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화

203화 [스파이]······. 언젠가 ‘멸살법’에서 [스파이]를 설명한 문구를 읽은 적이 있다. 「‘혁명가 게임’의 모든 포지션은 [혁명가] 또는 [독재자] 양팀에 속한다. 그런데 딱 하나, 편이 정해지지 않은 포지션이 존재하니 그것이 바로 [스파이]다.」 이 ‘혁명가 게임’에서 가장 위험한 포지션이자, 가장 비겁한 포지션. 때문에 ‘멸살법’에서는 [스파이]를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스파이]를 손에 넣는 팀이, 게임에서 승리할 수 있다.」 정보가 최우선시 되는 ‘혁명가 게임’에서, [스파이]의 위상은 대단하다. 왜냐하면 [스파이]의 능력으로 원하는 이의 ‘포지션 정보’를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루 열 명의 제한이 있기는 했지만, 그것만으로도 [스파이]는 판 전체를 흔들 힘이 있었다. 그런데 바로 지금, 내 눈앞에 자신이 [스파이]라고 주장하는 사내가 나타난 것이다. “그쪽이 ‘유중혁’인가?” 나타난 사내의 외형은 마계와는 썩 어울리지 않았다. 어딘가 어중간한 느낌이 드는 외모랄까. 아니, 정확히는······ 뭐지? 왜 이렇게 기시감이 드는 얼굴이지? ‘멸살법’에서 등장했던 외양은 아닌 것 같은데? 나는 일단 사내를 향해 대답했다. “맞아. 내가 유중혁이다.” 그런데 사내의 반응이 좀 미묘했다. “······흐음. 그런가.” 그 순간, 나는 뭔가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런데 내 이름을 용케 알았군.” 보통은 ‘당신이 혁명가인가’라고 물었어야 했다. 그런데 저자는 처음부터 내 이름이 ‘유중혁’인지를 먼저 확인했다. 사내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하하, 유명한 이름이잖은가.” 말하는 것과 달리, 사내의 눈은 집요하게 내 외모를 훑고 있었다. 마치 자신이 알고 있는 어떤 것과 대조하는 듯한 시선. 그것으로 나는 확신했다. 「유중혁을 알고 있는 녀석이다.」 빠르게 ‘멸살법’의 원작을 떠올렸으나, 마땅히 짐작 가는 대상은 없었다. 애초에 유중혁은 회귀자고, 공식적으로는 마계에 진출하기 전이었다. 그러니 이곳에 유중혁을 제대로 알고 있는 녀석이 있을 리 없었다. 관찰력 좋은 이라면 ‘지구 시나리오’를 보고 유중혁을 알아봤겠지만······ 그럴 가능성은 사실 크지 않다. 내 미덥잖은 반응 때문인지 장하영과 아일렌, 그리고 마르크는 긴장한 눈으로 나와 사내를 번갈아 보고 있었다. 아마 그들도 본능적으로 뭔가를 느낀 것일 테지. 나는 일단 상대의 정체를 알아보기로 했다. “이름이 뭐지?” “아우렐리우스라고 하네.” “······아우렐리우스?” 나는 잠깐 멈칫했다. 그 이름을 어디선가 본 기억이 났기 때문이다. ‘멸살법’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 “특이한 이름이군.” “그렇게들 말하지.” “그래서 당신이 [스파이]라고?” “그렇다네.” [전용 스킬, ‘거짓 간파 Lv.3’을 발동합니다!] [‘혁명가 시나리오’ 지역에서는 ‘거짓 간파’ 스킬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 ······역시, 이 스킬은 안 통하는군. 예상은 했다. 111회차의 유중혁도 이 스킬이 안 먹힌다는 걸 알고 좌절하는 장면이 있었으니까. 그래도 혹시 몰라서 써봤는데, 역시나인 모양이다. 하긴, [거짓 간파]의 사용이 자유롭다면 이 시나리오의 난이도는 무척 쉬웠겠지. 하지만 나한테는 [거짓 간파]만 있는 게 아니다. [전용 스킬, ‘등장인물 일람’을 발동합니다!] 물론 [등장인물 일람]을 쓴다고 해도 상대의 명확한 포지션은 분별할 수 없었다. 하지만, 적어도 상대가 ‘특수한 포지션’인지 아닌지 정도는 알아낼 수 있었다. [해당 인물의 정보는 ‘등장인물 일람’으로 열람할 수 없습니다.] [‘등장인물 일람’에 등록되어 있지 않은 인물입니다.] ······뭐? 나는 순간 당황해서 입을 다물었다. [해당 인물에 대한 정보가 업데이트 중입니다.] [다음 업데이트에 해당 인물의 인물 정보가 추가됩니다.] 처음 들어보는 메시지는 아니었지만, 여기서 들을 거라곤 생각지도 못한 메시지였다. 내 상황을 모르는 사내가 물었다. “음? 왜 그러지?” [등장인물 일람]으로도 읽을 수 없는 인물. 이 자는 ‘멸살법’의 원작에 기여하지 않았던 사내라는 뜻이다. 즉, 내가 만든 변수 때문에 존재하는 인물이라는 것. 하지만 그럴 수가 있나? 여긴 지구도 아니고 마계인데······. 내가 계속 뜸을 들이고 있자 마르크가 물었다. “우리 편이 되러 온 거요?”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겠지.” “그게 무슨 말이요? “난 자네들을 살리러 왔네. 이대로라면 ‘혁명’이 망할 게 불 보듯 뻔해서 말이지.” “······아직 밥도 안 지었는데 재부터 뿌리러 왔소?” “농담이 아닐세. 자네들에 대한 여론이 좋지 않아. 밖에는 나가 봤는지 모르겠군.” 확실히 아까부터 바깥이 시끄러웠다. 의원실의 문을 두들기는 소리도 들렸다. 우리는 잠시 서로를 돌아본 후 곧장 밖으로 나갔다. 나가자마자 사람들이 웅성이는 목소리가 들렸다. “혁명가다!” 누군가의 외침과 함께, 무수한 시선들이 동시에 내게 꽂혔다. 몰려든 일백에 가까운 군중들. 개중 몇몇이 과장된 목소리로 나를 향해 소리쳤다. “네놈 때문이야! 너만 아니었더라도!” “내 아내가 다쳤다고!” 심지어 누군가는 돌을 던지기도 했다. 솔직히 나는 조금 놀랐다. 피해가 있기는 했지만, 이 정도로 과격하게 나올 정도는 아니었다. 목소리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차라리 [밤]이 사흘에 한 번씩만 올 때가 나았다!” 본래 ‘혁명가 시나리오’가 발동하기 전에 [밤]은 사흘에 한 번씩 오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런데 이틀 연속으로 [밤]이 발동했다. 그러니 사람들의 두려움도 한층 가중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사람들을 향해, 장하영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이런 미친······ 뭔 개소리야 미친놈들아! 그렇게 한심하게 굴 거야? 사흘에 한 명씩 뒈져 가면서 생을 연명하는 건 괜찮다는 거냐고!” 몇몇 사람들이 그 말을 듣고 찔끔 물러섰다. 장하영이 계속해서 외쳤다. “그딴 식으로 살 거면 차라리 [공단] 밖으로 꺼져!” “꼬, 꼬맹이 네놈이 뭘 안다고 큰 소리냐! 바깥이 어떤 곳인지 알기나 하는 거냐!” 겁에 질린 목소리들. 이곳의 모두는 잘 알고 있었다. 「[공민]들은 모두 [공단]의 시나리오에 소속된 존재들. 그들은 이곳을 빠져나갈 시 시나리오 지역 이탈로 [추방자 패널티]를 받게 된다.」 추방자 패널티. 그게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은 이 마계에 없다. 그러니, 사람들은 차라리 사흘에 한 번씩 죽음의 룰렛을 돌리는 편을 택하는 것이다. 그런데 ‘혁명가’가 등장한 이후 룰렛의 간격은 사흘에서 하루로 줄어들었다. “이, 이제 매일 이런 [밤]을 겪어야 하는 겁니까?” “이제 어떻게 할 거야! 앞으로 어쩔 거냐고!” 공포에 질린 목소리들. 아일렌을 비롯한 의원들이 움직임을 제지했지만, 군중들의 움직임은 더욱 거세어질 뿐이었다. 고개를 돌리자 아우렐리우스가 비열한 미소를 지은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알겠나?” 공민의 지지를 얻지 못하는 [혁명가]는 반드시 패배할 수밖에 없다. 나는 쓰게 웃었다. “당신은 [공작] 쪽의 인물이로군.” “그건 중요하지 않네. 중요한 건 자네의 선택이지.” “그래서, 뭘 원하는 거지?” “공작에게 항복하게. 그럼 자넬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살 수 있어. 어차피 이대로라면 혁명은 실패할 거야.” “나보고 희생하라는 건가?” “그런 말은 아닐세. 자네도 살 수 있는 방법을 찾아 주지.” “어떻게?” “자네가 정말 유중혁이라면, 내가 모시는 분께서 자네를 지켜줄 걸세.” “공작은 날 죽이려 할 텐데?” “내가 모시는 분은 세이스비츠 공작과는 비교도 안 되는 분이야.” 세이스비츠 공작과는 비교도 안 되는 존재라. 꽤 호기심이 생기는 제안이다. 내가 유중혁만 아니었더라면, 잠깐 생각해 봤을 수도 있겠다. “당연히 거절이다.” “그렇군. 자네는 후회하게 될 거야.” 다음 순간, 아우렐리우스의 신형은 곁에서 사라져 있었다. 그리고 군중들 속에서 누군가가 외쳤다. “저놈을 [공작]에게 바치자!” “[공작] 께서 저놈을 데려 온다면 ‘시나리오’를 끝내겠다고 말씀하셨다!” “더 이상 [밤]은 오지 않을 것이다!”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들불이 번지듯 일어나는 목소리들. 아주 흥미롭다. 실제로 나는 언젠가 이와 비슷한 광경을 본 적이 있었다. 아마, ‘미노 소프트’ 노사 협상 때였던 것 같다. “다음 [밤]이 오면 모든 게 끝장이다! 그 전에 혁명가를 잡아야 해!” 그 압도적인 선동력에 군중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겁에 질려 있던 사람들의 표정이 적의로 물들었고, 그것은 나에 대한 반발로 이어졌다. “누, 누가 저 놈 좀 잡아봐······!” 나는 그들을 잠시 바라보다가, 오히려 군중들의 앞으로 나섰다. 내가 두려움 없이 걸어나오자 당황한 것은 오히려 군중들이었다. 나와 닿지 않기 위해 물러선 사람들로 인해, 내 주변은 마치 모세의 파도처럼 갈라지고 있었다. “[처형관]이 그렇게 무서워?” 나는 한 걸음을 더 내딛으며 [부러지지 않는 신념]을 뽑았다. 그러자 [신념의 칼날]이 거센 진동을 일으키며 새하얀 백광을 터트렸다. 마력이 담긴 내 목소리가, 군중들 속에 찬물처럼 끼얹어졌다. 그 마력파에 놀란 군중들 몇이 엉덩방아를 찧었고, 어떤 사람들은 놀라 뒷걸음질을 쳤다. 그들을 향해 나는 고요한 목소리로 말했다. “다들 잊었나 본데, 지금은 [밤]이 아니야.” 나는 허공을 향해 검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골드 드래곤의 심장에서 토해진 [백청강기]의 마력 파동이 검은 하늘을 백청의 빛으로 물들이기 시작했다. 내 갑작스런 행동에 겁에 질린 사람들이 외쳤다. “무, 무슨······!” “놈이 사람을 죽이려 한다!” “우아아아악! 혁명가가 공민을 죽인다!” 놀란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고, 아일렌의 고함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나는 그 모든 소리를 등한시 하고 군중의 중심을 가르며 달렸다. 그리고, 군중들 중 하나를 향해 지체없이 칼을 휘둘렀다. “우선 하나.” 콰악! 방금 전 군중들 속에서 선동을 일삼던 사내 중의 하나였다. 무참히 심장이 꿰뚫린 사내는, 비명 하나 지르지 못하고 부릅 뜬 눈으로 나를 보더니 절명했다. [전용 스킬, ‘제4의 벽’이 활성화됩니다!] 손 끝에 깃드는 살행의 감각. 명백하게 누군가를 죽이기 위한 움직임은 간만이었다. ‘불살의 왕’을 유지하기 위해 오랫동안 절제해 온 버릇이 배었기 때문이겠지. 하지만 오늘만큼은, 나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다. 마치, 정말로 유중혁이 된 것처럼. “그리고 둘.” 철저한 사살을 위해 움직인 칼날이 피를 머금으며 귀기를 토했다. 그리고 두 번째 사내의 목이 날아갔다. 푸슈슈슛! 피가 거세게 튀기며 옷의 앞섶이 젖었고, 공포에 질린 사람들의 표정이 보였다. 나는 이어서 검을 움직여, 마지막 사내의 등에 검을 꽂았다. “마지막으로 셋.” 그렇게 순식간에 세 명을 죽인 후,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비명과 절규, 비탄에 빠진 공민가의 모두가 나를 보고 있었다. 공민들만이 아니었다. 아일렌도, 장하영도, 마르크도. 내가 무슨 짓을 벌인지 이해하지 못해 패닉에 빠진 얼굴들이었다. 혁명가가 평범한 [공민]을 죽였다. 어떤 말을 해도, 납득할 설명은 불가했다. 하지만, 애초에 내가 설명할 필요가 없는 일이었다. [‘혁명가 시나리오’에 변화가 발생했습니다!] 갑자기 들려온 메시지에 사람들이 동시에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이어서 연속으로 떠오르는 메시지. [누군가에 의해 ‘처형관’이 사망했습니다.] [누군가에 의해 ‘처형관’이 사망했습니다.] [누군가에 의해 ‘처형관’이 사망했습니다.] . . . [현재 남은 처형관의 숫자 : 7] 그 메시지를 확인한 사람들의 안색이 변하고 있었다. 죽은 사람의 숫자는 총 셋. 그리고, 죽은 처형관의 숫자도 셋. 떨리는 눈으로 나를 보던 사람들은, 이제 시체들에게서 비명을 지르며 물러서고 있었다. 마치, 끔찍한 것이라도 보듯이. “으, 으아아아악!” “처, 처형관? 여기에 숨어있었다고?” “애런이 처형관이었어! 맙소사!” [공민]들 중 [처형관]이 숨어있었다. 그 어마어마한 배신감 속에서, 군중들은 조금씩 깨어나고 있었다. 처형관이 죽었다. 무적인 줄 알았던 처형관이, 평범한 사람처럼 죽었다. 이제껏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했던 이야기. 그 이야기 앞에서, 사람들은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고무되고 있었다. 가장 먼저 자리에서 일어난 사람이 품 속에서 칼을 뽑았다. 그의 눈은, 이제껏 없던 분노로 이글거리고 있었다. “개, 개새끼들! 잘 죽었다 이 개새끼들아!” 방금 전까지 나를 위협하던 사람들이, 죽은 [처형관]의 시체를 짓밟고 난도질하기 시작했다. 아까의 몇 배나 되는 열기로 들끓는 군중들. 모두 [처형관]에게 뭔가를 잃은 사람들이었다. 비참한 복수였지만, 그것이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나는 그런 군중 사이를 유유히 가로질렀다. 그리고 슬그머니 꽁무니를 빼려는 사내의 목덜미를 붙잡았다. “커어억!” “사람들 선동하는 솜씨는 여전하시네요.” 달아나려던 사내가 내 손아귀 속에서 발버둥쳤다. “그간 무탈하셨습니까, 한명오 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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