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4화
304화
대체 어떻게, 이곳에 유중혁이 있는 것일까.
나는 혼란을 느끼면서도 귀환자들을 인도해 무사히 지상에 착지했다. 비석 앞에서 강대한 격을 흩뿌리는 유중혁을 보며, 긴장한 귀환자들이 뒷걸음질을 쳤다. 비천호리가 물었다.
“형씨, 저 자는······?”
“물러서세요, 제가 말해보겠습니다.”
나는 비천호리에게 눈짓을 하며, 유중혁을 향해 조금씩 접근했다.
어쨌든 우리 목적은 ‘목표 거점’에 표식을 남기는 것.
그것만 완수하면 시나리오는 완수된다.
유중혁의 십여 미터 앞으로 다가간 순간, 유중혁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기세가 바뀌었다.
나는 침을 삼키며 말했다.
“유중혁.”
당연하게도, 내 목소리는 제대로 전달되지 않을 것이다.
“비켜줘. 부탁한다.”
유중혁은 움직이지 않았다.
1863회차에 다녀온 내가 강해진 만큼, 이곳의 유중혁도 강해졌을 것이다.
얼핏 느껴지는 기세만으로도, 승부를 장담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뿐이다.
[전용 스킬, ‘전지적 독자 시점’을 발동합니다!]
이렇게 된 이상, 내 화신체를 기절시킨 뒤 유중혁에게 이입해서······.
[전용 스킬, ‘전지적 독자 시점’의 발동이 취소됩니다.]
[해당 인물에 대한 복합적인 이해도가 부족합니다.]
[현재 해당 인물의 상태를 이해하기 위한 독해력이 부족합니다.]
······뭐?
나는 깜짝 놀라 한 걸음 물러섰다.
이런 경우는 또 처음이었다.
이곳은 틀림없는 3회차다.
내가 잘 모르는 1863회차가 아니란 말이다.
고오오오오······!
눈앞의 유중혁이 낯설게 느껴졌다.
······ 대체 지난 3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형씨! 피하시게!”
때마침 비천호리가 밀치지 않았더라면, 유중혁의 칼날에 두 쪽이 날 뻔했다. 비천호리가 외쳤다.
“같이 해치우지! 위험한 놈인 것 같은데!”
“······안 됩니다.”
“왜? 혹시 저놈도 아는 놈인가?”
나는 비천호리를 보며 말했다.
“제 동료입니다.”
그 말이 내 입에서 나왔다는 것이 우스웠다.
언젠가의 유중혁의 기분을 이해할 것도 같았다.
나와 유중혁은 잘 맞지 않는다.
성격도 다르고, 시나리오를 진행하는 방식도 다르며, 누군가와 소통하는 방식도 다르다. 그럼에도 우리는 몇 번이고 서로의 목숨을 구해주었고, 그렇게 여기까지 왔다.
“······그러니까 죽일 수는 없습니다.”
나는 코트 속에 손을 집어넣었다.
유중혁에게 유중혁의 신념이 있듯, 내게도 나만의 신념이 있다.
[‘신념의 칼날’이 활성화됩니다!]
그것은 내가 쓰던 [부러지지 않는 신념]이 아니었다.
내 검보다 훨씬 거무튀튀한 광택이 도는 칼날.
이 검은 1863회차의 한수영이 쓰던 것이었다.
기이이이잉!
솟아오른 ‘신념의 칼날’의 에테르가 깊은 검은 빛을 띠고 있었다.
[해당 아이템의 등급이 시나리오의 형평성에 맞지 않습니다.]
[해당 아이템의 능력치가 일부 조정됩니다.]
한수영의 방식으로 정제된, 95번 시나리오의 [부러지지 않는 신념].
유중혁의 동공이 희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지금 내 모습이 어떻게 보이는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거대한 촉수에 에테르를 휘감은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그만둬, 유중혁. 난 싸울 생각이 없어.”
어떻게 하면 유중혁과 싸우지 않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내가 김독자라는 걸 알릴 수 있을까.
다가오는 유중혁의 칼날을 아슬아슬하게 피해낸 순간, 번뜩 생각난 것이 있었다.
······잠깐만, 혹시?
확신할 수는 없었다. 또 ‘시나리오 페널티’ 때문에 효과가 왜곡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래도 안 해보는 것보다는 나았다.
[아이템, ‘한낮의 밀회’를 발동하였습니다!]
[현재 대상과의 연결 상태가 양호합니다.]
[시나리오 페널티로 인해 아이템 사용주가 ‘못 생긴 오징어’로 변경됩니다.]
나는 곧바로 유중혁에게 메시지를 타전했다.
―유중혁! 나 김독자야! 베면 안 돼!
[한낮의 밀회]. 그것은 언젠가 유중혁이 빈사 상태가 되었을 때 소통용으로 남겨둔 아이템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아이템이, 아직까지도 유효했던 것이다.
[시나리오 페널티로 인해 발송한 메시지가 왜곡됩니다.]
―덤벼라 개복치.
······이런 빌어먹을. 이것까지 왜곡이냐?
나는 살짝 경계하며 유중혁의 눈치를 살폈다.
내용이 이상하게 갔지만, 유중혁이 메시지를 받았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했다.
‘한낮의 밀회’는 정해진 사람들끼리만 사용할 수 있는 아이템.
사용주의 이름이 바뀌었다 해도, 눈치 빠른 유중혁이라면 메시지를 받은 것만으로 내 정체를 짐작해낼 것이다.
―유중혁! 멈추라니까! 나 김독자라고!
[시나리오 페널티로 인해 발송한 메시지가 왜곡됩니다.]
―바다의 왕을 가리자.
유중혁은 잠시 나를 바라보더니, 천천히 검을 내렸다.
나는 숨을 들이켰다.
드디어, 나라는 걸 눈치챈 것일까?
쿠오오오오오!
검을 내린 유중혁의 전신에서 어마어마한 기류가 흘러나왔다. 푸른빛 격으로 뒤덮였던 전신이 다시 황금빛 격류에 휘감기고 있었다.
유중혁이, 초월격을 해방하고 있었다.
나는 당황하며 물었다.
“······유중혁?”
머릿속이 띵했다.
유중혁이라면 분명 메시지를 받은 것만으로도 내 존재를 눈치챘을 것이다.
그런데, 왜?
까아아아앙!
검과 검이 마주치는 순간 몸이 뒤로 튕겨 나갔다. 손목이 없어진 듯한 충격 속에서 한줄기 의문이 솟았다.
「어째서 ‘한낮의 밀회’가 발동했던 거지?」
[한낮의 밀회]는 기간제 아이템이다. 일정 시일이 경과하면, 추가 코인을 지불해야만 사용 기간을 연장할 수 있다.
그런데 ‘한낮의 밀회’는 어떤 지연도 없이 발동했다.
즉, 누군가가 그 기간을 계속 연장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등장인물 ‘유중혁’이 거대 설화 ‘마계의 봄’을 이야기합니다.]
유중혁의 전신에서 마침내 거대 설화가 개방되었다.
순간, 나는 깨달았다.
지금 유중혁은 진심이었다.
“빌어먹을······!”
나는 물러서지 않고 녀석을 마주했다.
[거대 설화, ‘마계의 봄’을 이야기합니다.]
같은 거대 설화라면 나도 지지 않는다.
애초에 이 설화의 최고 담화자는 나라고.
나는 달려드는 유중혁을 향해 마왕의 ‘격’을 일으켰다.
[마왕, ‘구원의 마왕’이 마왕의 격을 개방합니다!]
서울의 중심부에 위치한 거대한 성채가 보였다.
한때는 73번째 마계에 있었던 나의 [공단].
‘은밀한 모략가’의 도움으로 서울로 전송되었던 내 성채였다.
[공단]이 이곳에 있는 한, 나는 절대로 지지 않는다.
[서울 지역의 마기가 당신의 격을 칭송합니다!]
쩌저저저적!
등줄기를 찢고 나온 검은 날개. 어둠 속성이 개방된 [부러지지 않는 신념]이 에테르 블레이드를 토했다. 초월좌의 검강과 신념의 칼날이 충돌하며 굉음을 일으켰다.
까가가가각!
첫 충돌은 강렬했다. 나와 유중혁은 한 걸음씩을 밀려났고, 그와 거의 동시에 서로를 향해 재차 검을 휘둘렀다.
콰아아아앙!
검과 검의 충돌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폭발이 연쇄적으로 일어났다. 우리는 검을 부딪치고, 부딪치고, 또 부딪쳤다. 마치 그것만이 서로가 나눌 수 있는 대화의 전부라는 것처럼, 필사적으로 싸웠다.
믿을 수 없었다.
유중혁이 강한 것도 알고 있었고.
그동안 더 강해졌을 거라고 예상도 했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강해졌을 줄은 몰랐다.
[바람의 길]을 발동하고, [전인화]까지 사용했음에도 나는 유중혁에게 승세를 잡을 수가 없었다. 조금의 표정 변화도 없는 유중혁은 굳건한 벽처럼 그곳에 서 있었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모든 것이 오해라고 생각했다.
유중혁이 나를 알아보지 못하기 때문에, 나를 공격하는 것이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아니었다.
콰콰콰콰콰!
싸우는 내내, 유중혁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녀석은 타고난 검사였고, 그 무수한 세월 동안 검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써왔다.
그렇기에 나는 알 수 있었다.
[등장인물 ‘유중혁’에 대한 이해도가 상승합니다!]
유중혁은 나를 알아보았고, 내가 이곳으로 올 줄 알고 있었다.
대체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했다.
녀석은 이곳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전투가 일시적으로 중단된 것은 도중에 뛰어든 한 아이 때문이었다.
“그만둬요! 중혁 아저씨! 제발 그만두세요!”
신유승이었다.
내 앞을 막고 선 작은 아이가, 울며 외치고 있었다.
“이 오징어 독자 아저씨에요!”
그 말에, 장내가 침묵으로 잠겼다. 주변을 돌아보자 어느새 일행들이 모여 있었다. 굳은 표정의 정희원과, 걱정스러운 표정의 이지혜와, 흥분한 표정의 이길영. 마계의 성채 위쪽에서 이쪽을 내다보는 시선도 느껴졌다.
······한때는, 내가 오랫동안 원망했던 사람.
고개를 돌리자, 마계의 거주민들도 보였다. 73번째 마계에서 마주쳤던 이들이었다. 아일렌도 있었고, 마르크도 있었다.
멀리서 달려온 것인지, 숨을 헐떡거리는 한수영이 근처의 고층 빌딩에서 이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내가 살아낸 역사들이 하나둘 이곳에 모이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 중 누구도, 싸움에 간섭하는 이는 없었다.
멈췄던 유중혁이 다시 칼날을 세운 채 다가왔다.
마치 신유승의 말을 듣지 못했다는 것처럼, 조금도 누그러지지 않은 기도였다.
신유승이 재차 외쳤다.
“으······ 사, 사실은 거짓말이에요! 저거 독자 아저씨 아니에요! 그냥, 그냥 제가 테이밍 한 재앙이에요! 제가 길들인 괴수라고요! 제가 잘 타이를 테니까 용서해주세요!”
“유승아.”
나는 신유승의 어깨에 손을 뻗었다. 그러자 정희원이 신유승을 안고 물러났다. 한없이 굳건한 정희원의 눈빛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 순간 나는 뭔가를 깨달았다.
······그래, 그런거였구나.
고개를 숙이자, 정희원이 내 눈을 피했다.
[등장인물 ‘정희원’에 대한 이해도가 급격하게 상승합니다!]
돌아보자, 유중혁이 다가오고 있었다.
유중혁의 진신절기, [파천검도].
마지막을 준비하는 검격이 유중혁의 칼끝에서 휘몰아치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유중혁은, 아마도 내게 증명하고 싶은 게 있는 것이다.
“······덤벼라 유중혁.”
검을 고쳐 쥔 순간, 유중혁과 나의 격이 정면으로 부딪쳤다.
눈이 멀 듯한 섬광이 코앞에서 폭발했다.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채널에 입장합니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채널에 입장합니다!]
[다수의 성좌들이 채널에 입장합니다!]
우리의 충돌을 느낀 성좌들이 대거 채널에 입장했고.
[성좌, ‘흥무대왕’이 당신의 격에 깜짝 놀랍니다!]
[성좌, ‘외눈 미륵’이 화신 유중혁의 격에 감탄합니다.]
어떤 성좌들은 나와 유중혁을 보며 경악했다.
[성좌, ‘가장 어두운 봄의 여왕’이 뭔가를 깨닫고 탄식합니다.]
그리고 전혀 다른 의미로, 놀란 이들도 있었다.
콰아아아아앙!
재차 폭음이 터졌을 때, 나는 엄청난 격통과 함께 바닥을 나뒹굴었다. 천천히 눈을 끔뻑이자, 자욱한 먼지 사이로 창명한 하늘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헛웃음이 나왔다.
“······더럽게 쎄네.”
내가 사용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봐준 것도 아니었다. 순수한 힘과 힘의 대결이었고, 나는 유중혁에게 밀려난 것이다. 자박거리는 발소리와 함께 유중혁이 다가오고 있었다.
녀석의 [흑천마도]가 내 얼굴 바로 곁의 바닥에 꽂혔다. 특유의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유중혁이 나를 내려다보았다. 나는 그런 녀석을 보며 말했다.
“좀 봐줘라. 인마.”
유중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알 수 있었다.
아마도 이것이, 유중혁이 증명하고 싶었던 것일 터다.
이것이 녀석의 지난 3년이라고.
이것이, 녀석이 진짜 하고 싶었던 말이라고.
나는 웃었다.
“난 안 봐줄 거지만.”
유중혁의 뒤쪽에서 높이 솟은 비석이 반짝이고 있었다.
목표 거점. 비석 위에서 한 사내가 말하고 있었다.
“어이 형씨! 여기다 쓰면 되는 거지?”
깜짝 놀란 유중혁이 돌아선 순간, 비천호리가 발을 움직였다. 빠른 발길질에, 비석 위로 멋드러진 표식이 새겨지고 있었다. 내가 미리 부탁한 문구였다.
[163번째 귀환자 그룹이 시나리오를 클리어하였습니다!]
내 몸이 새카만 연기에 휩싸였다. 나뿐만 아니라, 주변의 귀환자들도 비슷한 모양새였다. 연기 속에서 귀환자들의 외양이 변하고 있었다.
[당신은 더이상 ‘재앙’이 아닙니다.]
일행들의 동공에, 바닥에 너부러진 내 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신유승이 울음을 터뜨리며 달려왔다.
나는 아이를 품에 안은 채 토닥였다.
“3년이었어요. 3년이요·····.”
뒤늦게 달려온 이길영도 내 허리를 끌어안고 울었다.
“역시 형일 줄 알았어요! 독자 형인거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고요!”
[메인 시나리오 #45 ― ‘금의환향’의 클리어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시나리오 보상이 준비 중입니다.]
[46번 메인 시나리오의 진행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나는 아이들을 끌어안은 채,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먼지가 갠 하늘 위로 비석의 꼭대기가 선명하게 드러났다.
나는 비석을 가리키며 말했다.
“돌아온 기념 선물입니다.”
[당신이 소속된 ‘성운’의 이름이 정식으로 공표됩니다.]
[당신이 소속된 ‘성운’의 터가 마련되었습니다.]
비석의 꼭대기에 새겨진 표식은, 다음과 같았다.
―김독자 컴퍼니
임시를 떼어버린, 내가 멋대로 지은 성운의 이름.
이쪽을 향해 다가오던 일행들이 어이없다는 듯 나를 보고 있었다. 눈이 퉁퉁 부은 이지혜와,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내쉬는 한수영의 모습. 나는 그들을 보며 물었다.
“다들 가입해 줄 거죠?”
다가오는 일행들의 얼굴이 보인다. 한 사람, 한 사람. 모두 내가 보고 싶었던 사람들이었다. 달려오는 일행들을 향해 두 팔을 벌리는 순간, 아찔한 통증이 뒤통수에 작렬했다.
조금씩 희미해지는 의식 속에, 냉정한 정희원의 얼굴이 한가득 들어왔다.
“이 인간, 가둬 버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