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화
197화
유중혁의 ‘73번째 마왕’ 발언은 ‘멸살법’에서도 나오는 대사였다.
나는 조금 설레는 마음으로 공민회 의원들의 반응을 살폈다.
“저기, 그러니까······.”
이상한 일이었다.
‘멸살법’이었으면 분명 “오오!” 하고 다들 넘어갔어야 했는데······.
다들 내 생각만큼 드라마틱한 반응은 보이지 않았다.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73번째 마계의 마왕! 그런 말을 입으로 잘도 내뱉는 존재가 있다니, 아일렌을 비롯한 공민회 의원들은 큰 충격에 빠졌다.」
이 자식, 언제 깨어난 거야?
막상 필요할 땐 졸리다면서 가버리더니······.
「반면, 김독자는 왠지 강해진 듯한 느낌이 들었다.」
······어?
「그것은 그의 학창 시절부터 있던 버릇이었다. 종종 자존감이 떨어지거나 인생의 중요한 순간이 올 때면, 김독자는 그렇게 말하곤 했다. “나는 유중혁이다.”」
남의 흑역사를 마구 들쑤시는 [제4의 벽]의 괴롭힘을 견디며, 나는 씁쓸한 입맛을 다셨다. 제기랄, 이 자식 진짜 어떻게 할 수도 없고.
“의원들은 잠깐 자리를 비워주세요. 잠시 저분과 둘이 이야기를 해야겠어요.”
뭔가를 생각하던 아일렌이 용단을 내렸다.
장하영과 공민회 의원들이 문밖으로 사라지자, 의자를 끌어온 아일렌이 내 수술대 곁에 바짝 붙어 앉았다.
“이것부터 좀 풀어주고 말하지? 난 대화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잖아.”
그러나 아일렌은 나의 결박을 풀어주지 않았다.
아직 나를 제대로 신뢰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마왕이 되실 거라고 하셨죠.”
“그래.”
나는 일단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게 무슨 뜻인지는 알고 계신가요?”
“말 그대로 73번째 마계의 왕이 된다는 뜻이지.”
“그리고요?”
“다른 72 마왕들의 과도한 주목을 받게 된다는 뜻이기도 하고.”
사실, 그쪽은 조금 신경이 쓰인다.
나는 아직 마왕들과 그다지 호의적인 관계를 쌓지는 못했으니까.
내 표정을 보던 아일렌이 한숨을 내쉬었다.
“당신을 치료하면서 설화 구성을 조금 엿보기는 했지만······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작자인지 감도 오질 않는군요.”
“뭐가 문제지?”
“······세이스비츠 공작은 강해요. 아마, 당신 생각보다도 더.”
일전의 당황했던 모습과는 달리 아일렌의 말투는 침착했다.
과연, 마계에서 오랫동안 살아남은 존재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는 법이다.
“강하겠지. 그래도 공작이니까.”
공작은 마계에서 마왕 다음으로 강력하다.
마계 오등작의 정점에 위치한 자들.
개중에는 거의 위인급 성좌에 육박하는 힘을 가진 녀석들도 있을 정도니 확실히 얕볼 상대는 아니었다. 하지만 아일렌의 평가는 제법 공정했다.
“그쪽 자신감도 이해는 해요. 당신이 놀라운 설화를 가지고 있는 건 이미 확인했으니까요.”
역시, 내가 가진 설화들을 수선하며 그녀도 내 힘을 어느 정도는 어림하고 있는 듯했다.
시간이 짧아서 내가 숨겨둔 모든 설화들을 확인하진 못했겠지만, 전설급 설화 두어 개 정도는 보았겠지.
이 자리가 마련된 것도 그녀가 내 설화에서 어떤 가능성을 엿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아일렌은 차분하게 말을 이어갔다.
“먼저 당신이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알아야겠어요.”
“존재 맹세를 하지.”
“이곳에서 나온 어떤 대화도, 바깥으로 유출해선 안 돼요.”
우리는 손을 마주 댄 채 [존재 맹세]를 했다.
영혼을 걸고 하는 맹세.
만약 이 맹세를 어긴다면, 어긴 존재는 스스로 영혼을 불태우며 자멸하게 된다. 언젠가 유중혁이랑도 이 맹세를 했었지.
“내 정체에 대해서도 발설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알고 있어요. 설화 수선에 참가한 의원들끼리는 모두 맹세를 공유하는 사이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작게 한숨을 내쉰 아일렌은 혹시 누군가 들을까 속삭이듯 입을 열었다.
“우리 공민회는, 오래전부터 [공장]을 무너뜨릴 기회를 엿보고 있어요.”
[공장]은 [공단]의 핵심이자 권력의 중추가 되는 건물.
그곳을 무너뜨리려 한다는 건, 애초에 목적이 명백한 행위였다.
대강의 일들은 ‘멸살법’을 통해 읽어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나는 물어보기로 했다. 당장 ‘멸살법’을 다시 읽을 방법이 없는 만큼 직접 정보를 얻는 것도 중요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귀족들을 몰아낼 셈인가?”
“그래요.”
“어차피 너희는 귀환자일텐데. 왜 굳이 마계의 생태에 간섭하려는 거지?”
“우린 아직 귀환자가 아니니까요.”
어떤 의미에서, 그보다 정확한 말은 없었다.
“그렇군.”
모든 귀환자가 차원이동 시나리오를 완수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은 아니다. 어떤 귀환자는 시나리오에 실패하고, 또 어떤 귀환자는 고향이 싫어 타향에 남는다. 그리고 어떤 이유로든 귀환을 포기한 자들은, 타향을 새로운 고향으로 삼아야만 한다. 그곳이 얼마나 끔찍한 곳이든, 그곳에서 발을 딛고 살아가야만 하는 것이다.
“공작을 죽이려는 시도는 몇 번이나 해 봤어요.”
“아직 녀석이 살아있는 걸 보면 모조리 실패한 모양이네.”
“······나쁜 계획은 아니었어요. 모두 실패하기 전까지는 말이죠. 그들 중엔 <제 1무림>의 고수들도 있었고, 고향 행성에서 최고의 검사에 오른 이들도 있었으니까.”
“그런 자들은 어떻게 구했지?”
“당신과 비슷한 경우였죠. 모두 고향의 시나리오에서 실패하거나 추방된 자들이었어요.”
역시나,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사실 아일렌이 ‘추방자’들을 치료해주는 것은 바로 이런 연유였다.
한 사람이라도 더 강한 공민을 모아 [세이스비츠 공단]의 지배자에게 대항하기 위한 수단.
그녀는 [설화 전문가]의 특성을 그런 형태로 사용하고 있었다.
절레절레 고개를 내젓는 아일렌은 조금 지친 표정이었다.
“대부분은 공작에게 도달하기는커녕 그 호위도 뚫지 못했어요.”
“호위가 많은 편인가?”
“[공장]에는 남작이나 자작급의 하위 귀족들 숫자만 해도 물경 백에 달해요. 백작급도 열이나 되고, 후작급도 둘이나 있죠.”
호위가 많다는 것은 문제다.
설령 하위 귀족이라고 해도 악마종이면 어지간한 화신들보다는 강력하니까. 게다가 백작급 위쪽으로는 전부 설화의 힘을 운용할 수 있는 녀석들이다. 더 큰 문제는 공작의 힘이 그런 수하들을 모조리 합친 것보다 강력할 것이라는 점이다. 하지만 나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그 정도면 해 볼만해.”
“다른 추방자들도 그렇게 말했어요.”
“그놈들보다 내가 더 강해.”
왜냐하면 유중혁도 이렇게 말했을 테니까.
그리고 나는 지금 유중혁이다.
하지만 아일렌은 유중혁이 누군지 알지 못했다.
“정말로 강했다면 시나리오에 실패하지 않았겠죠.”
맞는 말이라 순간 반박할 길이 없었다.
이제와서 복잡한 사정이 있었다고 설명하기도 뭣했다.
하지만 아일렌은 아직 내게 기대를 걸고 있는 듯했다.
“그러니 먼저 실력을 증명해줬으면 좋겠군요.”
“이런 것 말인가?”
나는 기다렸다는 듯 몸을 묶은 속박을 풀어냈다.
파지직, 하는 소리와 함께 끊어지는 속박구들.
아일렌은 살짝 놀란 듯했지만 당황하지는 않았다.
“······그 정도는 다른 추방자들도 해냈어요. 나는 당신이 귀족을 상대할 수 있는 존재인지 확인해야 해요.”
“뭘 원하지?”
“마침 [세이스비츠]에 적당한 상대가 방문한 상태죠.”
“[길로바트 공단]의 사절을 말하는 거로군.”
“그래요.”
나는 피식 웃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알만하군.”
아일렌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에겐 미안한 일이지만요.”
현재 73번째 마계는 마왕에 대한 소문으로 혼란한 상태.
[세이스비츠 공단]과 [길로바트 공단] 측의 만남은 그 전운을 달래기 위해 기획된 것이었다.
“가장 위험한 적은 늘 가장 가까운 동맹인 법이죠.”
만약 그 기회를 잘 이용해 상잔(相殘)을 유도할 수 있다면, [세이스비츠 공단] 내 귀족층을 분열시키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마침 나라는 장기말도 생겼으니 아일렌은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겠지.
실패하더라도 크게 손해 볼 것은 없는 장사니까.
하지만 이쪽도 순순히 이용만 당해줄 생각은 없었다.
“이걸 ‘첫 번째 거래’로 하지.”
“좋아요. 그쪽 조건은 뭐죠?”
“앞으로 내가 요청할 때마다 화신체를 수선해 줘. 물론 무료로.”
화신체가 보다 견고해질 때까지, 나는 지속적으로 설화 파편을 섭취해야 했다. 언제 또 설화 간의 충돌이 발생할지 알 수 없었다. 당분간은 아일렌의 도움이 필요했다.
“성공만 한다면 못 해줄 것도 없죠. 그게 전부인가요?”
“하나 더.”
사실, 본론은 이쪽이었다.
“내게 ‘시나리오’를 양도해줘.”
“······시나리오?”
애초에 [세이스비츠 공단]을 방문한 이유도, 바로 이것 때문이었으니까.
“나는 너희가 가진 ‘혁명가 시나리오’가 필요해.”
*
[마계]는 예부터 성좌들에게는 인기가 없는 지역이다.
성좌들과 마왕들의 사이가 안 좋기 때문이기도 하고, 애초에 마계에 진입하는 화신들 중 대부분이 ‘실패자’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수술실을 빠져 나오자, 제일 먼저 보인 광경은 공민들이 모인 선술집이었다.
“시이벌, 술맛 조오타.”
곳곳에서 들려오는 공민들의 탄식.
때마침 시간은 늦은 저녁이었다.
[공장]에서 종일 일을 하고 돌아온 노동자들과 화신들이 두런두런 모여 술을 넘기고 있었다. 뒷맛이 쓴 듯 잔뜩 일그러진 얼굴들. 마계의 술은 지상의 것보다 더 쓰다고, 언젠가 ‘멸살법’에서 읽은 기억이 났다.
「김독자는 생각했다. 이들 중 ‘혁명가’가 누구일까.」
마계에서도 [시나리오]는 진행된다. <스타 스트림>은 어느 한 지역의 이야기도 소홀히 하지 않으니까. 특히 이곳의 메인 시나리오 중 하나인 [혁명가 시나리오]는 마계의 ‘공작’들도 눈여겨보는 시나리오였다.
―그 시나리오에 대해 어떻게 알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건 당장 도와주기 어려워요. ‘혁명가’가 누구인지는 우리도 모르거든요. ‘혁명가’의 정체도 모르는데 시나리오 양도부터 권할 수는 없잖아요?
―정보가 전혀 없는 건가?
―정보를 얻어도 한 달 단위로 ‘혁명가’가 바뀌어 버리니까 알 방도가 없죠. 솔직히 자기가 ‘혁명가’에 걸렸다고 자백할 녀석이 어디 있겠어요? 어디에 ‘스파이’가 있을지 모르는데······.
아일렌은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내 예상이 맞다면, ‘혁명가’는 분명 이들 중에 있었다.
「[혁명가 시나리오]는 마계의 고유한 메인 시나리오였다. 시나리오 번호는 매번 다르지만, 해당 시나리오 이벤트를 맞이하는 존재들은 정해져 있다. 그들은 바로 마계의 피지배계층이다.」
이럴 때는 [제4의 벽]이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멸살법’이 없어도 저 녀석이 재깍 기억을 상기시켜 주니까.
―마지막으로 자기가 ‘혁명가’라고 선언했던 자가 어떻게 되었는지, 이곳의 공민들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어요. 그러니 괜히 사람들 들쑤시진 말아줘요. 다들 불안해 할 테니까.
아일렌의 말이야 그랬지만, 정말로 마냥 기다리기만 할 수는 없었다.
화신체를 어떻게든 수선했으니 [추방자 패널티]도 당분간은 버틸만하겠지만, 그것도 며칠 뿐일 것이다.
「김독자는 생각했다. 이곳에서 [혁명가 시나리오]를 손에 넣어야만, 나는 본래의 시나리오로 돌아갈 수 있다.」
그때,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기, 처음 보는 얼굴이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