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5화

295화 Episode 56. 독자와 작가 (1) 진군이 시작된 것은 그날 정오였다. 약 이백여 명의 정예 화신들이 포함된 군대였다. 무수한 성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군대의 첨단에서 이현성이 나팔을 들어 올렸다. 부우우우우. [아이템, ‘전장의 나팔’이 발동합니다!] [아군의 사기가 대폭 증가합니다!] [아군의 전투력이 소폭 증가합니다!] 역시 한수영. 벌써 저런 소모품들까지 준비해 둔 모양이었다. 이현성이 한 차례 더 나팔을 불자, 화신들이 환호를 내질렀다. 다들 어딘가 들뜬 모양새였다. 곁에서 내 얼굴을 힐끔거리던 신유승이 예의 바른 목소리로 말했다. “저······ 지난 번에는 구해주셔서 감사했어요.” “아, 네. 아닙니다.” 내 말에 배시시 웃는 신유승. 정말 누가 키웠는지, 김남운 같은 싸가지와는 다르다. 옆을 보니 한수영이 알 수 없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딱히 누가 키워서 신유승이 이렇게 자란 건 아닐 테지. 유승이는 원래 착한 애라고. “김독자 씨도 이번 시나리오에 참가하시는 건가요?” “아뇨. 저는 자격 요건 미달이라서요.” “아, 그러시군요······ 아쉬우시겠어요. 이번 시나리오를 깨면 ‘거대 설화’ 얻을 수 있다고 들었는데.” 아쉽다면 아쉬운 일이겠지. 여기서 ‘묵시룡의 해방자’를 두 번째 거대 설화인 승(承)으로 획득할 수 있다면 굉장한 일이 될 테니까. 하지만 그건 내가 원하는 방향은 아니었다. 내가 승으로 얻고 싶은 거대 설화는 3회차에 있다. 전방에서 이현성의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주는 이설화가 보였다. 이현성이 힘없이 웃으며 말했다. “······긴장되네요. 잘 할 수 있을지.” “괜찮을 거예요. 지금까지도 잘 해냈으니까.” 뒤쪽에서 걸어오는 김남운과 이지혜의 목소리도 들렸다. “야, 이지혜. 이번 시나리오 끝나면 뭐 할 거냐?” “뭐 하긴, 또 시나리오 깨겠지.” “언제까지 시나리오만 깨? 가끔은 좀 놀기도 해야지. 그러지 말고 이번 시나리오 끝나면 나랑 같이······.” 김남운은 내가 빌려준 코트를 입은 채 이지혜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내가 말한대로 장갑도 양손에 다 꼈다. 머리는 여전히 백발이고 팔뚝에 붕대를 감은 것도 여전하지만······. 쿠구구, 하는 소리와 함께 하늘에서 천둥이 내리쳤다. 이번 시나리오에 참전한 성운들의 군단이 멀리서 몰려오는 것이 보였다. 내가 이미 마주친 성운들도 있었고, 아닌 성운들도 있었다. 한수영의 일행들은 충분히 강했지만, 저들 모두를 상대하기엔 숫자에서 역부족이었다. 이현성의 어깨를 밟고 올라선 한수영이 말했다. “우리의 목적은 단 하나다. 저 위에 있는 봉인구의 ‘묵시룡’을 해방시키는 것.” 새하얀 코트를 흩날리며, 한수영이 무심히 말을 이었다. “알고들 있겠지만, ‘묵시룡’을 해방하면 한반도는 멸망한다. 하지만 클리어 조건을 완수한 우리는 다음 스테이지로 넘어갈 수 있어. 그러니 이 땅의 누구도 죽지 않을 것이다.” 한수영의 선언에 굳어 있던 화신들이 다시 함성을 질렀다. 한수영의 이름을 연호하는 이들도 보였다. 어딘가, 익숙한 광경이었다. ······모두 한때의 유중혁이 했던 일들이었다. 95번 시나리오, ‘묵시룡의 재림’. 이 시나리오는, 지난 <에덴>의 멸망 당시 봉인되었던 ‘묵시룡’을 깨우는 시나리오였다. 지구 각지에 흩어진 다섯 자루의 ‘명검’을 모아, 그것을 저 봉인구의 열쇠 구멍에 꽂음으로써 완수되는 시나리오. 실제로 유중혁은 이 시나리오를 완수해 거대 설화의 ‘결’을 획득했다. “가자, 다음 시나리오로!” 한수영의 외침과 동시에, 화신 군단이 봉인구를 향해 움직였다. 그러나 맞은 편에서 이쪽을 향해 달려오는 이들도 보였다. [검을 빼앗아라! 열쇠는 우리가 차지해야 한다!] [저기다! 한수영이다!] 한반도 곳곳에 숨어 있던 성좌들과 화신들이었다. 묵시룡을 깨우는데 기여하여 설화를 획득하려는 이들. “막아라!” 내 곁에 있던 일행들이 뿔뿔이 흩어지며 병장기를 꺼내들었다. 이현성과 신유승, 그리고 이지혜가 충전한 마력을 흩뿌리며 달려갔다. “하하하하핫! 와라! 심연룡!” 김남운도 전장에서 날뛰고 있었다. 극성까지 진행된 흑화(黑化). 이 세계의 김남운은 내가 아는 김남운과는 다르다. 하지만, 다가오는 모든 생명체들을 갈기갈기 찢어버리는 김남운은 분명 내가 아는 망상악귀의 모습이었다. 녀석이 여기까지 오며 어떤 끔찍한 짓들을 저질렀는지, 나는 모두 알지 못한다. 쿠구구구구! 그리고 그 와중에, 한수영은 품속에서 검을 한 자루씩 꺼내고 있었다. 기이이잉······. 찬란한 빛을 뿌리며 허공으로 떠오르는 성유물들. 모두 이 시나리오를 클리어하는 데 쓰일 ‘열쇠’들이었다. 총 네 자루의 검. 아직 열쇠를 완성하기엔 한 자루가 부족했다. “김독자. 네가 가진 ‘아론다이트’를 내놔.” “······알고 있었냐?” 나는 씩 웃으며 품속으로 손을 집어 넣었다. 용살검 아론다이트. 그게 이 시나리오의 마지막 열쇠다. “그리고 유중혁을 봉인구로 보내.” 이어진 한수영의 말에, 나는 품속을 뒤지는 것을 멈추고 한수영을 노려보았다. 한수영이 웃고 있었다. “놈을 죽이기로 했잖아? 잊었어?” 너도, 나와 똑같지 않느냐는 눈빛. 그 순간 나는 뭔가를 깨달았다. “너도 유중혁을 죽이는 것이 ‘이계의 언약’의 조건이었군.” 한수영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그래.” “그래서 유중혁에 집착했던 건가?” “빨리 그 칼이나 내놔.” 품속의 아론다이트에서 차가운 질감이 느껴졌다. 사실, 나는 한수영이 뭘 할지 잘 알고 있었다. “성검 아스칼론. 천둥검 그람. 단룡검 리딜. 투룡검 네일링, 그리고 용살검 아론다이트.” 내가 검의 이름을 줄줄이 읊자, 한수영의 표정이 묘하게 굳어졌다. “문제를 하나 낼게. 내가 방금 말한 검들 중, 성격이 다른 검 하나를 고르시오.” “지금 뭐 하자는 거야?” “너는 사람들을 속이고 있어.” “헛소리 하지 마.” “‘다음 시나리오로 가자’고?” 나는 계속해서 말했다. “시치미 떼지 마. 너는 이번 시나리오를 클리어할 생각이 없잖아.” 한수영의 동공이 희미하게 흔들렸다. 시종일관 따분하던 그녀의 눈빛에 광기에 가까운 미소가 깃들었다. 네 자루의 명검이 그녀의 곁에서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계속해 봐.” “넌 묵시룡을 해방할 생각이 아냐. 오히려 그 반대지. 너는 묵시룡과 함께 이 ‘지구’를 봉인할 생각인 거다.” “왜 그렇게 생각했지?” 나는 한수영의 오른손에 쥐어진 검을 가리켰다. “네가 가진 투룡검 네일링. 그 검은, 네가 가진 ‘검’ 중에 유일하게 속성이 다른 검이야.” 95번 시나리오를 이루는 다섯 자루의 검은, 모두 용살(龍殺)과 관련된 설화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오직 단 한 자루, ‘투룡검 네일링’은 그렇지 않았다. “그 검은 용살에 실패한 검이다. 그 검을 열쇠로 쓰면 봉인은 해제되지 않아. 오히려 그 반대지.” 적합하지 않은 열쇠는 봉인을 해제하는 것이 아니라 강화시킨다. 아직 해방의 때가 아님을 깨달은 봉인구는 더욱 거대하고 강력한 방어벽을 형성하며, 이윽고 지구 전체를 봉인으로 덮게 될 것이다. “이곳의 시간은 멈추고, 지구는 묵시룡과 함께 봉인되겠지. 영원히 95번 시나리오에 고정된 채 말이야.” 고개를 숙인 한수영의 표정을 읽을 수 없었다. 나는 계속해서 말했다. “그리고 그것이, 네가 유중혁을 죽이는 방법이다.” 나는 유중혁을 돌아보았다. 텅 빈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유중혁. 배후성이 있는 한, 유중혁은 죽지 않는다. 녀석은 죽어도 몇 번이고 다시 회귀할 뿐이니까. 하지만······. 만약 세상에 영원한 잠이 존재한다면 어떨까. 어떤 꿈도 꾸지 않고, 깨울 수도 없는 영원한 잠. 만약 그런 것이 있다면 그것은 ‘죽음’과 무엇이 다를까. “너는 유중혁을 영원히 이 회차에 봉인해버리기로 한 거야.” 봉인구에 갇힌 유중혁은 누구도 깨울 수 없는 잠에 빠져들 것이다. 그는 회귀하지 않을 것이며, 더 이상 고통을 겪지도 않을 것이다. 그는 다만 영원한 잠을 자게 될 것이고, 그로 말미암은 새로운 세계선은 만들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한수영이 말한 유중혁의 ‘죽음’. 시간을 초월한 회귀자의 죽음이었다. 고개를 돌리자 한수영이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제법이네. 어떻게 알았지? 나는 다음 계획에 대해서는 정확히 보여준 적이 없는데 말이야.” “안 보여줘서 알았어.” 나는 한수영의 머릿속을 보았다. 그녀가 꿈꿔온 세계를 보았고, 그녀가 보여준 정보들을 읽어냈다. 분명, 거의 모든 것이 완벽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그 세계에는 결정적인 한 가지가 없었다. “네 이야기에는 ■■가 보이지 않았다.” 이 모든 시나리오의 끝, ■■. 하지만 모두가 ■■에 도달하는 것은 아니었다. 어떤 설화는, ■■의 근처에 가보지도 못하고 끝난다. 서쪽 하늘에서 천둥 소리가 들렸다. 먹구름과 함께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멀리서 고함을 치는 일행들의 목소리와, 처절한 격전을 벌이는 성좌들의 진언들이 터져 나왔다. 이현성도, 이설화도, 이지혜도. 모두 필사적이었다. 살아남기 위해서. 다시 살아남아, 다음 시나리오로 가기 위해서. 그런 그들을 여기까지 데려온 것은 한수영이었다. “이게 만 명의 네가 생각해 낸 결론이냐?” 그리고 한수영은 이제 그들의 이야기를 끝내려 하고 있었다. “맞아. 이게 내가 생각한 이 세계의 끝이야.” “어차피 이런 식으로 끝낼 거면 왜 굳이 일행들을 모두 살린 거냐? 왜 그렇게 완벽한 전개를 고집해 왔던 거지?” 한수영은 대답하지 않았다. “넌 저들을 배신한 거다.” 한수영의 계획이 성공하면, 이 회차의 모두는 영원히 종막에 도달하지 못한다. 그들은 이 95번 시나리오의 영원 속에서 잠들게 될 것이다. 한수영은 무표정한 눈으로 자신의 주변을 떠다니는 네 자루의 검을 보았다. “어떤 세계의 끝이 반드시 ■■일 필요는 없어. 이렇게 하면 지구는 안전해져. 유중혁도 다른 성좌들도, 강화된 묵시룡의 봉인을 푸는 법은 알지 못하니까.” “그건 기만이야.” “어떤 구원은 그렇게 불리지.” “그럼 지금까지 널 믿었던 동료들은―” “어차피 내가 만든 세계도 아니야.” 비참하게도, 나는 한수영의 그 마음을 안다. 내가 본래의 세계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것은, 이 세계가 내 세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게 네가 받기로 한 ‘이계의 언약’의 대가인가? 유중혁을 죽이는 대가로, 너는 자신의 세계를 만들 힘을 얻게 되는 거냐?” 쿠구구구구! 한수영의 몸에서 강력한 기류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더이상 시간을 끌지 않겠다는 의도. “검을 내놔 김독자. 그게 모두를 위한 길이야. 유중혁도 그걸 원했어.” 원작을 넘어서고 싶었던 표절 작가는, 아마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원작을 넘어서기 위해선, 원작에서 벗어나야만 한다는 것을. 그리고 자신이 표절 작가인 이상 그것은 불가능하다는 것도. 나는 웃었다. “나는 유중혁을 죽일 생각이 없어.” “무슨 헛소리지? 설마 ‘이계의 언약’을 포기할 생각이냐?” “물론 그것도 아니고.”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한수영의 신형이 사라졌다. “유중혁, 막아!” 내 외침에, 유중혁이 앞으로 나서며 날아드는 한수영의 검들을 막아냈다. 나는 품속에 아론다이트를 집어 넣으며, 동시에 다른 검을 꺼내 들었다. [사인참사검]이었다. 성좌와 화신 사이의 링크를 베는 아이템. 나는 유중혁을 바라보며 검에 힘을 집중했다. 츠츠츠츠츳······. [성유물, ‘사인참사검’이 힘을 개방합니다!] 검에 깃드는 기운을 확인한 한수영이 눈을 크게 떴다. “너 설마······.” 이 <스타 스트림>에서 죽음은 다양한 의미를 갖는다. 언젠가, 내가 [운명]에 당했을 때도 그랬다. “소용없어 김독자! 그 방법은······!” 그때 나는 ‘화신 김독자’로서 죽었지만, ‘성좌 김독자’로서 살아 남았다. 그렇다면 유중혁은 어떨까. “가브리엘, 요피엘! 도와주십시오!” [성좌, ‘물병자리에 핀 백합’이 당신을 바라봅니다.] [성좌, ‘붉은 코스모스의 지휘관’이 당신을 바라봅니다.] 한수영이 소리치는 것이 들렸다. 하지만 나는 듣지 않았다. 내 감각은 오직, 유중혁의 머리 위로 솟은 한 줄기 검은 실에 집중되어 있었다. 사인참사검의 힘으로 볼 수 있게 된 유중혁의 링크였다. 이제껏 ‘멸살법’의 누구도 이런 방법을 시도해본 적은 없었다. 하지만 성공하기만 한다면. 잠깐이라도 이 링크를 베어낼 수 있다면, 나는 유중혁을 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유중혁, 정신 똑바로 붙잡아라!” 지금 유중혁은, ‘성좌’가 되기에 충분한 양의 설화를 갖고 있었다. 만약, 배후성과의 연결이 일시적으로 끊어진 상태에서 이번 시나리오를 통해 새로운 설화를 얻는다면······ 녀석은 ‘성좌 유중혁’으로 거듭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화신’으로서의 녀석이 죽게 됨을 뜻했다. 이 방법이라면, 유중혁은 죽더라도 회귀하지 않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유중혁을 봉인하지 않고도 3회차로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고오오오오오! 내가 개방한 마왕의 격과 대천사의 격이 동시에 사인참사검에 깃들었다. 상대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유중혁의 성좌. 저 링크를 끊으려면, 최소한 이 정도의 힘은 필요할 것이었다. 나는 사인참사검을 내리쳤다. 까아아아아앙! 다시 한 번. 까아아아앙! 또 다시 한 번.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내리쳤다. 링크에서 터져 나오는 엄청난 충격파에 주변의 성좌들과 화신들이 휩쓸려 날아갈 지경이었다. 한수영조차 쉽게 다가오지 못할 정도의 후폭풍. 그렇게 얼마나 더 내리쳤을까. 마침내 쩌저적,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쥐고 있던 [사인참사검]이 반토막으로 부러졌다. 나는 조금의 흠집도 나지 않은 유중혁의 링크를 바라보았다. [성좌, ‘물병자리에 핀 백합’이 알 수 없는 공포를 느낍니다.] [성좌, ‘붉은 코스모스의 지휘관’이 경악합니다.] 순간, 아득한 우주가 나를 바라보는 느낌이 들었다. 그 유래를 짐작할 수 없는, 내가 차마 헤아릴 수조차 없을 만큼 거대한 의지였다. [화신 ‘유중혁’의 배후성이 당신을 바라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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