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9화

309화 시나리오를 위해 나타난 도깨비는 비형이 아니었다. 하지만, 무척 낯익은 도깨비였다. 한때는 하급 도깨비였고, 심지어 나한테 도깨비 보따리 사용법을 배웠던 녀석. ―······김독자님? 두 눈이 호롱불처럼 휘둥그레진 도깨비가 나를 향해 도깨비 통신을 걸었다. ―접니다! 도깨비 영기요! 정장을 걸친 도깨비 영기가 나를 보고 있었다. 메인 시나리오 진행 때문인지 다른 참가자들에게 티를 내는 것은 꺼리는 모양새였다. ―오랜만이네. ―돌아오셨다는 소문은 들었는데······. ―······그새 소문이 퍼졌나? ―아유, 모를 수가 없죠. 지금 비형 님께서 김독자 님이 헤집어 놓은 개연성 수습하시느라 사방팔방으로······. 영기가 히죽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아무튼, 다시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다른 성좌 님들도 독자 님 소식을 많이 물어보셨어요. 이번 시나리오 끝나면 드디어 후원자분들을 뵈러 가시겠군요. ―잘 되면 그렇겠지. ―후후, 당연히 잘 되시겠죠. 하지만 김독자 님이라고 해서 특별 대우는 없습니다. 아시죠? ―알아. 멀리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느새, 46번 시나리오에 참가하기 위한 화신들이 주변에 제법 모여 있었다. [흐음······ 총 48명이라. 서울 지역은 참가자가 적은 편이군요.] 말투가 바뀐 영기가 침착한 눈으로 지원자들을 살폈다. 지원자들의 외양은 모두 각양각색이었다. 본래부터 [공단]의 주민이었던 사람들, 혹은 필사적으로 시나리오를 깨부수고 여기까지 올라온 화신들도 있었다. 재앙에서는 벗어났으나, 유중혁과의 계약을 거절한 몇몇 귀환자들도 보였다. 깊은 슬픔과 분노로 일그러진 표정들. 아마도 고향에서 가족을 찾지 못한 이들일 것이었다. [이번 시나리오는 지금까지의 시나리오와는 많이 다릅니다. 먼저, 이 시나리오는 ‘선택형 시나리오’입니다.] 의문을 던진 것은 무림 출신의 귀환자였다. “선택형 시나리오? 그게 뭐지?” [‘개인’의 자격으로 참가하실지, 아니면 ‘성운’의 자격으로 참가하실지를 선택하실 수 있다는 뜻입니다. 뭐, 어느 쪽을 선택하시든 함께 참가할 동료 한 사람은 꼭 필요하지만 말입니다.] 들려오는 영기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슬그머니 주먹을 쥐었다 폈다. 46번 시나리오, ‘별의 증명’. 드디어 올 것이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화신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뭐야, 개인 자격으로 참가하는 거랑 성운 자격으로 참가하는 건 무슨 차이가 있는 건데?” “멍청아. 개인 자격은 말 그대로 혼자 참가하는 거고, 성운 자격은 단체로 참가하는 거겠지. 뭐, 성운이 있을 경우의 얘기겠지만.” “벌써 성운에 가입되어 있는 사람들은 어떻게 되지? 강제로 ‘성운 자격’으로 참가하게 되는 건가?” [오, 아주 중요한 질문을 해주셨습니다. 안 그래도 그것에 관해서는······.] 영기의 말이 이어지려는 순간, 밤하늘 사이로 빛살이 번뜩였다. [이런, 벌써 오셨군요. 성격들도 급하셔라.] 말과 동시에 허공에서 메시지들이 쏟아졌다. 메시지들은 각자의 목적지를 향해 별똥별처럼 착지했고, 화신들의 머리 꼭대기에서 환한 빛을 뿜으며 맴돌았다. . . [성운, <아스가르드>에서 당신을 초대합니다.] [성운, <수호의 나무>에서 당신을 초대합니다.] [성운, <탐라>에서 당신을 초대합니다.] [성운, <황제>에서 당신을 초대합니다.] . . 46번 시나리오는, 성운들의 선발 경쟁으로 시작된다. “이, 이거 뭐야!” 놀란 화신들이 소리를 질렀다. 신중한 얼굴로 성운들의 목록을 점검하는 화신도 보였다. 이미 시나리오를 알고 있었던 소수의 귀환자들이었다. 몇몇 화신들은 다른 이들의 머리 위에서 맴도는 별의 개수를 세기도 했다. 대부분은 하나, 혹은 둘 정도였고 많은 경우는 다섯을 넘기도 했다. “······미친, 저쪽은 뭐야?” 물론, 가장 많은 메시지를 받은 건 우리 일행이었다. 특히나 유중혁을 비롯한 몇몇 일행들은 광휘로 인해 얼굴이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나는 내 머리 위를 올려다보았다. [당신에게 총 137개의 성운 초대가 도착하였습니다.] [단, 이 초대에 승낙하게 되면 성운 <김독자 컴퍼니>는 자동으로 해체됩니다.] 못 먹는 감 찔러나 보자는 생각으로 보낸 메시지들일까. 정말로 내가 내 성운을 해체하고 저기 가입할 거라고 생각하는 건지. 화신들이 조금 진정하는 듯하자, 영기가 말을 이었다. [이 시나리오는 처음으로 <성운>의 선택을 받는 시나리오입니다. 여러분들은 초대 받은 <성운>들 중 하나에 가입해 시나리오에 참가하실 수 있습니다.] “꼭 가입해야 돼? 가입하면 뭐가 좋은데?” [가입하지 않으셔도 상관은 없습니다. 하지만, 만약 여러분이 가입하신 <성운>이 이미 46번 시나리오인 ‘별의 증명’을 완료하였을 경우······.] 영기가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여러분은, 해당 시나리오를 면제받고 47번 시나리오로 직행하실 수 있습니다.] * 화신들의 북새통 속에, 일행들이 하나둘 내 쪽으로 모여들었다. “나는 <황제>를 선택하겠다!” “<영광의 깃발>을 택하겠어.” 그 와중에도, 선택을 마친 화신들이 여기저기 소리를 질렀다. [면제권이 충족된 성운을 선택하신 분들은 자동으로 47번 지역으로 전송되니, 선택 전에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대부분의 화신들은 46번 시나리오에 도전하기보다는 성운을 통해 업혀 가는 쪽을 택했다. 어느 정도는 합리적인 판단이었다. 한반도는 시나리오 진행이 더딘 편이었고, 때문에 46번 시나리오의 악명은 미리 시나리오가 시행된 다른 국가들을 통해 제법 알려진 편이었다. ―46번 시나리오에 두 명이 도전하면, 한 명은 죽는다. 그들 중 누구도 죽는 쪽이 되고 싶은 사람은 없었다. 어떤 화신들은 시나리오 참가를 보류했고, 어떤 화신들은 성운들의 선택을 받아 다음 시나리오로 나아갔다. 화신들의 숫자가 줄어들고, 마침내 영기가 우리를 바라보았다. [이제 여러분들만 남으셨군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주변에 모인 일행들이 내 선택을 기다리고 있었다. 영기가 재차 물었다. [성운의 자격으로 지원하시겠습니까, 아니면 개인 자격으로 지원하시겠습니까? 뭐, 어느 쪽을 선하시든 혼자 지원하시는 건 안 되지만 말입니다.] “성운의 자격으로 이 시나리오를 통과한다면, 후에 같은 성운에 소속된 인원들은 자동으로 시나리오 승격 처리되는 거겠지?” [호, 맞습니다. ‘구원의 마왕’님. 성운의 자격으로 도전할 생각이신가요?] “그래.” 46번 시나리오인 ‘별의 증명’은, 우리 같은 신생 성운에겐 일종의 데뷔 무대나 다름없었다. 이 시나리오에서 얼마만큼의 희생자를 내고, 어떤 성적을 거두느냐에 따라 ‘별자리의 맥락’에 기록되는 설화도 달라진다. 나는 일행들을 돌아보았다. 나와 유중혁을 제외한 일행들은 아직 성운에 가입하지 않았다. 나는 일행 하나하나와 눈을 마주친 뒤, 천천히 숨을 들이켜며 말했다. “선택을 강요하진 않겠습니다. 하지만 명심하세요. 여기서 다른 성운을 선택해 시나리오를 진행하시면 분명 불공정한 제약을―” “독자 아저씨는 진짜 솔직하지 못하다니까. 그냥 가입해달라고 말하면 되잖아?” 이지혜가 입술을 비죽이며 내 말을 끊었다. 쯧쯧, 하고 일행들이 혀를 차는 가운데, 제일 먼저 입을 연 것은 정희원이었다. “흐음, 이걸 어쩐다.” 장난스럽게 웃는 정희원의 머리 위에도, 까마득한 양의 ‘성운 초대’가 반짝이고 있었다. “우리엘을 생각하면 <에덴>으로 가는 게 맞긴 한데······.” 사실 많은 경우 화신들은 배후성이 소속된 성운에 가입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하지만 배후성이 무척 개방적이거나, 화신 개인의 선택을 존중하는 경우도 분명 존재한다. 특히나 <에덴>은 그와 관련해 화신의 자유의지를 존중하는 편이었다. 정희원이 물었다. “<김독자 컴퍼니>는 4대 보험은 가입시켜주나요?” “어, 음. 제가 이런 걸 처음 운영해 봐서······.” “점심시간이랑 낮잠 시간은?” “개인 정비 시간은 어떻게 됩니까?” “약재나 재료 아이템의 지원은요?” 이지혜도, 이현성도, 이설화도. 제각기 묻고 싶은 질문들을 던졌다. “저, 그게······ 아시겠지만, <김독자 컴퍼니>는 이제 막 만들어진 신생 성운입니다.” 나는 폭발적인 질문 세례 속에 말을 더듬다가,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쉬는 시간도, 개인 정비 시간도, 모두 여러분들이 정하셔야 합니다. 소모성 재료 아이템의 공급은 최선을 다해보겠지만 충분치 않을 수 있습니다. 잦은 야근이 있을 수도 있고, 충분한 수당을 못 드릴 수도 있습니다.” 말을 하면서도 참 양심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멸망 이전’이었더라면 누가 이런 회사에 들어오겠나 싶을 정도였다. 그럼에도 이현성은 내 말을 귀기울여 듣고 있었고, 이지혜는 하품을 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독자 씨.” “예?” 고요한 목소리로, 정희원이 말했다. “사실, 물어보고 싶은 게 산더미 같아요. 그동안 어디에 있었는지, 뭘 하느라 이렇게 늦게 돌아온 건지.” “저, 안 그래도 곧 이야기를 드리려고······.” “사실 들어도 화가 안 풀릴 거 같긴 해요.” “······.” “그날 일은 생각만 해도 화가 나요. 왜 독자 씨가 우리 목숨을 결정해요? 우린 독자 씨가 기르는 애완동물이 아닌데.” “······죄송합니다.” “설령 독자 씨한테 도움이 안 되더라도, 우리 삶은 우리가 결정하는 거라고요.” 정희원이 받은 상처가 어떤 것이었을지, 나는 짐작도 할 수 없었다. 어쩌면 정희원뿐만이 아닌지도 모른다. 지난 3년은, 일행들에게 그런 세월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내 결정은 이거에요.” 말꼬리를 흐린 정희원이 고개를 숙였다. 파르르 떨리는 어깨. 내가 다가가려는 순간, 정희원이 고개를 들어 나를 보았다. 저 강인한 검객이, 희미하게 붉어진 눈동자로 나를 보고 있었다. [화신 ‘정희원’이 성운 <김독자 컴퍼니>에 가입하였습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화신의 의견을 존중합니다.] 나는 입술을 깨문 채로 그 시선을 마주했다. 그리고 간신히, 정말 간신히 웃으며 대답했다. “고맙습니다, 희원 씨.” 정희원이 희미하게 미소했다. 두 번째로 나선 것은 이현성이었다. “저도 하고 싶은 말이 무척 많지만······ 희원 씨가 다 해버렸군요.” “그럼 먼저 말하지 그랬어요?” “워낙 말주변이 없어서······. 사실 저도 직군은 이제 그만하고 싶었습니다.” [화신 ‘이현성’이 성운 <김독자 컴퍼니>에 가입하였습니다.] [성좌, ‘강철의 주인’이 화신의 의견을 존중합니다.] 그다음은 이지혜였다. “윽, 난 이런 분위기 질색이야. 빨리 다음 차례로 넘겨!” [화신 ‘이지혜’가 성운 <김독자 컴퍼니>에 가입하였습니다.] [성좌, ‘해상전신’이 화신의 의견을 존중합니다.] 이설화도 미소를 지었다. “사실 전 어제 중혁 씨 통해서 가입했어요.” [성좌, ‘구암신의’가 고개를 끄덕입니다.] 신유승과 이길영이 내게 매달리며 말했다. “우리도요, 아저씨!” 목록을 확인해 보니, 정말이었다. 이미 세 사람은 내 성운에 가입되어 있었다. 모두가 머리 위에 떠오른 성운 메시지를 확인하는 동안, 오직 한 사람만이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일행들도 하나둘 그쪽을 바라보았다. 일행들 중 성운에 가입하지 않은 이는 이제 한 사람뿐. 한수영이 칫 하고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이번 한 번만 해주는 거야, 멍청아.” [화신 ‘한수영’이 성운 <김독자 컴퍼니>에 가입하였습니다.]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투덜거리며 화신의 의견을 존중합니다.] “대신 이름은 나중에 바꿀 거야. 한수영 코퍼레이션으로.” 나는 일행들을 향해 꾸벅 고개를 숙인 후, 기다리고 있던 영기 쪽을 돌아보았다. [흐음, 대충 정리는 끝나신 것 같군요. 그럼 묻겠습니다. 성운 <김독자 컴퍼니>. ‘성운 자격’으로 시나리오에 도전하시겠습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영기가 씩 웃으며 말을 이었다. [한꺼번에 많은 인원이 들어가면 재미가 없으니, 일행을 조금 나누겠습니다.] 뭔가 느낌이 이상했다. 인원이 많아서 일행을 나눈다? 원작의 46번 시나리오에 그런 내용은 없었는데? 영기의 표정이 께름했다. 묘하게 식은땀이 맺힌 녀석의 이마. ―죄송합니다, 김독자님. ······뭐? [성운 <파피루스>가 당신의 도전을 못마땅해합니다!] [다수의 성운이 당신의 도전에 눈살을 찌푸립니다!] 순간,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지 알 것 같았다. ······이런 개자식들이, 끝까지 훼방을 놓겠다 이거지? 나는 반사적으로 일행들을 향해 외쳤다. “다들 명심해요! 절대로 ‘별’에 손을 대서는······!” 눈부신 빛살과 함께, 눈앞의 정경이 바뀌기 시작했다. [당신의 성운은 참여 조건을 충족하였습니다.] [46번 시나리오 지역으로 이동합니다.] [참가 인원에게 방이 할당됩니다.] 그와 동시에, 허공에 시나리오 내용이 떠올랐다. + <메인 시나리오 # 46 ― 별의 증명> 분류 : 메인 난이도 : ??? 클리어 조건 : 방의 중심에 비치되어 있는 ‘별’을 입수해 사용하거나, 제한 시간 동안 상대방이 ‘별’을 입수하지 못하게 막으시오. 둘 중 하나의 조건이 충족될 시 시나리오는 자동으로 클리어됩니다. 제한시간 : 3시간 보상 : 추가 메시지로 설명됩니다. 실패시 : 조건부 사망 + 이어서 들려오는 영기의 목소리. [동료애가 아주 각별한 분들끼리 함께 넣어드리죠.] 눈을 떴을 때, 나는 새하얀 방 안에 덩그러니 홀로 서 있었다. 그리고 방의 중심에, 작은 대리석 장식대 위에 반쯤 두둥실 떠 있는 ‘별’이 있었다. [이런, 방 하나가 잘못 배정되었군요. 하하, 어쩔 수 없죠! 아무튼, 여러분께 이야기의 가호가 따르기를!] 목소리가 잦아들고, 방의 반대편에도 한 사람이 소환되었다. 나는 눈을 한 번 비빈 뒤 무시무시한 눈길로 이쪽을 노려보는 상대를 마주보았다. “······‘잘못 배정된 방’이 여기인가 본데.” [해당 방에 비치된 별의 보상이 공개됩니다!] + <별의 보상> 선택 1. 상대방보다 먼저 ‘별’을 획득해 사용할 시, 당신은 상대방이 가진 모든 스킬 및 설화를 획득할 수 있습니다. 선택 2. 상대방보다 먼저 ‘별’을 획득해 사용할 시, 당신은 상대방에 대한 무기한 생사여탈권을 가질 수 있습니다. 선택 3. ······. + 나는 보상 내역을 읽다 말고 상대방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어이, 어떻게 해야 할지 알지? 너도 알다시피 이 시나리오는······ 야!” 나는 말을 하다 말고 별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이미 방의 중심에 도착한 유중혁이 ‘별’을 향해 손을 뻗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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