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화

190화 1부 완결 “······으.” 「전신의 뼈가 으스러진 듯 아려왔고, 살갗은 죽은 동물의 가죽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제4의 벽]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지난 번에는 그렇게 얄미웠던 [제4의 벽]의 목소리가 이렇게 반가울 수 없었다. 「살아있구나. 김독자는 그렇게 생각했다.」 [제4의 벽]의 수다가 들리는 걸 보니, 계획은 성공한 모양이었다. 사실 성공이라고 말할 것도 없었다.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었으니까. 녀석들이 내게 부여한 [운명]은 ‘화신 김독자’의 죽음. 그러니 ‘성좌’로서의 김독자는 죽지 않는 것이 당연했다. 그렇게 쉽게 사라질 거였다면 그 고생을 하며 설화를 쌓아 성좌가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문제는 화신체를 잃은 채 ‘성좌’로서 되살아난 내가 어떤 꼴이 될 것이냐는 건데······. “······여긴 어디지?” 주변에 보이는 건 폐허가 된 건물들과, 반파된 8차선의 도로. 어쩐지 익숙한 정경이었다. “여긴······?” 혼잣말을 내뱉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내가 어떤 처지가 되었는지 깨달았다. 허공을 올려다 보았다. 늘 무수한 성좌들의 빛으로 가득했던 밤하늘. 하지만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내가 혼잣말을 했다는 것 만큼이나, 그 혼잣말 이후 드리워진 깊은 적요에 놀랐다. 밤하늘을 보며, 나는 실없이 웃었다. “하하······.” 보통이었다면 성좌들의 간접 메시지가 무수히 떠올랐어야 했다. 내 혼잣말을 좋아하는 ‘제천대성’이라든가, 태클 걸기 좋아하는 ‘심연의 흑염룡’이라든가······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나를 좋아해주는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라든가. 하여튼 누군가가 대답해줬어야 정상이었다. 하지만 누구도, 내 혼잣말에 대답해주지 않았다. 머리를 닦는 ‘대머리 의병장’도, 심심하면 안대를 집어 던지는 ‘외눈 미륵’도, 뻔뻔하기 짝이 없는 ‘매금지존’도 없다. 진저리쳤던 성좌들의 메시지가 사라지자, 내게 남은 것은 우습게도 지독한 외로움이었다. 「김독자는 생각했다. 나는 정말 혼자가 되었구나.」 [현재 당신은 시나리오에서 추방당한 상태입니다.] 나는 천천히 주변의 정경을 다시 돌아보았다. 시나리오에서 추방 당한 후에도 살아있는 존재들은, 가장 가까운 ‘시나리오 권외 지역’으로 가게 된다. [현재 당신은 시나리오 권외 지역에 있습니다.] 그리고 현재 내가 서 있는 이 ‘권외 지역’은, 내겐 아주 익숙한 곳이었다. 「서울.」 이곳은, 서울의 광화문 광장이었다. ‘왕들의 전쟁’이 벌어졌고, 내가 ‘절대 왕좌’를 부쉈던 곳. 그런데 그런 서울이, 시나리오 권외 지역이 되었다는 것은······. 일행들이······ 무사히 탈출했구나. 나는 어쩐지 벅차오르는 기분으로 예전의 ‘서울 돔’이 있었던 자리를 바라보았다. 예전에는 반투명한 막으로 덮여 있었던 그 자리에는, 이제 두터운 차단막 같은 것이 씌워져 있었다. 이제 ‘서울’의 시나리오는 완전히 끝났다. 그리고 일행들은 내가 없는 ‘시나리오’로 나아가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고 있다. 그곳에서, 계속 살아 나가고 있다. ······그걸로 된 것일까. 「김독자는, 기쁘면서도 어쩐지 쓸쓸한 기분이었다.」 나는 일행들을 잠시 생각하다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혼자가 된 김독자는 해야 할 일이 있었다. 그것을 위해, 그는 처참한 죽음을 택한 것이다.」 * 「서울 거리를 걷는 내내, 김독자는 아직 낡지 않은 추억에 잠겼다. 어디를 가도 일행들과 시나리오를 수행했던 지역들 뿐. 김독자는 새삼 자신이 ‘멸살법’의 일부가 되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닫고 있었다. 그는, 명백히 이 이야기를 살았던 것이다.」 “······거참 감동적이긴 한데, 이제 그만 하면 안 되냐? 대체 언제까지 중얼거릴 거야?” 「김독자는, 가엾은 ‘제4의 벽’에게 짜증을 냈다.」 처음에는 그래도 누군가가 곁에서 떠드는 느낌이 들어서 좋았는데, 내가 뭘 할 때마다 사사건건 설명을 해대니 영 기분이 좋지가 않았다. 「얼마나 시간이 지난 거지? 김독자는 그렇게 묻고 싶었지만 대답해 줄 사람은 없었다.」 “빌어먹을. 네가 대답해주면 되잖아.” 나는 녀석에게 대거리를 하다가, 일단 내 상태를 살피기로 했다. [현재 당신의 설화들 중 다수가 손상을 입었습니다.] [현재 당신의 화신체가 완전히 붕괴한 상태입니다.] 성좌의 격으로 살아 남기는 했지만, 나는 화신체를 완전히 잃어버렸다. 즉, 지금 내 존재는 ‘육체’가 아니라 굉장히 불완전한 설화 덩어리에 불과했다. 파스스슷. [현재 당신의 본체가 매우 위태로운 상태입니다.] [본체를 보전할 방법을 찾을 수 없습니다.] 누가 툭 건드리기라도 하면 완전히 붕괴해버릴 것 같은 불안한 상태. 이대로는 살아도 산 게 아니었다. 나는 일단 시도해볼 수 있는 것을 모두 시도해보기로 했다. [‘전지적 독자 시점’을 사용할 수 없는 지역입니다.] ······역시 안 되나. [현재 당신의 화신과 통신이 불가능합니다.] 이것도, 안 되고. 예상은 했지만 막상 정말로 안 되니까 기분이 이상했다. 마치 홀로 통신 불가지역에 와버린 듯한 느낌이다. 물론 내가 실제로 처한 상황은 그보다 더한 것이었지만. [당신은 채널 시스템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 시나리오에서 추방되었으니 채널에서도 자연히 추방되었고, 비형과의 계약도 자연히 해지되었다. 별 한 점 없는 하늘을 보고 있자니, 공허한 자유가 찾아왔다. ······이제 정말, 혼자가 된 거구나. 그 사실을 깨닫자, 서서히 한기 같은 것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누구도 나를 바라보지 않고, 나 역시 누구도 볼 수 없다.」 아니, 완전히 혼자는 아닌가. 「그 적요 속에서, 김독자는 불현듯 깨닫는다. 그렇구나. 존재라는 것은 누군가의 시선을 통해 비로소 감각되는 것이구나.」 “난 그런 철학적인 생각은 안 해, 멍청아. 그보다 언제까지 계속할 건데?” 「멍청한 김독자는 알지 못했다. 위대한 ‘제4의 벽’께서 왜 이런 수고로움을 행하는지.」 ······어쭈. “단순히 설명만 할 수 있는 게 아니네? 너 대체 뭐야? 스킬 맞아?” 「멍청한 김독자는 허공을 향해 혼잣말을 했다.」 이 자식이 진짜. 「멍청한 김독자는······.」 “그만 안 해? 스킬 꺼버린다?” 그 순간 허공에서 츠츠츳, 하는 소리가 들렸다. 「‘제4의 벽’이 말합니다. ‘그 럼 그 만둘 까?’」 나는 조금 놀랐다. 이 자식, 자기 의사를 생각보다 명료하게 표출할 수 있잖아? 그러고 보니 지난 번에도······. “그래, 그만해. 지금은 방해 받고 싶지 않으니까.” [전용 스킬, ‘제4의 벽’이 침묵합니다.] 그러나 다음 순간, 나는 그 선택을 곧바로 후회했다. 쩌저저저적. 뭐야, 라고 말할 틈도 없이 주변의 공기가 얼어붙는 느낌이 들었다. 한기는 곧장 살갗으로 스며들더니 뼛속 깊이 침투했다. 파스슷, 하는 소리와 함께 폐의 숨이 턱 막히는 느낌이 들었다. “컥······?” 순간, 뒤늦게 떠오르는 것들이 있었다. <베다>와 <올림포스> 녀석들이 굳이 나를 ‘시나리오 권외 지역’으로 보냈던 이유. 그건 바로 이런 상황을 노렸기 때문이었다. ‘화신 김독자’를 죽이며 ‘성좌 김독자’도 처리하기 위한, 녀석들의 계략. “끅, 끄으으으윽······.” 비명을 질렀지만, 비명이 나오지 않는다. 숨을 쉬고 싶었지만, 숨을 쉴 수가 없다. 마치 누군가가 폐를 압착해 버린 것처럼, 숨통이 턱 막혀왔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하며, 생각들이 하나둘씩 지워져 간다. <스타 스트림>은 ‘이야기’의 세계. 화신이든 성좌든, 예외는 없다. 모든 존재는 ‘이야기’를 통해 숨을 쉬고, ‘이야기’를 통해 존재한다. [설화의 손상 속도가 빨라집니다!] [당신의 존재가 소멸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니 ‘이야기’가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는, 그 무엇도 존재할 수가 없다. 심지어 나조차도. 파스스슷! ‘제기랄, 살려줘!’ 나는 나 자신이 사라지는 까마득한 공포 속에서 외쳤다. 그제야 나는 [제4의 벽]이 왜 그렇게 떠들어댔는지를 알 수 있었다. 녀석은, 나를 살리기 위해 계속해서 뭔가를 떠들어댔던 것이다. 어떤 이야기도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나를 계속해서 살려두기 위해······. 내게, 계속해서 ‘이야기’를 했던 것이다. [전용 스킬, ‘제4의 벽’이 발동합니다!] 「‘제4의 벽’이 말합니다. ‘멍 청 이.’」 가까스로 숨통이 트이며, 호흡이 돌아왔다. “허억, 허억······.” 시나리오 추방자가 끔찍한 꼴을 당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줄은 몰랐다. 하긴, 그 ‘척준경’ 조차 <성운>의 도움 없이는 시나리오에서 배제된 후 살아남지 못했으니······ 젠장, 내가 너무 상황을 얕봤던 모양이다. 설화 몇 개 내주는 정도면 어떻게든 첫 번째 목표 지점까지는 움직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제4의 벽]이 없었더라면, 살아있는 것조차 힘들었을지도 모르겠다. 「김독자는 생각했다. 다시는 ‘제4의 벽’님에게 까불지 않아야겠다.」 나는 비참한 기분 속에서도 차마 그 말에 반박할 수가 없었다. “······근데 언제까지 지켜줄 수 있냐?” 「‘제4의 벽’이 말합니다. ‘오 래는 무 리.’」 츠츠츠츠츳! [제4의 벽]이 말하기가 무섭게 주변에 강렬한 스파크가 튀어 올랐다. 하긴, 무려 <성운>급이 나서야 무마할 수 있는 개연성을 [제4의 벽] 혼자서 감당한다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이었다. 내게 주어진 시간이 별로 없는 것이다. 제때 일을 마무리하지 못하면, 나는 이곳에서 말라 죽고 말 것이다. 스스스스스스. 어디선가 소음이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마치 진공 청소기를 연상시키는 흡입음······. 「김독자는 그 녀석들이 뭔지 알고 있었다.」 “그래, 알아. 시나리오 청소부.” 청소부가 나타났다는 것은, 이 시나리오 지역에 대한 대대적인 ‘청소’가 시작됐다는 뜻이었다. 「김독자는 생각했다. 청소가 시작되었으니, 머지않아 ‘지평선의 악마’도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시나리오의 폐허에서 돌아다니는 하이에나 같은 녀석들이, 이처럼 먹음직스러운 폐허에 방문하지 않을 리가 없으니까.」 정말 생각 하난 기가 막히게 읽는군. 하지만 녀석들을 만나기 전에, 먼저 찾아야 할 것이 있었다. 「김독자는 걸음을 재촉했다.」 비틀거리면서, 나는 조금씩 달리는 속도를 올려갔다. 거리 곳곳에 조그마한 먹구름을 연상시키는 것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놈들이 바로 ‘시나리오 청소부’였다. 주의해야 할 녀석들이었지만, 나는 신경 쓰지 않고 달렸다. 어차피 ‘청소부’들은 속도가 느리고 인식 범위도 좁다. 조심히 피해 가기만 하면, 녀석들에게 들키지 않고 목표 지점에 도달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나는 곧장 광화문에서 벗어나 남하하기 시작했다. 을지로 3가를, 충무로를, 동대입구를, 약수를, 금호역을······. 나는 연어처럼, 지금껏 내가 지나왔던 장소들을 거슬러 갔다. 그리고 마침내 도착한 옥수역. 그곳에서, 나는 끊어진 동호대교와 마주했다. 끊어진 다리를 보고 있자니, 아직도 생생한 기억들이 머릿속을 스쳐갔다. 여기서 유중혁 그 자식이 날 어룡 입 속으로 내던졌지. 지금쯤 잘 하고 있을까 모르겠네. 뭐, 한수영도 있으니 서로 도우며 잘 하고 있겠지. ······그러길 비는 수밖에. 스팟! 나는 도움닫기도 없이 끊어진 다리를 가볍게 도약했다. 예전엔 ‘데우스 엑스 마키나’의 도움을 받아야만 간신히 건널 수 있었던 다리였지만, 지금은 단 한 번의 도약만으로 충분했다. 시나리오의 시작과 지금이 얼마나 달라졌는지 알 수 있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아직 멀었다. 내가 넘어야 할 녀석들은 저 끊어진 다리의 간극보다도 더 아득한 거리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으니까. 탁. 마침내 도달한 장소에는 반파된 지하철이 있었다. 이 모든 시나리오가 시작되었던 곳. 나는 잠시 그 지하철의 외양을 바라보고 있다가, 내부로 들어가 폐허를 뒤지기 시작했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나는 마침내 찾던 것을 발견했다. 그것은, 하얗게 빛나는 아이템 박스였다. 아이템 박스 위에는 짧은 시나리오 메시지가 남겨져 있었다. ―김독자, 믿어도 되는 거겠지? 일단 의뢰한대로 남기고 떠난다. 그간 내 채널의 화신이 되어줘서 고맙다. 누가 썼는지, 아주 잘 알 수 있는 메시지였다. ―제발, 살아 있어라. 당연하지. 난 안 죽어. 나는 아이템 박스를 열었다. 박스 안에는 내가 무려 30만 코인을 지불하고서 구입한 특성과, 부탁한 아이템들이 모두 들어 있었다. [새로운 특성을 획득하였습니다.] [아이템 ‘도깨비의 알’을 획득하였습니다.] [아이템 ‘부러지지 않는 신념’을 획득하였습니다.] ······. 나는 아이템들을 모두 수거한 뒤, 지하철 밖으로 나왔다. 때마침 동이 터오고 있었다. 다리에 걸터앉은 채, 나는 기다렸다. 이제 곧 놈이 올 것이다. 그리고 생각하기가 무섭게, 이야기가 끝난 지평선에서 누군가 나타났다. 한쪽 뺨에, 거대한 혹을 붙인 등이 굽은 노인. 그는 묘한 표정으로 이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마치, 내가 이곳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이. “그대가 ‘구원의 마왕’인가?” 나는 그런 그를 잠시 바라보다가, 돔 밖의 새벽빛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그 빛 너머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성운들을 생각했다. 아마, 녀석들은 지금쯤 내가 죽은 줄 알고 있겠지. <올림포스>. <베다>. <파피루스>······. 나는 놈들의 수식언들을 하나하나 떠올렸다. 화신들의 이야기를 비웃고, 능멸하고, 마침내는 자신의 유희거리로 만들어버린 그 모든 성좌들. 조금만 기다려라. 「내가, 그 빌어먹을 하늘에서 너희들을 모두 떨어트려 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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