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5화

325화 “히야, 진짜 모처럼의 지구네······.” 포탈을 껑충 넘어온 장하영이 자신의 금발을 쓸어넘기며 한숨을 돌렸다. 탁 펼쳐진 광화문. 오랜 여정 끝에 돌아온 고향이었다. “오랜만에 고향에 오니 좋으냐?” 장하영이 뒤를 돌아보자, 파천검성이 포탈을 빠져나오고 있었다. 뒤이어 그녀의 다리 사이로 파천신군이 쏙 빠져나왔다. 파천신군의 머리 위엔 역설의 백청 키리오스 로드그라임이 올라타 있었다. 모두 다른 차원으로 수련을 떠났던 초월좌 일행들이었다. “별로 그렇지는······.” “혹시 장하영 씨 되시오?” 낯선 목소리에 장하영의 말이 끊겼다. 돌아보자, 한 사내가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옷차림을 보아하니 저쪽도 한국인은 아니었다. “그런데요.” “그렇다면 뒤쪽의 거대하신 분은 설마 ‘파천검성’이시오?” “그렇다.” 파천검성이 대답하자, 사내가 감탄하며 말했다. “허, 역시 명불허전이로군. 기다렸소이다. 본인은 비천호리라는 무명소졸이오.” “무림인이군. 무슨 용건이지?” “김 소협이 여기서 그대들을 기다리라 했소.” “김 소협? 그 허여멀건 녀석 말인가?” “그 허여멀건 자가 김독자 소협을 가리키는 거라면, 맞소.” 비천호리가 말을 이었다. “‘귀환자 연합이 곧 서울을 침공할 것이다’. 그렇게 전하라더군.” “······건방진 제자 놈. 왜 빨리 돌아오라고 닦달인가 했더니.” 키리오스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귀환자 연합이 누구인지는 그들 또한 잘 알고 있었다. 특히나 파천검성은, 그와 관련해 김독자와 유중혁에게 따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귀환자 연합’이라······ 다른 세계선에선 내가 녀석들의 합공을 받고 죽었다지.” 모든 귀환자들이 비천호리처럼 상생의 길을 택한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귀환자 연합’은, 폭력과 지배의 길을 택한 대표적인 집단이었다. “그 세계선에선 수련을 게을리 한 모양이군, 파천검성.” “상대는 천마와 혈마다. 얕볼 수는 없어.” “누가 오든, 이번 세계선의 너는 죽지 않는다. 본좌가 함께 있으니.” 키리오스의 단언에 파천검성이 희미하게 웃었다. “나도 죽을 생각은 없다. 여기서 죽게 되면 내 귀여운 제자 녀석의 엉덩이를 두들겨주지 못할 테니까.” 파천검성은 그 말을 하며 가만히 주먹을 쥐었다 폈다. 다른 세계선의 자신이 어느 정도의 강함을 지녔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지금의 그녀 또한 하나의 경지를 넘었다는 것이다. 파천검성은 3년 전 있었던 ‘형용할 수 없는 아득함’과의 전투를 떠올렸다. 그 격의 끝을 잴 수 없던 ‘이계의 신격’. 성좌조차 넘어선 재앙을 마주했던 날의 공포를, 파천검성은 단 하루도 잊어본 적이 없었다. <제1 무림>을 지켜내며 ‘거대 설화’를 얻었고, <타르타로스>를 방문해 ‘거신’의 운명을 개방했다. 그럼에도 상대할 수 없었던 적. 파천검성의 지난 3년은, 오직 그 ‘이계의 신격’과의 재전(再戰)을 준비하기 위한 기나긴 수련의 시간이었다. 멀리서 낯선 기운이 느껴진 것은 그때였다. “뭔가가 온다.” 키리오스의 말과 함께, 장하영과 파천신군도 자리를 잡았다. 하필 이 타이밍이라면, 역시 ‘귀환자 연합’일 것이다. 파천검성은 재빨리 명령을 내렸다. “천마와 혈마는 나와 키리오스가 맡는다. 하영과 파천신군은 서울 지역의 민간인들을 최대한 보호하면서······.” 그리고 다음 순간. 츠츠츠츠츳! 파천검성의 몸이 환한 빛으로 물들었다. [화신 ‘남궁민영’에게 깃든 ‘거신의 운명’이 발현합니다!] “······무슨?” [시나리오 강제 전송이 시작됩니다!] [‘신화의 낙인’에 의해 거절권이 주어지지 않습니다.] “사부님!” 깜짝 놀란 장하영이 소리를 질렀으나, 이미 파천검성의 육신은 빛살 속에 어딘가로 사라진 후였다. 그 침착한 키리오스조차, 이번만큼은 흔들리는 눈빛으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리고 하늘 건너편에서 암운(暗雲)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키리오스의 표정이 굳어졌다. “이번엔 진짜 온다.” ‘귀환자 연합’의 군단이 서울을 향해 진격해오고 있었다. 귀환자들의 진군이 만들어 내는 어마어마한 격의 향연. 긴장한 비천호리가 슬금슬금 발을 빼며 중얼거렸다. “······이거, 아무래도 위험하겠소이다.” * “유중혁, 잠깐만!” “시간이 없다. 김독자, 설마 눈치 못 챈 건가?” 돌아보는 유중혁의 얼굴이 분노로 일그러져 있었다. “다섯 번째 거신은, 분명 파천검성이다.” “알고 있어.” 원작의 ‘파천검성’은 <기간토마키아>의 제물이 되지 않는다. 본래 그녀는 <타르타로스>에 방문해 자신의 혈육을 만나지도 않고, ‘거신’의 운명을 각성하지도 않으니까. 「나 때문이다.」 전개를 뒤틀었으니 한 번쯤은 이런 일이 벌어질 거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스승이라 해도 당장 도우러 가지 않으면 위험할 수 있다. <기간토마키아>가 시작되었다는 말 못 들었나?” 채근하는 유중혁의 얼굴을 보며,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안 위험해. 오히려 당분간은 안전한 상태야. 위험한 건 파천검성이 아니라 다른 쪽이라고.” “무슨 헛소리냐? 만약 스승이 시나리오의 ‘거신’으로 지목되었다면······.” 말을 하던 유중혁이 뭔가를 눈치챈 듯 입을 다물었다. 녀석도 깨달은 것이다. <기간토마키아>에서, ‘거신 사냥’ 이벤트는 맨 마지막 순서로 지정되어 있다. 사냥 이벤트가 시작되기 전까지 ‘거신’은 시나리오의 절대적인 보호를 받는다. 정말로 파천검성이 <기간토마키아>에 동원되었다면, 지금 그녀는 안전한 상태일 것이다. 오히려 지금 문제는, 파천검성이 사라진 지구였다. “지금쯤 귀환전쟁(歸還戰爭)이 시작되었을 거야.” 우리가 45번 시나리오를 통과했다고 해서, 지구의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그곳에는 45번 시나리오가 진행되고 있고, 지금쯤이면 차원을 넘어선 ‘귀환자 연합’의 진군이 시작되었을 것이다. 본래 파천검성을 비롯한 초월좌 일행은 그 ‘귀환자 연합’을 상대하기로 되어있었다. 유중혁이 침음하듯 말했다. “······서울이 위험하군.” 물론 파천검성이 없더라도 지구의 전력은 막강했다. 장하영과 파천신군, 키리오스 스승님도 있었고, 비천호리를 비롯한 몇몇 귀환자들, 어머니와 ‘방랑자들’의 세력도 있었다. 북한 쪽에 있다는 공필두와 한명오도 도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초월좌인 천마와 혈마를 상대할 수 있는 것은 파천검성이나 키리오스뿐이다. 잠시 고민하던 유중혁이 말했다. “지구엔 내가 가지. 네놈은 <기간토마키아>에 참가해라.” “괜찮겠어?” “지금으로서는 방법이 없다.” 나는 손에 쥐고 있던 아이템을 던져 주었다. “이거 가져가.” 그것은 방금 브리아레오스에게 맹세의 증표로 받은 ‘거신갑’이었다. 중후반 시나리오로 들어가며, 유중혁이 사용하는 주력 방어구 중 하나. 유중혁은 말없이 거신갑을 받아쥐더니, 페르세포네의 도움을 받아 곧장 <타르타로스>를 탈출했다. 쿵. 쿵. 쿵. 쿵. 전쟁을 준비하는 거신들이 발구르기를 계속하고 있었다. [히든 시나리오 ― ‘신화 전복’이 시작되었습니다.] [새로운 설화의 가능성이 발아합니다!] 저 의식이 끝나면, 진짜 <기간토마키아>가 시작되겠지. 나는 거신들의 눈치를 보다가 페르세포네를 불렀다. “여왕님, 저도 슬슬 나가볼까 싶은데요.” [그대는 나갈 수 없어요.] “예? 유중혁은 보내 주셨잖아요?” [그는 ‘죄수’가 아니에요. 하지만 그대는······.] 나는 허공에 떠 있는 메시지를 바라보았다. [현재 당신은 ‘법권지대’에서의 범법 행위로 수감된 상태입니다.] [잔여 감금 시간 : 4시간] [규칙은 규칙이에요.]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지축을 울리는 거신들의 아우성. <명계>의 시간 비율이 어떤지도 모르는 판국에, 여기서 순순히 4시간을 기다리면 내가 김독자가 아니다. * “저기, 우리 여기 놀러 온 거예요?” 이지혜는 멍한 얼굴로 섬의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테마파크, <기간토마키아>에 입장하신 것을 환영합니다!] [현재 ‘올림포스 12과업 체험기’가 진행 중입니다!] 북적이는 화신과 성좌들의 무리들이 분주히 어딘가로 이동하고 있었다. <거대 멧돼지 생포 체험> <네메아의 사자 사냥 체험> ······. 토끼 귀 머리띠를 쓴 신유승과 이길영이 꺅꺅거리며 주변을 뛰어다녔다. “이런 곳은 처음 와 봐요!” “저거 진짜 ‘헤라클레스’가 입었던 옷이에요?” 일행들이 60번 시나리오인 <기간토마키아>에 진입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여덟 시간 전의 일이었다. 그리고 그 여덟 시간 동안, 일행들이 한 것이라고는 <올림포스>의 따분한 영상을 관람하거나, 허접한 4급 괴수종을 신화의 멧돼지라고 우기는 것을 보거나, 체고가 5미터도 안 되는 조그만 히드라가 우리에 갇혀 울부짖는 것을 구경한 것이 전부였다. “여기 그냥 놀이공원이잖아······.” 멀리서 <황금 사과 농장> 이벤트에 참가하여 사과를 잔뜩 얻어 오는 이현성의 모습도 보였다. 아이들은 노는 데 정신이 팔렸고, 믿었던 군인은 저 모양이다. 이설화가 말했다. “······60번 시나리오가 절대로 이런 식일 리 없어요. 정신 바짝 차려야 해요.” 그렇게 말하는 이설화의 머리엔 기념품으로 산 별모양 머리띠가 반짝이고 있었다. 이지혜가 질린 얼굴로 한수영을 채근했다. “다들 제정신이 아니야······. 수영 언니, 뭐라고 말 좀 해 봐요!” 한수영은 한가롭게 벤치에 앉아 사탕을 물고 있었다. 일행들이 정신을 못 차리고 테마파크의 곳곳을 쏘다니는 와중에도, 한수영은 날카로운 눈으로 시나리오의 진행 현황을 살피고 있었다. [다음 ‘12과업 이벤트’에 참가하실 화신 및 성좌분들은······.] 특히 한수영이 제일 눈여겨보고 있는 것은 테마파크의 중심지에서 진언을 터뜨리는 한 성좌였다. 고대 그리스의 갑옷과 장신구를 걸친, 언뜻 보기엔 이벤트 도우미 정도로 보이는 한 사내. ‘발뒤꿈치에 두꺼운 덮개를 씌워놨네.’ <올림포스>에서 발뒤꿈치를 조심해야 할 영웅이라면, 하나밖에 없다. 트로이의 슬픔, ‘아킬레우스’. 녀석은 이벤트의 진행이 따분한지 연신 하품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자아, 대충 구경들은 하신 것 같으니, 슬슬 본론으로 들어가 볼까요.] 나른하던 녀석의 말투가, 처음으로 바뀌었다. [<기간토마키아>는 오래전부터 우리 <올림포스>가 주최해 온 시나리오입니다. <스타 스트림>에서 가장 위대한 신화를 직접 체험하고, 그것을 몸소 느끼는 것.] 떠들썩하던 화신들의 시선이 일제히 집중되고 있었다. [알다시피, 이 시나리오는 곧 중후반 시나리오에 진입하시게 될 화신 및 성좌 여러분들을 위해 만들어진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시나리오를 통해 성운 <올림포스>의 12신좌에게 간택될 기회를 얻을 수 있습니다.] 마치 도깨비처럼 말하는 고대의 영웅을 보며, 한수영은 쓴웃음을 지었다. ‘성운의 명망을 위해서라면 도깨비짓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건가.’ 물론 저런 짓을 한다고 정말로 ‘도깨비의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참가자들을 자극하기엔 저만한 퍼포먼스도 없었다. [그뿐입니까? 여러분은 ‘고대 거신’의 사냥 이벤트를 통해 강력한 ‘거대 설화’의 지분도 얻을 수 있습니다!] 거대 설화의 지분이라는 말에, 몇몇 화신과 성좌들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인자하게 웃은 아킬레우스가 말을 이었다. [그럼, 슬슬 본격적인 게임에 돌입해 볼까요.] 아킬레우스의 말과 동시에, 테마파크의 중앙 홀이 열리기 시작했다. 봉인되어 있던 거대한 구의 덮개가 열리며, 허공에서 오색의 빛이 쏟아졌다. [‘첫 번째 거신’을 소개합니다!] 빛살이 사라진 곳에 전설 속 거신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런데 왜일까, 거신의 모습은 생각보다 왜소했다. 아무리 봐도 거신의 키는 대략 삼 미터 정도밖에 안 되어 보였던 것이다. [하하, 실망하시는 분들이 보이시는군요. 첫 번째 거신은 ‘혼혈종’이라 조금 작은 편입니다. 하지만 거신의 설화를 가진 것은 틀림없으니, 다들 사냥을 시작해주시기 바랍니다!] 한수영과 일행들도 그 거신을 보고 있었다. 넋을 놓은 채 입을 벌리고 있던 이지혜가 몇 번이나 눈을 비비더니 외쳤다. “저 사람······!” 이현성도, 이길영도, 신유승도. 그곳에 있는 모두가 저 ‘거신’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 ‘거신’은, 언젠가 그들과 함께 싸운 적이 있는 동료였으니까. 부스스 눈을 뜨는 구릿빛의 거신족이, 일행을 마주 보았다. [메인 시나리오 #60 ― ‘기간토마키아’가 시작되었습니다!] [첫 번째 사냥감이 결정되었습니다.] [거신, ‘파천검성 남궁민영’을 사냥하시오.] 그들의 첫 사냥감은, 유중혁의 스승인 파천검성이었다. [왜 다들 가만히 계시죠? 설마 겁을 먹으신 겁니까?] 시나리오가 시작되었음에도 아무도 움직이지 않자, 아킬레우스가 두둥실 허공을 날았다. [다들 <기간토마키아>가 처음이시라 무서우신 모양인데······ 별거 아닙니다. 제가 먼저 시범을 보여드리죠.] 아킬레우스의 손에 성유물인 [물푸레나무 창]이 쥐어져 있었다. 트로이 전쟁에서 무수한 무장들을 꿰어 죽인 전설의 창. 화신들의 함성이 터져 나왔다. 아킬레우스는 올림포스의 대영웅. 어떤 거신이라한들, 그에게 대적할 수 있을 턱이 없었다. 한수영은 팔의 붕대를 풀었다. 시나리오는 중요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여기서 파천검성을 잃을 수는 없었다. [보십시오. 이렇게 하는 겁니―!] 쏜살같이 날아간 아킬레우스가 파천검성의 심장을 노리고 창을 휘두르는 순간, 한수영이 달려나갔다. 그리고 한수영의 발걸음은 멈췄다. 텁. 쇄도하던 아킬레우스가 허공에 멈춰있었다. 환호하던 화신들의 함성이 멎었다. 파천검성의 거대한 손이 아킬레우스의 머리를 죄고 있었다. [<무림>이든 <올림포스>든, 거신은 언제나 같은 취급이군.] 졸지에 벌레처럼 허공에 매달린 아킬레우스가 발버둥을 쳤다. 발버둥을 치면 칠수록, 파천검성의 손등에 튀어나온 근육이 불거지고 있었다. 어디선가 쩌저적,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거신’을 사냥하고 싶으냐?] 파천검성의 차가운 눈길이 화신들과 성좌들을 일별했다. 콰드득 하는 소리와 함께, 아킬레우스의 머리가 으깨졌다. [그럼 어디 한번 해보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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