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3화
273화
천공으로 도약한 수르야는 착잡한 눈으로 지상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환한 빛으로 둘러싸인 ‘73번째 마계’가, 자신이 엮어온 문장들을 하나의 존재에게 흘려 보내고 있었다.
쿠구구구구구!
우주에서 날아오는 거대한 멸망 앞에, 세계가 자신의 주인을 선택하고 있는 광경.
수르야가 중얼거렸다.
[겨우 스물 다섯 번째 시나리오에 ‘거대 설화’를 얻은 존재······. 그런 이가 <스타 스트림>에 있었던가.]
그토록 오래 살아온 수르야도 떠오르는 이름이 없었다. 스쳐가는 것은 올림포스의 헤라클레스 정도. 하지만 그 역시 온전한 인간이 아니라 반신(半神)이었다. 오이디푸스 왕이 외쳤다.
[수르야, 괜찮습니다. 막 발아한 지금이라면 얼마든지 짓눌러 버릴 수 있습니다!]
‘거대 설화’는 다른 설화들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이야기다.
무수한 설화의 합산인 동시에, 그 자체로 어마어마한 개연성을 담보하는 이야기.
하지만 아무리 ‘거대 설화’라 해도, 저 설화는 이제 막 움튼 것에 불과했다. 그리고 그것을 가지게 될 ‘구원의 마왕’ 또한, 운 좋게 성좌위에 오른 천박한 존재일 뿐이다.
그럼에도 왜일까, 수르야는 쉽사리 확신을 가질 수 없었다.
[수르야, 왜 그러십니까? 어서 끝내시는 게······.]
모든 ‘거대 설화’는 ‘끝의 시작’을 함의한다.
이 장대한 시나리오의 마침표를 향하는 이야기.
하지만 ‘거대 설화’를 얻는다고 해서, 모두가 ‘끝의 자격’을 얻는 것은 아니었다. 어떤 ‘거대 설화’는 ■■과 연결되어 있지만, 어떤 거대 설화는 ■■의 근처에도 못 가보고 소멸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수르야 너는, ‘끝의 자격’을 얻지 못했으니까.
아스모데우스가 남긴 그 말이, 잊혀지질 않았다.
고요한 분노 속에서 수르야의 귓가에 메시지가 들려왔다.
[당신에게 새로운 시나리오가 부여되었습니다!]
[당신은 ‘73번째 마계의 멸망’이 될 것입니다.]
원치 않았던 역할 배정에 수르야가 인상을 찌푸렸다.
‘<스타 스트림>이여. 늙은 이몸에게 무엇을 바라는가.’
척준경에게 열두 개의 태양 중 하나를 잃었고, 아스모데우스를 상대하며 심력을 상당 부분 낭비했다. 거기다 이미 그에게 허락된 개연성의 대부분을 소진한 상황.
[수르야. 꼭 정석대로 갈 필요는 없습니다. 제게 생각이 있습니다. 싸우지 않고도, 녀석들을 무참히 굴복 시킬 방법이―]
수르야가 인상을 찌푸렸다.
[오이디푸스. 또 비열한 수를 쓸 참인가? 고작 인간들을 상대로?]
[그, 그것이 아니오라······.]
[나는 ‘지고한 빛의 신’ 수르야다.]
위대한 베다의 문장들이 수르야의 후광 속에서 빛나고 있었다.
[온전한 힘을 쓸 수 없다 해도, 결코 인간에게 패배하지는 않는다.]
그 압도적인 ‘격’의 향연에, 뭐라 말을 하려던 오이디푸스가 입을 다물었다.
수르야가 손을 들어 올리자, 잠깐 주춤거리던 마차가 다시 맹렬한 돌진을 시작했다.
*
콰콰콰콰콰콰콰!
창공을 뚫고 대기권에 진입한 기관차가 굉음을 냈다.
발갛게 익은 선두에서 붉고 푸른 불꽃이 튀기고 있었다.
제일 먼저 입을 연 것은 목소리를 회복한 유중혁이었다.
“13만 5천 킬로미터는 아닌 듯 하군.”
하기사 정말 그만한 규모의 열차가 나타났다면, 거대한 행성이 충돌해오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척준경이 말을 받았다.
[후인의 말이 옳다. 길어봐야 30킬로미터 남짓이다. 하지만 이곳을 멸망시키기엔 충분한 크기로군. 구원의 마왕이여, ‘거대 설화’는 어떻게 됐지?]
“이제 막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문장이 모이는 속도가 느려요.”
‘73번째 마계’의 거대 설화는 무사히 얻었다.
그러나 얻었다고 해서 다 끝난 게 아니었다.
“제대로 힘을 쓰려면 시간이 더 필요합니다. 열차 속도를 늦춰야 해요.”
아마도 저 ‘열차’는 지금의 수르야가 동원할 수 있는 전부일 것이다.
저 열차만 막아낸다면 우리에게도 승산은 있다.
돌아보자, 이미 척준경이 도약을 준비하고 있었다.
“부탁합니다, 고려제일검.”
[믿게.]
콰아아아앙!
힘차게 발돋움한 척준경이 허공으로 포탄처럼 쏘아져 나갔다.
나와 유중혁이 그 뒤를 쫓았고, 나머지 일행들 또한 신유승의 [키메라 드래곤]을 타고 쫓아왔다.
‘우레를 먹는 새’와 ‘나일강의 괴조’가 우리를 방해하기 위해 날아 올랐지만, ‘성급한 늪의 포식자’가 그들의 날갯죽지를 물어 뜯었다.
[이놈들은 내게 맡겨라.]
열차의 선두에 근접할수록, <베다>의 어마어마한 스케일이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선두의 너비만 수백 미터. 어지간한 ‘이계의 신격’도 넘볼 수 있을 듯한 수준이었다.
[흐아아아아아아압!]
기합과 함께, 척준경의 삼검식이 발휘되었다.
제 이식, 이검참산(二劍斬山).
산을 베어 가르는 척준경의 검식이 열차에 직격했다.
척준경의 ‘격’과 부딪친 열차의 선두가 기이한 음색을 토했다.
콰드드드드드득!
히히히히힝!
선두의 말이 놀라 궤도를 이탈하긴 했지만, 열차의 속도는 조금도 줄지 않았다. 가공할 열기 속에서, 오히려 녹아내리는 것은 척준경의 검극이었다.
하지만 척준경은 멈추지 않고 삼검식을 이어갔다.
제 삼식, 삼검참해(三劍斬海).
바다를 참하는 일격. 해일의 포말이 산란하는 듯한 느낌과 함께, 처음으로 열차의 속도가 미미하게 줄어들었다. 무엇보다 큰 성과는 선두의 칸을 폭발시켜 내부 진입로를 만들었다는 것이었다.
[내부에서 전진하는 게 더 쉬울 거다! 나는 바깥에서 속도를 줄이겠다!]
열차의 선두에서 강맹한 마력을 토해내는 척준경의 모습이 보였다.
하지만 아무리 척준경이라고 해도 이 정도 속력의 물체를 혼자서 감당하는 것은 힘들었다.
“저도 도울게요 아저씨!”
신유승의 ‘키메라 드래곤’이 척준경과 함께 열차의 선두에 붙었다. 2급 괴수종인 ‘키메라 드래곤’이 강렬한 풍압을 일으키자, 열차의 속도가 더욱 줄어들었다. 척준경이 외쳤다.
[이십 분 정도는 어떻게든 벌 수 있겠군. 후미의 마지막 칸에 수르야가 있을 거다. 놈을 쓰러트려야 이 설화도 사라진다! 어서 가!]
우리는 고개를 끄덕인 후 열차의 내부로 진입했다.
열차는 마치 거인족을 위해 만들어진 듯한 지하철 같은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관성에 어느 정도 적응한 우리는 곧장 열차의 다음 칸으로 향하는 버튼을 눌렀다.
[문이 열리지 않습니다.]
[해당 열차는 오직 <베다>의 성좌들만이 이용할 수 있습니다.]
[파천검도]를 발동한 유중혁이 망설이지 않고 문짝을 타격했다. 그러나 문은 움푹 들어가기만 할 뿐 열리지 않았다.
“······단단하군.”
척준경의 예상과는 달리, 열차 내부의 강도도 만만치 않았다.
나나 유중혁이 제대로 격을 발휘한다면 못 뚫을 정도는 아니었지만, 열차의 길이는 무려 30킬로미터나 된다.
즉, 힘의 분배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거대 설화’의 첫 번째 문장이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그 이야기는, 지하철에서 시작되었다.」
츠츠츠츠츳!
밀려오는 스파크와 함께, 내가 가진 설화들이 허공에 풀려 나오고 있었다. 먼 곳에서 파도가 밀려오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것은 아주 오래된 이야기의 흔적이었다. 돌아보니, 일행들도 비슷한 것을 느끼고 있는 듯했다.
[당신의 ‘거대 설화’가 첫 번째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유중혁과 이현성, 그리고 유상아가 나를 보고 있었다.
밀물처럼 흘러온 스파크가 주변의 풍광을 고스란히 바꾸어 놓고 있었다. 이현성이 감탄하며 중얼거렸다.
“이, 이곳은······.”
모든 ‘거대 설화’는 제각기 다른 이야기를 품고 있다.
어떤 이야기는 영웅의 탄생 서사를, 어떤 이야기는 세계의 탄생 설화를 내포한다. 하지만 우리의 이야기는 영웅의 일대기도, 창세 설화도 아니었다.
이 이야기는, 우리의 ‘생존 기록’이었다.
열차의 뒷문에 적힌 [3807]이라는 번호.
주위를 둘러보던 유상아가 탄식하며 말했다.
“······그 지하철이군요.”
모든 설화는, 그 설화와 관계된 장소나 인물이 충돌할 때 「무대화」를 발동한다.
―불광행 3434열차의 3807칸.
나는 이곳에서 유상아와 이현성을 동료로 맞이했고, 유중혁을 만났다.
우리의 모든 이야기는 바로 이곳에서 출발한 것이다.
내 곁에서 주먹을 불끈 쥐던 이현성이, 긴장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때 생각이 나는군요.”
“결코 좋은 기억은 아니었지만······.”
유상아도 희미한 미소로 나를 보고 있었다.
“그래도, 종종 이때를 떠올리곤 했어요.”
즐겁게 회상할 수 있는 기억은 아니었다.
누군가의 죽음과, 부조리한 시나리오의 지옥.
그리움도 추억도 될 수 없는 시간이었지만······ 그럼에도 분명, 우리가 살아 남았던 역사였다.
울 것 같은 미소를 띤 이현성이 문 위로 손을 얹었다.
“왠지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곳에, 정의롭고 싶었던 군인이 있었다.」
결국 모든 것은 이야기가 된다.
힘들었던 일, 슬펐던 일, 잊고 싶었던 일조차.
지난 후에는 모두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흐아아아아아압!”
그것이 지금의 우리에게 위로가 될지 아닐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뿐이었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당신의 일행을 지켜봅니다.]
[성좌, ‘은밀한 모략가’가 당신의 설화를 듣습니다.]
슬픔도 기쁨도 무용한 세계에서, 우리가 그 이야기를 계속해야만 한다는 것.
콰드드드드드드드!
유중혁의 [파천검도]에도 열리지 않았던 문이, 이현성의 괴력에 열리기 시작했다. 이현성의 전신에 깃든 ‘거대 설화’가 힘을 발휘한 것이었다.
[등장인물 ‘이현성’이 성흔 ‘태산 밀기 Lv.10’를 발동합니다!]
생각해 보면 그때도, 탈출의 문을 열었던 것은 이현성이었다.
“가십시오. 빨리!”
이현성이 열어 젖힌 틈새로, 일행이 달렸다. 그러나 이제 겨우 문 한짝을 열었을 뿐이었고, 열차는 여전히 길었다. 이번에 앞장선 것은 유중혁이었다.
“다음은 내가 뚫겠다.”
불현듯 오래 전의 기억이 떠올랐다.
열차의 다른 화신들을 전멸시키고, 비정한 탱크처럼 돌격해오던 그때의 회귀자가, 지금 내 앞에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강하고 고독한 사내가 있었고,」
검을 집어 넣은 유중혁은 자신의 모든 마력을 주먹에 집중시키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 녀석은, 그때 맨주먹으로 문을 부쉈다.
콰아아아앙!
검으로도 끄떡없었던 열차칸의 문이, 맨주먹에 종잇장처럼 찢겨 나가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무대화」의 효과였다.
수르야의 주력 설화가 이 ‘열차’인 것이, 녀석에게는 불행인 셈이었다.
“독자 씨! 이번 칸은 안 부숴도 될 것 같아요!”
뭔가를 알아 냈는지, 유상아가 외쳤다. 문의 개폐 장치를 찾아냈던 그때처럼, 유상아는 이번에도 무력 없이 열차칸을 열 수 있는 방법을 찾아냈다.
「타인을 위해 자신을 숨겨왔던 여인도, 그곳에 있었다.」
한 칸, 한 칸.
우리는 전진하기 시작했다.
마치 우리가 살아온 역사를 다시 살아내듯이.
콰앙! 투콰아앙!
바깥에서 열차를 두들기는 함포 소리가 들려왔다.
열차의 속도를 줄이기 위해 이지혜도 분투하는 모양이었다.
「인연을 잃고 상처 받은 검귀를 만났고.」
키메라 드래곤이 울부짖는 소리가 들렸다.
품속에 있던 비유가 고개를 들어 열차의 선두를 바라보았다.
정확히, 신유승이 있는 방향이었다.
「과거와 미래의 틈새에서 태어난 아이가 울었다.」
다음 순간, 키메라 드래곤이 가공할 포효를 터뜨리며 힘을 냈다.
순간 열차가 기우뚱, 하는 느낌과 함께 가속이 한층 더 줄어들었다.
그오오오오오!
잘은 모르겠지만, 비유가 이곳의 신유승에게 뭔가를 전해준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절반도 오지 못했다. 서둘러야 한다.”
유중혁의 말처럼, 일행들의 분전에도 열차의 끝은 멀었다.
벌써 십분 이상의 시간이 지체되었다.
아무리 속도를 줄였다고 해도, 이 기세라면 [공단] 일대의 시공간은 완전히 파괴되고 말 것이었다.
설상가상으로, 그 다음 칸을 열었을 때 우리는 난관에 봉착했다.
섬광처럼 쏘아진 한줄기 창. 나를 막아선 이현성이 어깨를 붙잡은 채 주저앉았다.
[더 이상은 못 간다.]
인류의 시조 ‘마누’와 몇몇 성좌들이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곧장 [파천검도]를 발휘한 유중혁이 녀석들에게 맞서 싸웠지만, 수세를 취한 성좌들을 뚫기엔 역부족이었다.
츠츠츠츠츠츳!
마치 이곳에서 시간만 끌면 된다는 것을 아는 투였다.
이를 악문 내가 아껴둔 마력을 사용하려는 순간.
꽈드드드드드득!
열차의 천장이 우그러지기 시작했다.
누군가가, 외부에서 엄청난 마력으로 열차를 파괴하고 있었다.
[무, 무슨······ 대체 뭐냐!]
최소한 설화급 성좌. 척준경에 준하는 힘을 가진 존재가 아니라면, 이 열차의 외피는 파괴시킬 수 없었다.
“비켜어어어어어어어!”
열차의 바깥에서, 장하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김독자! 왔어! 그분들이 왔다고!”
그리고 다음 순간, 천장이 통째로 뜯겨 나가며 장하영과 함께 두 존재가 나타났다.
[작은 행성의 작은 성좌가 당신을 바라봅니다.]
백청의 광휘를 전신에 휘감은 작은 사내와, 검푸른 아우라를 풀풀 흘려대는 거대한 여인이었다. 우습게도, 나는 순간 시야가 흐려질 것 같았다.
“내 제자는 어디에 있느냐?”
「세상에서 가장 강한 소인을 스승으로 두었고.」
“조금 늦은 모양이구나.”
「세상에서 가장 강한 거인의 세계를 구했다.」
척준경에 못지 않은 힘을 가진 강자이면서, 우릴 도와줄만한 존재.
[초월좌······!]
이를 가는 마누의 눈앞에, <제1 무림>의 최강을 다투는 두 명의 초월좌가 강림했다.
파천검성 남궁민영.
역설의 백청 키리오스 로드그라임.
우리 쪽을 흘끗 본 남궁민영이 말했다.
“끝까지 제대로 해라. 그렇지 않으면 엉덩이를 맞게 될 테니.”
키리오스도 나를 노려보더니 말했다.
“날 속인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그 전까진 네 죽음을 허락하지 않겠다.”
키리오스와 파천검성이 다음 칸의 문을 향해 자신의 무공을 발했다.
[파천검도]와 [전인화]의 기운이 모여들며 가공할 풍압이 발생했다.
한순간 성좌들조차 그 기세에 위축될 정도였다.
콰콰콰콰콰콰콰!
무시무시한 마력파가 눈앞을 가로막고 있던 문들을 일제히 박살내며 전진했다. 일시지간 마련된 직선가도. 시선이 마주친 순간, 나와 유중혁은 달리고 있었다.
[전용 스킬, ‘바람의 길 Lv.11(+1)’이 활성화되었습니다!]
전력으로 운용한 [바람의 길]과 [주작신보]가 서로를 보조하며, 우리는 달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열차의 마지막 칸에 도달했다.
「그리고, 이 모든 세계의 결말을 아는 한 사내가 있었다.」
이것은 ‘멸살법’에는 없던 설화였다.
이제껏, 한 번도 존재한 적 없었던 이야기.
그렇기에 비로소 내가 원하는 결말로 갈 수 있는 설화.
나는 열차의 마지막 문을 열어 젖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