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4화
314화
떠오른 메시지와 함께, 포탈의 소용돌이는 빠르게 잦아들었다. 대기하고 있던 일행들은 당황한 눈치였다. 먼저 의문을 제기한 것은 정희원이었다.
“······입장 거절? 이건 뭐죠?”
나는 다시 한번 행선지를 외쳐 보았다.
[현재 <올림포스>는 모든 방문객의 입장을 거절하고 있습니다.]
[<올림포스> 시나리오는 7일 뒤부터 개방됩니다.]
7일 뒤부터 개방된다······?
그 말에,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작은 성운인 것 같은데, 패기가 제법이군. <올림포스>에 갈 생각을 하다니.]
중후한 진언이 들려온 것은 포탈의 맞은편, 광장의 분수대 옆에 앉아 있던 한 성좌였다.
정갈하면서도 폭력적인 기세의 격으로 보아 오랜 세월 고련을 거듭해 성좌에 오른 무인(武人)이 틀림없었다.
이현성보다도 커다란 덩치에, 길고 구불구불한 창날을 등에 멘 화신체······ 잠깐만, 저 창날은······?
[흠, 인상착의가 익숙한데······ 자네들, 어디서 왔나?]
나는 일행을 대표해서 대답했다.
“지구입니다.”
[호오, 나도 그곳 출신인데······ 반갑구만. 지구 어디? 대륙 쪽인가?]
“한반도입니다.”
[변방의 친구들이었군! 그곳에도 제법 괜찮은 장수들이 있지.]
호탕한 성좌의 웃음소리를 들으니 확신은 더욱 짙어졌다.
뱀의 머리를 닮은, 1장 팔척의 거창(巨槍)······.
끙, 하는 소리와 함께 분수대에서 일어난 사내는 우두둑 목을 꺾더니 휘적휘적 걸어 멀어져 갔다.
내 곁에 슬그머니 다가온 한수영이 말했다.
“야, 저 성좌 그놈이지? 장판파?”
“맞아.”
항우, 관우와 함께 중국 최고의 무장으로 손꼽히는 위인급 성좌.
그는 틀림없이 ‘장판파의 호신(虎臣)’, 장비(張飛) 장익덕이었다.
귓속말을 엿들었는지, 깜짝 놀란 이지혜가 물었다.
“진짜? 저 아저씨가 그 ‘장비’라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급변하는 일행들의 표정이 볼 만 했다.
인도의 대신격인 수르야를 만났을 때도 이 정도 반응은 아니었는데······.
과연, 한국에서 삼국지의 위상이 어느 정도인지 잘 알겠다.
심지어 이현성마저 허둥지둥하며 군인 수첩을 꺼내고 있었다.
“저기 독자 씨. 제가 삼국지 광팬인데, 사인이라도 받아야······.”
“······앞으로도 종종 이런 일을 겪게 될 겁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적 인물들 중에는 성좌위에 오른 존재가 많으니까요.”
나는 일행들과 함께 광장의 저변을 바라보았다. 조금 전까지는 한산했던 광장이 하나둘 모여든 성좌와 화신들로 어느새 도떼기시장을 이루고 있었다.
[53번 시나리오 참가자 모집한다!]
[몸빵 뛰면서 설화 쪼가리 얻어갈 화신 구함.]
곳곳에서 들려오는 천박한 진언들.
47번 이후의 시나리오에서는 본격적인 ‘설화 쌓기’가 가능해진다.
때문에 위인급 성좌들도 저런 식으로 간이 파티를 구성해 시나리오 공략에 참가하는 경우가 많았다. 저런 존재들이 지금껏 우리를 후원했다는 걸 믿을 수 없다는 듯, 정희원이 말했다.
“······갑자기 성좌들 격이 떨어져 보이는데요.”
“실제로 대부분은 하위격입니다. 저들이 떨어진 게 아니라 우리의 격이 올라갔다고 봐야겠죠.”
“우리도 상아 씨 구하고 나면 저 시나리오들을 깨야겠죠?”
“비형이 말했던 것처럼, 모두 깰 필요는 없습니다.”
나는 하늘에서 번쩍이는 ‘시나리오 광고판’을 올려다보았다.
―숨 막히는 거신들과의 전쟁, <올림포스>의 <기간토 마키아>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47번 이후의 시나리오들 중에는 성운이나 관리국이 직접 개입하여 만든 대형 시나리오가 많았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바로 <올림포스>에서 정기적으로 시행하는 <기간토 마키아>였다.
광고를 보던 몇몇 성좌들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번에는 진짜라던데? <타르타로스>에서 고대 거신들 푼다고 했어.”
“에이, 십수 년 전에도 그렇게 말해놓고 꼴랑 거신 한 마리 풀고 지들끼리 다 해 먹었잖아.”
“이번에는 다르다니까? 분위기가 아주 수상해. <올림포스>에 내분이 있다는 얘기가 있다고.”
“그 자식들 편 갈라 싸우는 척하면서 쇼하는 거 아냐?”
떠도는 이야기들을 들으며, 나는 이어지는 광고를 보았다.
<올림포스>의 주신들이 하나씩 등장하며 거신들과 화려한 전투를 벌이는 영상이었다. 바다를 가르는 트라이던트에 거신들의 대열이 뭉개지고, ‘흉포의 군신’이 지휘하는 정병들이 거신의 몸통을 향해 달려들었다. ‘정의와 지혜의 대변자’가 거신의 목을 베어냈으며, 영문은 알 수 없지만 ‘사랑과 미의 여신’이 갑자기 손가락 하트를 띄웠다.
광고의 마지막은 전쟁의 승리를 축하하며 술잔을 드는 빌어먹을 디오니소스의 모습이었다.
―일주일 뒤 시작될 <스타 스트림> 최고의 시나리오!
―시나리오 참가자 중 3명을 추첨하여 ‘화산의 대장장이’가 제작한 ‘한정판 거신병’을 드립니다.
―시나리오 입장료 : 100,000코인
그 광고를 끝까지 다 본 이길영이 나를 향해 물었다.
“······독자 형, 저 시나리오 깨려면 입장료도 내야 돼요?”
“응.”
“사기꾼들!”
“뭐, 장삿속이긴 하지. <올림포스>에서는 <스타 스트림>에 시나리오를 제공해 수입을 얻고, 도깨비들은 그걸 광고해서 그 수입을 다시 나눠 가지니까.”
내 말에 정희원이 어이없다는 듯 실소를 흘렸다.
“허탈하네요. 우린 이렇게 필사적인데······.”
“저쪽도 필사적이게 만들면 됩니다.”
표정을 굳힌 정희원이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그럼 이제부터 어떻게 하죠? 여기서 일주일을 기다려야 할까요? <올림포스> 시나리오는 일주일 뒤부터잖아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남은 시간은 3개월. 하루라도 허투루 낭비할 수는 없었다.
“<기간토 마키아>는 ‘거대 설화 시나리오’라서 도전하려면 철저한 준비가 필요합니다. 일단은 유상아 씨 쪽이 더 급하니 다른 방법을 알아봐야겠군요.”
「의식의 흐름」은 드물지만 다른 화신도 종종 앓는 병증. 꼭 <올림포스>가 아니더라도, 그와 비슷한 급의 대성운이라면 유상아를 치료할 방법을 알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나는 곰곰이 속으로 여러 가지 계획들을 세웠다.
이곳에서 얻어야 할 것은 크게 두 가지다.
“여기서 일행을 나눠야겠군요. 한수영, 다른 사람들 데리고 ‘경매장’에 가. 아마 유중혁도 그쪽에 갔을 거야. 가는 김에 사람들 장비도 좀 바꿔주고. 애들 옷도 좀 사줘.”
“나 돈 없거든?”
“코인 줄게.”
내 말에 한수영이 얼른 손가락을 뻗었다.
나는 한수영과 검지를 맞댄 채 코인을 교환했다.
짜르릉, 소리를 내며 차오르는 코인의 숫자를 본 한수영의 두 눈이 휘둥그레 변했다.
“······알고는 있었는데, 너 진짜 어마어마한 부자네.”
“아껴 써. 남아돌아서 많이 준 거 아니야.”
“얘들아, 가자. <김독자 컴퍼니> 부도내러!”
와아, 소리치며 한수영의 뒤를 따라가는 신유승과 이길영. 나는 내 쪽을 돌아보는 이지혜와 이현성에게 말했다.
“같이 가세요. 성좌들의 경매장엔 쓸만한 성유물들이 많이 있으니까요.”
“그, 그럼 저희도 따라 가보겠습니다!”
“고마워 아저씨!”
이지혜와 이현성이 바람처럼 달려 한수영을 쫓아갔다. 나는 그 뒤를 쫓아가려 엉거주춤 자세를 잡는 정희원의 어깨를 붙잡았다.
“희원 씨는 남아 주세요. 저랑 같이 가셔야 할 곳이 있습니다.”
*
잠시 후, 나는 정희원을 데리고 곧장 주변의 백화점으로 들어갔다. 성간도시 ‘별자리의 맥락’에 있는 ‘도깨비 마트’의 지점 중 하나였다.
그러나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커다란 도깨비 하나가 우리의 앞을 막았다.
[죄송하지만, 플래티넘 멤버 이상만 입장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추레한 행색 때문이었는지, 입구를 막은 도깨비의 눈에 희미한 멸시가 담겨 있었다. 나는 가타부타 설명하는 대신 ‘도깨비 보따리’를 열어 내 등급을 확인시켜주었다.
[······다이아몬드 멤버?]
허둥지둥하던 도깨비가 내 수식언과 고객 목록을 대조하더니 눈을 크게 떴다.
[죄, 죄송합니다! 이곳 매장 방문은 처음이시죠? 어이, 매니저님이랑 직원들 다 불러와! 마왕님 쇼핑하시는 데 불편한 일 없으시게―]
“필요 없습니다. 번거로우니 부르지 마세요.”
나는 그 말을 남기고 도깨비를 지나쳤다.
쪼르르 따라온 정희원이 통쾌하다는 듯 말했다.
“독자 씨 꼭 재벌 3세 같네요.”
“······일단은 제가 사장이잖아요.”
“근데 웬 백화점이에요?”
나는 정희원의 복색을 빠르게 살폈다. 낡은 특공복, 그리고 허리에 찬 [심판자의 검]. 지난 3년간 무수한 전투를 통해 피를 머금은 검은, 전보다 훨씬 더 검붉은 광택을 띠고 있었다.
“사원 복지를 우습게 생각하는 회사가 어떻게 성공하겠습니까.”
“하긴, 전 받을 만한 사원이긴 해요.”
우리는 매장의 한쪽 구석에 있는 진열대 앞에 섰다. 그곳에는 ‘양산형 제작자’의 라이벌 브랜드인 <1세대>의 명품들이 있었다.
나는 신중한 눈으로 아이템들을 살핀 뒤, 단정한 정장 두 벌을 꺼내들었다.
47번 시나리오 기준으로 SSS등급의 방어구에, 실용성도 나쁘지 않은 아이템이었다. 하지만 정희원은 당황한 눈치였다.
“정장은 갑자기 왜요?”
“꽤 격식을 차리는 곳에 가야 해서요.”
우리는 각각 정장으로 갈아입고 나왔다. 정장은 입는 순간 알맞은 사이즈로 몸에 감겨들었다.
정장을 걸친 정희원은 꼭 대통령 경호원 같은 모습이었다. 그러고 보면, 나는 아직도 정희원이 멸망 이전에 어떤 사람이었는지 모른다. [등장인물 일람]도 그런 정보는 알려주지 않고, ‘멸살법’ 원작에도 그녀의 이야기는 제대로 나오지 않으니까.
“희원 씨 직업이 뭐였다고 하셨죠? 물어봐도 됩니까?”
“음, 마지막으로 했던 건 바텐더였는데······ 그냥 알바였어요. 직업이라고 한다면······ 알바몬?”
정희원이 관자놀이를 머쓱하게 긁적이며 말했다.
“그전에는 운동했었어요.”
“운동이요?”
“중고등학교 때 검도요. 대회 나갔다가 부상으로 그만뒀지만. 독자 씨는요?”
“저는 게임 회사의 계약직 사원이었습니다. 곧 잘릴 운명이었죠.”
그리고 우리는 잠시 말이 없었다. 거울 속에 비친 두 남녀가 정장을 입은 채 우두커니 서 있었다. 몇몇 성좌들의 화신체가 우리를 흘끗거리며 지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거울 속의 정희원이 물었다.
“독자 씨, 그때보다 지금이 더 행복하죠?”
“······그때보다 지금이 더 낫냐는 이야기라면, 그렇습니다.”
너무 솔직한 대답이었나 아차 싶던 순간, 정희원이 빙긋 웃었다.
“저도 그래요.”
우리는 코인을 지불한 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위층으로 올라갔다.
정희원이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독자 씨, 어디까지 가요? 이제 옥상인데.”
“여기에 포탈이 있습니다.”
옥상의 문을 열고 나서자, 성간도시의 정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정희원이 경치에 짧은 감탄사를 흘렸지만, 감탄하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나는 정희원을 데리고 옥상의 난간 쪽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갔다.
“저 믿으시죠?”
시선의 교환은 짧았다. 나는 정희원의 손을 붙잡은 채, 그대로 옥상에서 뛰어내렸다. 정신없이 떨어지는 와중에도, 정희원은 지지 않겠다는 듯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지상을 향해 반쯤 추락했을 무렵, 나는 허공을 노려보았다.
[마왕, ‘구원의 마왕’이 숨겨진 포탈을 바라봅니다.]
[포탈이 암호를 요구합니다.]
“추락하는 모든 것에는 날개가 있다.”
츠츠츠츠츠츳!
텅 빈 허공에서 소용돌이치는 포탈이 우리의 몸을 집어 삼켰다.
[성운이 당신들을 허락합니다.]
사위가 한바탕 이지러지는 느낌과 함께, 발이 바닥에 닿았다.
태초의 숨결을 연상시키는 공기가 코끝을 스쳤다. 이제껏 한 번도 맡아본 적 없는 맑은 바람. 언덕 아래로 끝없이 펼쳐진 녹빛 초원, 그리고 저 너머에 세워진 새하얀 성.
정희원은 멍청한 얼굴로 나를 돌아보았다.
“독자 씨, 설마 여긴······.”
“맞습니다.”
이곳은, 바로 저 지고한 대천사들의 성운이었다.
굳이 이런 번거로운 형태로 들어온 것은, 입장에 소요되는 시간을 최소화하기 위함이었다. 나는 허공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아마 지금쯤 마중을 나오셨을 것 같은데······.”
그때, 머릿속으로 차가운 경종이 울렸다.
[······마왕?]
대천사의 그것이라기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냉혹한 목소리.
내가 기다리던 목소리가 아니었다.
아무래도 원하지 않는 마중객이 나타난 것 같았다.
[간덩이가 부었군. 어떻게 ‘마왕’이 이곳에 온 거지?]
츠츠츠츠츳.
설화급 성좌인 내 화신체가 위축될 정도의 힘.
저 담력 강한 정희원조차 안색이 새파랗게 질리고 있었다.
[마왕, ‘구원의 마왕’이 자신의 ‘격’을 개방합니다.]
한순간 숨통이 트이며 정희원이 숨을 토해냈다. 목소리의 주인을 찾기 위해 몸을 돌리려는데, 별안간 앞에서 튀어나온 손이 내 턱을 강하게 붙잡았다.
[‘구원의 마왕’이라고?]
고작 턱이 잡혔을 뿐인데 전신의 힘이 빠져나가고 있었다.
항거할 수 없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격이었다.
[어떻게 마왕 따위가 ‘구원’의 수식(修飾)을 가지고 있지? 그 수식언의 주인은 지난 1500년간 나 하나뿐이었는데 말이야.]
간신히 고개를 들자, 넘실거리는 백금발의 사내가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사이하게 빛나는 보랏빛 눈동자. 그 시선을 마주한 순간, 나는 이 성좌가 누구인지 깨달았다.
[성좌, ‘타락의 구원자’가 광기 어린 눈길로 당신을 바라봅니다.]
이 <에덴>에서 유일하게 선악(善惡)의 수식을 모두 가진 존재이자, <에덴>의 모든 대천사들 중 최강으로 손꼽히는 존재.
······빌어먹을, 걸려도 최악의 상대에게 걸렸군. 하필 이 녀석이 지금 <에덴>에 있을 줄이야.
사내의 보랏빛 눈이 초승달처럼 휘어졌다.
[뭐하는 놈인진 모르겠지만, 난 내 수식언 공유하는 걸 싫어하거든? 그러니까 죽어줘야겠어.]
내 턱을 잡은 사내의 손이 차가운 보랏빛으로 물드는 바로 그 순간.
[■■. 그 손 치워라, 미카엘. 진짜로 뒈지고 싶지 않으면.]
내가 기다렸던 대천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