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화

250화 콰드드드드드! 지상과 하늘이 엇갈린 톱니바퀴처럼 덜그럭거렸다. 거대한 무언가가 하늘에서 내려오고 있었고, 그것을 막는 자가 있었다. 마력파와 [거대 설화]의 힘이 부딪치며 눈부신 스파크가 터져나왔다. [‘멸망 시나리오’ 시작까지 40초 남았습니다.] 상대는 무려 ‘이계의 신격’. 조금씩, 하늘의 천장은 가까워져 오고 있었다. 츠츠츠츠츳! 성채 전체를 짓누르는 위압감에도 파천검성은 물러서지 않았다. 아니, 물러설 수 없었다. 자신의 신념이 향하는 길 앞에서, 절대로 물러서지 않는 것. 그것이 오직 단 하나의 설화만을 걸어온 ‘초월좌’의 기치였다. “맞서 싸워라!” 파천검성의 분전은 절망하던 무림인들을 되살렸다. [다수의 성좌들이 해당 시나리오의 상황에 흥미로워합니다.] [몇몇 성좌들이 초월좌 ‘남궁민영’에게 주목합니다.] 밤하늘의 별들이 몰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피냄새를 맡고 쫓아온 피라냐 떼처럼, 성좌들이 붉은 밤하늘을 밝히고 있었다. 도깨비들도 기다렸다는 듯 모습을 드러냈다. [성좌님들, 바야흐로 ‘멸망’이 도래할 시간입니다!] 어떤 성좌는 침통한 시선으로, 또 어떤 성좌는 흥분한 기색으로 세계의 멸망을 지켜보고 있었다. 제각기 품는 감정은 다르지만, 결국 한 세계의 몰락조차 그들에게는 유희거리에 지나지 않는다. ······마치, 내가 그랬었듯이. 순간 여러 가지가 감정들이 머릿속에서 헝클어졌다. 어쩌면 그 감정은 ‘미식협’에서부터 쌓여온 것이었다. 만약 이곳에서 ‘무림’을 버린다면, 나 역시 저들과 다를 게 뭐지? “파천검성! 나는······!” 내가 성좌의 ‘격’을 끌어 올리자, 이변이 발생했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당신의 선택을 기대합니다.] [다수의 성좌들이 당신의 존재에 주목합니다!] 파천검성에게 몰려왔던 주목이, 내게 쏠리고 있었다. 【너 는······?】 여기서 ‘이계의 신격’의 눈에 띈다면, 나는 이곳을 벗어날 수 없게 된다. 그 사실을 아는 파천검성이 나를 막았다. “이곳은 네 전장이 아니다.” 마치, 이 페이지는 내게 허락되지 않았다는 것처럼. “이 세계는 이곳의 사람들에게 맡겨라.” 파천검성에게 무림이 어떤 곳이었는지는 모른다. 멋대로 그녀를 신으로 떠받들고, 경외시하며, 동시에 몰락시켰던 장소. 그럼에도 이 순간, 파천검성은 무림을 지키기로 결심했다. [29번 시나리오 지역, <제1 무림>에 쌓인 ‘설화’가 폭주합니다.] 그러자 그 무림도, 파천검성에게 응답했다. [29번 시나리오 지역이 자신의 수호자를 찾습니다.] [<제1 무림>이 자신의 ‘파천검성 남궁민영’을 바라봅니다.] [거대한 ‘설화’의 가능성이 발아합니다.] 파천검성이 놀라 눈을 깜빡였다. 아마 그녀도 처음 듣는 메시지였을 것이다. 누군가가 세계를 멸망시키려 한다면, 세계도 멸망에 반응하게 마련이다. 「이 세계에서, 역사를 쌓은 모든 것은 의지를 가진다.」 무림인들의 피와 살, 땀과 노력으로 응어리진 땅. 그 땅 위에 새겨진 설화들이 파천검성의 주변으로 몰려들고 있었다. 눈부시게 빛나는 파천검성의 몸에서 웅혼한 무림의 기상이 느껴졌다. [거대 설화]의 가능성. 아직 개화하지는 못했지만, 발아가 언제일지도 알 수 없었지만······. 그것은, 분명 [거대 설화]의 가능성이었다. 【가 가 가 가 가 가 가】 웃음 소리를 닮은 기괴한 언어가 허공에서 쏟아졌다. 마침내 하늘로 다섯 개의 촉수가 넘어오고 있었다. 쿠구구구구! 아무리 [거대 설화]의 가능성을 입수했다고 해도, 역시 파천검성만으로 ‘이계의 신격’을 막는 것은 무리였다. 저들은, 아주 오랫동안 그런 [거대 설화]들을 마주하며 살아온 존재들이니까. 더 시간을 끌 수 없다는 걸 알았는지, 파천검성이 외쳤다. “어서 가라!” 사자후와 함께 내 몸이 차안으로 떠밀렸다. [포탈이 발동합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유중혁이 차에서 내리려 했지만, 이미 [X급 페라르기니]는 시동을 걸고 있었다. 단 한순간이었다. 포탈을 통과하는 동안, 파천신군이 고요히 울었다. 무림의 정경이 천천히 멀어져 갔고, 얼마 지나지 않아 모든 것은 어둠 속에 묻혔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오랫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 [‘73번째 마계’에 도착했습니다.] [‘마왕 선발전’ 까지 사흘 남았습니다.] 너무 엄청난 일들을 연달아 겪은 탓일까. 일행들은 마계로 돌아온 후에도 한동안 말이 없었다. 차의 시동이 꺼지자, 고요한 정적만이 남았다. “······잠깐 담배 한 대 태우고 오겠네.” 한명오는 자리를 비웠고, 장하영은 무릎에 머리를 박았다. 파천신군이 낑낑거렸고, 유중혁은······ 제기랄. 나는 침착하게 숨을 몰아쉬며 이 여정으로 인해 내가 얻은 것들을 생각했다. 모두 곧 벌어질 ‘마왕 선발전’을 위해 벌인 일들이었다. ‘파천검성’을 동료로 영입하기 위해 무림으로 갔고, 그 과정에서 ‘미식협’에도 다녀왔다. 파천검성은 데리고 오지 못했다. 미식협의 성좌들은, 설득할 수 없었다. 그나마 소득이 있었다면 유중혁과 장하영이 더 강해졌다는 것, 초월형에 오른 개 한 마리, 그리고······. [보유 코인 : 4,890,875 C] ······. [‘2차 수정본’의 업데이트가 완료되었습니다.] 들려오는 메시지에도 불구하고 스마트 폰을 볼 용기가 나질 않았다. 그럼에도 이것을 봐야만한다는 게, 심지어 한편으로는 이것을 보는 걸 기대하고 있는 나 자신이 혐오스러웠다. “김독자.” 멍하니 고개를 들자, 유중혁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녀석의 마음 속에 고인 분노를, 나는 차마 읽어낼 수 없었다. 유중혁이 나를 여기서 격살해도 솔직히 할 말이 없는 지경이니까. “이제 어떻게 할 거냐.” 별다른 고저가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 나는 미묘한 두려움 속에 [전지적 독자 시점]을 발동했다. 그리고, 곧바로 후회했다. 「······.」 「······.」 「······.」 미어터지는 감정 속에 숨이 막혀왔다. 어떤 감정은 말로써 형용될 수 없다. 너무나 고되고 깊은 슬픔은, 차마 언어가 되지 못한 채 뭉그러진다. 유중혁은 이미 광인(狂人)이었고. 어쩌면, 오래 전부터 줄곧 그런 상태였다. 이 사건은 녀석을 더욱 닳게 만들 것이다. 터지지 못한 감정들은 다음 회차로 넘어갈 것이고, 녀석의 죽음을 부추길 것이다. 삶의 시간을 마모시키고, 녀석을 고립시킬 것이다. 3회차의 파천검성은, 그렇게 잊혀질 것이다. 나는 떨리는 입술을 열었다. 말해야 한다. 파천검성은 살아 있을 거라고. 분명 살아서, 다시 돌아올 거라고. 하지만 말할 수 없었다. 나는 tls123이 아니었으니까. “또······ 뭔가 해봐야겠지.”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고작 그게 전부였다. “발악하고, 싸우고, 뒤집어 봐야지.” 나를 조용히 바라보던 유중혁은, “그런가” 한마디를 남기고 차에서 내렸다.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아마 녀석은, 녀석 나름대로의 준비를 하러 갔을 것이다. 그게 유중혁이다. 녀석은 삶은 포기해도 목표는 포기하지 않는다. 아무리 강대한 절망이 있어도, 몇 번이고 또 몇 번이고 도전해 그 절망을 이겨낸다. 그렇게 살아왔고,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 그리고, 끝내 불행해질 것이다. 유중혁이 떠난 자리에, 녀석의 심상 속에서 유일하게 읽을 수 있었던 한줄의 문장만이 내게 남았다. 「네놈 답지 않았다.」 각인처럼 새겨진 그 문장을 곱씹으며, 나는 스마트폰을 켰다. 유중혁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알고 있었다.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세 가지 방법(2차 수정본).txt 여기에는 아마 파천검성의 생사가 적혀 있을 것이다. 이번 회차의 성공 여부가 적혀 있을 것이고. 어쩌면, 바뀐 ‘결말’이 적혀 있을 것이다. [‘제4의 벽’이 희미하게 흔들립니다.] 떨리는 손가락이 몇 번이고 화면을 헤매었다. 유중혁의 말이 다시 한 번 떠올랐다. 「네놈 답지 않았다.」 그 자식이 나에 대해 뭘 안다고 그런 소리를 한 건지 모르겠다. 나는 유중혁을 10년이 넘도록 지켜봤지만, 유중혁은 나를 안지 1년도 채 되지 않았다. 그런 자식이, 나에 대해 뭘 안다고······. 툭. 나는 화면을 껐다. 뭐가 적혀 있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어차피, 내가 만들려는 ‘이야기’는 이 안에 없을 텐데. “장하영. 무림을 구하고 싶다고 했지.” 곁에 있던 장하영이 눈을 닦으며 고개를 들었다. 그런 녀석을 보며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게 먹힐지 안 먹힐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안 해보는 것보다는 낫다. * [관리국]의 집행부 구치소에는 다양한 존재들이 들어온다. 주로 수감되는 것은 시나리오의 「개연성 적합 심사」에 걸린 성좌나 초월좌들이었다. 하지만 어지간한 경우가 아니면 개연성을 어겼다고 해도 집행부가 직접 나서는 경우는 드물다. 어차피 개연성을 벗어나면 알아서 후폭풍을 맞아 뒈지거나, 슬금슬금 몸을 피하기 마련이니까. 하지만 이 사내의 경우는, 집행부가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도깨비 ‘영기’는 한숨을 쉬며 수감실의 개연성 그물에 갇힌 사내를 바라보았다. “여기 좀 보십시오.” 그러자, 작은 사내가 영기를 돌아보았다. 영기는 사내의 잘생긴 얼굴을 보며 말을 이었다. “이제 본래 시나리오 지역으로 복귀하셔야 합니다. 당신의 고향은 안전하지 않습니까?” “······.” “당신 때문에 그쪽 행성계에 시나리오 진행이 불가능한 상태란 말입니다.” 그러자 작은 사내가 코웃음을 쳤다. “내가 떠나면 네놈들은 또 [피스 랜드]에 ‘재앙’을 내릴 거잖아.” “그렇지 않을 거라 이미 말씀 드렸지 않습니까?” “네놈들의 말 따윈 믿지 않는다.” 으르렁거리는 사내의 말투에, 영기가 움찔하며 물러났다. 이래서 초월좌들은 까다롭다니까. 성좌들은 그래도 말을 하면 재깍재깍 알아 듣는데, 필멸자인 상태로 고집만 똘똘 뭉친 초월좌들은 가끔 이런 말도 안 되는 난장을 피운다. 사내가 계속해서 말했다. “기다리는 녀석이 있다. 그놈이 돌아올 때까지는 고향에 머물 것이다.” “기다린다? 누구를 말입니까?” “그놈이 오면 알아서 떠날 것이다.” 영기가 그럴 수는 없다며 입을 열려는 순간, 수감소의 출입문이 열리며 새로운 수감자가 등장했다. [그르르르······ 빌어먹을 도깨비 놈들아!] 거센 진언에 수감소 전체가 쩌렁쩌렁 울렸다. 영기와 사내의 고개가, 동시에 그쪽을 향해 돌아갔다. 입구 쪽에서 집행부 도깨비들에게 포박 당한 성좌가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도마뱀을 닮은 외형의 성좌였다. [그 개자식이 나한테 사기를 쳤다! 내 코인을 훔쳐간 건 그놈인데 왜 그놈을 안 잡고 나를 잡는 것이냐!] “빚을 변제할 방법을 찾지 못하신다면, 설화를 앗아가는 수밖에는 없습니다.” 상황을 보니 대충 어떻게 된 것인지 알 것 같았다. 가끔 저런 경우가 있다. 말도 안 되는 대출 이자를 갚지 못해 이곳에 오는 경우. 영기가 속으로 혀를 차는 동안에도, 성좌의 고함은 계속되었다. 도깨비들이야 그런 소란에 익숙했지만, 이곳에는 그렇지 않은 사람도 하나 있었다. “왱알왱알 시끄럽다.” 그 서늘한 목소리에, ‘성급한 늪의 포식자’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네놈은 뭐냐? 조그만 녀석이······!] 순간, ‘조그만 녀석’의 전신에서 엄청난 기류가 휘몰아쳤다. 사내의 몸이 허공에 두둥실 떠오른다 싶더니, 어느새 찬연한 푸른 전격이 사내의 전신을 휘감았다. 츠츠츠츠츠츠! [무슨······ 큭······?] ‘성급한 늪의 포식자’가 당황한 목소리를 흘렸다. 자신의 ‘격’마저 짓누르는 필멸자의 힘. 이제껏 한 번도 겪지 못했던 일이었다. 쿠드드드드드! 수감소의 ‘그물’이 고통스러운 비명을 내질렀다. 이곳에 할당된 개연성 이상의 힘이 사내의 내부에서 용솟음치고 있었다. 영기를 비롯한 도깨비들이 깜짝 놀라 설치된 ‘그물’의 출력을 높였지만, 상황은 변하지 않았다. 일순, 사내의 몸이 더욱 작아지며 ‘그물’ 사이를 뚫고 튀어나왔다. 엄청난 기세로 폭주한 전격은, 그대로 ‘성급한 늪의 포식자’를 향해 쏘아졌다. 콰아아아앙! 건물 전체가 흔들리는 폭음과 함께, 희뿌연 먼지가 피어올랐다. [으······ 으으······.] ‘성급한 늪의 포식자’가 우스꽝스럽게 바닥에 너부러져 있었다. 백청의 주먹은, 무려 다섯 명의 도깨비들이 달려들어서야 간신히 궤적을 비껴갔다. 그의 주먹이 만든 끔찍한 흔적이, 수감소의 벽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러나 도깨비들은 주먹의 주인을 탓하는 대신, 급보를 전했다. “축하합니다, ‘성급한 늪의 포식자’. 당신은 해방입니다.” [응? 뭐?] “방금, 수감자를 풀어 주라는 지시가 내려왔습니다. 누군가가 당신의 빚을 갚았습니다.” [뭐? 누가······.] 이어지는 소식에 ‘성급한 늪의 포식자’는 방금 있었던 일도 잊고 눈을 끔뻑였다. 도깨비가 누군가의 이름을 말하자, 돌아서던 키리오스의 몸이 멈춰섰다. ‘성급한 늪의 포식자’가 의아한듯 물었다. [······그놈이 내 빚을 갚았다고?] 그 순간, 수감소 전체를 가득 채울 정도로 환해진 [전인화]의 전격이 도깨비를 향해 쏘아졌다. 도깨비의 멱살을 틀어쥔 키리오스가 물었다. “방금 뭐라고 했지?” “아, 아니 무슨······.” “네놈이 방금 말한 이름. 그놈 지금 어디에 있느냐?” 도깨비가 대답하기도 전에, 어떤 메시지가 키리오스의 귓가로 날아들었다. 잠시 멍한 얼굴로 허공을 올려다보던 키리오스가 도깨비들을 지나쳐 입구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영기가 다급하게 외쳤다. “잠깐만요! 당신을 보낼 수는 없습니다! 또 고향으로 돌아가신다면―” “고향으로 가지 않는다.” 역설의 백청, 키리오스 로드그라임이 분노 가득한 미소로 말을 이었다. “내 제자를 족치러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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