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5화
255화
Episode 48. 등장인물
뺨에 몇 번인가 불에 데인 듯한 통증이 일었다.
“김독자! 야! 뭐냐고!”
시야가 깜빡이며, 천천히 의식이 수면 위로 올라왔다.
[전용 스킬, ‘제4의 벽’이 강하게 발동 중입니다!]
“으······.”
내 목소리가 내 목소리 같지 않았다.
아주 잠깐이지만, 전혀 다른 존재가 되었다가 돌아온 듯한 느낌. 소름끼치는 감각이 전신에 남아 있었다. 장하영의 손끝이 닿은 어깨가 흠칫 떨렸다.
“꼴이 왜 이래?”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기억이 확실하지 않았다.
[제4의 벽]에게 부탁해서 내 특성창을 확인한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그 후로 목소리가 들렸고······.
나는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물었다.
“······나 얼마나 기절해 있었어?”
“몰라! 나도 갑자기 번개가 치길래 달려온 거야!”
“번개?”
“그 왜, 개연성 어길 때 생기는 스파크 있잖아. 그게······.”
“그게 번개처럼 쳤어?”
장하영이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큰 건 처음 봤다니까?”
잘 보니 코트를 비롯한 옷가지가 까맣게 타 있었다. 자동 수복 기능이 있는 코트가 이렇게 망가질 정도로 후폭풍이 쳤다니······.
심지어 집무실의 천장은 운석이라도 맞은 것처럼 뻥 뚫려 있었다.
“괜찮은 거야?”
“괜찮아. 괜찮은 건 물론이고······.”
오히려, 더 가뿐해진 느낌이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화신체가 이렇게 타버렸는데, 정신은 이렇게 또렷하다니.
심지어 설화력도 더 충만해진 느낌이었다.
[전용 스킬, ‘독해력’의 효과로 이해력이 증가합니다.]
그 메시지를 보는 순간, 종전의 기억이 떠올랐다.
맞다.
분명 나는 그런 메시지를 보았었다.
[등장인물, ‘김독자’에 대한 이해도가 상승했습니다.]
메시지는, 나를 ‘등장인물’이라고 표기했다.
이제껏 한 번도 없었던 일이었다.
가슴 한구석에 서늘한 기운이 스쳤다.
지금껏 나는 몇 번인가 ‘등장인물화’가 진행된 존재들을 본 적이 있었다. ‘원작’의 바깥에서 왔으나, 결국은 원작과 동화되어버린 이들.
주로 ‘하차자’라 불리던 이들이 그랬다.
나는 다급히 특성창을 불러 보았다.
‘특성창.’
하지만, 특성창은 열리지 않았다.
이유는 명백했다.
[‘제4의 벽’이 당신을 노려보고 있습니다.]
나는 식은땀을 흘렸다.
「김 독 자 15초 봤 다」
‘미안, 진짜로.’
그만큼 시간이 지난 줄 누가 알았겠냐고.
사실 10초든 15초든 특성창 하나 살피기도 빠듯한 시간이었다.
「이 제 안보 여 줘」
‘잠깐만, 하나만 물어보자.’
나는 사라지려는 [제4의 벽]을 황급히 붙잡았다.
‘그 [벽] 뒤에 있는 건, 대체 뭐야?’
어렴풋한 기억이지만, 나는 분명 기절하기 직전 무언가를 보았다.
좀 더 더듬어 보자면, 누군가와 언뜻 이야기를 나눈 것 같기도 했다.
몇 개의 그림자가 분명히 그곳에 있었다.
「······졸 려.」
그 말과 함께, [제4의 벽]은 잠들어버렸다.
여전히 기능은 작동하고 있었지만, 의식은 꺼진 모양이었다.
제기랄.
[새로운 설화를 획득하였습니다!]
[설화, ‘심연을 들여다본 자’를 획득하였습니다.]
[해당 설화는 등급 표기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
나는 멍한 눈으로 허공에 깜빡이는 메시지를 보았다.
심연을 들여다본 자.
나는 원작에서 그 설화를 얻게 되는 존재를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랬기에, 등줄기에 돋는 소름을 멈출 수가 없었다.
고삐가 풀린 의문들이 머릿속에서 폭주했다.
왜 여기서 내가 이 ‘설화’를 얻은 거지?
저 ‘설화’와, 내가 ‘등장인물’이라고 표기된 건 대체 무슨 관계인 걸까?
지금 나는 ‘등장인물’이 된 걸까, 아니면 여전히 ‘독자’인 걸까?
나는······.
나는, 여전히 미래를 바꿀 수 있는 존재인 걸까?
“김독자?”
감정이 훤히 내비치는 눈으로, 장하영이 나를 보고 있었다.
내가 처한 상황도 저 눈동자처럼 명확했다면 얼마나 좋을까. 저 눈빛을 읽듯, 나 자신에 관한 것도 읽을 수 있다면······.
순간, 머릿속에서 불똥이 튀었다.
「만약, 나 자신에게 [전지적 독자 시점]을 사용한다면 어떻게 될까?」
한 번도 그런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내 안에는, 분명 나 자신도 알지 못하는 뭔가가 숨어 있다.
작가가 남긴 것인지, 아니면 세계가 변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내게 스며든 것인지는 모른다. 확실한 것은 시간을 들여서라도 그게 뭔지 알아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막상 [전지적 독자 시점]을 쓰려고 마음을 먹자 망설여졌다.
······이걸 쓴다고 내가 어떤 존재인지 알 수 있을까?
애초에 [전지적 독자 시점]은 상대방의 생각과 움직임을 읽거나, 해당 인물의 시점에 빙의하는 기능이 전부인 스킬인데······.
[······김독자? 괜찮냐?]
간신히 생각의 수렁에서 빠져나온 것은 눈앞에 둥둥 떠 있는 도깨비를 발견한 후의 일이었다.
“비형?”
나는 멍청한 얼굴로 비형을 마주보았다.
이 자식 아까 떠난다고 하지 않았나?
비형이 우물쭈물 말을 더듬었다.
[아······ 갑자기 후폭풍이 치길래······.]
바쁜 일이 있다더니, 사실은 근처에서 지켜보고 있었던 모양이다.
하여간 음흉하게 짝이 없는 녀석.
이러니까 믿을 수가 있나.
[오, 오해 하지마. 깜빡하고 말 안 해준 게 있어서 돌아온 거니까.]
내가 처음 보는 도깨비와 태연히 말을 나누자, 곁에 있덩 장하영이 토끼 눈을 하고 이쪽을 보았다. 나는 괜찮다는 제스처로 녀석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준 후에 비형에게 물었다.
“말 안 한 게 뭔데?”
[너도 알겠지만, 이번 ‘마왕 선발전’ 이벤트가 굉장히 커질 거거든.]
이미 예상하고 있던 바였다.
안 그래도 성좌들 사이에 암암리에 퍼지고 있던 이야기를 내가 ‘미식협’에서 제대로 터트려버렸으니까.
분명 거기에 있던 녀석들 중 일부도, ‘마왕 선발전’에 참전할 것이다.
[그게, 단순히 커지는 정도가 아니라 방송권을 놓고 싸움이 붙었어. 너도 예상했겠지만 ‘마계’에 파견된 건 나만이 아니야.]
“그럼?”
[너도 아는 도깨비가, 반대 쪽에 있어.]
나도 아는 도깨비?
[너랑 나한테 엄청난 원한을 품은 녀석이지.]
그런 도깨비라면 둘 정도 있다.
하지만 하나는 무림에 있으니, 남은 것은 하나 뿐이다.
“······‘독각’이냐?”
[그래.]
독각. 일본 채널을 담당하고 있던 그 도깨비는, 언젠가 나와 비형에게 된통 당한 적이 있는 녀석이었다.
그때야 운이 좋았지만, 지금도 그러라는 법은 없었다.
‘멸살법’의 도깨비들 중에서도, 독각은 채널 운용에 관한한 특출난 재능을 지닌 놈이니까.
놈이 이번 ‘마왕 선발전’을 이끄는 도깨비 중 하나로 발탁되었다면, 앞으로의 일정은 결코 순탄하게 흘러가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뭐, 아무튼 몸 조심하라고. 채널 관리도 잘 하고······ 잠깐만. 너 도깨비는 어쨌냐?]
“도깨비?”
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무척 고적한 느낌이었다.
뻥 뚫린 천장 위로, 하늘에 붙박여 열심히 반짝거리는 성좌들의 모습이 보인다.
이상한 일이었다. 아무리 내가 채널 차단을 지시했다고 해도, 저들의 불만 사항은 들려올 텐데······ 내 귓가에는 어떤 메시지도 들려오지 않고 있었다.
“비유?”
불안한 마음에 소리내어 이름을 불러 보았다.
비유는 나타나지 않았다. 처음에는 또 자고 있겠거니 싶었지만, 일 분이 지나고 이 분이 지나도록 비유는 나타나지 않았다.
불길한 예감이 엄습했다.
······설마?
“비유!”
비유가 사라졌다.
*
[#BI-7623 채널에 입장했습니다!]
.
.
[성좌, ‘대머리 의병장’이 당신의 귀환에 크게 감격합니다.]
[성좌, ‘해상전신’이 당신을 향해 반가운 미소를 짓습니다.]
[다수의 성좌들이 당신의 귀환을 환영합니다!]
비형의 채널에 입장하자, 간만에 보는 이름들이 나를 반겼다.
그러나 환호 세례를 받으면서도, 나는 조금도 기뻐할 수 없었다.
[성좌, ‘구원의 마왕’이 도깨비 ‘비유’의 행방을 묻습니다.]
몇몇 성좌들이 곧바로 대답했다.
[성좌, ‘대머리 의병장’이 곤란하다는 듯 머리를 닦습니다.]
[성좌, ‘흥무대왕’이 헛기침을 하며 엄지와 검지를 붙입니다.]
[일부 성좌들이 코인을 준다면 대답해 줄 용의도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고 보니 우리 한반도 성좌님들은 돈이 별로 없었지.
주머니에서 코인을 뒤적거리는데, 장하영이 입을 열었다.
“혹시 후폭풍에 휘말린 거 아냐?”
[관리국] 소속이 아닌 비유는 커다란 후폭풍이 터졌을 때 자신을 보호해 줄 [거대 설화]가 없다. 그러니, 후폭풍에 휩쓸려 죽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아닐 거야. 흔적이 없어.”
그런 일이 벌어졌다면 끔찍한 파편들이 산재해 있을 텐데, 어디에도 비유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마치, 누군가가 ‘비유’라는 존재를 통째로 뜯어간 듯한 느낌.
누굴까. 대체 누가 비유를······.
순간 손톱을 잘근잘근 깨물던 비형이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우리는 서로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비유는 마계의 무소속 채널을 가진 유일한 도깨비였다.
[빌어먹을, 놈들 짓이야.]
“혹부리로군.”
원작의 문장들이 머릿속을 빠르게 흘러갔다.
「시나리오 지역들 중 유일하게 ‘도깨비’의 관할이 아닌 곳. 그곳이 바로 ‘마계’다.」
‘멸살법’ 원작에 쓰여있는 바와 마찬가지로, ‘마계’는 본래 혹부리들의 구역이다. 그런데 그런 구역에서, [관리국] 소속이 아닌 도깨비가 개인 채널을 가지고 있는 것이 확인되었다.
―그 영혼은 우리 것이다.
처음 만났던 혹부리도 ‘도깨비의 알’을 무척 탐냈었다.
무소속 채널의 가치는, 현 시점의 마계에서 산정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
마계에서 모처럼 벌어지는 [거대 설화] 이벤트. 자신들의 세력권에서 펼쳐지는 이 이벤트를, 혹부리들이 놓칠 턱이 없다.
놈들은 분명 이번 ‘마왕 선발전’을 노리고 채널을 훔쳐간 것이다.
혹부리들은 태생적으로 ‘개연성’에 대한 저항력도 강하다. 그러니 내가 기절한 사이 주변에 후폭풍이 불어 닥쳤다 해도, 충분히 그걸 뚫고 비유를 데려갈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빌어먹을······ 하필 이런 시점에.
[나한테 맡겨. 내가 놈들을 찾아낼게.]
흘끗 돌아본 비형의 눈동자에 분노가 차올라 있었다.
[도깨비의 명예가 걸린 일이야. ‘관리국’ 소속이 아니라고 해도, 두고 볼 수는 없지.]
“같이 가자.”
그러자 비형이 고개를 저었다.
[‘마왕 선발전’까지 시간도 얼마 안 남았어. 그 사이에 너도 해야 될 일들이 있을 거 아냐?]
맞다. 이제 남은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다.
자칫 비유를 찾는 데 시간을 잘못 쓴다면, 선발전은 시작과 동시에 패망할 수도 있다.
“······왜 이렇게까지 해주는 거냐?”
[넌 지금은 내 채널 소속이야.]
비형은 내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난 내 채널을 위해서 움직이는 것 뿐이야. 넌 이길 궁리나 해. 그래야 성좌들도 좋아하고, 내 채널도 더 커질 테니까.]
그 말과 함께 비형의 신형이 허공에서 사라졌다.
장하영이 물었다.
“······저거 믿어도 괜찮은 걸까?”
도깨비를 믿는가 안 믿는가 하는 질문만큼 바보같은 것도 없다.
비형에 관한 신뢰와는 별개로, 이 <스타 스트림> 전체를 뒤져도 도깨비만큼 속을 알 수 없는 종족도 드무니까.
나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유중혁은 지금 건드리기 좋지 않은 상황이었고, 장하영 정도의 실력으로는 비형을 추격할 수 없다.
내 부탁을 들어줄 만한 존재는 결국 저 밤하늘에 있을 텐데, 문제는 내가 지금 비형의 채널에 있다는 것이었다.
즉, 내가 채널을 통해 보낸 모든 메시지는 비형을 통해 읽힐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 뿐이다.
“장하영. ‘벽’을 불러.”
*
어둠 속을 달리는 쾌속한 발걸음.
[바앗, 바아아앗!]
새장 속에 갇힌 비유가 비통한 울음을 터뜨렸다.
[바아앗! 바앗······!]
왼쪽 볼에 작은 혹을 매단 등이 굽은 노인이, 어두운 길을 달리고 있었다.
급한 발걸음 속에 깃든 경쾌함. 노인은 기분이 몹시 좋은 상태였다.
[도깨비의 시대는 이제 끝이다.]
다른 혹부리들에게 자신의 공을 자랑할 생각에, 혹부리 노인은 신이 났다. 얼마 전 동료 혹부리가 ‘도깨비를 패는 설화’를 가지고 와서 자랑을 해대는 통에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른다. 그런데 이번에 그가 가져온 것은, 도깨비를 패는 설화도 아니고 무려 ‘도깨비’ 그 자체였다.
혹부리 노인은 비유의 새장을 사랑스럽다는 듯 쓰다듬었다.
[아이야, 너는 채널을 가진 최초의 ‘혹부리’가 될 거다.]
혹부리들이 가진 오랜 소망.
그것은, ‘도깨비’들에게 빼앗긴 이야기의 주도권을 돌려 받는 것.
[■■의 이야기꾼. 이 끔찍한 시나리오의 지옥으로부터, 노예들을 해방시킬······.]
혹부리 노인의 왼뺨에 달린 혹이 크게 부풀었다.
흥분한 노인의 혹이 꿈틀거리며, 비유가 들어 있는 새장을 툭툭 건드렸다. 공포에 젖은 눈으로 그 혹을 보던 비유가 다급히 주변을 돌아보았다. 구해줄 이를 애타게 찾았으나, 안타깝게도 이곳에 비유를 구해줄 사람은 없었다.
[어이.]
정확히 말하면, ‘사람’만 없었다.
[그 혹 안 치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