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7화
317화
성큼성큼 다가온 수르야가 내 눈앞에 섰다.
나와는 20cm 이상 차이가 나는 큰 키. 그가 내뿜는 격에 대항하기 위해, 나 역시 격의 일부를 개방했다. 집무실 안은 순식간에 나와 수르야의 기운으로 가득 찼다.
지금부터의 대화는, 성좌와 성좌의 대화였다.
“<올림포스>의 파멸이라······ 그건 <베다>의 뜻입니까 아니면 당신의 뜻입니까?”
[그게 중요한가?]
“중요합니다.”
지금쯤이면 거대 성운들 사이의 트러블이 본격화될 거라 생각은 했다.
나를 엿 먹일 때는 서로 간에 협력을 추구했다지만, 본래 <베다>나 <올림포스>, 그리고 <파피루스>는 견고한 동맹 관계가 아니었다.
‘단 하나의 설화’를 추구한다는 점에 있어서, 모든 거대 성운들은 잠재적 경쟁 관계에 놓여 있으니까.
잠시 고민하던 수르야가 답했다.
[나는 <올림포스>도 <베다>도 마음에 들지 않아. 이 정도면 답이 되었나?]
애매모호한 대답이었다.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내가 원하던 대답이기도 했다.
‘멸살법’의 원작을 생각한다면 확실히 수르야는 <베다>에서도 이단적인 성좌였다.
“대답이 됐습니다.”
[소마를 내주는 것 정도는 나 하나의 권한으로도 충분해. 내가 누구인지는 알고 있겠지?]
수르야는 불사의 음료인 소마의 출처. 그의 약속을 받아낸다면 소마를 얻는 것에는 확실히 문제가 없을 것이다.
그나저나 이거······ 일이 재미있게 되었다.
우리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즐거운지, 메타트론이 손가락을 까닥거리고 있었다. 나는 메트로놈처럼 움직이는 그 손가락을 보며 말했다.
“아직 질문이 하나 남았습니다. <올림포스>의 파멸이라 함은 정확히 어떤―”
[60번 시나리오, <기간토 마키아>.]
“그건 그냥 테마파크 이벤트잖습니까. 고작해야 거신 몇 마리 소환해서 사냥 축제를 벌이는······.”
[저쪽이 진지하지 않다면, 진지하게 만들겠다고 한 것은 그대일 텐데.]
······언제 내가 한 말을 듣고 있었지?
이 자식도 비유 채널의 구독좌인가?
[시나리오 하나 거꾸러뜨린다고 <올림포스>가 갑자기 멸망하지는 않겠지. 하지만, 몰락으로 가는 단초를 제공할 수는 있을 것이다.]
“어떻게 말입니까?”
[방법은 그대가 이미 생각하고 있지 않나?]
수르야의 이마에 달린 ‘제3의 눈’이 희번덕거렸다. 나는 그 눈을 가만히 마주 보았다.
하긴, 언제까지 한 발짝 물러서서 시치미만 뗄 수는 없겠지.
“저나 제 성운의 힘만으로는 무립니다. 물론, 그렇다고 아예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지만 말입니다.”
내 호언에 곁에 있던 메타트론의 손가락이 멎었다.
나는 메타트론을 보며 말했다.
“서기관. 당신이 저자를 이곳으로 불렀으니 책임을 지십시오.”
[······어떤 책임 말입니까?]
“이 계약의 증인이 되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그러자 메타트론의 표정에도 흥미가 스쳤다. 줄곧 관망자였던 그의 표정이, 책략가의 그것으로 변하고 있었다.
[제가 증인이 된다면 <에덴>에는 어떤 이득이 있죠?]
“이번에 획득할 ‘거대 설화’의 지분을 나누어주겠습니다.”
거대 설화, <기간토 마키아>의 지분.
아무리 작위적으로 만들어진 시나리오라 해도, 거대 설화급 설화는 성운으로서 무시할 수 없는 유혹이었다.
거기다 <에덴>의 대천사들은 하루에도 몇 번씩 사고를 치고, 그로 인한 개연성의 후폭풍을 무마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거대 설화’가 필요하다.
메타트론이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맨입으로는 안 됩니다.”
[무슨 말이죠? 증언을 서는 것만으로도 조건은 충분······.]
“겨우 그거 하나 해주시고 ‘거대 설화’의 지분을 받아 가시려고요? 대천사의 양심은 어디로 갔습니까?”
[‘제4의 벽’이 고개를 끄덕입니다.]
[‘선악을 가르는 벽’이 자신의 주인을 유심히 바라봅니다.]
메타트론의 안색에 희미한 당혹감이 스쳤다.
어떤 정의는 때로 그 정의의 주인을 잡아먹는 법이다.
수르야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중얼거렸다.
[과연 ‘마왕’이로군.]
[······‘구원의 마왕’. <에덴>에 원하는 것이 있습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원하는 것이라면 많다.
앞으로 있을 <기간토 마키아>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한두 가지의 준비로는 부족하기 때문이다.
「김독자는 1863회차를 떠올렸다.」
이젠 누구도 잃지 않을 것이다.
「김독자의 머릿속에 ‘멸살법’의 정보들이 떠올랐다 사라졌다.」
이제부터의 싸움은 최상위권의 성좌들이 참전할 가능성이 있었다.
수르야 뿐만 아니라 <베다>의 또 다른 고위신들― <로카팔라>들이 움직일 가능성도 있었고, <올림포스>에서도 12주신들 중 몇몇이 시나리오에 참가할 것이다.
그뿐인가? ‘마왕 선발전’ 때와는 달리 고위급의 마왕을 만나게 될 수도 있다. 그리고 어쩌면, 미카엘 같은 녀석도.
······미카엘이라.
「마침내, 김독자는 결정을 마쳤다.」
나는 메타트론의 뒤쪽 진열대에 놓여 있는 아이템 중 하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제게 <에덴>의 성유물 중 하나를 주십시오.”
*
잠시 후, 수르야와의 계약을 끝낸 김독자는 <에덴>의 출입 포탈에 섰다. 들어올 때와는 달리, 이번엔 당당히 정문에 선 모양새였다.
몇몇 천사들이 배웅을 나왔다.
[······벌써 가?]
정희원의 손을 꼭 잡은 우리엘이 섭섭하다는 듯 말했다. 그런 우리엘을 가만히 보던 정희원이 우리엘을 품에 꼭 끌어안았다.
[웃······?]
처음에는 당황하던 우리엘도, 한발 늦게 정희원의 등을 안았다. 쑥스러움으로 가득한 얼굴이었다.
[성좌, ‘물병자리에 핀 백합’이 화신 ‘정희원’을 노려봅니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가브리엘의 간접 메시지.
김독자는 잠시 뭔가를 생각하는 듯 하늘을 바라보다가 정희원을 향해 말했다.
“감동적인 작별 인사를 방해해서 미안하지만······ 희원 씨는 여기서 일주일 더 있다가 귀환하세요.”
“네?”
“서기관에게는 따로 말해 두었으니 걱정 마시고요.”
갑작스런 선언에 우리엘이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물었다.
[정말? 그래도 돼?]
“그럼요. 대신 희원 씨 좀 단단히 훈련시켜 주세요. 지난 3년 동안 곁에 없으셨잖아요.”
[······응! 맡겨 둬!]
환하게 웃는 우리엘을 뒤로하고, 김독자가 정희원을 보았다.
“희원 씨, 일주일 뒤 <올림포스>에서 만납시다.”
“······알겠어요, 겁나 강해져서 돌아갈게요.”
짧은 악수를 마지막으로, 김독자가 포탈 너머로 사라졌다. 몇몇 천사들이 섭섭한 표정을 지었고, 또 어떤 천사들은 한숨을 내쉬었다.
잠깐의 이벤트가 끝났다는 듯, 천사들은 다시 각자의 자리로 되돌아갔다.
가브리엘은 멀리서 그 정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가브리엘.]
[······서기관 님.]
등 뒤에 나타난 메타트론을 향해 가브리엘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왜 그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습니까?]
가브리엘은 대답하지 않았다.
[요피엘의 일은 그대의 잘못이 아닙니다.]
[하지만······.]
[요피엘은 강합니다. 그녀는 자신의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고 있어요. 그녀의 선택은, 분명 <에덴>의 멸망을 막을 단초가 될 겁니다.]
멸망이라는 말에 가브리엘의 맑은 눈이 흔들렸다.
뭔가를 묻고 싶은 듯, 그녀의 입술이 살짝 열리는 순간.
[서신이 도착했습니다.]
허공에서, 메타트론을 향한 메시지가 도착했다.
놀랍게도 해당 메시지의 발신인은 ‘붉은 코스모스의 지휘관’이었다.
―이계의 신격, ‘은밀한 모략가’의 정체에 관한 보고.
메타트론은 허공에서 깜빡이는 보고서를 향해 손을 뻗으며 말했다.
[곧, 진짜 전쟁이 시작될 겁니다.]
*
마치 전쟁터를 연상시키는, 시끌벅적한 거리. 경매장으로 향하는 길목에, 무수한 좌판 상인들이 온갖 종류의 아이템을 판매하고 있었다.
우뚝 멈춰선 유중혁이 뒤쪽을 향해 말했다.
“빨리 와라.”
말은 거칠게 하지만, 유중혁은 시종일관 이설화의 동태를 신경 쓰고 있었다. 혹여나 그녀가 다치지 않을까 지나치는 모든 성좌와 화신들에게 희미한 격을 내뿜어 댔고, 달려오는 차가 있으면 그 차의 앞을 막아섰다.
몇몇 화신들이 욕설을 지껄였지만 유중혁은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그냥 우리가 차를 피하는 편이······.”
“보행자 우선이다.”
그 뻔뻔함이 너무나 유중혁 다웠기에, 이설화는 무슨 말을 하려다가도 그냥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유중혁이 물었다.
“······왜 웃지?”
“중혁 씨는 회귀자라고 하셨죠.”
“그렇다.”
“그럼 이전의 삶에도 절 만나신 적이 있나요?”
그 질문에, 유중혁은 잠시 대답이 없었다.
“없다.”
“······그렇군요.”
어색한 분위기가 두 사람을 갈랐다.
이설화는 유중혁의 옆모습을 보았다. 분명 곁에 있음에도 한참이나 먼 곳을 걸어가는 것 같은 사람.
이설화가 쓰게 웃으며 말했다.
“조금 천천히 가요. 살 만한 아이템이나 스킬북이 있을 수도 있잖아요.”
“그런 것에 한눈팔 시간 따윈 없다.”
“전 벌써 하나 샀는데요?”
이설화가 웃으며 손에 든 스킬북을 흔들었다.
[스킬 ― 습도 보존]
스킬북을 확인한 유중혁이 눈을 가늘게 떴다.
“쓸데없는 스킬을 샀군.”
벌써 스킬을 사용 중인지, 이설화의 뺨과 입술에 촉촉함이 감돌고 있었다. 시나리오가 시작된 후 생필품을 구하기가 어려워진 까닭에, 이런 생활 스킬들은 남녀를 불문하고 쏠쏠한 인기를 끌고 있었다. 유중혁의 얼굴을 들여다보던 이설화가 말했다.
“중혁 씨도 필요하실 거 같은데요? 손등이랑 입술이 다 트셨잖아요. 이 도시는 기온이 전체적으로 낮아서 피부가 금방 건조해져요.”
“전투에 필요 없는 스킬은 배울 필요 없다.”
“독자 씨도 이 스킬 있던데요?”
유중혁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김독자도 그 스킬이 있다고?”
“네, 성좌들한테 인기 끌려면 이 정도는 필수로 가지고 있어야 한다면서······.”
“그놈은 아이돌이라도 되고 싶은 모양이군.”
유중혁이 으드득 이를 갈며 발걸음을 박찼다.
이설화는 그런 유중혁을 재미있다는 듯 바라보았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저 냉정한 사내는 김독자라는 이름만 나오면 쉽게 화를 낸다.
자세히 보자, 유중혁의 시선이 흘끗흘끗 가판대를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스킬북 50% 할인.
풋 웃음이 나온 이설화가 말했다.
“제가 하나 사드릴까요?”
유중혁의 걸음이 멎었다. 뭔가 마음에 드는 아이템이라도 있는 걸까 싶었는데, 뭔가가 심상치 않았다. 파르르 떨리는 주먹. 망막 깊숙한 곳에서 흘러넘치는 분노가 유중혁의 표정을 지배하고 있었다.
“······중혁 씨?”
멀리서 보이는 경매장의 입구. 그리고 그곳으로 들어가는 한 무리의 화신들. 찰랑이는 금발 머리. 이설화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살기를 억제하지 못한 유중혁의 손이 [흑천마도]의 손잡이를 쥐고 있었다.
“중혁 씨, 잠깐만요!”
이설화는 본능적으로 유중혁의 팔을 붙잡았다. 저 금발의 여자가 누구인지는 이설화도 알고 있었다.
‘아스가르드의 예언자.’
언젠가, 스치듯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났다.
지난 회차의 유중혁은, 저 여자에게 배신당해서 죽었다.
“안돼요. 여기서는······ 아직 다른 일행들도······!”
마음이 다급해진다.
아무리 유중혁이라고 해도, 이곳은 성좌들의 경매장. 위인급부터 설화급에 이르는 성좌들이 모여 있는 장소였다.
게다가, 유중혁의 적은 혼자가 아니었다. 지금 섣불리 달려들었다간······.
“내 이럴 줄 알았지.”
비꼬는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자, 한수영이 서 있었다.
“벌써 잊었냐? 김독자가 사고치지 말랬잖아.”
한수영이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차며 손가락으로 코인을 튕겼다.
유중혁이 차가운 목소리로 답했다.
“네가 상관할 일이 아니다.”
“왜 상관할 일이 아냐? 동료잖아.”
“동료?”
유중혁의 입술이 일그러졌다.
“넌 아니다.”
“이게 말이면 단줄 알아······ 야, 네가 아무리 주인공이라도······!”
“수영 씨.”
뒤늦게 달려온 일행들의 만류에, 한수영이 이마를 짚으며 중얼거렸다.
“후우······ 내가 김독자 유중혁 때문에 제 명에 못 산다 진짜······.”
“안나 크로프트는 여기서 제거해야 한다.”
“글쎄, 김독자는 그걸 원하지 않을 걸?”
“김독자와는 아무 상관―”
“그냥 저 여자한테 한 방 먹일 수만 있으면 되는 거지?”
유중혁이 멈칫 한수영을 바라보았다. 한수영은 그런 유중혁을 잠시 바라보다가, 경매장의 입구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나한테 좋은 생각이 있는데, 어때?”
한수영의 손에 아이템 하나가 쥐어져 있었다.
유중혁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건······?”
“아까 김독자 코트에서 몰래 빼낸 거야.”
한수영의 입가에 악동 같은 미소가 맺혔다.
“예언자의 ‘예언’이 어디까지인지, 한 번 시험해 보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