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3화
353화
돌무더기 밑으로 유중혁의 손이 비죽 튀어나와 있었다.
한수영은 그런 유중혁을 내려다보며 이죽거렸다.
“자식, 맨날 남들 깔아뭉개면서 등장하더니······ 막상 깔리니까 기분 별로지?”
[화신 ‘한수영’은 거대 설화 ‘신화를 삼킨 성화’에 대해 8.9%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역시, 한수영이라면 정확한 ‘지분’을 가지고 와줄 줄 알았다.
시스템은 ‘판결에 참가 중인 담화자끼리는 지분 증여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그 말은 곧, 아직 참가하지 않은 담화자끼리는 지분 증여가 가능하다는 뜻.
나를 흘겨본 한수영이 [한낮의 밀회]로 투덜거렸다.
―너 때문에 이설화한테 0.1% 뺏겼잖아.
아마 한수영은 이곳의 정보를 알게 된 즉시 이설화와 보유 지분을 조정했을 것이다. 그리고 곧장 이곳으로 왔겠지.
주변의 성좌들을 향해 돌아선 한수영이 으르렁거리며 선언했다.
“나는 ‘악’이다. 그리고 저기 멀거니 선 빌어먹을 김독자도 확실히 ‘악’이고.”
내 의사와는 무관하게 나를 악으로 만들어버린 한수영은 이어서 돌무더기에 깔린 유중혁을, 그리고 다른 일행들을 보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김독자 컴퍼니>는 선도 악도 아니야.”
짧은 단발을 흩날리며 외치는 녀석의 모습이 너무 굉장해서, 그 순간만큼은 유중혁이 아니라 한수영이 주인공으로 보일 지경이었다.
[제한시간이 종료되어 설화의 선악 판결이 종료되었습니다.]
[판결에 참가한 선악의 참여 지분은 총 91.8%입니다.]
[선악의 참여 비율은 45.9% : 45.9% 입니다.]
[선악의 저울이 완전한 평형을 이루었습니다.]
경악한 성좌와 마왕들이 이쪽을 보고 있었다.
나는 그들을 돌아보며 덧붙였다.
“우리는 당신들의 ‘정의’에 정의되지 않을 겁니다.”
[거대 설화, ‘신화를 삼킨 성화’는 선악을 판별할 수 없는 설화입니다.]
쐐기를 박는 메시지. 사회를 맡은 도깨비가 웃는 모습이 보였다. 마치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다는 듯, 혹은 이런 결말을 줄곧 바랐다는 듯한 표정. 관리국으로서는 신이 나기도 하겠지.
왜냐하면 지금 내 귓가로도 엄청난 양의 간접 메시지가 쏟아지고 있으니까.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당신의 판단에 만족합니다.]
[성좌, ‘가장 어두운 봄의 여왕’이 당신을 자랑스러워합니다.]
[성좌, ‘부유한 밤의 아버지’가 당신의 패기를 기꺼워합니다.]
[다수의 중립 계통 성좌들이 당신의 성운에 호감을 보입니다.]
[중립 계통의 성좌들이 당신에게 281,000코인을 후원하였습니다.]
중립 계통의 성좌들이 좋아할 것은 예상했다.
어떤 선택은 주어진 선택지들을 거부하면서 발생하니까.
[누군가가 당신의 설화를 <스타 스트림>에 추천하였습니다.]
[새로운 설화를 입수하였습니다.]
물론, 모든 성좌들이 그런 것은 아니었다.
[당신의 선택이 ‘절대 선’과 ‘절대 악’에 속한 일부 성좌들의 반감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츠츠츠츠츳!
[무슨······?]
[대상의 ‘선악’이 판별이 안 되었다고?]
성좌들과 마왕들의 분위기가 급변하고 있었다.
[‘절대 선’ 계통의 성좌들이 해당 판결에 반대합니다.]
[‘절대 악’ 계통의 성좌들이 해당 판결에 반대합니다.]
당장이라도 폭동이 일어날 것처럼, 두 테이블 사이에서 심상치 않은 격의 흐름이 감지되었다.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 관리국은 다시 한번 판결하라!]
[이게 대체 무슨 농간이지?]
최상위권의 마왕들부터 대천사들에 이르기까지. 모든 참석자들의 시선이 도깨비를 향해 꽂혔다.
위기감을 느낀 상급 도깨비가 식은땀을 흘리며 대답했다.
[죄송하지만, 그건 불가합니다. 이미 판결이 내려진 설화는 누구도 결과를 뒤집을 수 없습니다. 그게 규칙이니까요.]
다행히 관리국은 원칙을 지켰다.
하지만 원칙을 지키는 것이 항상 좋은 결과만을 불러오는 것은 아니었다.
[······이번 시즌까지만 두고 보려 했었다.]
쿠구구구구구!
상황이 예상 밖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중하위권 서열의 마왕들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자신들의 격을 방출했다.
[‘대상’으로 선악의 위상을 결정할 수 없다면, 다른 방식으로라도 결정을 내려야겠지.]
마왕들이 움직이자, 대천사들도 지지 않겠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서고 있었다.
[다수의 마왕들이 ‘절대 선’ 계통의 천사들에게 적대감을 표출합니다!]
[다수의 대천사들이 마왕들을 향해 경계심을 드러냅니다.]
[선악의 저울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츠츠츠츠츳!
당장이라도 달려들 것처럼 두 진영이 서로를 향해 대치했다.
나와 일행들은 서로에게 바짝 붙어선 채 상황을 살폈다.
내 곁에서 [심판자의 검]을 꺼내 쥔 정희원이 긴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독자 씨.”
“괜찮습니다.”
나는 안심하라는 듯 일행들을 보호하며 섰다.
설령 ‘성마대전’이 벌어지더라도, 그런 초대형 이벤트는 이런 장소에서는 벌어지지 않는다.
[성좌, ‘하늘의 서기관’이 대천사들을 만류합니다.]
[성좌, ‘지옥 동부의 지배자’가 마왕들을 물립니다.]
아마 ‘하늘의 서기관’ 메타트론도, ‘지옥 동부의 지배자’ 아가레스도 그것을 잘 이해하고 있을 것이다.
‘선’이 있어야 ‘악’이 존재할 수 있다.
만약 여기서 시나리오가 발동하면, 두 진영은 공멸의 파국으로 치달을 뿐이다.
그리고 내 생각이 맞다면, 그 사실을 가장 잘 이해하고 있는 것은 저 빌어먹을 <관리국>의 도깨비들일 것이다.
[대도깨비 ‘바람’이 무대에 존재를 드러냅니다.]
기다렸다는 듯 허공에 모습을 드러낸 대도깨비가 웅장한 격을 내뿜고 있었다.
대도깨비 바람.
나도 원작을 통해 익히 알고 있는 녀석이었다.
[그만들 두시죠. 이곳에서 싸워 봐야 해결나지 않을 문제라는 건 잘 알고 계실 텐데요.]
그 딱딱한 목소리에, 마왕들과 성좌들이 반발했다.
[아무리 <관리국>이라도 이 싸움에는 개입할 수 없다!]
[이대로 끝내라는 말인가?]
이곳에 모인 성좌나 마왕들 중에는 신화급에 육박하는 존재도 있었다. 그러니 ‘대도깨비’가 직접 왔다고 해도, 말을 듣지 않는 것은 당연했다.
‘도깨비 왕’이 직접 왔다면 이야기가 조금 달랐겠지만······.
곳곳에서 불만이 속출하자, 바람이 말했다.
[판결에 번복은 없습니다. 그리고 이곳에서의 적대 행위도 허락할 수 없습니다.]
단호한 선언과 함께, 허공에 튀는 스파크가 ‘절대 선’과 ‘절대 악’의 기류를 차단했다.
반발한 성좌들이 다시 난동을 부리려는 찰나, 바람이 말을 이었다.
[여러분의 불만은 ‘선악’의 위상이 가려지지 않는 것이겠지요. 단순히 그런 문제라면, ‘거대 설화 시나리오’를 하나 더 진행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그게 무슨 뜻이지?]
[이번 시즌의 ‘선악’의 위상을 가릴, 역대급 규모의 시나리오를 여는 겁니다.]
이어진 대도깨비의 말에 나는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다.
저 녀석, 지금 무슨······.
[<스타 스트림>의 의지가 ‘대도깨비’의 판단에 동의합니다.]
[‘선악의 이중주’가 선악의 위상을 가릴 새로운 시나리오를 원합니다.]
쿠구구구구.
<스타 스트림>의 개연성이 움직이고 있었다. 다수의 성좌들이 원하는 이야기를 향해, 은하의 강이 흐르고 있었다. 이만한 개연성이 움직일만한 시나리오는, <스타 스트림> 전체를 뒤져도 손에 꼽는다.
지옥 동부의 지배자가 물었다.
[지금 ‘성마대전’ 시나리오를 개방하겠다는 뜻인가?]
[원하신다면요.]
바람의 선언에 다수의 성좌들이 웅성거렸다.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은 바람이, 나를 보며 말했다.
[단, 시나리오의 무대는 여러분이 직접 정하십시오.]
*
휴회로 주어진 막간 동안, 성좌들과 마왕들은 제각기 새로운 ‘성마대전’의 무대를 어디로 정할지를 떠들어댔다. 다행히 도깨비들의 개입으로 우리에게 쏟아졌던 적대적인 시선은 한결 가신 듯 보였다.
갑작스런 사태에 지친 일행들은 제각기 탈진해 주저앉아 있었다.
곁으로 다가온 한수영이 아직도 돌무더기에 깔린 유중혁의 손을 툭툭 걷어찼다.
“뭐야 이거? 왜 아직도 안 나와?”
유중혁은 죽은 듯 반응이 없었다.
파묻힌 녀석의 손을 보면서도, 한편으로는 저 손을 잡아 끌어올리는 것이 두려웠다. 마지막으로 녀석이 남긴 말이 귓가에 붙어 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니면, 그 ‘멸살법’이라는 책에 나오는 정보인가?
유중혁은 대체 어디서 그 이야기를 들은 것일까. 필터링은 어디까지 해제된 거고, ‘멸살법’에 대해선 얼마나 알고 있는 것일까.
나와 한수영은 합심해서 유중혁을 꺼냈다.
유중혁은 의식을 잃은 상태였다.
이상한 일이었다. 돌무더기에 깔렸다고 이놈이 기절할 턱이 없는데.
“······이 자식 상태가 왜 이래?”
자세히 보니, 유중혁의 몸은 정상이 아니었다.
어디를 다녀온 것인지,몸의 곳곳에 크고 작은 상처들이 덮여 있었다. 뭔가를 죽이고 벤 흔적들. 지난 이틀간 유중혁은 내가 알지 못하는 시나리오를 헤매다 돌아온 듯했다.
그런 상황에서, 나를 향한 분노를 이기지 못해 격을 끌어 올리다 커다란 내상을 입은 것이다.
곧바로 [한낮의 밀회]를 발동한 한수영이 메시지를 보내왔다.
―유중혁이 ‘멸살법’의 존재를 눈치챘어.
―알고 있어. 너 오기 전에 유중혁이 나한테 말했으니까.
나는 유중혁이 했던 말들을 간략하게 전해주었다.
이야기를 들은 한수영의 눈썹이 크게 휘어졌다.
―······이 자식, 어디서 그런 얘길 들은 거야?
―나도 몰라. 넌 어디 있다가 온 거야?
―남은 선지자들 죽이고 왔어. 혹시나 거기서 정보가 유출됐나 싶어서.
―그래서 뭔가 알아냈어?
―아니.
그럴 것이다.
슬슬 선지자들은 가진 정보가 다 떨어져서 ‘등장인물’로 변하고 있을 테니까.
―선지자들 쪽에서 유출된 정보가 아닐 거야. 내 생각에는······.
나는 멀리서 대천사들과 논의를 진행하는 메타트론을 바라보았다.
아마도, 유중혁이 ‘멸살법’을 알게 된 것은 메타트론과 관계되어 있을 확률이 높았다.
한수영이 말했다.
―아스모데우스도 ‘멸살법’의 존재를 알고 있었어. 어쩌면 최상위권의 성좌들은 거의 다 알게 된 걸지도 몰라.
최상위권 성좌들이라······.
슬슬 ‘종말의 구도자’도 활동할 시기가 된 모양이었다.
드디어 이 기나긴 시나리오의 여정도 끝이 보이기 시작한다.
나는 쓰러진 유중혁을 잠시 내려다보았다.
한수영이 나를 노려보며 말했다.
―김독자, 지금 중요한 것부터 생각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고개를 들자 대도깨비 바람이 나를 보고 있었다.
―우리도 ‘성마대전’에 참가해야 해.
―미쳤어? 지금 우리 수준에 진입할 수 있는 시나리오가 아니잖아.
한수영의 말이 맞았다.
본래 ‘성마대전’은 80번대의 메인 시나리오니까.
나도 이럴 생각은 아니었다. 위험한 시나리오는 가능하면 피해 가는 편이 좋다. 하지만 ‘성마대전’은 아니다. 일어나지 않는다면 모를까, 일어난다면 절대로 피해 가서는 안 되는 시나리오.
―상위 시나리오라도 상관없어. 문제는 개전(開戰) 장소야.
―그게 무슨······.
멀리서 바람이 박수를 쳤다.
성좌들이 제자리에 착석하자 바람이 입을 열었다.
[휴회를 끝내겠습니다. 성좌 및 마왕님들은 시나리오의 무대를 선택해주십시오.]
기다렸다는 듯, 성좌와 마왕들이 기립하며 외쳤다.
[‘성마대전’의 무대로 우리 ‘14번째 마계’의―]
[우리 <수호의 나무>에 꽤 괜찮은 ‘거대 설화’의 무대가 있어요.]
[무슨 헛소리냐! 그 무대는······!]
역시나, 모두 자기들이 유리한 곳을 무대로 삼으려 했다.
그리고 나 역시 무대로 삼고 싶은 장소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 내가 발언한다고 해서, 저들이 나를 지지할 턱이 없었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어떻게 하면······.
「(독자 씨, ‘그 섬’을 무대로 삼고 싶으신 거죠?)」
머릿속으로 유상아의 메시지가 들려왔다.
「(제가 좀 도와드릴까요?)」
‘······예?’
「(제가 벽 안에서 재미있는 걸 하나 찾았거든요.)」
‘재미있는 거요?’
유상아는 대답이 없었다. 대신 머릿속에서 뭔가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잠시후, 떠들썩하던 홀에 조금씩 어수선한 분위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몇몇 성좌들이 속삭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방금 들어온 정보인데······.]
[뭐? 그게 정말인가?]
나는 녀석들의 속삭임에 주목했다.
······저 녀석들은 ‘계시’와 관련된 능력을 가진 성좌들인데?
분위기가 묘해지고 있었다. 속삭임은 파도처럼 번졌고, 5분 정도가 더 흐른 뒤에는 메타트론조차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싸우던 성좌들과 마왕들의 목소리가 하나둘 잦아들고, 잠시 후에는 서로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치열한 눈치 싸움에 먼저 수를 던진 것은 마왕들 쪽이었다.
[미안하지만, 나는 잠깐 일이 있어서 가봐야 할 것 같네.]
[나도! 나도 마찬가지야.]
갑작스레 손을 든 일부 마왕들이 자리에서 이탈했다.
나는 그들의 얼굴을 유심히 보았다. 몇몇은 ‘종말의 구도자’와 관련된 놈들이었다.
[죄송하지만, 저도 잠깐 자리를 비워야 할 것 같군요.]
성운 <수호의 나무>의 ‘새벽별의 여신’마저 그런 발언을 하자, 사태는 일파만파로 번져갔다.
[저도 잠깐 일이 생겨서─]
이탈자가 점점 많아지자, 가벼운 한숨을 내쉰 메타트론이 바람을 보았다.
[아무래도 대도깨비께서 직접 결정을 내려주셔야 할 것 같군요.]
대도깨비 바람이 허공을 더듬듯 눈을 게슴츠레 떴다.
[······흥미롭군요. 하필 이 타이밍에 ‘계시’가?]
‘계시’라는 말에, 눈치를 보던 성좌들이 움찔했다. 바람이 웃었다.
[······좋습니다. 다들 말씀은 안 하셔도, 이미 무대는 정해진 것 같으니―]
이어지는 대도깨비의 말을 들으며, 나는 멍한 기분에 휩싸였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그리고 별안간 머릿속에서 찌릿, 하는 통증이 일었다.
[<스타 스트림>의 개연성이 당신을 의심합니다!]
무시무시한 시선이 나를 들여다보는 것이 느껴졌다.
마치 의심스러운 뭔가를 찾듯이 나를 훑어보는 시선.
시선은 잠시간 계속되더니, 이내 씻은 듯이 사라졌다.
[<스타 스트림>이 당신에게서 시선을 돌립니다.]
식은땀을 닦은 나는 조심스레 유상아를 불렀다.
‘유상아 씨? 대체 뭘 하신 겁니까?’
유상아는 잠시 설명할 말을 찾는 듯 침묵했다.
그러더니 이렇게 말했다.
「(독자 씨는 성좌들이 미래를 읽는 방식을 알고 계신가요?)」
‘······알고 있습니다.’
성좌들이 미래를 읽는 방식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헤르메스 시스템]처럼 데이터를 모아 미래를 계측하는 방식이고, 다른 하나는 모이라이 3자매나 <에덴>, 그리고 일부 마왕들처럼 신묘한 ‘계시’를 받는 방식이었다. 속설에는 ‘신의 계시’라고 불리는 힘.
잠시 말을 찾던 유상아가 쑥스럽게 웃으며 답했다.
「(저, 아무래도 ‘신’이 된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