화

370화 「“너를 죽이겠다, 유중혁.”」 도서관의 모두가, 그 문장을 보고 있었다. 「(······잘못하면 우리 모두 죽을 수도 있겠군.)」 [‘제4의 벽’이 격렬하게 진동합니다!] 도서관 전체가 흔들리고 있었다.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던 책들이 쏟아지며 엉망이 되었다. 그러나, 그것을 정리하는 사서는 아무도 없었다. 「(답답하군. 왜 서로 대화하지 않는 거지? 역시 하나가 되려는 욕망이 부족한 놈들이야.)」 「(우리 수영이는 또 무슨 죄야······.)」 오징어가 자신의 다리로 동그란 눈을 콕콕 찍었다. 문장은 계속된다. 유중혁과 김독자의 검이 부딪칠 때마다, 니르바나의 이빨에서 딱딱거리는 소리가 났다. 「(어이 신입, 네 생각은 어때?)」 그말에, 머리 위를 날아가는 책을 하나씩 잡아채던 유상아가 사서들을 돌아보았다. 그녀의 손에는 김독자의 기억들이 한가득 쥐어져 있었다. 방금 전까지도, 그녀가 읽던 책이었다. 「(음, 제 의견은 두 가지에요.)」 「(두가지나 있어?)」 「(하나, 수영 씬 안 죽었어요. 내가 그 사람 잘 알아요. 이런 일로 자기 목숨 걸 사람은 아니거든요.)」 그 말에 눈물을 짜던 오징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 하지만 너도 봤잖아.)」 「(아직 뭘 모르는구만. 히로인이 저기서 손을 툭 떨어트리며 의식을 잃는다. 그리고 남 주인공의 각성! 자고로 내가 본 모든 영화에서는―)」 오징어와 시뮬라시옹이 뭐라 떠들든, 유상아는 묵묵히 말을 이었다. 「(둘, 두 사람은 대화하고 있어요.)」 유상아가 쌓여가는 문장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세상 누구도 저걸 ‘대화’라 부르진 않겠지만 말이에요.)」 * 갈라진 팔에서 설화의 파편들이 쏟아진다. 우리가 쌓아온 설화였다. [설화, ‘마계의 봄’이 자신의 이야기를 쏟아냅니다!] [설화, ‘신화를 삼킨 성화’가 으르렁거립니다!] 용과 호랑이가 드잡이질을 하듯, 설화와 설화가 부딪친다. 나와 똑같은 ‘거대 설화’를 가진 유중혁이, 똑같은 힘으로 내게 대응하고 있었다. [해당 설화에 관한 당신의 지분이 더 높습니다!] 더 높은 설화 지분에도 유중혁이 가진 설화 지분들은 내 말을 듣지 않았다. 아마 유중혁이 쌓아온 세월 때문인지도 모른다. 녀석은 <스타 스트림>의 누구보다도 더 치열하게 이야기를 계속해왔으니까. 츠츠츠츠츳! 2세대의 개연성이 우리를 억누르고 있었다. 하지만, 억눌러지지 않는 것도 있었다. [설화, ‘이적에 맞서는 자’가 일갈합니다!] [설화, ‘이적에 맞서는 자’가 노호성을 터뜨립니다!] 같은 역사를 쌓으며 만들어진 같은 설화가 충돌했다. [‘섬의 주인’이 당신에게 주목하고 있습니다.] [다수의 성좌들이 당신의 전투를 지켜봅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귓가에서 성좌들의 목소리가 멀어지고 있었다. [전용 스킬, ‘제4의 벽’이 발동합니다!] 서로가, 서로를 죽일 각오로 검을 휘두른다. 필사적으로 휘두른 내 검이 유중혁의 허리께를 스치고, 곧바로 반격해온 유중혁의 검이 내 어깨를 찔러온다. 전투 감각은 녀석이 위다. 하지만 ‘격’에 있어서는 내가 위였다. [거대 설화, ‘마계의 봄’이 당신을 보호합니다!] 두터운 격을 꿰뚫고 날아드는 초월좌의 예기. 그 검기에서 녀석의 진심을 읽는다. 놈이, 얼마나 필사적으로 이 자리에 서 있는지를. 녀석은 묻지 않았고, 나는 답하지 않았다. 그저, 검을 휘두르고 또 휘둘렀다. 그리고 우리를 대신해 설화들이 이야기를 계속했다. [설화, ‘절망의 낙원’이 맹수처럼 달려듭니다!] 낙원의 기억. [설화, ‘재앙의 왕을 사냥한 자’가 포효합니다!] [피스랜드]의 흔적. [설화, ‘공단의 해방자’가 슬퍼합니다.] 혁명의 시간들. 「그것은 ‘멸살법’ 어디에도 없는 문장들이었다.」 우리가 살아온 시간은, 내가 읽어온 그 어떤 페이지와도 같지 않았다. [‘천사화’를 발동합니다!] 어깻죽지를 뚫고 나온 날개. 순간적으로 증폭된 격이 [부러지지 않는 신념]에 깃들었다. 굉음과 함께, 충격을 이기지 못한 유중혁의 신형이 허공으로 치솟았다. “제대로 덤벼, 유중혁. 나도 그럴 테니까.” 유중혁의 눈빛이 변했다. 녀석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격의 모양새가 뒤틀리기 시작했다. 공간을 일그러트릴 정도의 격. 고단계의 초월좌가 가진 진짜 힘이 개방되고 있었다. 황금빛 휘광을 몸에 두른 유중혁의 신형이 사라졌다. [전지적 독자 시점 ‘2단계’가 발동 중입니다.] 내 눈으로 쫓아갈 수 없을 정도의 빠르기로, 유중혁의 검이 움직였다. 까가가가강! 일 검, 그리고 일 검. 파찰음이 더해질 때마다 손목이 무거워졌다. 내 허벅지에서 설화가 쏟아졌고, 유중혁의 어깻죽지에서 설화가 흘러내렸다. 자연히, 녀석의 목소리도 들려왔다. [‘제4의 벽’이 반발하듯 강하게 발동합니다!] 유중혁이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었다. 「너는······.」 나는 그다음에 이어질 문장을 상상한다. 분명 나를 탓하겠지. 한수영의 말처럼, 너는 그런 인물이니까. 「왜 네놈은, 그 회차에 남기로 했던 거지?」 1863회차의 기억이 머릿속을 스쳐 갔다. 「“나는 3회차로 돌아가지 않겠다. 여기 남아서, 이곳의 사람들과 함께 결말을 보겠어.”」 내가 결정했던 선택이, 다시 내게로 되돌아오고 있었다. [부러지지 않는 신념]이 까드드득 갈려 나가는 소리를 냈다. 그때는 그게 최선이었다. 1863회차에서 결말을 본 후, 3회차로 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모두 행복해질 수 있는 이야기를 찾아보려고 했다. 하지만 만약 그때, 1863회차의 유중혁이 나를 돕지 않았다면. 1863회차의 한수영이, 내게 살의를 품었다면. 나는, 이 세계로 무사히 되돌아올 수 있었을까. 누구보다 시나리오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나는, 실은 그저 운이 좋아 살아남았던 것은 아닐까. 「네놈의 동료는 이곳에 있었다.」 유중혁의 일검에 어깻죽지가 찢어졌고. 「네놈의 세계선은 이곳이었다.」 이검에, 팔꿈치가 갈라졌다. 「너는 사람들에게 이 세계를 살라고 말했다.」 삼검에 날갯죽지에 구멍이 뚫렸다.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그 고통보다 더 고통스러웠던 것은, 유중혁의 말에 담긴 분노와 실망이었다. 「화신 ‘유중혁’이 회귀를 거부합니다.」 나로 인해 회귀를 포기했던, 그리하여 3회차를 살기로 결심했던 유중혁이 나를 보고 있었다. 그 누구보다 이 세계를 사랑했고, 그렇기에 이 세계를 지키고자 하는 존재가 나를 보고 있었다. 「그런데 네놈은.」 어떤 분노는, 어떤 배신감은 말로써 서술되지 못한다. 그 어떤 전지한 독자라도 읽어내지 못한다. 유호성은 말했다. ―설화는 얼핏 보면 대단치 않아 보이지만, 그 내부를 들여다보려는 사람에게는 미로와 같은 심연을 보여주지. 아무리 작은 설화라도 마찬가지야. 지금 내가 보는 것은 유중혁의 전부가 아닐 것이다. 유중혁이 화를 내는 이유를, 나는 영영 알 수 없을 것이다. 그 모든 것이 이유가 될 수 있었고, 그 어떤 것도 이유가 될 수 없을 테니까. 확실한 것은 유중혁이 더이상 휘둘리지 않기로 결심했다는 것이었다. 나에게. 그 자신에게. 어쩌면 이 와중에도 우리를 지켜보고 있을 저 빌어먹을 성좌들에게. 「대답해라 김독자.」 쏟아지는 검격을 받으며, 나는 비틀거렸다. 아마 유중혁은 알고 있을 것이다. 내가 지금도 자신을 읽고 있다는 것을. 읽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녀석은 끊임없이 생각하고 있었다. 「대답해.」 내가 이 벽 너머로 녀석을 보아왔듯, 녀석 또한 이 벽 너머에서 뭔가를 끊임없이 쓰고 있었다. 언젠가, 반드시 누군가는 그 벽을 보아줄 것이라 기대하면서. 하지만 나는 대답해 줄 수 없었다. 왜냐하면 내가 지금 대답하면 [‘제4의 벽’이 두꺼워집니다.] 너는, 등장인물이 되기 때문이다. [‘제4의 벽’이 더욱 두꺼워집니다.] 너는, 등장인물이 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쿠구구구구! 특유의 이글거리는 눈동자로 나를 노려보는 유중혁. 그곳에 유중혁이 존재하고 있었다. 자신이 등장인물이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 나를 부수고 있었다. 「그런가.」 벽 위에 유중혁의 말이 떠올랐다. 「그것이 너의 선택이로군.」 [‘제4의 벽’이 더욱 두꺼워집니다.] 「이번 회차에도, 동료 같은 건 없었군.」 내가 어떤 대답이라도 한다면, 유중혁은 나를 용서할지도 모른다. 기적이 일어나 나를 납득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한수영은 돌아오지 않을 것이고. 서로에게 입혔던 상처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이제 동료가 될 수 없을 것이다. 유중혁도 나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제4의 벽’이 더욱 두꺼워집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검을 쥔 채 서로에게 달려가는 것이다. [‘제4의 벽’이 더욱 두꺼워집니다.] 전력과 전력이 부딪치며 굉음이 일었다. 부연 먼지가 피어올랐고, 녀석과 나는 충격을 이기지 못해 바닥에 너부러졌다. 먼저 일어난 것은 나였다. 나는 전신이 만신창이가 된 유중혁에게 비척거리며 다가가 검을 겨누었다. 유중혁은 저항하지 않고 나를 보며 말했다. “······이번 회차에 너무 오래 머물렀군. 그만 끝내라.” 유중혁은 한수영을 죽였다. 돌이킬 수 있는 선은, 이미 넘었다. [부러지지 않는 신념]의 검극이 떨렸다. 검을 쳐든 순간, 1863회차의 한수영의 말이 떠올랐다. ―내 소설이 멸살법의 표절이라면, 너는 무엇의 표절이지? 그 질문의 대답이, 내 눈앞에 있었다. 「김독자는 이 사내에게서 삶을 배웠다.」 이 사내는 나의 아버지였고. 나의 형이었으며. 나의 오래된 친구였다. [‘제4의 벽’이 두께를 키웁니다.] 이 두꺼운 벽 너머로, 오랫동안 녀석을 지켜 보아왔다. 몇 번이나 녀석에게 구원받았고. 녀석의 이야기를 보며, 살아남았다. [부러지지 않는 신념]이 천천히 바닥으로 떨어졌다. 나는 녀석을 죽일 수도, 잘못을 빌 수도 없다. 그렇게 비겁해지는 법을, 나는 배운 적이 없다. 내가 배운 것은 자신이 치른 일에 대가를 치르는 것. 유중혁이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나 역시 유중혁을 바라보았다. 「나는 이곳에 있다.」 알고 있어. 「그럼에도 너는 읽기만 할 뿐이군.」 이게 우리의 방식이니까. 너는 행동하고, 나는 그런 너를 읽는 것. 「네놈이 하지 않는다면, 내가 하겠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난 유중혁이 자신의 검을 움켜쥐었다. 하나의 이야기가 끝나는 소리가 들린다. ‘양산형 제작자’는 말했다. 어떤 설화는, ■■의 근처에 가보지도 못하고 끝난다고. 하지만 만약 이곳이 모든 이야기의 끝이라면. 어차피 여기서 죽을 것이라면, 나도 한 마디 정도는 해도 괜찮지 않을까. “······유중혁.” 내 말에 유중혁의 움직임이 멎었다. “알고 있겠지만, 나는 예언자가 아냐. 오히려 그런 것과는 굉장히 거리가 먼 사람이지.” 동호대교에서 처음 싸웠던 그 날부터, 나는 한 번도 제대로 내 소개를 한 적이 없었다. 유중혁에게 나는 예언자였고, 정체 모를 놈이었다. “나는 구원의 마왕도 아니고.” [설화, ‘구원의 마왕’이 이야기를 멈춥니다.] “왕이 없는 세계의 왕도 아냐.” [설화, ‘왕이 없는 세계의 왕’이 이야기를 멈춥니다.] 하나씩, 설화들이 이야기를 멈췄다. 내 이야기를 제외한 모든 것이 조용해졌다. “내 이름은 김독자.” 등에 돋아났던 날개가 사라졌고, 부풀어 있던 근육이 줄어들었다. “스물여덟······ 아니, 스물여덟 살이었고, 게임 회사의 직원이었어. 취미는 웹소설 읽기······.”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하듯, 나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시시하지? 그냥, 이게 나야. ······유중혁, 너는 누구지?” 나에게 유중혁은,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사람이었다. 정확히는, 혼자서 읽고 있었던 사람. 그러므로 나는 한 번도 녀석의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었다. 유중혁의 입이 열렸다. “나는 유중혁.” 천천히 움직인 유중혁의 칼날이, 나를 베었다. “회귀자였던, 유중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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