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9화
219화
유중혁은 경지에 오른 [은밀 기동]과 [은신 장막]을 사용해 아주 간단하게 [공단]에 침입했다.
[새로운 메인 시나리오 지역에 입장하였습니다.]
마계의 공단.
2회차 때 잠깐 마계를 방문한 적이 있기는 했지만, 이 시기에 온 것은 처음이었다.
천천히 주변을 훑어보자, 공민가 주변을 거니는 공민들의 모습이 보였다. 시나리오를 포기하고 세계에 절망한 얼굴들.
유중혁이 좀처럼 인연을 만들지 않는 이유 중 하나였다.
바로 저 절망감을 공유하지 않기 위해서.
회귀자에게 가장 독이 되는 감정이 바로 저런 것이니까.
‘생각보다 조용하군. 김독자가 나타났다면 한창 난리통일거라 생각했는데.’
주변 어디를 둘러봐도 김독자로 보이는 존재는 없다.
그 유난스러운 행동거지라면 어딜 가나 눈에 쉽게 띌 텐데······.
정말 놈이 살아 있는 게 맞는지 의심이 들 정도다.
“······귀찮군. 너무 넓어.”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당신이 불필요한 희생을 일으키지 않기를 바랍니다.]
고개를 돌려 보니 우리엘 인형이 볼을 부풀리고 있었다.
작게 한숨을 내쉰 유중혁이 안력을 집중해 주변을 살폈다.
하필 대천사의 화신체와 함께 오는 바람에, 행동에 제약이 생겼다.
‘공민 하나를 붙잡고 물어보면 되겠지만······.’
감각을 집중하자, 공민들 사이에 숨어있는 시커먼 기운들이 느껴졌다.
악마종 특유의 기척.
다른 존재도 아니고 악마종이라면, 대천사도 뭐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정보를 많이 가진 녀석들을 족치는 게 빠르겠지.’
물론 악마종은 강하다. 하지만 유중혁은 초월좌였다.
배후성의 권위를 빌리지 않고도 스스로 좌(座)에 오른 존재.
성좌에 준하는 존재라면 모를까, 필멸자들 중에서 이제 유중혁을 위협할 만한 존재는 거의 없었다.
‘저 녀석이 좋겠군.’
물 흐르듯 움직인 유중혁의 그림자가, 순식간에 원하는 목표물의 배후를 점했다. 깜짝 놀란 악마 백작이 소리를 지르기도 전에, 유중혁은 스킬을 발동했다.
[전용 스킬, ‘음파 차단 Lv.10’을 발동합니다!]
순식간에 목덜미를 대롱대롱 잡힌 악마 백작이 발버둥쳤다.
그러거나 말거나, 유중혁은 입을 열었다.
“지금부터 내 질문에 순순히 대답하면 살려주지.”
당연히 살려줄 생각 따윈 없었지만, 그래도 그렇게 말했다.
경험상 이쪽이 더 효과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황한 악마 백작이 소리쳤다.
“무, 무슨, 네놈은······!”
퍼억!
“끄억! 이, 이런 짓을······.”
퍼억! 퍼억!
무차별로 쏟아진 폭행에 악마 백작의 몸은 순식간에 걸레짝처럼 변했다.
검은색 피를 한다발이나 토해내고, 온갖 욕을 한사발로 토해내던 악마백작은 그로부터 5분도 채 지나지 않아 비굴한 목소리를 냈다.
“무, 물어보십시오! 뭐든 물어보십시오!”
그제야 유중혁은 입을 열었다.
“김독자는······.”
거기까지 말하던 유중혁이 퍼뜩 뭔가를 떠올렸다.
그가 아는 ‘김독자’라면, 당연하게도 자신의 이름을 밝히고 이곳에서 활동하지 않았을 것이다.
유중혁은 질문을 바꿨다.
“‘유중혁’은 어디 있지?”
*
[누군가가 ‘유중혁 선언’을 하였습니다!]
[누군가가 ‘유중혁 선언’을 하였습니다!]
수많은 공민들이 ‘유중혁’의 이름을 외치는 정경. 마치 공단 전체가 ‘유중혁’이 된 것 같았다.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그 무수한 ‘유중혁’들에게 휩쓸려 [공장]을 향해 진격하고 있었다.
“나도 유중혁이다!”
“내가 진짜 유중혁이다!”
물론 나도 그 사이에 끼어 한 손을 거들고 있었다.
“유중혁이다! 와아······.”
유중혁 자식이 이 광경을 봤어야 하는데······.
그놈이 있었다면 대체 무슨 표정을 지을지 궁금하다.
[73번째 마계에 ‘혁명가 유중혁’의 이름이 널리 울려 퍼집니다.]
<스타 스트림>은 곧 설화의 세계.
이곳에서 이렇게나 많은 공민들이 유중혁의 이름을 호명했으니, 녀석은 분명 상당한 수준의 설화를 획득했을 것이다.
부러운 자식,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잘 받아 처먹어라······.
이상한 메시지가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당신의 유명세가 상승합니다.]
응?
[73번째 마계에서 ‘김독자’의 명성이 급격하게 높아지고 있습니다.]
메시지는 계속해서 들려왔다.
······이건 대체 뭔 상황이지?
난 이름을 밝힌 적이 없는데?
[이, 이 망할 놈들이······!]
한편, 세이스비츠 공작은 밀물처럼 덤벼드는 공민들의 파도에 당황하고 있었다.
[마지막 처형관이 사망했습니다.]
[세이스비츠 공작의 ‘지배자 효과’가 해제됩니다.]
그리고 마침내, 장하영이 임무를 완수했다.
[공단의 모든 처형관이 사망했습니다.]
[공단의 모든 존재가 ‘지배자’에 대한 ‘처형권’을 손에 넣습니다.]
[지금부터 한 시간 동안, ‘혁명의 밤’이 시작됩니다!]
혁명의 밤.
태어나서 처음으로 찾아온 그 메시지에, 공민들은 흥분했다.
공작에 대한 ‘처형권’.
그들의 손으로, 직접 지배자를 처단할 수 있는 힘.
“우와아아아! 가자아아아아!”
마치 파도가 단단한 암초에 가서 부딪치듯 공민들은 [공장]으로 몰려갔다. 공민가가 피로 물들고, 무수한 공민들이 [공장]에 짓밟히는 와중에도, 오히려 공민들은 의지를 더욱 불태웠다.
“다 부숴버려!”
공민들은 생각하고 있었다.
저 커다란 고철덩이만 부수면 된다.
저 철벽만 넘어서면, 공작의 연약한 육편을 갈기갈기 찢을 수 있다.
「하지만 공민들은 알지 못했다. 이 혁명의 가장 큰 고비는 바로 이 지점이라는 사실을.」
쿠드드드드드!
거대한 연마기가 회전을 시작하자, 공민들은 순식간에 썰려나가기 시작했다.
“우와아아아악!”
“물러서!”
‘혁명가 시나리오’에서 ‘혁명의 밤’은 공작이 가장 취약한 시간이다. 공단의 모든 공민들이 공작을 죽일 수 있는 힘을 얻게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조건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공작이 [공장] 밖으로 나와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제기랄! 너무 단단해!”
아무리 내리쳐도 부서지지 않는 [공장]의 외피.
공작이 웃었다.
[어리석은 것들.]
한때는 그 역시 ‘혁명가’였다. 그러니 이날을 생각하지 않았을 턱이 없었다. [혁명의 밤]은 공작에게 있어 가장 위험한 시간.
하지만, [공장] 밖으로 나가지만 않으면 공작은 절대적으로 안전하다.
[이 ‘공장’을 무너뜨릴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그래서 공작은 자신의 [공장]을 세상에서 가장 단단한 형태로 제작했다.
명계의 거신병을 토대로 만들어진 [공장].
당연하게도, 공민들의 힘으로 그 무시무시한 설화병기를 부수는 것은 불가능했다.
퍼거거거걱!
공작은 움직임에는 자비가 없었다.
연삭기와 연마기가 반복해서 움직일 때마다 공민들의 몸이 육편으로 갈려 나갔다. 그럴 때마다 하늘에서는 간접 메시지들이 비처럼 쏟아졌다.
[성좌, ‘뱀 머리 졸부’가 피의 전장에 취합니다!]
[성좌, ‘손톱을 먹는 쥐’가 인간 학살에 흥겨워합니다.]
쏟아지는 코인 메시지와 함께, 결국 공민들의 대열이 망가지고 있었다.
“아아아악!”
부술 수 없는 단단한 외벽 앞에 혁명은 속절없이 무너지고 있었다.
“아일렌. 다 됐어?”
“임시 조치는 끝났어요. 하지만 전투는······.”
“됐어. 한 번만 움직일 수 있으면 돼.”
나는 대충 대답한 후 자리에 우뚝 섰다.
아마 설화 수선으로 때울 수 있는 것도 이번이 한계겠지.
[어디에 숨어 있느냐! 또 그 잘난 혁명을 읊어 보아라!]
공작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앞으로 나아갔다.
[부러지지 않는 신념]을 굳게 쥐고,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갔다.
츠츠츠츠츳!
과도한 개연성을 사용한 공장의 외피에서 연이어 스파크가 터지고 있었다. 저 [공장]은 명백히 시나리오 바깥의 힘이다. 이 불공정함을 감당하고 있는 것은 아마 놈을 후원하는 성좌들이겠지.
「김독자는 생각했다. 놈이 시나리오 바깥의 힘으로 공민들을 깔아 뭉갠다면, 이쪽에서도 똑같이 해주는 수밖에 없다.」
“비유.”
허공에 몸을 숨기고 있던 비유가 “바앗”하고 모습을 드러내자, 나는 곧장 말을 이었다.
“명계까지 채널의 대역폭을 늘려줘.”
지금의 비유에겐 힘든 일일지 모른다.
하지만, 이렇게 하지 않으면 이 방법은 쓸 수 없다.
“할 수 있겠어?”
비유는 힘겨워보였지만, 애써 고개를 끄덕였다.
[바앗.]
이건 정말로 최후의 수단이었다.
나는 언젠가, 두 번째로 명계에 갔던 기억을 떠올렸다.
―이게 거신병을 만드는 핵심이야. 알겠지?
―오호, 이런 식이었다 이거지······ 이야, 진짜 고마워!
―뭐, 정 고마우면 끝나고 제작자란에 내 이름도 넣어 주던가.
지금까지는 쭉 쓰지 않고 있었다.
왜냐하면 이 설화병기는, 그야말로 엄청난 개연성을 소모하니까.
그저 소환하는 것만으로도 개연성 후폭풍을 일으키는 병기.
때문에 이 병기는 성좌들의 대전쟁인 <기간토마키아>급의 시나리오가 아니면 무지막지한 개연성의 제약을 받는다. 애초에 나 혼자서는 소환조차 불가능하니, 최강의 칼을 가지고 있어도 뽑지조차 못하는 셈이었다.
“긴고아의 죄수.”
하지만 나 혼자가 아니라면, 이야기는 좀 달라진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당신을 바라봅니다.]
“도와주십시오.”
물론 제천대성이 도와주더라도 고작해야 ‘소환’이 전부겠지.
하지만 소환만 가능하더라도, 이 승부는 내가 이길 수 있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그것은 시나리오의 형평성에 어긋난다고 말합니다.]
“나는 이 시나리오를 바꾸고 싶습니다.”
나는 말을 멈추고 스파크가 튀는 [공장] 쪽을 흘끗보았다.
‘처형권’이라는 시나리오의 버프를 받았음에도, 공민들은 공작에게 손 하나 대지 못하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앞으로 몇십 분도 지나지 않아 [공단]의 모든 인구는 절멸할 것이다.
“그리고 형평성이라면, 이미 오래전에 어긋난 것 아닙니까?”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귀찮아합니다.]
젠장, 조금 친해졌나 싶었더니 역시나인가.
본래 제천대성은 이런 일에 쉽게 엮이는 타입이 아니다. 이렇듯 내 말을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어쩌면 기적일지 모른다.
“정말 이대로 저놈들을 그냥 두실 겁니까? 개연성을 먼저 침탈한 건 저쪽입니다.”
[성좌, ‘뱀 머리 졸부’가 난장판에 즐거워합니다.]
“이곳에는 녀석들을 제지할 도깨비도 없단 말입니다.”
제천대성은 말이 없었다.
생각해 보면 ‘왕이 없는 세계의 왕’ 때도, 그는 나에게 개연성을 빌려주지 않았다.
결국 나는 금기를 범해야만 했다.
“혹시 얼마 전에 이상한 메시지를 받은 적 없습니까?”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그게 무슨 소리냐고 묻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모르겠지만, 빠진 머리털에 대한―”
쿠구구궁, 하늘에서 우레의 기운이 느껴졌다.
제천대성이 분노하고 있었다.
나는 그 분노에 화답하듯 외쳤다.
“맞습니다. 그게 바로 저놈들입니다.”
[성좌, ‘뱀 머리 졸부’가 경악하며 당신을 바라봅니다.]
[성좌, ‘손톱을 먹는 쥐’가 예기치 못한 상황에 자신의 손톱을 뜯습니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격노합니다.]
순간, 주머니 속에 넣어뒀던 [제천대성의 머리털]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나는 그제야 한숨을 돌리며 답했다.
“······잘 쓰겠습니다.”
머리털을 손에 꾹 쥐는 순간, 응축된 설화의 힘이 느껴졌다.
고작해야 머리털 한 올에 이만한 에너지가 내재되어 있다.
제천대성의 진신은 대체 어느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을지, 지금의 나로서는 헤아리기조차 어려웠다.
여기서부터가 제일 문제인데······.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하늘을 보며 시동어(始動語)를 외웠다.
“······자, 잠자는 거신을 베기 위해 벼려진 검이여.”
창피한 첫 마디를 읊조리는 순간, 하늘의 색이 변하기 시작했다. 구름들이 이상 징후를 보였고, 새카맣고 불길한 아우라가 밤하늘을 가득 채웠다.
[명계의 성좌들이 당신의 존재를 눈치챘습니다!]
그래, 이건 들킬 수밖에 없겠지.
들키지 않는 게 이상하다.
하지만 들켜도, 어쩔 수 없다.
페르세포네와 하데스가 나를 예쁘게 봐주기를 바라는 수밖에.
“지금, 이곳에 강림하라.”
단출한 맺음과 함께, 변색된 하늘의 절반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쩌저저저저적!
그리고 그 갈라진 틈새로, 두 개의 거대한 눈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거신병 플루토’가 당신의 부름에 응답합니다.]
츠츠츠츠츠츳!
가공할 개연성의 스파크가 내 몸을 뒤흔들었다. 전기 뱀장어라도 된 것마냥 온몸이 저려왔고, 두 눈에서 흘러내린 피로 시야는 붉게 물들었다. 비명을 지르고 싶었지만, 비명조차 허락하지 않는 고통이었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당신의 개연성을 함께 부담합니다.]
이미 넝마가 된 화신체가 당장 영멸하지 않는 것은, 제천대성의 가호가 있기 때문이었다.
[인근 마계의 마왕들이 가공할 개연성의 폭풍에 깜짝 놀랍니다!]
[극소수의 성좌들이 시나리오의 이상 징후에 경악합니다!]
이미 새카만 밤하늘 위에, 또 다른 거대한 그림자가 밀려오고 있었다.
그것을 눈치 챈 몇몇 공민들이 하늘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커지는 눈동자.
“재, 재앙이다······.”
뒤늦게 뭔가를 눈치 챈 공작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쿠구구구구구!
갈라진 하늘의 틈새로 검은색 기체가 드러나고 있었다. 블랙 드래곤의 비늘처럼 섬뜩한 광택을 자랑하는 외피. 그 모습을 확인한 공작이 경악성을 터트렸다.
[저, 저건······ 어, 어떻게······!]
놀랄 뒤집어질 법도 하다.
[아직 미완성이라고 들었는데!]
한때는 그랬겠지.
정확히는, 내가 명계에 방문하기 전까지는 그랬을 것이다.
「명왕의 비밀병기, ‘거신병 플루토’.」
마침내, 30미터에 달하는 체고를 가진 거대한 기갑병기가 하늘에서 낙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