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화

180화 원작에서 [꿈을 먹는 자]는 유중혁을 삼킨 후 유중혁이 겪어온 끔찍한 삶에 감응하며 몸부림치다가 결국 소멸하고 만다. 지나친 과식이 불러온 참사였다. 하지만 그것은 ‘멸살법’의 이야기. 이번에 녀석이 먹을 것은 136회차가 전부가 아니었다. 【그오오오오오오오······!】 3회차, 4회차, 5회차······. 「“인간이 수천 년을 살면 어떻게 되는지 알고 있나?”」 36회차, 47회차, 69회차······. 「“끝없이 반복되는 생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생각해 본 적이 있어?”」 141회차, 143회차, 148회차······. 「“이것이 인간의 고통이다. 빌어먹을 촉수 놈아.”」 끝을 모르고 이어지는 기억들의 향연. 부풀어 오른 공간 곳곳에서 균열이 일기 시작했다. 먹어서는 안 되는 것을 먹고, 미쳐버린 [꿈을 먹는 자]가 광기에 젖어 난동을 피우기 시작했다. 하지만 놈은 도망갈 곳이 없었다. 왜냐하면 이곳은 놈의 뱃속이었으니까. 누구도, 자기 자신에게서 도망갈 수는 없다. 【그오오오오오오!】 폭주한 텍스트들은 이내 녀석이 감당할 수 있는 부피보다 더 커졌다. 흡수하지 못한 설화들이 날뛰었고, 이윽고 범람한 이야기들은 파도처럼 외우주의 곳곳을 휩쓸었다. 파괴된 위의 잔해들이 나뒹굴었다. [‘제4의 벽’이 천천히 눈을 뜹니다.] [‘제4의 벽’이 포식 대상을 물색합니다.] 흠칫 놀란 [꿈을 먹는 자]가 내 쪽을 바라보았다. [‘제4의 벽’이 ‘꿈을 먹는 자’를 보며 웃습니다.] 이제, 포식자와 피식자의 관계는 뒤바뀌었다. 【그어어어어어······.】 콰직! 콰지지직! 거대한 활자의 벽을 형성한 [제4의 벽]은, 소용돌이치며 [꿈을 먹는 자]의 설화들을 삼키기 시작했다. 어떤 미식(美食)도 존재하지 않는, 순전한 허기에의 탐식. 무수한 물고기와 다양한 상징체로 화한 [꿈을 먹는 자]는 어떻게든 달아나 보려 애썼지만, 집요한 벽의 흡입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었다. 콰지지지직! 일만 팔천 년 동안 녀석이 먹어왔던 설화들이 모조리 으깨지고, 가루가 되어 벽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벽의 활자들이 환한 빛을 내뿜었다. 허락되지 않은 이야기를 읽은 녀석의 목소리에, 경악이 깃들었다. 【■■······?】 이미 절반 이상이 먹혀버린 놈의 생각이, 벽 위에 활자로 떠오르고 있었다. 「설마 이것이 ■■······의?」 【오오오오오오······.】 「위대한 옛 존재들이여! 모두 어디 있습니까!」 마지막 순간 녀석은 모든 것을 버리고 탈출하려 했으나, [제4의 벽]이 한 발 더 빨랐다. 소름 끼치는 이빨을 드러낸 벽은, 놈의 위장을 모조리 파먹고는, 전체를 통째로 까뒤집어 삼켰다. 【오오······ 위대한 모략이시여······ 오오오오오오오.】 눈부신 빛과 함께, 벌어졌던 벽의 입이 닫혔다. [‘제4의 벽’이 포식을 마쳤습니다.] [당신은 이계의 신격을 퇴치하였습니다!] . . . [<스타 스트림>이 당신의 업적에 어울리는 수사를 찾지 못했습니다.] [당신의 다섯 번째 설화에 이름을 알 수 없는 업적이 추가됩니다.] [확정을 앞두고 있던 당신의 격이 재평가에 들어갑니다.] 스스스스······. [꿈을 먹는 자]의 파편이 흩날리고, 나는 텅 빈 외우주의 공허에 몇 개의 설화들과 함께 남았다. [꿈을 먹는 자]가 죽었음에도, 공간은 무너지지 않았다. 나는 여전히 본래의 세계로 돌아가지 못한 것이다. [외우주의 신격들이 ‘꿈을 먹는 자’의 부고를 접하고 크게 당황하였습니다.] [이계의 신격들이 해당 시나리오에서 일어난 일을 파악 중입니다.] [일부 ‘위대한 옛 존재’들이 당신을 일별합니다.] 츠츠츠츠츠츳! 속에서 헛구역질이 올라왔다. 놈에게 정신이 뜯어 먹히는 바람에, 정신의 비위가 약해졌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허억, 허억······ 웨에에에엑!!” 끔찍한 경험이었다. 유중혁은, 136회차에서 이런 짓을 당했던 거구나. “웨에에에엑!” 그렇게 몇 번을 더 토하고 난 후, 나는 설화들의 파편 사이를 헤집어 어머니를 찾아나섰다. 다행히, [꿈을 먹는 자]에 의해 형상을 보존하고 있던 그녀는 피폐해진 얼굴로 눈을 감고 있었다. 살아는 있는 것일까. 잘 알 수 없었다. 나는 어머니의 맥박을 짚으며 어깨를 흔들었다. “정신 좀 차려 보세요.” 일단, 어머니를 데리고 여기서 나가야 한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왜 공간이 부서지지 않지? 136회차에서도, 유중혁이 [꿈을 먹는 자]를 죽이는 순간 외우주가 무너지며 원래 세계로 돌아가는 장면이 있었다. 외우주는 곧 이계의 신격의 힘으로 운용되기에, 신격이 죽으면 함께 부서져야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녀석이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놈의 외우주가 아직 유지되고 있었다. 대체 왜지? [‘제4의 벽’이 당신을 바라봅니다.] ······설마? [‘제4의 벽’이 아쉬운 마음으로 고개를 젓습니다.] [‘제4의 벽’은 여전히 허기진 상태입니다.] 그렇게 많은 설화를 먹었는데도, 배가 고프다고? [‘제4의 벽’이 남은 잔해를 빨아들이기 시작합니다.] 휘유우우우우! 마치 진공청소기가 돌아가듯, [제4의 벽] 위에 도드라진 입이 주변의 나머지를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남은 설화의 부속들과 먼지들, 그리고. “잠깐! 잠깐만!” 내 품에 있던, 어머니까지도. 나는 벽을 향해 헤엄치듯 날아갔다. “이봐! 그건 먹지 마!” 하지만 내가 벽에 도달하기도 전에, 어머니는 벽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쩌어억 벌어지는 입이 어머니의 머리를, 팔을, 몸통을 먹어 치웠다. “씨발! 먹지 말라고 했잖아!” [‘제4의 벽’이 만족한 듯 웃습니다.] [‘제4의 벽’이 당신을 보며 입맛을 다십니다.] 물어볼 것이 있었다. 아직, 듣지 못한 것이 있었다. 그런데, 저 빌어먹을 벽이 어머니를 삼켜버렸다. 벽에게 삼켜진 존재는 어디로 가는가? 알 수 없었다. 확실한 것은, 벽이 먹은 존재들 중 돌아온 존재는 없다는 것. 극장 던전의 시뮬라시옹도, 환생자 니르바나도, 심지어 방금 먹힌 [꿈을 먹는 자]까지······. 이계의 신격조차 살아남지 못한 상황에서, 어머니가 살아있을 가능성이 있을까? “뱉으라고!” 나는 주먹으로 [제4의 벽]을 때리기 시작했다. 벽은 나를 향해 연신 입맛을 다셨지만, 딱히 나를 먹을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콰앙! 콰아앙! 내 주먹질에 벽의 표면이 희미하게 흔들렸다. 때리고, 또 때리고. 미련한 짓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그것을 멈추지 않았다. 멈출 수가 없었다. 그렇게 얼마나 벽을 두들겼을까. 벽 위로 메시지가 떠올랐다. 「처음, 그 아이에게 이름을 붙여줬을 때를 기억한다.」 나는 멍하니 그 문장을 바라보았다.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깨달은 것은 잠시 후의 일이었다. 「그이는 홀로 독(獨)을 쓰자고 했고, 나는 읽을 독(讀)을 쓰자고 했다. 어쩌면, 거기서부터 그 사람과 나는 줄곧 달랐던 것이다.」 나는 신음하며 벽을 두들겼다. 결코, 이런 식으로 듣고 싶었던 이야기가 아니었다. 「나는 그 애가 외로운 사람보다는, 무언가를 읽는 사람이 되기를 바랐다. 적어도 무언가를 읽는 한, 인간은 외롭지 않다고. 아마도 나는 그렇게 믿고 싶었다.」 내 주먹질이 멈춘 순간, 벽의 곳곳에서 무수한 문장들이 떠올랐다. 한 사람의 평생에 이만큼 많은 문장이 있을 수 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많은 문장. 「“네가 집에서 하는 게 뭐야? 응? 내가 왜 이렇게 살아야 돼! 언제까지 너랑 애 뒷바라지하면서 살아야 하냐고!”」 「“수경아, 네가 참아야 하지 않겠니. 독자를 생각해야지. 남자들 그러는 거 그냥 잠깐이야.”」 「“어머님, 아무래도 독자에게 신경 좀 쓰셔야 할 거 같습니다.”」 나는 입으로 욕설을 내뱉으며 다시 벽을 내리치기 시작했다. 어떤 일은 나도 기억이 났고, 어떤 일은 기억이 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시절의 감정만은 생생했다. 「힘들었다. 그때는 내가 너무 힘들어서, 다른 생각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아이도, 나만큼이나 힘들었을 것이다.」 그 시절의 어머니가 당했던 고통들. 한 사람의 여자로서, 한 사람의 엄마로서,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당하지 말았어야 했던 폭력들. 「“독자야. 여기 안에 들어가 있어. 알겠지? 엄마가 말하기 전까지, 절대로 나오면 안 돼.”」 텍스트 위로 무자비하게 이어지는 의성어와 의태어들 속에서, 나는 유년의 일을 다른 사람의 시점에서 다시 한번 겪고 있었다. 분명 내가 겪었던 일임에도, 그것은 완전히 낯선 이야기처럼 들렸다. 그게 이런 일이었구나. 이렇게 고통스럽고. 비참한 일이었구나. 그런데 왜 나는, 이걸 모두 잊었던 걸까. 왜, 잊으려고만 했던 거지? 그 사이에도 벽은 계속해서 말했다. 「데리고 떠났어야 했다. 누가 뭐라든, 아이를 데리고, 먼 곳으로 떠났어야만 했다.」 그러지 그랬어요. 차라리, 진즉에 떠나지 그랬어요. 「왜 그러지 못했을까.」 긴 회한과 후회의 기록들. 평생 내게 ‘현실’인 채 침묵했던 어머니가. 이제 ‘소설’이 되어서야, 비로소 입을 열고 있었다. 「그 일은 늦은 저녁에 일어났다.」 그리고 마침내,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술 더 가져와!”」 술을 가져오라고 소리치는 아버지의 목소리. 어머니를 밀치고, 배를 때리고. 협박하는 아버지. 「“다, 당신! 칼은 내려놓고 이야기해요!”」 서서히, 기억이 돌아오고 있었다. 방 안에 숨어 있던 어린 내가 놀라서 고개를 내밀었다. 맞아. 저 때 아버지는 식칼을 들고 횡포를 부렸었지. 「“독자야! 방 안에 들어가 있으라고 했잖아!”」 어머니가 소리치며 나를 향해 달려왔다. 술에 취한 아버지가, 위협적으로 칼을 휘두르고 있었다. 「니들도 죽고, 나도 죽고. 어? 다 죽어 볼까? 어차피 이렇게 살아봤자 다 같이 좆되는 거 아냐? 응? 다 같이 죽어보자고!」 그리고 어머니가 몸을 날렸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아버지의 몸이 무너졌다. 바닥에 떨어진 식칼. 흐르는 술과 구르는 술병. 나는 저 다음 장면을 알고 있었다. 식칼을 주워든 어머니는 아버지를 찌를 것이다. 그리고 내게 말할 것이다. 지금부터, 모든 것을 ‘다시 읽자’고. 「“으, 으아아아아!”」 그런데. 「“독자야. 안 돼! 그거 내려놔!”」 저건 뭘까. 「“독자야!”」 벌벌 떨면서 칼을 든 어린 내가, 아버지를 보고 있었다. 얼굴에 울음이 번진, 조그만 나. 아버지의 표정에 떠오른 비웃음과, 취한 채 휘두르는 주먹. 그걸 대신 맞는 어머니와, 술병을 밟고 미끄러진 아버지. 그리고. 푸욱, 하는 소리와 함께 터져 나오는 핏줄기. 「바로 구조대를 불렀다면, 살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야말로 기가 막힌 우연이었고. 「살릴 수 있는 것은 나뿐이었고, 선택한 것도 나뿐이었다.」 그 우연이, 우리의 삶을 바꿔 놓았다. 「그러니 아이에게 한 말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그 사람을 죽인 것은 나다.」 어머니는 정신을 잃은 어린 내게서 칼을 빼앗아 들었고, 몇 번이나 심호흡을 한 뒤 조용히 나를 깨우며 말했다. 「“독자야. 지금부터 모든 걸 다시 읽을 거란다.”」 「“아버지는 죽을 만한 잘못을 한 거야. 이건 정당방위였던 거야. 알겠지?”」 「“무슨 일이 있어도, 네가 피해자라는 걸 잊으면 안 된다.”」 조곤조곤한 어머니의 말이 귓가에 스며든다. 「아마도 그때, 여러 가지가 결정되었던 것이다.」 젊은 어머니는 살인에 관한 판례들을 검색했고, 증거를 조작했다. 조금이라도 내가 연루될 수 있는 요소들을 배제했고. 오직 이 우발적 살인이, 자신의 계획범죄인 것처럼 만들었다. 「누군가는, 살인자로 살아가야만 하고. 다른 누군가는, 살인자의 아들로 살아가야만 한다는 것이.」 그 뒤부터는 내가 기억하는 그대로였다. “······겨우 이거였어요?” 벽에 손을 짚은 채로, 나는 한참이나 고개를 숙이고 서 있었다. ······실은, 알고 있었다. 이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고, 어머니의 행동을 납득할 이유도, 이것뿐이라고 생각했다. 갑자기 영문 모를 에세이를 쓴 것도. 내가, 살인자의 아들이 되어야만 했던 것도. 「나는 종종 생각한다.」 「어쩌면 그 모든 것은 변명이 아닐까.」 「더 나은 방법도 있었을 텐데.」 「무슨 일이 있어도, 그 아이를 혼자 두어서는 안 되었는데.」 「어미로서, 그런 식으로 행동해서는 안 되었는데.」 ······. 「결국 나는, 그냥 도망친 어미일 뿐이다.」 그리고 그것이, 마지막 문장이었다. 혹시나 싶어 기다려도 보고, 몇 번이고 벽도 두드려 보았다. 하지만 문장은 떠오르지 않았다. 쾅! 이렇게는 안 된다. 이런 식으로, 이딴 이야기를 듣고 끝낼 수는 없었다. 콰앙! 콰아앙! “뱉어! 뱉으라고!” 나는 미친 듯이 벽을 때리기 시작했다. “씨발!” [제4의 벽]이 내 주먹을 핥았다. 내 주먹에 묻은 피가, 기억이, 이야기들이 [제4의 벽]에 빨려 들어가 이야기가 되었다. 울음은 나오지 않았다. 「김독자는 울고 있었다.」 [제4의 벽]이 말했다. 「김독자는 조용히 주먹을 쥐었고.」 쾅! 「벽을 때리고.」 콰앙! 「또 때렸다.」 “씨발!” 「김독자는 소름이 끼쳤다. 그 모든 것이 이야기가 되고 있다는 것이. 자신의 모든 행동이, 말들이 전부 시나리오가 되어 벽 위의 문장이 되고 있다는 사실이.」 “닥쳐!” 「김독자는 알고 싶었다. 어떻게 해야. 어떻게 해야 이 벽을 부술 수 있을까? 설마, 이것이 ‘멸살법’을 읽은 대가일까. 그걸 읽어서, 내 모든 현실조차 소설이 되어버리고 있는 것일까. 페이지가 찢어지는 듯한 소음이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찌이이이익! 「김독자는 생각했다. ······(야)······ 이건 또 뭐지?」 이어지는 벽의 문장 위에, 부자연스럽게 끼어든 말이 보였다. 마치, 소설을 읽는 누군가가 남긴 낙서처럼 서술에 끼어든 말. 「김독자는 놀랐다. ······(정신 똑바로 차려)······ 누가, 나한테 말하고 있는 거지? ······(이건 네 스킬이잖아)······ 당신 누구야? ······(네 스킬에, 네가 먹히지 말라고)······ 무슨 ······(멍청아 손 빼 빨리!)」 나는 내 주먹을 빨아들이고 있는 벽을 보았다. 「······(스킬을 해제해라, 김독자)······」 어떤 섬전 같은 깨달음이 머릿속을 스쳤다. 그게 누구의 말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게 가능한 일인지 어떤지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내가 할 일이 무엇인지는 명백했다. “나는 [제4의 벽]을 해제하겠다.” 전류라도 흐르듯, 벽의 활자들이 거칠게 요동쳤다. 쩌저저적― 하는 소리와 함께, 처음으로 내 주변을 겉돌던 뭔가가 조금씩 사라지는 느낌이 들었다. 벽이, 무너지고 있었다. 다음 순간, 메시지가 들려왔다. [알 수 없는 원인으로 인한 시스템 오류가 일시적으로 수정됩니다.] . . [당신의 ‘특성창’이 복구되었습니다.] [지금 ‘특성창’을 확인하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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