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3화

323화 [작은 아이야, 너는 누구냐?] 거신에게서 뻗어 나온 수많은 팔들 중 세 개가, 정확히 나와 유중혁 그리고 김남운을 쥐고 있었다. 허공에 대롱대롱 매달린 채, 나는 현실감 없는 눈으로 거신을 마주보았다. ······이렇게 쉽게 문이 열렸다고? 이해가 가질 않았다. 지하 77층 아래의 거신들을 봉인한 문은, 본래 안쪽에서는 열 수 없게 되어 있다. 47회차에서도, 211회차에서도 그것은 마찬가지였다. 때문에 미리 제물을 준비해 온 것인데······. [큼······ 개연성이 곤란하구만. 요즘 들어 심해지는군.] 츠츠츠츳, 소리와 함께 거신의 전신으로 개연성의 스파크가 번졌다. 거신이 자신의 손가락 하나를 뽑아 문밖으로 내던졌다. 그러자 스파크는 기다렸다는 듯 달려들어 거신의 손가락을 녹여 없애버렸다. 그리고는 천천히 사그라지는 스파크······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고작 손가락 하나로 제물의 개연성을 대신했다고? 유중혁의 어떤 회차에서도 그런 일이 가능했던 적은 없었다. 고오오오오······. 거신의 전신에서 희미하게 피어오르는 아우라. 격을 감추고 있지만, 그 깊이를 쉬이 헤아릴 수 없는 막대한 ‘격’이 거신의 내부에 잠들어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것들 중 하나. 세월을 통해 쌓인 ‘신화’. 표면에 맴도는 세월을 가늠하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떨려올 지경이었다. 이자는 티탄. 틀림없는 태고의 거신이었다. 거신의 몸피에서 약동하는 신화들은 많이 낡아 있었지만, 여전히 살아 있었다. 허나 내가 알고 있는 원작과는 많이 다른 모습이었다. 「유중혁이 만난 태고의 거신들은, 늘 쇠락 속에 죽음을 앞두고 있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모든 거신은 <티타노마키아>와 <기간토마키아>의 ‘거대 설화’에 의존해 살아간다. 그리고 그 신화의 영향력이 약해지거나, 전승의 왜곡이 심해질수록 그들의 힘 또한 약해진다. 때문에 <올림포스>의 상습적인 <기간토마키아> 이벤트로 인해, 그들의 거대 설화는 지금쯤 상당히 약화된 상태여야 했다. [아이야, 대답하지 않을 셈이냐? 나는 인내심이 바다처럼 깊어 기다리는 것에는 자신이 있단다. 이미 오랫동안 기다렸는데, 더 기다리지 못할 이유도 없으니.] 하지만 눈앞의 거신의 목소리에는, 믿을 수 없는 활력이 남아 있었다. 문득 스쳐가는 가정이 있었다. 「어쩌면 <명계>에 너무 일찍 온 것은 아닐까?」 이번 <기간토마키아>는 아직 일어나지 않았고, 그 때문에 거신들의 쇠락이 아직 임계점을 넘지 않았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거신은 계속해서 말했다. [하지만······ 나 말고 다른 친구들도 그럴지는 모르겠구나. 너희처럼 맛있어 보이는 아이들이 들어온 것은 정말 간만이거든.] 김남운은 대답할 생각도 못하고 턱을 떨고 있었다. 그런 김남운이 귀엽다는 듯, 거신이 김남운의 뺨을 쓰다듬었다. [죄업이 깊은 아이구나. 그런 아이일수록 뜯어 먹는 맛이 좋지. 스스로 거신병의 몸이 되다니······ 혹시 지난번에 뜯겼던 그 아이인가?] <타르타로스>를 탈출하려다 지하로 추락한 죄수들은, 대개 거신들의 먹이가 된다. 덜덜 떠는 김남운은 인간이었다면 이미 거품이라도 물었을 듯한 모습이었다. 거신은 다시 내게 시선을 돌렸다. [네게선 많은 냄새가 난다. 성좌, 천사, 마족, 인간······ 거기에 이계의 신격까지. 대체 어떻게 되먹은 설화인 게냐?]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때로는 말보다 확실한 대답이 있으니까. 설령 상대가 ‘태고의 거신’이라고 한들, 처음부터 주눅들어 있을 수는 없다. [마왕의 ‘격’을 개방합니다!] 쿠구구구구! 거신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오자, 거신의 모습은 한결 명료하게 보였다. 거신의 크기는 내 상상 이상이었다. 거의 백 미터는 넘을 듯한 신장······ 애초에 싸움이 되지 않을 수준이었다. [그 아이는 내가 먹겠다.] [반을 찢도록 하자.] 곳곳에서 스멀스멀 기어나오는 목소리. 나는 그에 경고하듯 냉정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우리는 먹이가 아닙니다.” “우리는 협상을 하러 왔다.” 유중혁도 말을 보탰다. 초월좌의 격을 뿜어내는 유중혁도, 어느새 거신의 손아귀를 빠져나온 채였다. 그러나 아랑곳없는 거신의 답이 돌아왔다. [그것은 너희가 결정할 일이 아니다.] 그렇게 나올 줄 알았다. 거신들의 멸망은 결국 저 오만함에서 비롯된 것이니까. 나는 더 지체하지 않고 진언을 발동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위대한 ‘백수(百手)의 왕자들’, ‘헤카톤케이레스 삼형제’시여.] 내 말과 함께, 어둠 속에서 삼백 개의 눈동자들이 동시에 뜨여졌다. 그 눈동자들은, 단 ‘세 거신’의 것이었다. 세 거신은 동시에 말했다. [재미있구나. 우리를 알면서도 이곳에 찾아왔다?] 오십 개의 머리와, 백 개의 팔을 가진 백수거신(百手巨神)들. 나는 이 티탄 거신들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굳센 폭풍, 브리아레오스. 돌진하는 거암(巨巖), 코토스. 변화하는 수족(手足), 귀에스. 이들은 <티타노마키아>와 <기간토마키아>를 모두 겪은, 살아 있는 신화의 증인들이었다. 그들의 몸엔 <올림포스>의 온갖 설화들이 고스란히 누적되어 있었다. 만약 저들이 ‘책’이라면, 이 자리에 앉아 몇 달이고 몇십 년이고 읽어낼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제4의 벽’이 탐욕스레 입맛을 다십니다.] 아마도, 이것이 신화(神話)다.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이야기. 필멸자들을 매개로 전승되어 마침내 하나의 세계관을 이룬 것들. 세 거신들의 외양은 모두 같았으나, 눈동자의 색이 달랐다. 브리아레오스는 푸른 색 눈동자, 코토스는 흙색 눈동자, 그리고 귀에스는 초록색 눈동자. 나는 그 수백 개의 눈동자를 가만히 응시하며, 다시 입을 열었다. [나는 당신들을, 이곳의 모든 거신족을 <타르타로스>에서 해방시키러 왔습니다.] 쩌렁쩌렁 울려 퍼지는 진언이 메아리치며 퍼져 나갔다. 아마도, 헤카톤케이레스들 뿐만 아니라 <타르타로스> 전체의 거신들이 들었을 법한 크기였다. 어둠 속에서 몇몇 거신들이 몸을 일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왜냐하면 눈앞의 티탄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 말을 들은 헤카톤케이레스들의 반응은 제각각이었다. 코토스는 심드렁한 모습이었고, 귀에스는 지겨운 표정이었다. 하지만 브리아레오스만은 달랐다. [재미있는 농담이로군. 너를 더 먹고 싶어졌다.] 살 떨리는 협박에도 나는 굴하지 않고 웃었다. “보시다시피 전 너무 작아서 맛을 느낄 새도 없을 텐데요. 저보다는 저 녀석이 더 먹을 게 많을 겁니다.” 나는 유중혁을 돌아보았다. 기다렸다는 듯, 유중혁의 근육이 크게 꿈틀거리고 있었다. 이내 쩌저저적, 하는 소리와 함께 유중혁의 골격이 커지기 시작했다. 2미터, 3미터, 4미터······ 급격하게 체고가 늘어난 유중혁이, [흑천마도]를 쥔 채 브리아레오스를 바라보았다. 우리를 보던 백 개의 눈 중 절반이 의심의 빛을 띠었다. [······거신화? 어떻게 그 스킬을 가지고 있는 거지?] “당신에게 배웠다, 브리아레오스.” [흑천마도]에 하늘을 깨부수는 [파천검도]의 힘이 어른거렸다. 신화에 대항하는 작은 영웅처럼, 유중혁이 으르렁거리며 말했다. “정확히는, 지난 ‘회차’의 당신에게.” * 엄밀히 따지면, 유중혁의 ‘스승’은 파천검성 하나뿐이다. 녀석이 가진 힘의 원천은 회귀로 반복 숙련된 [파천검도]가 핵심이니까. 그렇다고 해서 유중혁이 하나의 기술만을 익힌 것은 아니었다. 무수한 회귀를 거치며, 유중혁은 다양한 존재에게서 다양한 기술을 습득했다. 스킬 [거신화]가 그랬고. 성흔 [전승]이 그러했다. 특히 [거신화]를 가르쳐 준 브리아레오스는 유중혁과 약간의 인연이 있었다. 파천검성을 닮은 저 푸른 색 눈동자가 그 증거였다. [얼마 전 어린 거신족 하나가 이곳을 방문한 적이 있었지. 그때, 그 아이의 ‘운명’을 각성시켜주는 대가로 약간의 이야기를 들었다. ······뭔가 싶었는데, 너희에 관한 이야기였군.] <제1 무림>에서 나는 파천검성의 도움을 얻는 대가로 그녀를 <타르타로스>에 보내준 적이 있었다. 아마 파천검성이 그때 우리 이야기를 한 모양이었다. 그 고집불통 초월좌가 무슨 말을 늘어놓은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의외로 이야기가 잘 풀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성좌들이 말하는 특이점이군.] [거대한 수레를 움직이는 존재······.] [정말로 시나리오가 ■■을 향해 가고 있는 것인가······.] 조금 전까지 우리를 먹어 치울 듯 굴던 거신들의 목소리에 알 수 없는 피로감과 해방감이 묻어났다. 아니, 해방감이라기보다는 거의 체념조에 가까운 목소리였다. [너희에게 흥미가 생겼다. 그래, 우리를 어떻게 해방시켜줄 생각이냐?] “<기간토마키아>를 일으킬 겁니다.” 나는 곧장 본론을 말했다. 어차피 티탄들과 만나버렸고, 일을 물릴 수도 없다면 저지르고 보는 편이 나았다. 헤카톤케이레스 삼형제는 <티타노마키아>와 <기간토마키아>의 주역들. 이들만 있다면, <기간토마키아>를 내 생각대로 뒤엎는 것도 불가능한 일만은 아니었다. “이쪽은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당신들이 마음만 먹는다면―” [거절한다.] 너무나 단호한 즉답에, 나는 조금 머뭇거렸다. “어째서입니까?” [어린아이야. 너는 말해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우습게도,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나는 어째서 그들이 제안을 거절하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헤카톤케이레스 삼형제와 거신들은 이곳 <타르타로스>에서 아주 오랫동안 수감되어 있었다. 누구보다 이 감옥을 증오하는 자들이었고, 12신좌에 대한 깊은 원망을 품고 있는 자들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이들은 해방을 거부하는 것일까. 「김 독자 머리 나 쁘 다」 나는 빠르게 ‘멸살법’의 내용을 떠올려 보았지만, 마땅한 혜안은 떠오르지 않았다. 설명 덩어리 ‘멸살법’에도 거신들에 대한 정보는 자세히 소개되지 않는다. 거신들과의 접점이 늘어나는 후반부로 갈수록, 유중혁은 입을 떠벌리기보다는 칼을 먼저 꺼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지금처럼. ―가만있어 인마. 여기서 칼 꺼내면 진짜 우리 다 망해. 나는 칼자루를 놓는 유중혁을 일별한 후 다시 거신들을 돌아보았다. 방법을 떠올려야 한다. 이 수천, 수만 년 묵은 덩어리들을 설득할 방법을. 그런데 뜻밖에도, 브리아레오스가 먼저 입을 열었다. [어린 성좌야, 너는 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 <기간토마키아>가 있었다고 생각하느냐?] 순간, 거신들의 표정에서 활자들이 일렁였다. 거신들의 설화가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었다. 아주 오래된 감정들이 실린 문장들. [‘시나리오의 해석자’의 특성 효과가 발동합니다!] [설화에 대한 당신의 이해도가 급격히 상승합니다!] 나는 그 문장을 통해 거신들의 기억을 엿볼 수 있었다. 오래전 있었던 <티타노마키아>와 <기간토마키아>의 역사들. [모든 시나리오의 결과는 정해져 있다. 우리는 그 시나리오의 단역일 뿐이야. 이미 우리는 네가 알지 못하는 수많은 <기간토마키아>를 치러왔다.] 60번 시나리오, <기간토마키아>. 그 시나리오 속에서 거신들은 짓밟혔다. 전쟁에서 승리한 <올림포스>는 주기적으로 <기간토마키아>를 다시 열었다. 거신들은 몇 번이고, 또 몇 번이고 그 전쟁에 끌려나갔다. 남루한 옷과 장비를 걸친 채, 무장한 수백의 성좌들과 화신들의 사냥감이 되었다. 피묻은 상흔들은 모두 거짓이 되고, 그들의 용맹이 조롱거리가 될 때까지. [우리는 패배하고.] 그런 일이 열 번. [패배했으며.] 백 번. [또 패배했다.] 천 번도 넘게 반복되었다. [그런데 너는 또다시 우리에게 그 전장에 서라고 말하는구나.] 마치, 유중혁의 회귀가 그러했던 것처럼. [너희는 언제까지 과거의 망령들을 불러낼 것이냐? 대체 언제까지 죽은 신화의 껍데기를 뒤집고, 능욕할 것이냐?] 그렇기에, 이 거신들은 유중혁과는 다른 의미에서 ‘회귀자’들이었고. 마침내는 그 ‘회귀’에 지쳐버린 존재들이었다. [아이야, 우리는 ‘해방’을 원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제 ‘이야기’가 궁금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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