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6화
216화
“······왜 말이 없어?”
분명, 세상에는 좋은 성좌들도 있을 것이다.
내가 ‘멸살법’을 통해 보고, 읽어온 성좌들.
혹은 ‘멸살법’이 현실이 된 뒤, 내가 조금이지만 재평가를 하게 된 성좌들.
하지만 녀석들이 어떻게 보인다 한들, 그들의 본질이 ‘성좌’라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내 표정이 어떻게 보였는지, 장하영이 걱정스러운 눈을 했다.
“······혹시 내가 뭐 잘못했나?”
“아니, 그런 건 아냐.”
“그럼 무슨 고민이라도 있어?”
어쩐지 말하기가 껄끄러워서 가볍게 고개를 내젓는데, 장하영이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난 얘기 듣는 거 좋아해.”
어딘가 익숙한 그 말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나는 새삼 장하영의 얼굴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새하얀 피부에 오똑한 코. 부드러운 선을 그리는 눈썹에 맑고 깊은 눈동자······.
희미한 죄책감 같은 것이 가슴 속에 조금씩 응어리졌다.
「이야기를 좋아하는 애가 좋겠어요.」
「유중혁은 잘 나가는 놈이니까, 얘는 적당히 현실의 쓴맛을 본 애로······.」
「중혁이가 사람 말 안 듣잖아요. 그러니까 얘는 남 얘기 잘 들어주는 녀석이면 어떨까요.」
내가 끄적였던 모든 댓글의 결과가 지금 내 눈앞에 있었다.
세상을 볼 수 있는 눈과 숨을 쉬는 코, 그리고 이야기를 들을 귀를 가지고.
죄책감 때문이었을까, 나도 모르게 첫 마디가 나왔다.
“나쁘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있었어.”
“사람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대체로는 질이 나쁜 사람들이었어. 남을 괴롭히거나 험담하는 놈도 있고, 심지어는 정말 끔찍한 짓거리를 저지르는 녀석들도 있었지.”
가만히 이야길 듣던 장하영이 내게 물었다.
“말하는 거 보니 그 사람들 어지간히 싫어 했나봐?”
“······그렇다고 생각했는데, 잘 모르겠어.”
무심코, 진심이 나왔는지도 모르겠다.
“생각보다 좋은 녀석도 있었고, 알아왔던 것과는 다르게 행동하는 사람도 있었어.”
그동안 읽어온 무수한 ‘멸살법’의 텍스트들이, 무심히 머릿속을 흘러갔다.
“어떤 게 녀석들의 진짜인지. 어느 쪽이 현실이고 어디까지가 가짜인지. 잘 알 수가 없게 되었어.”
내 불확실한 표현에도 장하영은 묵묵히 내 말을 들어주었다. 그리고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뭔갈 곰곰이 생각하던 장하영이 나를 향해 물었다.
“정확히 무슨 고민인지 이해하긴 어렵지만······ 그러니까 너 지금 그 사람들에 대해 더 알고 싶다는 거지?”
“뭐?”
“나쁜 사람들 같았는데 실은 좋은 사람도 있을지 모른다. 뭐 그런 기대를 하게 됐다는 거잖아. 아냐?”
그게 그렇게 낭만적으로 들렸나?
반발심이 일었지만 생각해 보니 그런 문제일 수도 있겠다는 느낌이 들었다.
장하영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럴 땐 역시 이야기를 해보는 수밖에 없어. 그 사람들이랑 말해봐.”
“이야기 해봐야 소용없을 거야.”
“왜?”
“그냥······.”
잘 설명할 수가 없었다. 그것은 잘 표현할 수 없는 무력감이었다.
하지만 사람은 가장 무력해졌을 때, 가장 진실해지기도 한다.
“나는 모두에게 거대한 벽이 있다고 생각하니까.”
[‘제4의 벽’이 당신을 바라봅니다.]
“너랑 나랑도 이렇게 말하고 있지만, 실은 소통하는 건 아닐 거야. 세상에 ‘소통’ 같은 건 없는 거라고, 나는 그렇게 생각하거든.”
[‘정체불명의 벽’이 ‘제4의 벽’을 흘깃 바라봅니다.]
「김독자는 생각했다. 어쩌면 현실이든 소설이든, 모두 마찬가지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오랫동안 읽어왔어도 여전히 알지 못하는 것이라면.」
「아마, 영영 모르는 것은 아닐까.」
착각일까, 일순간 주변의 사위가 일그러지며 모든 것이 활자로 변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착시는 장하영의 말과 함께 부스러졌다.
“나랑 타인은 다른 존재인데, 당연히 그런 게 될 리가 없지.”
“뭐?”
“누구에게나 벽이 있고, 소통은 불가능하고······ 뻔한 얘기잖아.”
저 친화력 좋은 장하영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줄이야. 조금 의외였다.
그런데 장하영의 말이 이어졌다.
“그래도 이야기는 해봐야지. 거대한 벽이 있어도, 어쨌든 그 벽 너머엔 상대방이 있다는 거잖아.”
“······벽이 있는데 무슨 얘기를 해?”
“벽에다 쓰면 돼.”
그 뻔뻔한 말에, 나는 멍하니 입을 벌렸다.
“똥을 칠하든 오줌을 갈기든, 벽에다 뭔가를 남겨. 상대방이 알아볼 수 있게.”
“뭐하러 그런 짓을 해? 어차피 상대방은 벽 너머에······.”
“그래도 남겨봐.”
“그게 무슨 의미가 있어?”
“딱히 의미는 없어.”
“그럼?”
“그냥 네가 남겼다는 사실이 중요한 거야.”
“어차피 상대방은 모를 텐데?”
“적어도 벽은 바뀌었잖아.”
나는 잠시 말을 잃었다. 장하영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언젠가 누군가 읽을지도 몰라.”
나는 장하영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내 욕심으로 이 세상에 태어난 장하영은, 나로 인해 태어났어도 나와는 관계없는 삶을 살고 있다.
그리고 어쩌면, 내가 생각한 것보다도 더 좋은 사람이 되었다.
나는 그 사실이 어쩐지 씁쓸해서 웃었다.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응?”
“너 성좌들한테도 이런 식으로 상담해줬냐?”
“어, 그게······.”
머뭇거리는 투를 보아하니, 정답이었던 모양이다.
그런 성좌들의 마음이 조금은 이해가 갔다.
이 우주에서 가장 지고하지만, 동시에 외로운 존재.
이야기를 보는 것만큼이나, 자신이 할 말도 많은 작자들.
장하영은 아마 내게 했듯이 그들의 말도 들어 주었을 것이다.
[성좌, ‘뱀 머리 졸부’가 건방진 화신을 찾아 두리번거립니다!]
나와 장하영이 동시에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비유의 채널 교란 덕분에 ‘뱀 머리 졸부’는 당분간 내가 있는 곳을 찾아내지 못하고 있었다. 물론 이것도 그리 오래가지는 않겠지만.
장하영이 불안한 목소리로 물었다.
“······저 자식 계속 여기 머무를 생각일까?”
“아마도.”
채널에서 망신을 당했으니, 녀석은 단단히 벼르고 있을 것이다.
잠시 고민하던 나는 결국 결정을 내렸다.
장하영의 말이 맞다. 벽이 있으면, 그 벽에 뭔가를 써야 한다.
그것이 원래 쓰여 있던 뭔가를 바꾸더라도······.
이제, 그냥 읽기만 하는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장하영, 혹시 이 녀석한테 좀 연락해줄 수 있어?”
생각해 보면 지금까지도 줄곧 그렇게 행동해왔다.
내가 원하는 결말을 보기 위해, 나는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왔으니까.
따지고 보면 나는 이미 뭔가를 신나게 휘갈기고 있었던 셈이다.
그걸 읽게 될게 누구인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누군데?”
이 성좌가 내 제안에 응해줄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이제 채널도 열렸겠다······ 녀석만 도와준다면 남은 ‘혁명가 시나리오’는 무난히 끝나게 될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허공에서 메시지가 들려왔다.
[‘다섯 번째 밤’이 찾아왔습니다.]
불길한 피리 소리. 부지 중에 [공단] 쪽을 돌아보았다. 피어오르는 화마(火魔) 속에서, 사람들이 비명을 질러대고 있었다. 나는 주변에 흩어져 있던 아일렌과 마르크를 향해 굳어진 얼굴로 말했다.
“공민들 전부 모이라고 해.”
*
공작은 궁지에 몰렸다.
네 번째 [밤]이 그냥 넘어간 것만 봐도, 그것은 확실했다.
[수거 노예]들을 납치해 공장의 가동 전력을 차단했으니, 제아무리 공작이라도 간이 배 밖으로 나오지 않은 이상 당분간은 경거망동할 수 없었다.
그런데 그런 공작이, 제 발로 귀족들을 이끌고 이 [밤]으로 나왔다.
「김독자는 생각했다. 대체 무슨 속셈이지?」
새로운 성좌들이라는 변수가 개입한 상황이다 보니, 마음이 조금 복잡했다. 게다가 아직 이쪽 편이 되어줄 성좌들도 부르지 못한 상황.
「됐어. 좋게 생각하자. 차라리 기회일 수도 있다.」
그래, 약한 마음 가질 필요 없다.
나도 이제 오롯한 성좌니까.
지금까지도 잘 해냈으니 아무 문제 없을 것이다.
“장하영! 처형관들을 맡아! 다른 귀족들은 절대로 상대하지 말고!”
“알았어!”
나는 [바람의 길]로 허공을 내달려 가장 큰 불길이 타오르는 거리에 도달했다. 얼마나 달렸을까. 곧 부서진 건물의 첨탑 위에 서 있는 악마종 하나와 마주했다.
“네가 혁명가인가?”
붉은 화염에 휩싸인 긴 머리의 악마종.
녀석의 전신에서 피어오르는 열기에 얼굴이 따가웠다. 따끔거리는 폭염의 기운. 노랗게 뭉그러지는 불길의 형태를 보니, 이 힘이 뭔지 알 것 같았다. 73번째 마계에 이런 종류의 설화를 사용하는 녀석은 하나뿐이다.
“후작 옴보로스.”
73번째 마계에서는 공작들 다음으로 강력한 악마종.
내가 성좌가 되기 전이었다면 부딪치기를 망설였을 녀석이었다.
그런데 옴보로스의 표정이 묘했다.
“옴보로스가 아니라 옴브로스다.”
아하, 이름을 틀렸던 모양이군.
하지만 내가 아무리 김독자라도 엑스트라들 이름까지 다 외우고 있진 않다고.
자존심이 상했는지 옴보로스는 계속해서 중얼거렸다.
“나를 알면서도 도망가지 않다니······ 명이 긴 녀석일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운이 나쁜 모양이군.”
“질 것 같으면 도망갔겠지. 옴보로스.”
“옴브로스라고 했······!”
나는 대답 대신 체내의 마력을 끌어 올렸다.
지난번에는 성좌의 격을 이용해서 싸웠다. 하지만 그때는 만만한 녀석들이었고, 옴보로스 정도 되는 놈이라면 격을 발출하는 정도로는 틈을 만들 수 없었다.
그러니, 이번에는 전면전이다.
[5번 책갈피, ‘키리오스 로드그라임’이 활성화됩니다!]
[전용 스킬, ‘소형화 Lv.3’를 발동합니다!]
[전용 스킬, ‘전인화(電人化) Lv.11(+1)’가 활성화되었습니다.]
콰아아앙!
옴보로스가 말아쥔 주먹에서 노란 폭염이 터졌다.
녀석의 주특기 설화인 폭렬환(爆裂煥)이었다. 73번째 마계에서는 손에 꼽는 폭발계 성흔. 위력은 강한 편이지만, 피하는 게 그리 어렵지만은 않았다.
폭발이 범위가 큰 만큼 타격 면적이 성긴 공격이었기 때문이다.
“쥐새끼 같은······!”
[성좌, ‘손톱을 먹는 쥐’가 악마종 옴브로스의 발언을 혐오합니다.]
단순한 폭렬환으론 작아진 나를 상대하는 게 어렵다고 느꼈는지, 옴보로스는 작전을 바꾸었다. 녀석의 양손에서 피어오른 폭염이 급격하게 수축하더니, 이내 작은 공처럼 변화하기 시작했다.
“죽어라!”
응축된 폭렬환이 녀석의 양손에서 더욱 강렬하게 타올랐다. 아무래도 면적을 줄인 후 힘으로 나를 밀어붙일 셈인가 본데······.
좋은 작전이지만, 이번엔 상대가 틀렸다.
그런 건 평범한 화신한테 썼어야지.
콰아아아아!
다가오는 녀석의 폭렬환을 보며, 나는 망설임 없이 내 주먹을 내뻗었다.
마력을 한껏 쏟아부은 일격에, 밀려오던 폭렬환의 중심부가 깊게 뚫려나갔다.
순간적으로 귀가 윙윙거렸고, 폭발에 휘말린 파편들이 허공으로 비산하며 장관을 이루었다.
콰콰콰콰콰!
주변을 덮친 화마가 모조리 쓸려나가며 불길이 꺼지고 있었다. 사방을 가득 메운 것은 오직 백청의 힘이 담긴 전격뿐. 으어어어― 하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시야가 하얗게 깜빡였다.
[성좌, ‘뱀 머리 졸부’가 당신의 힘에 경악합니다.]
백청의 전격이 휩쓸고 간 자리에 옴보로스는 보이지 않았다.
멀리 날아가 버린 것일 수도 있고······ 어쩌면 죽었을 수도 있겠다.
“맙소사······.”
무참하게 파괴된 공단의 정경.
내 힘을 확인한 몇몇 공민들이 질린 듯 무릎을 꿇고 있었다.
이쯤 되니 나도 지금의 내가 어느 정도로 싸울 수 있는지 정확히 감이 오질 않았다. 시나리오에 제대로 복귀만 하면, 어지간한 성좌들이랑은 일대일로 맞짱 떠도 이길 수 있는 거 아닐까?
[화신체가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의 힘을 사용하였습니다.]
[당신의 화신체가 상당 부분 손상되었습니다!]
······젠장, 또 시작이군.
그래도 괜찮다. 너덜너덜한 화신체로 지내는 것도 곧 끝날 테니까.
“우와아아아아!”
상황에 고무된 것일까.
하나둘 일어난 주변의 공민들이 일제히 함성을 질렀다.
“혁명가! 혁명가!”
[채널에 새로운 성좌들이 입장합니다!]
성좌들의 숫자가 늘어나는 소리.
비형과 채널을 키울 때와는 또 다른 기분이었다.
아무래도, 이건 ‘내 채널’이라는 생각 때문이겠지.
나는 전열의 선두로 나가 다가오는 귀족들을 마구잡이로 베어 나갔다.
“와아아아아!”
[공장]도 없이 기어 나오다니, 공작은 제 발로 이 시나리오의 끝을 자초한 셈이었다. 화난 공민들의 파도 속에 귀족들의 세력은 조금씩 갈려 나갔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마침내, [공장]의 정문이 보이기 시작했다.
“혁명이 코앞이다! 조금만 더 가면······!”
누군가가 그렇게 말했다.
그런데 다음 순간, 땅속 깊은 곳에서 지진이 일어났다.
쿠구구구.
당황한 공민들이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눈앞에서 뭔가가 일어서는 것이 보였다. 늙은 짐승처럼 고요히 잠들어 있던, 거대한 건물이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부우우우우우!
증기 기관을 연상시키는 엔진 소리. 하늘을 까맣게 메우는 매연과, 귀청을 찢는 경적.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공장]이 가동됐다고?
어떻게?
그러나 생각할 여유는 없었다.
채 대비할 사이도 없이, 거대한 주먹 같은 것이 나를 후려쳤던 것이다.
퍼어어억! 콰아아아앙!
나는 건물 몇 개를 반파시키며 무너진 철골 속에 내리깔렸다.
순간적으로 의식이 끊어졌다가 돌아왔다.
[화신체의 설화가 심각하게 손상되었습니다!]
[새로운 설화를 섭취하거나, 메인 시나리오에 진입하세요!]
화신체에서 울컥 피가 쏟아져 나왔고, 전신의 설화가 불균형하게 흔들렸다.
제기랄, 머릿속이 너무 복잡해서 방심한 모양이었다.
이런 실책을 하다니······.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가질 않는다.
대체 어떻게 [공장]이 가동된 거지?
[성좌, ‘뱀 머리 졸부’가 당신의 꼴을 보며 즐거워합니다.]
[성좌, ‘손톱을 먹는 쥐’가 당신의 시련을 즐깁니다.]
[극소수의 성좌들이 당신이 더욱 괴로운 고통 속에 놓이길 바랍니다.]
빌어먹을.
기껏 채널이 열렸는데 저 녀석들 중 내 편은 하나도 없다니.
이를 갈며 몸을 일으키는 순간, 익숙한 이름이 들려왔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머리털을 쥔 채 당신을 유심히 바라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