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화
260화
내가 성좌들을 향해 입을 열려는 순간, 겁에 질린 한명오가 손을 번쩍 들었다.
“나, 난 빼주게! 솔직히 난 별 도움이 안 될 것 같네.”
겁먹을 만도 하다.
저쪽의 참가자와 조력자들은 모두 최소 위인급 성좌에 준한다.
미노 소프트의 낙하산 부장이 비벼 보기엔 턱도 없는 전력.
나는 달달 떨리는 한명오의 어깨를 꾹 눌러 잡으며 말했다.
“인원수만 채워 주세요. 어차피 저기서 죽어도 진짜 죽진 않아요. 눈 딱 감고 한 게임만 뛰세요.”
이 ‘신화의 전장’에는 총 ‘세 번’의 기회가 있다.
설령 이번 판에서 지더라도, 다음 판과 그 다음 판에서 만회하면 된다.
“하, 하지만 아픈 건 진짜일 거 아닌가!”
“그렇겠죠.”
“그럼 싫어! 안 해······!”
“고맙습니다, 부장님.”
[조력자 ‘악마 백작 한명오’를 얻었습니다.]
[앞으로 섭외 가능한 조력자의 숫자 : 5명]
다른 대타를 구할 수 있다면 좋았겠지만 마땅한 인재가 없었다. 마르크나 아일렌을 택하는 방법도 있었지만, 솔직히 악마 백작급인 한명오에 비해서는 급이 떨어진다.
“난 당연히 참가야.”
기다렸다는 듯, 장하영이 작은 두 주먹을 팡팡 부딪쳤다.
[조력자 ‘차원이동자 장하영’을 얻었습니다.]
[앞으로 섭외 가능한 조력자의 숫자 : 4명]
지금 장하영의 전투력은 어느 정도일까?
무도 대회에서 3등을 했다고 듣기는 했는데······.
자리에 없었던 나로서는 정확히 감이 오질 않았다. 어떤 회차의 장하영도 이 시기에 ‘파천검성’의 무공을 계승한 적은 없었으니까.
나는 또 다른 파천검성의 제자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파천신군.”
왕!
대답은 간명했다.
[조력자 ‘풍월을 읊는 개 파천신군’을 얻었습니다.]
[앞으로 섭외 가능한 조력자의 숫자 : 3명]
초월견 파천신군은 나나 유중혁을 제외하고는 ‘확실하게’ 위인급 성좌들과 자웅을 겨룰 수 있는 존재다.
분명, 이 싸움에서 이 개는 큰 도움이 되겠지.
그런데, 왜인지 파천신군의 표정은 영 좋지 않았다.
크르렁! 컹!
세차게 짖는 파천신군의 시선이 향한 곳에, 꼬질꼬질 때가 묻은 개 한 마리가 있었다. 무슨 뜻인지 알겠다.
“맞습니다. 새 동료입니다.”
왕왕왕!
“맘에 안 들어도 어쩔 수 없어요.”
슬금슬금 눈치를 보던 오수가 파천신군의 궁둥이 쪽을 킁킁대며 슬그머니 고개를 들이밀었다. 그러자, 눈에 불을 켠 파천신군이 앞발로 오수의 머리통을 후려쳤다.
깨갱!
영 미덥지는 않지만, 저 녀석도 아쉬운 대로 동료에 넣어야 한다.
아무리 그래도 위인급 성좌니까 한명오 보다는 낫겠지.
[조력자 ‘불길에 몸을 던진 개 오수’를 얻었습니다.]
[앞으로 섭외 가능한 조력자의 숫자 : 2명]
남은 두 자리 중 한 자리는 유중혁의 것이다.
[조력자 ‘패왕 유중혁’을 등록하였습니다.]
[해당 인물은 현재 근처에 없습니다.]
[해당 인물이 제안을 수락할 시, 전장으로 자동 소환 됩니다.]
[제한 시간이 5분 남았습니다.]
이제 남은 건 한 자리.
[성좌, ‘구원의 마왕’이 성좌들을 바라봅니다.]
나를 바라보는 성좌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어디, 지원자를 받아볼까.
“조력자로 지원하실 분, 계십니까?”
솔직히 지원자가 없지는 않을 거라 생각했다.
지금 이 채널에 있는 성좌들은 여기까지 내 이야기를 따라와준 이들이니까.
혹시나 둘 이상의 지원자가 있다면, 한명오를 대체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성좌, ‘가장 어두운 봄의 여왕’이 알 수 없는 미소를 짓습니다.]
[성좌, ‘대머리 의병장’이 머리를 열심히 닦습니다.]
[성좌, ‘양산형 제작자’가 허리 통증을 호소합니다.]
······제길.
[다수의 성좌들이 당신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돌립니다.]
나는 못마땅한 눈으로 하늘을 잠시 노려보았다.
페르세포네나 양산형 제작자야 이 무대에 낄만한 급이 아니니 논외로 치더라도, 다른 위인급 성좌들은 지원해줄 만도 한데······.
나는 한숨을 쉬며 장하영을 돌아보았다.
“장하영, 내가 말한 성좌들한테 연락해 봤어?”
“······응.”
안 그래도, 이런 날을 대비해 장하영을 통해 몇몇 성좌들에게 접선해 보라고 한 참이었다.
“해상전신은 뭐래?”
“‘숙고해 보겠다’라고 했어.”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대체 언제까지 숙고만 하실 셈인지.
아무리 개연성이 우려된다고 해도, 판까지 깔아 드렸는데······.
역시 다른 성운들과 척을 지는 게 껄끄러우신 건가?
[성좌, ‘대머리 의병장’이 머리를 닦던 수건을 내려 놓습니다.]
본래 내 계획은 남은 자리에 파천검성 남궁민영과 역설의 백청 키리오스 로드그라임을 데려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두 사람은 지금 무림에 있다.
“고려제일검은?”
“그쪽은 아예 대답이 없어.”
이쯤 되니 조금 배신감까지 들었다.
[성좌, ‘대머리 의병장’이 비장한 표정을 하며 머리를 닦던 수건을 이마에 질끈 묶습니다.]
어쩔 수 없었다.
이렇게 된다면, 차선이라도 선택해야 한다.
[성좌, ‘대머리 의병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당신을 바라봅니다.]
“아스모데우스. 도와 주겠다고 하지 않았나?”
츠츠츠츳!
진명의 언급에 하늘의 구석에 있던 불길한 검은 별이 꿈틀거렸다.
[마왕, ‘격노와 정욕의 마신’이 당신을 바라봅니다.]
[마왕, ‘격노와 정욕의 마신’이 자신은 3차전부터 도와주겠다고 말합니다.]
······3차전부터?
[마왕, ‘격노와 정욕의 마신’은 당신이 자신의 도움을 받을 자격이 있는지 시험하고 싶어합니다.]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 빌어먹을 마왕 녀석이 지금 각을 잰다 이거지······.
3차전까지 갈 수 있을지도 의문인 판국에.
그나마 다행스러운 점은, 아직 저쪽의 ‘조력자’들 중에서 마왕의 이름은 보이지 않는다는 것.
[‘멜레돈 공단’에서 성좌 ‘인류의 시조’를 조력자로 지정하였습니다.]
[‘베르칸 공단’에서 성좌 ‘최후의 파라오’를 조력자로 지정하였습니다.]
[‘멜레돈 공단’에서 성좌 ‘자신의 눈을 찌른자’를 조력자로 지정하였습니다.]
[‘멜레돈 공단’에서 성좌 ‘바나라의 장군’을 조력자로 지정하였습니다.]
마왕은 아니라도, 수식언부터 하나하나가 무시무시한 성좌들이었다.
심지어 설화급에 오른 녀석들도 보였다.
쿠구구구구······.
조금이라도 더 빨리 이 ‘시나리오’를 찢고 뜯고 씹고 맛보고 싶어 하는 성좌들의 욕망이 피부로 느껴졌다.
이젠 지푸라기라도 붙잡아야 하는 상황이었다.
“우리엘.”
[성운 ‘에덴’이 당신의 제안에 곤란해합니다.]
[마계의 마왕들이 성운 ‘에덴’의 움직임에 촉각을 곤두세웁니다.]
······이곳이 ‘마계’라는 사실을 깜빡 잊고 있었다.
‘하늘의 서기관’에게 떼를 쓰고 있을 우리엘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아마 두 집단 간의 협약이 지속되는 한, 우리엘은 이 게임에 참가하는 것이 불가능할 것이다.
결국, 나는 다른 지푸라기를 향해 손을 뻗었다.
“제천대성.”
그러나 제천대성의 반응도 신통치 않았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당신을 보며 코를 팝니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다른 공단의 성좌들을 향해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찹니다.]
아무래도 저 자존심 강한 원숭이 왕은, 이곳이 자신의 무대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이 정도 시나리오에 본신의 힘을 빌려주기엔 자존심이 상한다는 거겠지.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킬킬 웃으며 당신을 바라봅니다.]
그 메시지를 함께 들었는지, 장하영이 물었다.
“염룡이는 어때?”
“안돼.”
“왜? 쟤 생각보다 착해.”
심연의 흑염룡이 생각보다 나쁜 녀석이 아니라는 건 안다. 하지만 저놈의 힘은 함부로 빌리기엔 위험 부담이 크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심연의 흑염룡’은 써야 할 곳이 따로 있었다.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어쩔 수 없네. 남은 성좌는 하나뿐인가······.”
“그게 누군데······?”
[성좌, ‘대머리 의병장’이 기다렸다는 듯 자신의 죽장을 움켜쥡니다.]
“장하영. ‘은밀한 모략가’한테 메시지를 보내.”
[몇몇 성좌들이 당신의 선택에 깜짝 놀랍니다!]
성좌 ‘은밀한 모략가’.
내 채널의 주요 4인방 중, 내가 유일하게 정체를 모르는 성좌.
제천대성에 흑염룡까지 채널에 복귀한 마당에, 왜 아직까지 녀석이 내 채널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극소수의 성좌들이 당신의 선택에 두려움을 느낍니다.]
[몇몇 성좌들이 당신의 선택을 만류합니다!]
성좌들의 반응은 이해가 갔다.
은밀한 모략가가 누구인지는 확실히 모르겠지만, 높은 확률로 ‘이계의 신격’ 중 하나일 것이다.
그것도 ‘위대한 옛 존재’들을 물릴 정도의 영향력을 가진 존재.
아마 다른 성좌들도 그 사실을 깊이 의식하고 있을 것이다.
한참 허공에다 대고 뭔가를 두드리던 장하영이 나를 불렀다.
“김독자. 수식언 제대로 불러준 거 맞아?”
“왜?”
“이것 좀 봐.”
장하영은 자신이 입력하던 화면을 내게 보여줬다.
화면에 떠오른 메시지는 다음과 같았다.
[해당 수식언은 <스타 스트림>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나는 황망한 심정으로 장하영에게 물었다.
“너 똑바로 입력한 거 맞아?”
“내가 바본 줄 알아?”
장하영이 다시 한 번 수신좌에 ‘은밀한 모략가’를 입력했다.
[해당 수식언은 <스타 스트림>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은밀한 모략가’가······ 존재하지 않는 수식언이라고?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흥미로운 표정을 짓습니다.]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호기심을 갖습니다.]
[성좌, ‘하늘 걸음의 주인’이 네트워크를 가동합니다.]
[다수의 성좌들이 ‘은밀한 모략가’에 대한 수소문을 시작합니다.]
이런 경우는 생각도 못했기 때문에, 나는 순간적으로 사고가 마비되었다.
[제한 시간이 1분 남았습니다.]
실제로 대성좌들 중에는 수식언이 여럿인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이런 경우가 있었던가?
멀쩡하던 수식언이 사라졌다고?
“이제 어쩌지?”
장하영이 초조한 눈으로 나를 보았다.
이제 남은 시간은 30초도 채 되지 않는다.
[성좌, ‘대머리 의병장’이 괴성을 지르며 자리에서 일어섭니다!]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더 이상은 외면하기 힘들었다.
“······사명대사님, 도와주십시오.”
내 말과 동시에, 하늘에서 낙뢰가 번뜩였다.
고오오오오!
[성좌, ‘대머리 의병장’이 개연성을 얻어 화신체를 소환합니다!]
눈부신 빛살 속에서 구현되는 화신체를 보며, 나는 생각했다.
지금은 강력하지만 통제할 수 없는 성좌보다, 조금 아쉬워도 믿을 수 있는 성좌를 동료로 삼는 게 좋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사명대사는 내가 ‘성운 개설권’을 얻을 때 지지해줬던 성좌들 중 하나니까.
쿠구구구구!
소환식이 끝난 후에도 여전히 빛은 사라지지 않았다.
자세히 보니 사명대사의 머리 쪽에서 섬광이 번뜩이고 있었다.
슬그머니 손으로 차양막을 만드는데,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랜만일세, 김독자.]
가공할 내력을 지닌 진언에 절로 감탄이 나왔다.
개나 고양이도 운이 좋으면 성좌가 될 수는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무나 성좌가 되는 것은 아니다.
“오랜만입니다, 사명대사님.”
삼미터는 될 법한 거대한 키의 신승(神僧).
마치 거목처럼 대지에 꽂힌 커다란 죽장(竹杖).
한반도의 위인급 성좌, 사명대사가 마침내 본연의 모습을 드러냈다.
[조력자 ‘대머리 의병장’을 얻었습니다.]
[당신은 모든 조력자를 섭외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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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참가자가 조력자 섭외를 마쳤습니다.]
[게임, ‘신화의 전장’이 마계에 현현(顯現)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