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화

193화 살갗에 와 닿는 보드라운 이불의 감촉. 그것이 얼마 만에 누려보는 사치인지 정희원은 좀처럼 실감이 나질 않았다. 모든 것이 평화로웠다. 괴수에게 습격당할까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지도 않았고, 아이템을 빼앗길까 같은 인간들을 경계할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그 평화가 오래가지 않을 것임을 정희원은 잘 알고 있었다. “정희원 씨! 문 좀 열어주십시오!” “인터뷰 좀 부탁드립니다!” 벌써 일주일 째, 집 앞으로 몰려든 기자들이 1층 현관 앞에서 아우성치고 있었다. 커튼을 살짝 여는 순간 쏟아지는 플래시. 그 무자비한 카메라의 시선 앞에, 정희원은 익숙한 기시감을 느꼈다. “······하긴, 성좌들만 관음종자는 아니겠지.”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킬킬 웃습니다.] [성좌, ‘은밀한 모략가’가 당신의 감상에 동의합니다.] 정희원은 자신을 쳐다보는 사람들의 무수한 시선을 느끼며 새삼스런 감상에 잠겼다. 사실 ‘시나리오’가 시작되기 전에도 형태는 다르지만 비슷한 일들은 줄곧 있었다. 시선의 관음도, 생존을 위한 투쟁도. 그렇게 보면 ‘시나리오’라는 건, ‘시나리오’가 시작되기 전부터 줄곧 있어왔던 것인지도 모른다. 누구도 그게 ‘시나리오’라는 것을 알지 못했을 뿐. 창문 너머로 부서진 시가지와 차단된 서울 돔의 모습이 보였다. 서울 돔을 벗어난 지 벌써 일주일이 지났지만, 정희원은 아직도 그 돔을 벗어났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희원 언니! 일어났어요?” “아, 응. 지혜야.” 벌컥 문을 열고 들어온 이지혜를 향해, 정희원이 힘없이 웃어 보였다. 서울 돔 탈출 후 일주일. 그동안 여러 가지 일들이 있었다. 정희원을 비롯한 일행들은 임시 정부의 도움으로 경기 지역에 거처를 지원받았고, 기관에 불려가 몇 가지 설문에 답했다. 대부분 뻔한 질문들이었다. 서울 돔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가.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소문들이 사실인가. 당신 같은 사람은 몇 명이나 있으며, 어떤 사상을 가지고 있는가. 성좌들과 시나리오라는 것은 대체 무엇인가······. 정희원은 처음에는 성실히 질문에 답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모든 것이 귀찮아졌다. 애초에 이런 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싶었다. 이미 대한민국 정부는 궤멸 상태였다. 운 좋게 살아남은 몇몇 국회의원들과 시의원들로 이루어진 임시 정부는 이 사태에 대해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은 여전히 앞으로의 시나리오에 맞서 ‘국가’라는 체제가 유의미할 것이라 굳게 믿는 모양새였다. 새로운 시대에 여전히 낡은 신념을 고수하는 이들에게, 정희원이 해줄 말은 정해져 있었다. ―다들 정장 벗고, 넥타이부터 풀어요. ―예? ―도망치기 좋은 복장이 아니니까. 정희원은 이지혜를 바라보았다. 어차피 믿을 건 일행들뿐이다. “유상아 씨는?” “애들이랑 같이 방에 틀어박혀 있어요.” 문제는 그 일행들마저도 정신을 못 차리고 있다는 것이지만. 이지혜가 어두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독자 아저씨가 없어진 타격이 크네요.” 있을 때는 솔직히 긴가민가할 때도 있었는데, 없어지니까 없어진 티가 확 나는 사람이 있다. 일행들에겐 그게 바로 김독자였다. 생존의 목적은 각자에게 있었지만, 생존의 방식을 정해온 것은 지금껏 김독자였다. 일행들이 방향성을 잃어버리고 흩어진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군인 아저씨 말마따나 매뉴얼이라도 있으면 좋겠네요 진짜.” “현성 씨는 아직이야?” “······첫날 군대에 불려가서 아직도 소식이 없어요.” 본래 군인이었던 이현성이었으니, 군부대에 제일 먼저 호출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지혜가 투덜거렸다. “진짜 미련하게······ 나 같으면 안 갈 텐데. 이런 세상에 군대가 다 뭐라고.” 정희원도 이지혜의 말에 적극 동감했지만, 그렇다고 이현성을 욕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상실 앞에 대처하는 방법은 모두가 다르다. 아이들이 방 안에 틀어박혔듯, 이현성은 군대로 돌아갔다. 그저 그것뿐이다. [다음 시나리오는 사흘 뒤에 시작됩니다.] 허공에 뜬 메시지를 보며, 정희원은 불안감을 삼켰다. 사흘 뒤, 지옥은 다시금 시작될 것이다. 더 복잡한 문제는, 앞으로 있을 시나리오가 지금껏 겪어온 것과는 완전히 다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었다. [당신은 이제 배후성의 부름에 응할 수 있으며, 그들이 내리는 개인 시련들을 받을 수 있습니다.] [개인 시련은 히든 시나리오로 취급되며, 특정 메인 시나리오 수행과 중첩될 시 메인 시나리오를 대체할 수 있습니다.] [시나리오 대체는 25번째 메인 시나리오가 시작되기 전까지만 가능합니다.] 열 번째 시나리오를 통과하며 열린 [개인 시련]. 그게 뭔지, 정희원은 아직 좀처럼 감이 오질 않았다. 이지혜가 위로하듯 말했다. “사부 말로는 당분간 큰일은 없을 거라고 했으니 너무 신경쓰지 마요 언니.” “유중혁 씨는 어떻게 됐어?” “김독자 김독자 노래를 부르더니 어딜 가버렸는지 모르겠어요. 진짜 사부 답지 않게······.” 확실히, 김독자의 죽음 앞에 유중혁의 반응은 의아할 정도였다. 한동안 폐인처럼 방 안에 처박혀 연공만을 반복하던 유중혁은, 사흘 전 곧 돌아오겠다는 말을 남기고는 홀연히 사라져버렸다. “한수영 씨는?” “오늘 아침 정부 요원들이랑 이야기해보겠다고 나갔어요. 뿌린 씨앗을 거둘 때가 됐다는 말도 했고······.” “정부? 그 치들에겐 딱히 기대할 게······.” 말하는 순간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만약 나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무조건 한수영과 함께 움직이세요. 그것은 언젠가 김독자가 남긴 말이었다. 왜 한수영과 함께 움직이라고 한 것인지, 그 이유는 모른다. 다만 김독자가 그렇게 말했으니 분명 타당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정희원이 몸을 일으키자 놀란 이지혜가 되물었다. “나가시게요?” “그래. 계속 여기 죽치고 있을 수는 없으니까. 우리도 뭔가 준비를 하긴 해야지.” “그럼 저도 같이 가요.” 뭔가를 결심한 이상 둘 다 망설이는 성격은 아니었다. 이지혜와 정희원은 간단히 장구류를 챙긴 후, 곧장 밖으로 나왔다. 현관문을 열자 쏟아지는 셔터 소리가 사위를 뜨겁게 메웠다. “정희원 씨! 고려일보 기자입니다! 한 마디만 해주세요!” 생존자들은 그들만이 아니다. 천 명에 달하는 생존자들이 서울 돔에서 살아 돌아왔고, 그들 중 일부는 언론사와 접촉해 몇 달에 걸친 끔찍한 생존 기록을 남겼다. 이미 충분한 증언이 쌓였을 텐데도 기자들은 계속해서 그들을 찾았다. 이유는 알만했다. 살아남은 천 명의 생존자들 가운데에서도 정희원을 비롯한 일행들은 시나리오의 중추에 있었던 유명 인사들이었으니까. “정희원 씨! 그곳에서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평소에 검도를 배우신 게 도움이 되었다고 들었는데, 사실입니까?” “국가 대표 후보였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정희원은 마이크를 들입다 밀어붙이는 기자들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정부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언론에 말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그리고 그녀도 쉽게 입을 여는 성격이 아니었기 때문에 지금껏 말을 아껴왔었다. 그런데······ 왜일까. 오늘 정희원은 뭔가를 말하고 싶은 기분이었다. “거기서 무슨 일들이 있었는지, 그렇게 궁금해요?” 그냥 가자며 옷깃을 잡아끄는 이지혜의 손길을 만류한 채, 정희원은 바깥에서 흔들리는 현수막을 바라보았다. [양천구의 영웅! 멸악의 심판자 정희원의 무사 귀환을 축하합니다!] ······영웅이라고? 내가? 양천구 따위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다. 그런데도 저런 현수막이나 걸어 놓고 있는 이 작태가, 정희원은 한심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난 당신들이 생각하는 그런 영웅이 아니에요. 국가 대표 후보도 아니었고, 검도도 그렇게 잘하지 못했어요.” 마치 세계 전체를 노려보듯, 정희원이 마이크에 대고 말했다. “멸망이 오기 전, 난 그냥 싸구려 술집에서 일하던 바텐더였어요.” 그 말에 기자들이 크게 술렁였다. 다들 믿을 수 없다는 눈치였다. 누군가는 경멸조로, 누군가는 질투심 어린 눈길로 그녀를 훑었다. 그 시선들 앞에서, 정희원은 기이하게도 자유로워지는 기분이었다. 그녀는, 이제 예전의 ‘정희원’이 아니다. 그 알량한 시선의 파도 속에서, 정희원은 그 사실을 비로소 실감했다. 기자들이 물었다. 어떻게, 고작 술집 바텐더가 최후의 생존자가 될 수 있었는지. 평범한 그녀가 어떻게 살아남았고, 무려 ‘멸악의 심판자’가 될 수 있었는지. [성좌, ‘대머리 의병장’이 슬픈 눈으로 당신을 바라봅니다.] [성좌, ‘외눈 미륵’이 당신의 발언에 누군가를 떠올립니다.] 성좌들의 간접 메시지가 곳곳에서 들려왔다. 정희원은 자신의 기분을 잘 이해하지 못한 채로 입을 열었다. “‘김독자’라고 아세요?” [성좌, ‘해상전신’이 고개를 끄덕입니다.] [성좌, ‘서애일필’이 그 이름을 기억합니다.] [성좌, ‘황산벌의 마지막 영웅’이 그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성좌들의 목소리와 함께, 기자들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김독자?” “그게 누굽니까?” “전에 증언록에서 들어본 것 같기도 한데.” 정희원은 우스운 기분이었다. 모르겠지. 당연히, 당신들은 모를 것이다. 정희원은 가볍게 숨을 들이켜며 말을 이었다. “최후의 생존자들은 전부 스스로의 힘만으로 살아남은 게 아니에요.” 하지만 거기까지만 말했는데도, 갑자기 울음이 나올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기자들의 질문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생존자 명단에 ‘김독자’라는 이름은 없는데요?” “김독자 씨는 왜 함께 생환하지 않았습니까?” “그 사람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어디에 있는가. 정희원도 그것은 모른다. 다만, 바라는 것이 있다면······. “그 사람은······.” 정희원은 서울 돔을 바라보며 말했다. “돌아올 거예요. 반드시.” * 「그 시각, 마계에서 김독자가 눈을 떴다.」 “허어어어어어억!” 나는 거의 용트림 같은 비명을 토해내며 눈을 떴다. 쿠웅― 쿵― 반복해서 뛰는 심장 소리가 낯설었다. 심장 어림에서 금빛 아우라가 일렁이며 거친 마력을 토해냈다. 비록 망가진 것이라 해도 헤츨링의 드래곤 하트다. 그저 이식한 것만으로 기절할 정도로 강대한 마력을 품은 소재. 이걸 제대로 활용할 수만 있다면, 당분간 전투에서 마력이 부족할 일은 없을 것이다. [특성 ‘라마르크의 기린’의 효과로 부서진 설화의 힘을 흡수합니다.] 사실, 부서진 설화를 흡수한다는 것 자체가 위험한 발상이었다. ‘라마르크의 기린’을 얻지 못했다면, 시도해볼 수조차 없는 일이었으니까. 「라마르크의 용불용설(用不用說)이 진화론의 주류로 인정 받지 못했기 때문에, ‘라마르크의 기린’은 다른 진화계 특성에 비해 흡수 효과가 떨어지는 편이었다. 하지만 부작용이 제일 적고, 설화의 약점을 흡수하지 않는다는 장점도 있었다.」 [제4의 벽]의 말마따나, 다른 진화계 특성인 ‘다윈의 악마’를 얻었다면 나는 골드 드래곤의 설화 조각을 먹는 순간 심장이 터져서 죽어버렸을 것이다. 흡수 효과는 적어도 안전성이 보장되는 쪽이 좋다. 이젠 목숨도 여러 개가 아니니까. [설화 파편, ‘어린 골드 드래곤의 망가진 심장’을 획득하였습니다.] 이 설화 파편의 원래 이름은 「이계의 신격에게 찢겨 죽은 어린 골드 드래곤의 심장」이었다. 하지만 「이계의 신격에게 찢겨 죽은」이라는 부분은 흡수되지 않았다. 이것이 ‘라마르크의 기린’의 장점이다. 설화의 흡수율이 낮은 대신, 약점도 흡수하지 않는 것. [당신의 새로운 화신체가 구성되고 있습니다.] [새로운 화신체의 생성으로 존재의 붕괴가 지연됩니다.] [이 효과는 일시적이므로, 빠른 시나리오 복귀를 추천합니다.] 새롭게 뛰는 심장이 도도한 마력을 전신으로 흘려보내자, 숨통이 조금 트였다. 적어도 아까처럼 탄생 설화가 흘러내리는 비극은 없어졌다. 하지만 육체의 재구성은 지금부터가 시작이었다. 나는 이어서 「동료에게 뒤통수를 맞은 소드마스터의 오른팔」를 먹기 시작했다. 육질을 뜯는다기보다는, 설화를 씹는 순간 부서지는 이야기를 엿보는 것에 가까웠다. [설화 파편, ‘불쌍한 소드 마스터의 오른팔’을 흡수합니다.]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쩐지 검을 좀 더 잘 쓸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특성 ‘라마르크의 기린’의 포만도가 한계치에 도달했습니다.] [새로운 설화 파편을 흡수하려면 포만도를 떨어트리십시오.] 그렇게 두 개의 설화 파편을 모두 먹어 치운 후에야, 나는 한결 나아진 기분으로 쓰레기 더미 위에 주저앉았다. “······조금 춥네.” 아까보다는 덜 고통스러웠지만, 한기는 계속해서 살갗을 찔러왔다. 화신체의 내구도가 올랐다고는 해도 여전히 ‘추방자 패널티’는 사라지지 않는다. 이야기의 상실로 인한 커다란 공허감과 외로움. 사람들이 계속해서 뭔가를 보고 듣고 읽기를 원하는, 근원적인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전신에 미미한 온기가 돌기 시작한 것은 그때였다. [누군가가 당신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나에 대한 이야기? [행성 ‘지구’에서 당신의 설화가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그제야,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 있었다. 누군가가 지구에서 내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누구일까. 일단 유중혁은 아닐 테고. 이현성? 정희원? 아니면 신유승? ······모르겠다. 다만, 묘한 기분이었다. 누군가가, 내가 모르는 곳에서 내 이야기를 한다는 것. 누군가에게, 여전히 기억되고 있다는 것······. [행성 ‘피스랜드’에서 새로운 ‘김 도게자 전설’을 만들었습니다.] ······저쪽은 이름을 좀 똑바로 불러줬으면 좋겠는데 말이지. 나는 별이 보이지 않는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곳은 이야기의 지평선. 내가 별을 볼 수 없듯, 별들도 나를 볼 수 없는 곳. 그러니 오만한 별들은 모를 것이다. 그들이 볼 수 없는 곳에서, 그들을 파멸시킬 이야기가 이제 막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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