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화

173화 츠츠츠츠츳! 전신을 감싸는 스파크와 함께, 나는 간만에 개연성 후폭풍의 징조를 느끼고 있었다. 설화급도 아닌 위인급이, 단일 빙의만으로 이렇게 큰 부담을 주다니. 혼자서 군대와 대적했다는 척준경에 관한 기록들은 과장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과장은커녕, 오히려 축소되었다고 해야 할 판이다. 실제로 척준경은 성좌가 된 이후 벌인 일들이 훨씬 많았고, 지구의 역사에 기록된 것 이상으로 강력했다. 다른 세계에서는 소드마스터 척이라는 말만 들어도 벌벌 떠는 성좌들이 있을 정도니까. 그래도 버텨내야 했다. 척준경의 격을 버텨내지 않으면, [백일 봉인]을 부술 수 없다. [현재 당신의 격이 봉인되어 있습니다.] [현재 당신의 주요 스킬들이 봉인되어 있습니다.] [남은 봉인 시간 : 100일] 성운 <홍익>의 천부삼인으로 행할 수 있는 [백일 봉인]은, 상대방의 능력을 봉인하는 최고위급의 봉인진이었다. [마늘과 쑥을 먹으며 100일을 견디십시오.] 물론, 이 봉인이 꼭 나쁜 것은 아니었다. 백일 동안 마늘과 쑥을 먹으며 버틸 수만 있다면, 환인(桓因)의 축복을 받아 육체의 잠재력을 깨울 수 있으니까. 하지만 지금의 내겐 그만한 시간이 없었다. 하늘에서 쏟아진 마늘과 쑥을 보며 한수영이 탄식했다. “야, 아직 멀었어?” “······힘이 너무 강해서 통제하기가 힘들어. 좀 기다려봐.” 나는 심호흡을 하며 마력을 다스리는 중이었다. 척준경은 나의 부름에 답해 힘을 빌려주기는 했으나, 딱히 어떤 진언도 전하지 않았다. 자신이 있다면 사용해보라는 듯, 힘의 일부를 건네주었을 뿐이다. 그 결과, 나는 지금 삼십 분째 꼼짝도 못하고 폭주하는 설화를 다스리기에 여념이 없었다. 자칫하면 몸 전체가 터져버릴 것 같았다. 투덜거리는 한수영을 보며, 나는 문득 짜증이 났다. “이게 다 너 때문이야. 네가 날 방패로만 안 썼어도 이렇게 될 일은 없었다고.” “나도 일부러 그런 게 아니야.” “그걸 믿으라고? 넌 하는 짓 보면 언제나······.” 모르는 사이 꽤 쌓여 있었던 모양인지, 괜히 따박따박 잔소리가 나왔다. 그렇게 몇 분쯤 지났을까. 서서히 인상을 굳히던 한수영이 결국 빽 소리를 질렀다. “아 사과했잖아! 그래, 내가 너 방패로 좀 썼다. 어쩔래?” 이건 또 무슨 적반하장인가 싶었는데, 갑자기 엉뚱한 존재가 끼어들었다.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헛기침을 하며 끼어듭니다.]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한수영은 당신을 방패로 삼은 적이 없다고 말합니다.]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당신의 죽음은 자신의 책임이라 말합니다.] “야, 넌 닥치고 가만히 있어! 괜한 얘기 했다간······!” “······저게 무슨 소리야?” “헛소리니까 신경꺼.” [성좌, ‘심연의 흑염룡’은 화신 한수영이 당신의 흑염룡을 지켜주려다 당신의 심장을 보호하지 못했다고 주장합니다.] ······내 흑염룡? “그러니까 그게······.” 내 시선에 우물쭈물하던 한수영이 한숨을 쉬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러니까, 전우치의 공격이 내······ 그곳으로 날아왔다 이거냐?” “······응.” 나는 너무 어이가 없어져서 중요한 상황이라는 것도 잊고 입을 벌렸다. 한수영은 머뭇거리며 내 눈을 한 번 보고, 바닥을 한 번 보더니 입술을 질끈 깨문 채 말을 이었다. “그······ 기능을 잃으면 좀 불행해지지 않을까 해서, 지켜주려다가······ 살짝 방향이 뒤틀려서 그만.” “그래서 내 심장에 맞았다?” “······뭐, 그런 얘기지.” 어처구니없는 이야기였다. 내 반응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한수영이 재빨리 첨언했다. “따, 딱히 이상한 생각은 없었으니까 괜한 오해는 말고. 흑염룡 이 자식이 네 그걸 꼭 지켜줘야 한다고 고래고래 소릴 질러서······.”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당황하는 자신의 화신을 보며 흥분합니다.] 나는 가볍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고자 되어도 상관없으니까, 다음부턴 그냥 심장을 잘 지켜줘.” 내 말에, 한수영은 의외라는 듯한 표정을 짓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어색한 공기가 흘렀다. 그리고, 뭔가를 심각하게 고민하던 한수영이 입을 열었다. “근데 김독자,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뭔데.” “왜 쟤가 네 그걸 ‘흑염룡’이라고 부르냐?” * ‘그 녀석······ 어릴 적엔 참 작았는데.’ 이수경은 황량한 암흑성의 무저갱 벌판을 바라보며, 간만의 회상에 젖어 있었다. 여기까지 오는 데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렸던가. 쉬운 시나리오는 하나도 없었고, 모든 계획은 반쯤 어그러지거나 망가졌다. 불충분한 정보들로 인해 몇 번이나 죽을 위기를 넘겼다. ‘특히 니르바나를 만났을 때는 위험했지.’ 환생자라니. 그런 존재가 세상에 존재할 것이라고, 이수경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하긴, 애초에 소설이 현실이 되었다는 것부터가 비정상이지만. 인기척에 등을 돌리자 그곳에 전우치의 화신인 조영란이 서 있었다. “왕이시여.” “이제 그런 호칭은 그만두세요.” “······수경 씨.” 조영란은 착잡한 눈빛이었다. 그럴 만도 하다고, 이수경은 생각했다. 조영란은 방랑자들 가운데 유일하게 자신의 사정을 모두 아는 사람이다. “당신은 그 아이와 싸울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 책을 썼던 이유를 솔직하게 말했다면······.” “싸우는 것보다 솔직해지는 게 더 어려운 일이죠. 특히 부모 자식 간에는.” 사실 김독자와 이야기를 한 것도, 조영란의 제안 때문이었다. 조영란이 다그쳤다. “이제 그 애도 진실을 받아들일 수 있는 나이입니다. 당신이 알던 열 살배기 소년이 아니잖습니까?” “내겐 그저 어린애에요. 그 아이가 서른 살이 되든, 마흔 살이 되든.” “······부모의 오만이군요.” 오만······. 맞다, 오만이다. 이수경이 긴 눈꺼풀을 내리깔았다. “처음엔 용기를 내보려고 했어요. 진실을 이야기해주려고 했죠.” “······.” “하지만 그 애의 눈을 보고 있으니······ 이제와서 내가 그 애의 인생에 끼어드는 것 자체가 그 애에게 실례인 것처럼 느껴지더군요.” 현실은 소설과 다르다. 상처받은 인물은 구원받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상처받은 ‘인간’은 그리 쉽게 치유되지 않는다. “진실을 알리는 게 그 애에게 정말 필요한 일인지 모르겠어요. 어쩌면 내가 필요로 했던 걸지도 모르죠. 나쁜 엄마로 남는 게 싫어서······. ” 김독자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비뚤어졌듯. 그녀 역시 자기 나름의 사랑을 고수한 결과 이 지경이 되었다. 「화신 김독자는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 의해 죽게 될 것이다.」 이수경은, 처음 유상아에게 그 운명을 전해 들었던 순간을 떠올렸다. 반드시 실현되는 올림포스의 운명. “······그 애도 언젠간 당신을 이해할 겁니다.” 아들을 살릴 방법을 알아내기 위해, 이수경은 ‘시조의 어머니’에게 사흘 밤낮으로 치성을 드렸다. 세 개의 SS급 아이템을 <홍익>의 공물로 바쳤고, 그것으로도 모자라 자신의 수명 20년을 바쳤다. 그리고 그 대가로, <올림포스>가 숨겨두었던 한 줄의 운명을 훔쳐볼 수 있었다. 「다음 시나리오로 가지 않으면, 화신 김독자는 살 수 있다.」 이수경은 웃었다. “그보다, 병력들은 모두 집결했나요?” “예. 모두 모였습니다.” 벌판의 가장자리에, 그녀가 이끄는 방랑자들의 세력이 모여 있었다. 모두 그녀 하나만을 믿고 여기까지 모인 사람들이었다. 이수경은 메인 시나리오 창을 열었다. + <메인 시나리오 # 10 ―73번째 마왕> 분류 : 메인 난이도 : SS 클리어 조건 : 당신은 암흑성의 마지막 시나리오에 참가할 자격을 얻었습니다. 암흑성의 3층으로 함께 올라갈 네 명의 랭커를 모은 후, 최종 시나리오에 돌입하세요. 제한시간 : 30일 보상 : 100,000코인 실패시 : 사망 * 현재 당신의 암흑성 랭킹은 2위입니다. * 랭킹 10위 이내의 화신만이 당신과 함께 최종 시나리오에 도전할 수 있습니다. + 이수경은 조영란을 흘끗 바라보았다. 조영란과 이복순을 포함해, 현재 그녀가 보유한 10위권의 랭커는 둘. 시나리오를 완수하고 암흑성의 최종층에 도전하기 위해서는, 아직 두 명의 랭커가 더 필요했다. 조영란이 말했다. “녀석들이 오는군요.” <무저갱 평원>의 건너편에서, 군세가 밀려오고 있었다. <낙원>에서 오는 자들이었다. 군세의 첨단에, 그녀가 익히 아는 얼굴이 보였다. 이수경은 반대쪽 세력에서 나오는 인물들 중 하나를 향해 인사했다. “유상아 씨. 오랜만이군요.” “아! 정말, 정말 다행이에요······ 살아 계셨군요! 독자 씨는······.” “그 이야기는 나중에 하죠.” 이수경은 건너편의 일행들을 바라보았다. ‘왼쪽에서부터 차례로 이현성, 신유승, 정희원, 이지혜, 이길영인가.’ 이현성과 신유승, 이지혜에 대해서는 김독자에게서 이야기를 들었지만, 이길영과 정희원에 대한 이야기는 들은 바가 없었다. 아마도, 그녀의 아들이 원작과 무관하게 새로 영입한 인물들이리라. ‘원작의 인물들만 기용했으면 훨씬 편했을 텐데. 바보 녀석.’ 어릴 적부터 김독자는 예측할 수 없는 행동들을 많이 하곤 했다. 그 때문에 한때 이수경은 자신의 아이가 예술가가 되리라 믿었다. “방랑자들의 왕.” 목소리가 들려온 곳에, 그녀가 기다린 인물이 있었다. 수감되어 있는 동안, 아들에게 수도 없이 들었던 인물. 이렇게, 현실로 보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존재. “유중혁.” 패왕 유중혁.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 그녀를 향해 입을 열었다. “왜 이곳에서 보자고 한 거지?” “슬슬 시나리오의 마지막을 결정할까 해서.” 유중혁은 이수경의 곁을 살피더니 물었다. “너도 ‘사천왕’을 모으고 있는 건가?” “사천왕?” “다음 시나리오로 가려면 네 명의 랭커가 필요하다. 알고 있을 텐데?” “아······ 그래, 맞아. 나도 모으고 있어. 그걸 사천왕이라 부르나 보구나. 요즘 애들 유행어는 영 못 따라가겠는걸?” 이수경의 말에 유중혁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심성이 뒤틀린 자로군.” “맹랑한 아이네.” 두 사람의 눈빛이 허공에서 부딪치는 순간, 기파가 사납게 튀었다. 고오오오! 단지 시선을 교환한 것만으로도, 이수경은 유중혁의 힘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초월좌라고 했던가. 확실히 이 정도는 되어야 이야기의 주인공이겠지. 짧게 숨을 들이켠 이수경이 입을 열었다. “너와 손을 잡고 싶어. 같이 남은 랭커들을 모으자.” “······랭커들을?” “그래. 네 목표는 어차피 이 세계를 구하는 거잖아? 다음 시나리오를 클리어하려면 최대한 강력한 화신의 라인업을 구성할 필요가 있겠지. 나는 너를 도와줄 수 있어. 내 성좌는 ‘시조의 어머니’니까.” ‘시조의 어머니’라는 말에 유중혁의 눈빛에 잠깐 이채가 감돌았다. 하지만 정말로 잠깐뿐. 유중혁의 입에서 나온 말은, 전연 뜬금없는 것이었다. “김독자는 어디 있지?” “······그 아인 왜 찾아?” “그쪽이 데리고 있다고 들었다.” “그러니까, 왜?” 자신의 제안 따위 아랑곳 않는 그 태도에, 이수경은 불현듯 이상한 예감이 들었다. 오직 자식을 가진 어미만이 감지할 수 있는 불온한 예감이었다. “설마, 그 아이를 네 ‘사천왕’에 넣을 셈이니?” “내가 대답할 의무는 없는 것 같군.” “정말 그 애가 말한 그대로의 성격이구나.” “······김독자가 내 이야기를 했나?” “했지. 아주 많이.” 일순 흔들리는 유중혁의 눈빛을 보며, 이수경의 의심은 더욱 짙어졌다. 고민하던 이수경이 물었다. “<낙원>에서 내 아들에게 업적을 나눠줬다고 들었어. 왜 그랬지?” “놈이 강해지면 세계를 구할 확률이 높아지니까.” “아하, ‘이용하기 위해서’ 그랬다 이거구나?” 이수경은 일부러 특정 단어에 방점을 찍으며 물었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안심한 어투로. 그런데 유중혁이 대답했다. “김독자는 이 세계에 반드시 필요한 존재다. 나는 그놈이 필요해.” “······.” “놈은 나의 동료가 되어서, 시나리오의 끝을 볼 것이다.” 이수경의 표정이 서서히 굳었다. ‘동료’라고? 기억 속에서, 어린 아들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그 새끼, 완전 사이코패스예요. ―지밖에 모르는 놈이고. 목표를 위해선 무슨 짓이든 하는 놈이거든요. “이상하네. 내가 들은 유중혁은, 절대로 너처럼 말하지 않는데.” “그쪽 집안 사람들은 남에 대해 잘 아는 것처럼 말하는 게 특기인가?” 유중혁이 검을 뽑았다. 더 이상의 대화는 필요 없다는 듯 강경한 태도였다. “김독자를 내놔라. 그러면 너를 살려주겠다.” 이글거리는 유중혁의 눈을 보며, 이수경은 아들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잔뜩 불만스러운 것처럼 이야기하면서도, 어쩐지 들떠 있던 아들의 표정. ―하지만 그 녀석이 없으면 이야기가 진행이 안 돼요. ‘멸살법’은 그런 소설이거든요. 순간, 섬전 같은 깨달음이 이수경의 머릿속을 스쳐 갔다. 「화신 김독자는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 죽을 것이다.」 이수경은, 그 순간 ‘운명’의 진짜 의미를 깨달았다. 자신의 사랑하는 아들을 죽이는 이가 누구인지, 알게 되었다. 어쩌면 그것은 이수경 또한 한 사람의 독자였기에, 이런 종류의 비유와 상징에 익숙했기에 도달할 수 있었던 통찰이었다. “그렇구나.” 모든 것을 깨달은 이수경은 웃었다. 본래 이럴 생각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예언이 그런 뜻이라면 계획은 여기서 수정되어야 했다. “미안하지만 내 아들은 만나게 해줄 수 없어.” “왜지?” “자식이 질 나쁜 친구들과 어울린다면, 그걸 통제하는 것도 엄마의 몫이니까.” [팔주령]을 꺼낸 이수경의 눈빛이 납처럼 차가운 빛을 띠었다. “내 아들을 그만 현실로 돌려보내 줘야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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