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4화

284화 2부 마지막 화 [바앗, 바아앗!] “안 돼.” [바아아앗!] “돌아가.” 활짝 열린 차원문 안쪽의 세계는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아무튼, 위험한 곳이라는 것만큼은 분명했다. “사람들을 부탁해.” 수르야의 열차 파편에서 ‘형언할 수 없는 아득함’의 흔적을 발견했을 때부터, 어쩌면 이 순간은 예정되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아마 지금부터 가는 장소는, ‘멸살법’의 도움을 거의 받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가야 한다. 이번 한 번만 잘 견뎌내면, 나는 다시 일행들에게 돌아갈 수 있다. 그들과 함께, 이 모든 시나리오의 끝에 도달할 수 있다.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자, 비유가 소리를 질렀다. [바앗, 바앗······ 바아아앗······! 아, 바, 앗······.] 차원문의 경계를 딛자마자 비유의 목소리가 급격하게 희미해졌다. 흐려지는 비유의 얼굴을 향해 나는 전해지지 않을 말을 전했다. 「꼭 돌아올게.」 [‘이계의 언약’이 발동합니다!] [당신은 <스타 스트림> 바깥으로 추방되었습니다.] [당신의 별자리가 <스타 스트림>에서 사라집니다.] * 김독자가 포탈 속으로 사라진 후에도, ‘은밀한 모략가’는 오래도록 그 포탈이 있었던 자리를 바라보았다. 비정상적으로 큰 두 개의 혹을 가진 노인이 ‘은밀한 모략가’의 곁에 서 있었다. [위대한 모략이여. 그 녀석은 벌써 가버린 건가?] 【방금 떠났다.】 [아쉽군. 어떤 녀석인지 보고 싶었는데······ 그나저나 어지간히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군 그래. 그대가 무려 세 개의 손가락을 희생할 정도였다니.] ‘은밀한 모략가’의 왼손에는 세 개의 손가락이 사라져있었다. 개연성의 대가였다. [아무리 당신이라고 해도 ‘부왕의 차원문’을 직접 빌리는 것은 부담이었을 텐데 말이야. 차라리 우리한테 부탁하지 그랬나?] 【혹부리의 거래법으로 감당할 수 있는 개연성이 아니었다.】 그 말에 노인이 쯧, 하고 혀를 찼다. [나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군. 아무리 설화가 고파도 나는 그런 짓따윈 안 해.] 【이해할 수 없겠지.】 ‘은밀한 모략가’의 그림자에서 새하얀 눈동자가 허공을 헤맸다. 노인도 그 시선을 좇았다. 마치, 그 허공에서 뭔가를 발견하기라도 한 것처럼. [귀찮은 녀석들이 끼어 있던데······ 혹시 일부러 보내준 건가?] 【어차피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할 녀석들이다.】 노인이 피식 웃었다. [뭐, 상관없겠지. 그 빌어먹을 <스타 스트림>에 한 방 먹여줄 수만 있다면야. 그런데 승산은 있는 건가?] 【무사히 성공한다면 녀석은 누구보다 ‘결(結)’에 가까워지게 되겠지.】 [······누구보다? 이미 ‘결’을 본 그대가 그런 이야기를 하다니, 우습군.] 노인이 투덜거리며 말을 이었다. [녀석이 성공하든 실패하든, 어차피 그대에겐 손해일 텐데.] 그러자 ‘은밀한 모략가’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그걸 판단하는 것은 내가 아니다.】 * [‘제4의 벽’이 격렬하게 흔들립니다.] 깜빡이는 의식 속에서, 등줄기로 한기가 밀려왔다. [‘이계의 언약’이 당신의 존재를 보호합니다.] 어디론가 흘러가는 느낌 속에, 나는 몇 번인가 꿈을 꾸었다. 일행들에 관한 꿈이었다. ―독자 씨는 맨날 스마트폰만 보네. 독자 씨 번호 뭐예요? ―······어차피 전화도 안 되는데 알아서 뭐하시게요? ―그냥 알아나 두게요. 나중에 게임 초대나 보내게. 게임 초대라. 정말 그런 걸 받을 수 있다면 좋겠는데. ―독자 씨는 멸망 이후에 더 자주 웃는 것 같아요. ―근데 아저씨는 웃을 때 좀 재수 없는데. ―입 모양을 좀 바꾸면 봐 줄만 하지 않을까? ―독자 씨가 제 선임이셨으면 좋았을 텐데 말입니다. 어디선가 울려퍼지는 시계의 초침 소리. ―전 오늘처럼 독자 씨가 미운 날이 없었어요. 돌아와요, 꼭. 시작도 끝도 알 수 없는 이야기의 흐름이 나를 밀어내고 있었다. 막막한 성류 속을, 작은 뗏목 같은 기억에 의존해 나아간다. 끝없는 우주의 공허 속에, 떠다니는 것은 오직 나의 기억뿐이다. 어쩌면 비유도······ 41회차의 신유승도 이런 기분이었을까. 츠츠츠츠츠······! 메시지가 들려온 것은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후였다. [‘부왕의 차원문’이 닫힙니다.] [<스타 스트림>이 당신의 존재를 눈치챘습니다.]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바닥에 몸을 웅크린 채 헛구역질을 하고 있었다. 딱딱한 바닥의 촉감과 함께, 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새로운 시나리오 지역에 입장했습니다!] [관리국의 도깨비들이 당신의 존재에 의구심을 가집니다.] 굳어 있던 화신체의 관절 마디마디가 비명을 질러댔다. 나는 [점혈]을 사용해 최대한 빠르게 몸을 풀었다. 어디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부터는 긴장해야 한다. ‘은밀한 모략가’ 자체가 원작에 없었던 존재이니 여기서 일어나는 일들은 ‘멸살법’의 도움을 받을 수 없을 것이다. “큭······.” ‘형언할 수 없는 아득함’에게 뜯어 먹힌 자리가 아팠지만, 여분의 [대환단]으로 어떻게든 회복이 될 것 같았다. [마왕화]가 종료된 탓에 뿔과 날개는 사라져 있었다. [현재 ‘마왕화’가 불가능한 상태입니다.] 꼼꼼하게 장비들을 점검하고, 필요한 물품들을 곧바로 사용할 수 있는 위치에 넣어두는 것도 잊지 않았다. 채비가 끝난 후 내가 제일 먼저 확인한 것은 개인 시나리오 창이었다. [서브 시나리오 창을 띄울 수 없습니다.] [아직 해당 시나리오의 정보가 업데이트되지 않았습니다.] ······시나리오 업데이트는 아직인가. 나는 주변을 살피며 망가진 건물의 잔해를 둘러보았다. 무너진 고층 빌딩들과, 그 사이사이로 보이는 로고의 부스러기들. 로고를 이루는 문자들이 익숙했다. 한글도 있고, 영어도 있다. 중간중간 이계 종족들의 언어로 쓰인 것들도 보였다. 나는 잠시 멈춰서서 그것들을 읽었다. 서서히, 발끝에서부터 불편한 위화감이 차올랐다. 여긴 대체 어디란 말인가. [<스타 스트림>이 당신의 수식언을 인식하였습니다.] [밤하늘에 당신의 자리가 새로이 마련됩니다!] [<관리국>이 당신의 존재를 경계하고 있습니다.] [당신에게 히든 시나리오가 할당되었습니다!] [히든 시나리오― ‘세계 적응’을 획득하였습니다!] [새로운 설화를 획득했습니다!] ······설마? 나는 거리를 달리기 시작했다. 알아 볼 수 없을 정도로 망가진 도시. 그럼에도, 나는 이곳을 알아볼 수 있었다. 알아보지 못하는 게 이상할 지경이었다. 왜냐하면 내 모든 악몽은, 이 도시로부터 비롯되었으니까. 다리만 남은 이순신 상과 파괴된 [절대 왕좌]. 곳곳에 흩어진 괴수들의 사체와 거대한 촉수들의 잔해가 끔찍한 악취를 뿜고 있었다. “······서울?” 그러나 생각할 시간은 없었다. 쿠구구구궁! 인근에서 들려오는 폭음에, 나는 기척을 숨기고 폐허 사이로 숨었다. 시끄러운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사람들이 무언가로부터 달아나고 있었다. 아니, 자세히 보니 사람들은 아니었다. 성좌들의 화신체였다. 상당한 격을 지닌 성좌들이 진언을 쏟아대며 소리치고 있었다. [도망쳐라!] [이런 망할······!] 그들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꾸드드득! 허공에서 내려온 코끼리 같은 발에, 화신체들이 벌레처럼 터져 나갔다. 나는 숨도 쉬지 못한 채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불가항력의 ‘격’을 가진 코끼리의 앞발은, 죽은 화신체의 설화를 질질 끌며 어딘가로 나아갔다. ······미친, 저게 대체 뭐야? 코끼리의 기척이 완전히 사라진 후에야, 나는 조심스레 폐허 사이를 빠져나와 시체들 쪽으로 다가갔다. 바닥에 수거할만한 아이템들이 몇 개 떨어져 있었다. 나는 아이템들을 하나씩 살피며 마음을 다스렸다. 침착하자. 이곳이 아무리 위험한 곳이라 해도, 정보만 있다면 승산은 있다. 아직 이곳이 시나리오 지역이라면, ‘멸살법’은 여전히 유효할 것이다. [특성 효과로 이미 읽었던 페이지에 대한 기억력이 향상됩니다.] 여긴 대체 몇 번째 시나리오인 걸까. 성좌들의 화신체가 중구난방으로 날뛰는 데다, ‘이계의 신격’의 파편이 널려 있다는 것은, 적어도······. [현재 아흔다섯 번째 메인 시나리오가 진행 중입니다.] 츠츠츠츠츳! [‘이계의 언약’이 당신의 부족한 개연성을 대체합니다.] [당신은 해당 시나리오의 정식 참가자가 아닙니다.] [<스타 스트림>이 당신의 자격을 의심합니다.] 팔뚝의 솜털이 모조리 곤두섰다. ······몇 번째라고? [아이템, ‘아론다이트’를 획득하였습니다.] 나는 수거하던 아이템을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무려 설화급 성좌의 성유물이 길바닥을 굴러 다니고 있었다. 나는······ 대체 몇 년을 건너뛴 거지? 일행들은, 모두 어떻게 된 걸까. [전용 스킬, ‘전지적 독자 시점’을 발동합니다!] 정희원. 이현성. 신유승. [전용 스킬, ‘전지적 독자 시점’의 발동이 취소됩니다.] [현재 대상과 연결이 불가능한 상태입니다.] [해당 ‘등장인물’을 찾을 수 없습니다.] 나는 떨리는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애썼다. 침착해야 한다. 아직 확실한 것은 없어. 나는 심호흡으로 마음을 다스리며, ‘성좌’의 권능을 발현했다. 인근에 채널이 있다면, 채널을 통해 주변을 둘러볼 심산이었다. 그때, 주변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절도 있는 참격 소리와 성좌들의 비명이 함께 들려왔다. 반사적으로 건물 사이로 숨으려는 순간, 건물 너머로 바람에 흩날리는 검은 코트 자락이 보였다. 아주 잠깐, 심장이 멎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찢어진 코트의 소매로 돋아난 상처투성이의 근육. 바닥을 긋는 패도의 궤적을 보며, 울컥하는 마음과 함께 가슴이 벅차올랐다. 살아 있었구나. 기억하던 그대로의 모습은 아니었다. 체격은 조금 더 커졌고, 인상은 더 날카로워졌으며, 뺨에는 커다란 흉터가 남아 있었다. 하지만 내가 놈을 모를 수가 없었다. “유―!” 입을 여는 순간, 소리보다 빠른 무언가가 나를 노리고 날아들었다. 스가각! [책갈피]로 발동 중이었던 [바람의 길]이 아니었더라면 그 자리에서 즉사했을 것이다. 심지어 피했음에도 옆구리에 커다란 자상이 남았다. 상처를 막은 채 나는 당황한 얼굴로 놈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고개를 들었을 때 녀석은 이미 내 눈앞에 와 있었다. 콰드드득! 목을 틀어쥐는 손아귀에 숨이 턱 막혀왔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기에, 발버둥치며 진언을 발했다. [야! 나야 유중혁!] 어쩌면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났는지도 모른다.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도 훨씬 오랜 시간이 걸렸기에, 나를 잊었는지도 모른다. [이거 놔. 나라고! 벌써 까먹은······.] 퍼어어억! 뱃가죽을 때리는 끔찍한 고통에 의식이 끊어질 것 같았다. 장난이 심하다고 생각했다. 아니면, 내게 몹시 화가 나서 그런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유중혁의 냉혹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론다이트’는 어디 있지? 네놈이 가지고 있나?” 그 순간, 서늘한 감각이 뒷목을 스쳐갔다. 동호대교 위에서 유중혁을 처음 만났던 순간이 떠올랐다. 그때도 녀석은 저와 비슷한 눈을 하고 있었다. 정말로 나를 모르는 사람의 눈. “오 초 내에 대답하지 않으면 죽이겠다. 오.” 정말로, 나를 죽일 수 있는 사람의 눈빛이었다. [전용 스킬, ‘등장인물 일람’이 발동합니다!] [해당 인물의 관련 정보가 지나치게 많습니다. ‘등장인물 일람’이 ‘요약 일람’으로 변환됩니다.] [시스템 오류가 발생했습니다.] “사.” [해당 등장인물의 정보를 요약할 수 없습니다!] [해당 등장인물의 정보를 요약할 수 없습니다!] 끔찍한 두통과 함께, 무지막지한 정보들이 흘러들어오기 시작했다. “삼.” 나는 신음을 흘리며 ‘등장인물 일람’의 설정을 바꾸었다. [사용자가 임의로 지정한 최소한의 항목들이 출력됩니다.] 눈앞에 떠오르는 정보를 보며, 나는 망연해졌다. ‘멸살법’의 모든 회차를, 그 모든 결말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 <등장인물 요약 일람> 인물 : 유중혁 배후성 : ??? 전용 특성 : 회귀자 <1863회차> (신화), 유희의 지배자 (전설), 철혈의 패왕 (전설), 마왕살해자 (신화), 영원의 고독자 (준신화), 별들의 공포 (신화)······. 전용 스킬 : [현자의 눈 Lv.???], [백병전 Lv.???], [사상 백신 Lv.???], [백보신권 Lv.???], [주작신보 Lv.???], [파천검도 Lv.???]······(중략)······. 성흔 : [회귀 Lv.???], [전승 Lv.???] ······. * 해당 인물의 스킬 숙련도를 레벨 수치로 환산할 수 없습니다! * 해당 인물의 성흔 숙련도를 레벨 수치로 환산할 수 없습니다! ······. + 하지만 단 하나. 내가 그 끝을 알지 못하는 회차가 하나 있었다. 모든 동료를 잃고, 마침내 이야기의 마지막 장을 눈앞에 둔 사내. “이.” 셀 수 없는 배신과 무수한 회귀 속에, 모든 감정이 닳아버린 괴물이 나를 보고 있었다. 가슴 깊은 곳을 찌르는 아픔과 함께, ‘은밀한 모략가’가 남긴 말들이 귓전을 어지럽게 맴돌았다. 【너의 방식으로 모든 것의 마지막에 도달해, 세계를 구한다고 치자. 그러면 ‘다른 세계’는 어쩔 셈이지?】 【네가 구원하지 못한 그 세계들은 모두 어떻게 되는 것이냐?】 폐허가 된 광화문의 하늘에서, 죽어가는 별들이 빛나고 있었다. 이곳은 내가 바꾼 ‘3회차’의 <스타 스트림>이 아니었다. 내가 바꾼 미래로 인해, 원작의 세계선에서 버려진 세계. 유중혁의 칼날이 허공으로 솟구쳤다. “대답하지 않을 모양이군. 죽어라.” ‘멸살법’ 1863회차. 이 세계는, 내가 알던 유중혁의 마지막 회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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